정관누리교회

2012년9월16일/보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세기37:1-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10. 1. 20:2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9월 16일 주일 예배

보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세기37:1-19)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가운데 일단의 목자들이 앉거나 누워서 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여유롭게 담소를 즐기기도 하고 , 누워서 이런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치른 광야 저편에서 한 소년이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헉헉대며 자기들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발에까지 내려오고 소매에는 황금으로 수를 놓은 채색옷을 입고 오는 소년은 목자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누구와 닮았습니다.

마침내 소년의 모습이 확연히 보이자 목자 중 한사람이 일어나 외칩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그런데 원문의 뜻을 좀더 살려서 번역하면 ‘보라 꿈들의 주인이 저쪽에 있다’
꿈들의 주인,
도데체 그들이 말하는 꿈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꿈은 그 소년의 단은 꼿꼿이 일어서고 형들의 단이 엎드려 절하는 꿈입니다. 여기서 절하다는 표현은 단순히 인사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군주에게 꿇어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소년의 별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여기서 절하더이다라는 말은 원문의 의미로는 계속해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때 형들은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그렇게 말하면서 소년을 매우 매우 미워하였던 바로 그 꿈

이제 그 꿈들의 주인이 오고 있는데 그는 꿈속에서 처럼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이 아니라 오랜 여행 끝에 지치고 초라한 모습으로 게다가 형들에게 줄 음식을 등에 지고는 힘에겨워하며 오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분명 소년의 꿈속에서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제 형들은 바로 그 모습을 보며 소년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도단에서 양떼를 치던 형들과 요셉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왕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들도 , 부모도 그 앞에서 절하게 되는 그런 놀랍고도 황당한 꿈 말입니다.
물론 형들이 보기에 지금 초라한 모습으로 오고 있는 요셉의 모습은 전혀 그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저 초라한 모습 속에 어디에 미래의 왕이 될 가능성이 보입니까?
어디에 자기들을 다스릴 당당한 지배자의 모습이 보입니까?
물론 이 당시까지만 해도 요셉의 모습은 그가 꾼 꿈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맞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왕자의 황금겉옷(채색욧)을 입고 형들의 잘못을 습관적으로 고자질이나 하는 , 그리고 형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지도 모르고 신이나서 자기만 좋아서 꿈얘기나 떠들어 대는 철부지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의 꿈얘기를 듣지 않으려 함에도 끝까지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꿈얘기를 들려줍니다. 너무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형들은 다르게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우리가 너에게 절이라도 해야 되겠냐?” 어쩌면 형들은 요셉이 교활하게 거짓말로 꿈얘기를 지어내서는 자기가 다음번의 족장이 되려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철부지 요셉에게 13년간의 훈련과정을 부과하셔서 그를 당당하게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자’라는 영화의 1탄 주인공은 모세고 2탄 주인공은 바로 요셉입니다. 실로 요셉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37:7에 사용되었던 ‘절하더이다’라는 단어가 43:28에 보면 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가서 요셉에게 인사할 때 그대로 사용되어서 요셉의 꿈이 그대로 실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년이 훌쩍 넘어서 요셉은 철부지 소년에서 애굽왕 바로의 버금 수레를 타는 총리대신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그 꿈을 실현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요셉은 그 초라한 모습에서 당당히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까요?
고된 훈련, 그리고 인내, 그 인내를 가능하게 한 소망, 소망을 낳게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맹자에 이런 옛말이 있습니다
천장여지 필선고지(하늘이 사람에게 뭔가를 줄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고난을 준다)
하늘에서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길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몸을 수고롭게 하고
또한 생활을 궁핍하게 하여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틀어지게 만든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인내심을 기르게 하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과연 하나님은 요셉에게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몇가지의 시험과 13년간의 고된 훈련기간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이 부과하신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는 훈련과정에 들어갈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떤 시험을 부과하셨습니까?

첫 번 시험은 순종입니다
어디에 대한 순종인고 하니 바로 심부름에 대한 순종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65Km떨어진 세겜으로 가서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말합니다.
갈때는 당연히 형들과 목자들에게 줄 많은 음식들을 가지고 갑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65Km가 넘는 길을 혼자서 간다
그것도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산책길도 아니고
아스팔트로 차도와 인도가 구분된 평탄한 길도 아니고
푸른 잔디를 밟고 가는 초원길도 아니고
뙤약볕에서 나무한그루 물 한모금 구하기가 어려운 사막길을 걸어서 간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뿐입니까?
엄마찾아 삼만리라는 말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가겠지만 자기를 미워하는 형들, 사이가 좋지않은 형들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37:4에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그에게 솰롬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솰롬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평화라는 말로 유대인들의 인사입니다. 그냥 만나면 안녕처럼 하는 인사지요. 그러니까 형들은 요셉을 봐도 남들에게도 하는 인사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요셉을 미워하는 형들을 보러 가는 길인데도 요셉은 기쁘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일차 시험 합격입니다.
핑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

그런데 막상 요셉이 천신만고 끝에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냥 돌아와서 ‘아버지, 형들이 안보이던데요’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고 빈들을 방황하며 형들을 찾으려 합니다

이때 한 사람을 만나 형들이 거기서 도단으로 간 것을 알고는 다시 거기서 30Km나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광야길 30km 만만치 않습니다. 더구나 하루종일 걸어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또 30km는 너무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도 그는 형들을 찾아서 도단으로 간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하기위해서.
이차 시험까지 합격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든 준행하겠다는 요셉은 하나님이 부과하신 자격시험, 입학시험에 당당히 합격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비록 비행기를 타고 가지않고 배도 아니고 기차도 아닌 밧줄에 묶여서 걸어갔거나 아니면 노예들이 타는 쇠창살로 우리가 쳐진 마차를 타고 갔거나 여하튼 폼나는 유학길을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애굽으로 종살이를 가는 처량한 신세지만 하나님의 영안으로 보면 이는 요셉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첫 번째 훈련과정에 입학시키는 거대한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슨 시험입니까?
종살이도 어느듯 세월이 흘러 적응이 되었고, 보디발에게 인정도 받아 종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은 종의 신분으로는 이 집에서 더 높이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종이지 뭐! 별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셉에게 더 높은 과정으로 입학시키기를 원하셨고 그에게 한가지 시험을 또 부과하셨습니다
무언고 하니 바로 , 순종이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입니까? 사악한 정욕에 대한 하나님의 금지명령에 대한 순종.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이 시험에도 요셉은 당당히 합격합니다

하나님은 합격하면 상을 주시는데 종이었던 요셉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요셉은 이제 종은 아닙니다. 단지 죄수일 뿐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이고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요셉은 죄수가 됨으로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실로 오묘합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성실하고 근면하게 생활합니다.
결국 그는 그 깊은 지하 감옥 속에서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만난 관원장 때문에 요셉은 결국 애굽의 바로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때는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히는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족장의 아들에서 , 황금빛 겉옷을 입은 왕자의 신분에서 누더기를 걸친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진 저주받은 인물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할수록
그가 하나님앞에서 신실하면 신실할수록 그는 더 깊은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훈련을 13년동안 성실히 수행하고 나이 30이 되자 그는 마침내 바로 앞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무 오랜시간동안 준비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땅에 오셔서 3년간의 사역을 위해서 무려 30년동안을 준비하셨습니다.
겨우 3년을 사용하기위해 30년동안 준비하는 것이 참으로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역시 우리의 나머지 삶을 위하여 오랜세월을 부지런히 배우고 닦아서 내일을 준비합니다.
준비하지 않고 배우고 닦지 않고는 우리가 가진 가능성이 재능이 되어 사회에 쓰이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로 ,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고등학교로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교로 진학을 합니다. 물론 그 뒤에도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고, 그 전에는 유치원을 졸업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인간의 삶의 전반부는 졸업과 입학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졸업과 입학에는 반드시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연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시절에는 우리는 규율과 학칙에 얾매여 빽빽한 일정 속에서 과정을 이수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학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교육과정 속에 집어 넣으시고는 연단을 통하여 키우십니다.
그 시련과 연단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마침내 요셉이 30의 나이로 애굽의 임금앞에 섰을때 임금은 그에게 꿈을 해몽할 것을 명령합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애굽의 총리가 꿈 해몽 한번 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시시한 자리입니까?

천만에요.
당시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는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꿈해몽 한번에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거짓말을 합니까?
천만에요.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요셉은 꿈을 해몽하고는 어떻게 하면 애굽에 밀어닥칠 대재앙으로부터 그 땅을 구할 수 있는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곡식을 저장하고 , 오랜기간 썩지않게 관리했다가 , 얼마나 공평하게 이를 분배하며, 또 기근과 한발을 이길 관개와 도로의 건설같은 치국의 도에 관해서 바로와 그 대신들에게 방안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와 애굽의 지배층은 사실은 애굽의 백성들과는 달리 요셉과 같은 셈족이었습니다. 당시 셈족계열의 북방민족이 남방 애굽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정복하고 애굽 원주민인 햄족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자기들에게 나라의 큰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한 지혜자가 자신들의 동족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공교롭고도 즐거운 발견이었겠습니까?

여하튼 이러한 일을 위해서 실로 요셉은 13년동안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가 장사꾼의 집이나 공사장의 노예로 팔려가지 않고 시위대장의 집에 팔려간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 주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지식을 얻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가깝게는 큰 대갓집의 식솔을 다스리면서 나라를 다스릴 예행연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가 세겜으로 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를 도단으로 안내해줄 한 사람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가 도단으로 가야했지요? 그것은 요셉이 그곳에서 미디안 상인을 만나서 공짜로 애굽으로 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보디발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사람을 통해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의 노예수레에 태우신 것입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간 이유는 보디발의 집뜰에 있는 국사범을 가두는 지하감옥으로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시위대장이었기 때문에 왕에 반대하는 국사범을 가두는 일을 합니다. 당연히 감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집뜰 지하에.

하나님은 바로 그 지하감옥에서 요셉이 누군가를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를 보디발의 집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 지하감옥에서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말미암아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떡맡은 관원장은 엑스트랍니다. 요셉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보면, 나타나는 현상만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삶에서 전혀 역사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살수록 나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그냥 거짓말이나 하고 사기나 치고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살았다면 나의 삶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내앞에서 나를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막살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믿었기 때문에요.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때는 매주 월요일마다 두과목씩 시험을 칩니다. 그래서 한달하면 전과목이 되고 이걸 합산을 해서 그게 시험성적이 되는 거지요. 그때 만일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 갔다면? 어때요? 좀 속상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 웃깁니다. 그는 안계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종이 출세해 봐야 종이지, 한집에서 가장 높은 종이면 뭐합니까? 결국은 종이지. 죄수가 출세해 봐야 뭐합니까? 그래봐야 감옥 안의 죄수지. 그런 것 보다는 처음부터 히브리족의 족장의 아들로서, 황금으로 수놓은 채색옷을 입고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편안하게 사는게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결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야, 너는 너무 너무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냥 그런자리에서 썩기는 너무 아까워. 너는 큰 일을 해야해.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훈련을 받아야해. 왜냐면 내가 너에게 맡길 일은 너무 중하고 엄청나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기때문이지.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셉이 만일 자기가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노예로 잡혀가는 것에 만족했을까요?

천만에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저는 여기서도 얼마든지 행복한데 , 그리고 그런 일을 감당하고 싶지도 않은데 왜 저를 못살게 구십니까?”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그냥 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품게 하신 재능을 갈고 닦아서 우리의 일들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남들의 눈에는 돌맹이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천하에 다시 볼 수 없는 보배입니다. 이것을 잘 갈고 닦는 다면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게을러서 아니면 보이는 현실에 절망해서 우리의 보배를 갈고 닦는 것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무엇입니까?
아니 그런 꿈같은게 없다면 다시 물어 봅시다. 내가 잘하는게 과연 뭘까?
꿈과 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요? 당연히 상관이 있죠.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똑같이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무얼 꿈꾼다면 그 꿈을 이룰 능력이 우리의 육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를 잘해서 고시에 합격해서 고위 공무원이 되어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라는 꿈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공부를 좋아하고 충분히 잘돌아가는 머리를 주신 것입니다.

나는 멋진 축구선수가 될거야, 그래서 월드컵에 나가는게 꿈이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축구를 잘할 수 있는 운동신경과 체력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왕왕 꿈은 꾸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 없다든지, 아니면 그 꿈을 이룰려고 하는 노력은 전혀 없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망상이라고 해서 꿈과는 구별합니다.

요셉은 하나 하나의 단계에서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자기의 처지가 비관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겠지만 그는 어디에도 그런 원망과 한탄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성실함에 감탄합니다.

비천한 노예가 자기의 주인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쳤는데 왜 그가 죽지 않고 감옥에 들어갔을까요? 당시의 노예는 그보다 훨씬 하찮은 이유로도 맞아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는 분명 파렴치범인데 어떻게 해서 잡범들이 가는 감옥이 아니라 나라의 국사범이 가는 감옥에 가게 되었을까요?

술맡은 관원장이 풀려나고 복권이 되는 꿈을 해몽해주고 요셉은 그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제발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그런데 감옥에서 나가서 다시 고위직에 올라가자마자 요셉의 억울함은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사람이 다그렇지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이가 한둘도 아니고. 그리고 그걸로 끝이 났을 터인데...

그런데 하필이면 애굽의 왕이 그런 신기한 꿈을 꾸다니요, 게다가 요셉이 바로의 앞에 섰을때의 나이가 딱 서른, 30입니다. 만일 술맡은 관원장이 너무 착한 사람이라서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요셉의 억울함을 밝히고 그를 풀어 주었다면 아마 요셉은 풀려난 노예가 되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갔을 겁니다. 어차피 그가 애굽에서 할 일도 별로 없는데요, 계속해서 남의 집 종살이를 할 것도 아니고.......

애굽의 법에는 나이 30이 되어야 공직을 맡을 수 있으니까 그가 30전에 꿈을 해몽했다면 몇가지 상을 받고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전혀 요셉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았을 것 같던 하나님, 그냥 요셉을 이방 땅에 방치한것처럼 보이는 그 하나님은 요셉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의 한걸음 한걸음을 세밀히 조율하고 조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를 통하여 전무후무한 중동의 대기근을 피하게 하고 그를 통하여 히브리부족을 거대한 민족으로 바꾸어서 그 줄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요셉의 일정을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추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를 위한 계획을 믿고 나에게 주어진 곳에서 기쁘고 즐겁게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가 지금은 모르지만 먼 훗날 오늘을 되돌아 보고 ‘아! 그때 그래서 그렇게 된거구나!’라고 고백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앞에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기회는 점점 줄어 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회는 줄어 듭니다.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그가 결코 나를 이대로 두지 않으시리라는 소망 때문입니다. 왜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지 않을까요? 그와 나는 사랑하는 사이이기때문이지요.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사랑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현실을 사랑합시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분임을 믿고 멋지고 힘차게 오늘을 살아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9월 1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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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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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우리네 욕망의 중심에는 "빠른 결과"가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스마트폰 속도가 올라가는 것도 빠름을 추구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자동차도 빠르게 속도가 올라갈 수록 비싸집니다. 놀이기구를 탈 때도, 좀 더 빠르게 타기 위해서 고민하고... 더욱 더 빠른 세상이 되어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삶이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닙니다. 더 바빠졌을 수는 있겠네요. 하하.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은 간혹 느릴 때가 있고, 또한 고통과 인내를 동반할 때도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결과를 참고 기다리라는 말은 때로는 무척이나 잔인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 쯤에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요셉은 상심하지 않았을까요. 왜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가 꿈을 품고 있었고, 언젠가 그 날이 올 것임을 믿고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과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일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한 눈 팔지 않았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를 꾸준히 단련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 이 문구가 생각납니다. "잘못된 것에 한 번 굴복하면, 또 다른 잘못에 한 번 더 굴복하게 된다" 처음에 요셉은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이런거나 해야해? 라면서, 적당히 설렁설렁 하면서, 투덜거리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가지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작은 책임 조차 대충 대충 하면서 넘겨버리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작은 일이라도, 작은 경험이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맡은 바를 완수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렵습니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뜻한 바를 걸어갈 때, 비로소 그 고난의 의미를 찾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앙드레 말로의 말로 마무리 하면 딱 좋을 분위기입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변함없이 한 가지 꿈을 향해서, 매일 정진하는 사람은, 마침내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변함없이 세상을 선하게 바꾸기 위해서 평생을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의 삶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겸허하게, 인내 속에서 정진하기를 소망하며... / 2012.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