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5월16일/혀를 조심하라(청년설교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10. 18. 02:31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혀를 조심하라 (야고보서3:1-10)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물론 다른이들은 아무도 스승의 주일을 축하해 주지 않습니다
교회의 공식절기에 이 스승의주일은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주일을 경시할수록 우리 학생들이 학교 교사에게는 감사를 표하면서
주일학교의 교사에게는 감사를 표할지 않을수록 우리의
주일학교는 쇠퇴합니다

사실 주일학교는 지금 상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항상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주기만 해놓으니까
학생들은 교회의 모든것이 공짜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전혀 감사를 모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멸망을 초래할 중대한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바로 기독교 신앙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신 은혜가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몸을 내어주신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택하여 불러주신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것에 대한 감사가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처음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모른다면 이것은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니며
나아가 인간의 자세도 아닙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감사를 압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인들은 감사를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들에게 교훈을 주려합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자기의 시간과 노력, 땀과 눈물 그리고 물질을 바쳐
헌신하는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교회와 사회에서 많이 선생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네가지를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혀를 조심하십시오.
둘째는 제자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셋째는 제자들을 사랑하십시오.
넷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십시오.
저의 경험이 결코 많지는 않지만 이 네가지만 제대로 지켜도 정말 훌륭한 선생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이중에서 한가지만이라도 제대로 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오늘 저는 그중에서도 특히 혀를 조심하라는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혀를 조심해야 되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선생님들의 혀를 조심하라는게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본문에는 혀를 왜 조심해야 되는지에 대한 많은 이유와 비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지만 혀를 제대로 제어한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특히 선생된 자들이 혀를 조심해야 될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왜 많은 책임이 따릅니까?
그들의 가르침이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들이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남을 가르친다는건 또한 자신의 삶이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의 삶이 남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라본 자들을 실족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혀에는 실수가 따릅니다.
2절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말에 실수가 많았으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의 온전한 사람이 곧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도덕적이나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 이런 뜻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이란 칭호도 받기 어려운것 아닙니까?
그런데 말에 실수가 없으면 도덕적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그런 사람이라면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울수” 있답니다.
이말은 자기의 몸을 제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굴레 씌우리라는 말은 야고보서1:26절에는 “재갈먹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재갈먹이는게 무슨 의미입니까?
바로 밑에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몸을 어거하며”
힘센 말도 입에 물린 적은 쇠막대기 하나에 꼼짝못하고 마부의 명령을 따르게 되는 것처럼 혀를 제어하는 것이 곧 말의 입에 재갈을 먹이는 것과 같고 우리의 혀에 굴레를 씌우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혀를 얼마나 제어하기 어려우며 우리가 이 혀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는지 아시겠지요.

2.혀로하여 화복이 정해집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배의 키로 표현합니다.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라고 표현합니다
거대한 범선에 붙은 적은 키가 그 배를 움직이게 합니다. 설령 광풍이 몰아쳐서 배를 요동치게 만들어도......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즉 환란이란게 결코 외부적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외부적 환경이 순경이면 더 좋겠죠
그러나 비록 외부환경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혀라고 합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던 한마디말로 천냥빚을 갚는다라는게 바로 그런 의미이지요.

여기 본문에는 아무리 큰 배라도 또 아무리 광풍이 불더라도 키하나로 사공의 뜻대로 배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게 세상의 험경을 우리의 혀로 이겨낼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친구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해보세요
여러분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보세요
도저히 사랑할수 없는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한다고 말해보세요

가식적으로
억지로
건성으로 말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주님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미워하는 자들이
여러분의 원수가 변할 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이 바뀔것이고
그때부터 세상은 나에게 미소지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내가 먼저 그들에게 미소지었기 때문에
내가 먼저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3.혀는 불과 같아 모든 것을 태웁니다
혀는 이와같이 우리를 이롭게 합니다
불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를 이롭게 하기위하여 불이 발명되었습니다
아니 발견되었다고 해야 합니까
어쨌든 불이 인간사회의 진보에 크게 기여한것 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은 잘못다루면 한순간에 그동안에 쌓아올렸던 모든 것을 살라버립니다
그래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리 거대한 빌딩이라도 한순간에 붕괴되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쌓아올린 명예와 공이 한번 혀를 잘못 놀림으로서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리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본문의 저자인 야고보는 불의의 세계란 말을 사용하면서 세계를 표현할 때 하나님이 계신 ‘우라노스’대신에 ‘코스모스’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코스모스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계란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악되고 타락한 상태, 즉 하나님이 없는 상태의 세상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우라노스에 대비되어서.
더욱이 불의의 라는 말로 수식되어서 혀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선생된 자들이 입으로 너무 쉽게 거짓을 말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분열시키고 비난하기 때문에 그러한 혀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믿는다 하면서도 특히 믿는 이들의 선생된자라라 하면서도 혀를 함부로 사용하여 세상을 불의한 곳으로 만드는 세태에 견딜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못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나쁜영향을 끼치는 것은 마치 지옥에서 불이 나와서 우리인생의 전 과정 즉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혀를 잘못 사용한다면 우리가 이제껏 그렇게 수고하고 쌓아올렸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잘 사용하여야 합니다
계속해서 야고보는 야생동물은 우리가 길들이지만 혀만은 길들이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혀는...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입니다

4.같은 혀로 두가지를 합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 혀로 하나님 아버지을 찬송하면서 동시에 그 혀로 자기들이 찬송한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저주한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자기들이 찬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을 저주하다니!

그것은 그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저주하는 것과 똑같은데도 오늘날 우리들은 그런 모순된 행위를 태연히 저지르곤 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셨고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라고까지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바로 그 입으로 형제를 저주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당장 , 지금 즉시
야고보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도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혀를 조심하라는 말은, 저 개인적으로는 "정직"이라는 단어와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어 졌습니다. 혀가 악하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가 거짓말을 하기 쉽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불리하거나, 궁지에 몰리게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혀로 거짓을 이야기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말을 조심해야 하고, 약속을 함부로 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흘린 물과도 같아서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담으로, 야학에 있던 시절, 야학의 대표선생님께서는 시간날 때마다 눈길을 가는 비유를 자주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선생이라는 것은 눈길을 걷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발자국, 흔적이 남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서가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따라오는 사람들까지 잘못된 길을 가게 된다고 하셨지요. 이 이야기가 주는 핵심은, 바로 겸허함, 자신의 발걸음에 대한 책임감을 의미합니다.

저는 오늘도 스스로를 격려하며, 다짐해 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정직한 인생이 되자고. 뻔뻔한 모습으로 거짓을 이야기하는 위선적인 인생은 되지 말자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한 번, 두 번, 몇 번이고 되새기며 다짐해 봅니다.

네. 맞습니다. 결국 우리는 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썩어빠졌다고 욕하는 사람은 늘 그런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지내게 될 것이고, 주변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늘 그런 사람들과 축복받은 인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2012.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