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11월25일/누구라도 사용받을 수 있다(열왕기하6:24-7: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12. 14. 19:4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1월 25일 주일 예배

누구 때문입니까? (열왕기하6:24-)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하다 못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동상이나 형상이 그려진 그림이라도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옛날 이 문제 때문에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즉 서방교회가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단이라고. 파문한다고.......웃기지요?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 엘리사를 잡으러 왔다가 사마리아에서 포위되어서 잡힌 아람의 군대를 이스라엘 왕이 풀어 주어서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몇 년후에 다시 쳐들어 온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아람군대를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엘리사가 풀어 주라고 해서 억지로 풀어 준겁니다.

사람은 은혜를 입으면 보통은 그 은혜를 갚는게 아니라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남의 은혜를 입는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했거든요. 우리는 이를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게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살려 보낸 아람군대는 사마리아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옵니다. 여하튼 한동안 잠잠하던 아람의 군대는 다시금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아람군대는 이스라엘의 국토를 유린하고는 최후로 수도인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 성내에 극심한 식량부족사태가 오고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양식이 없어서 아이를 잡아 먹는 참담한 일까지 벌어 집니다.

아람왕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온 것은 엘리사가 영력이 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그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기습해도 항상 사전에 정확한 지점을 파악하고 매복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에게 잡혀서 번번히 실패한 아람의 왕은 엘리사의 능력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엘리사의 활동이 보이지 않으니까 아람의 왕은 엘리사가 능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하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교의 주술가들은 종종 왕성한 활동 뒤에 능력이 침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엘리사도 그러할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한 겁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마리아 성내에서는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세겔이라고 합니다. 은 삼십세겔은 성인노예의 가격이지요. 그런데 나귀 머리 한 개가 사람세명의 목숨만큼 소중하게 된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합분태는 비둘기 똥이란 말이지만 똥이라기 보다는 콩이나 포도씨, 쥐엄나무 열매 꼬투리 등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뭔지 모른다는 말이겠고 하여튼 별볼일 없는 것으로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것을 은 다섯세겔이라는 비싼 값에 판다는 겁니다.

은 한세겔은 노동자의 4일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20일간이나 일해야 겨우 1.2리터의 식물 찌꺼기를 살 수 있다는 말이니까 사마리아성내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에 막일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없는 사람은 굶어 죽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더구나 성벽을 시찰하던 왕의 앞으로 나와서 재판을 호소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모골이 송연합니다. 서로의 자식을 잡아 먹기로 했다는 거지요. 너무 끔찍하니까 이하는 생략합시다.

이 기가 막힌 소식을 듣고 왕은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보통 자기의 옷을 찢는건 회개의 표시이지만 왕은 오히려 이 참극의 모든 책임을 엘리사에게 돌립니다. 자기가 왕인데 백성의 굶주림의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합니다. 엉뚱한 왕입니다.

자 이 굶주림의 책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이 참극의 책임을 져야 합니까?

하나님은 일차 아람의 침입 때는 엘리사를 보내셔서 아람군대를 포위해서 잡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신 겁니다. 구원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북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약한자를 억압하며 음탕하고 사악한 삶들을 계속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배은망덕입니다. 이러한 대 기근은 사실 레위기와 신명기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면 대기근을 내리신다고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혀 이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본겁니다. 그러니까 왕은 엘리사에게 결코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왕인데 왕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는 거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합니까?

이 당시 북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람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북이스라엘 희대의 폭군인 아합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합도 엘리야의 선포로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자 엘리야를 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로 선포하고 그를 죽이려고 찾았던 전력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엘리야는 우상숭배와 각종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뿐인데도 엘리야가 마치 이스라엘에 재앙을 가져 온 것처럼 매도당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엘리야의 제자에게 똑같이 원한을 품고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당시의 기근 역시 아합과 백성의 죄악 때문에 율법에 명기된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돌보지 않고 상대방에게 죄를 전가한 아합과 그 아들의 행태는 똑 같습니다. 아들 역시 자기의 죄는 돌보지 않고 엘리사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지요. 엘리사는 자기의 스승인 엘리야와 같은 상황에 처합니다.

“엘리사의 머리가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엘리사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좋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은 무지막지한 말로 엘리사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군대를 보내서 엘리사를 잡아 오게 합니다.

아마 여호람은 수년전에 사로잡은 아람군대를 죽여 버리지 말고 음식을 주고 선대해서 아람으로 돌려 보내라고 한 엘리사의 처사에 원한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죽여버렸으면 지금 이렇게 쳐들어 오지 못할텐데!’

뭐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죄인을 살리기위해 또 다른 죄인, 아람이라는 죄인들을 죽일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어차피 이 죄인이나 저 죄인이나.

만일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본 그때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면 결코 오늘 아람군대가 사마리아성을 포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 갑니까?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이방의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고 가난하고 약한자를 학대하는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형벌로 징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먼저 배은망덕을 했기 때문에 아람의 배은망덕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생기면 자기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되돌아 볼 것이 아니라 먼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혹시라도 배은망덕하지는 않았는가? 지금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가?

한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면 모든게 다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말도 아니라고요? 하하, 여러분이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아마 몸으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여호람은 엘리사의 목을 치라고 사람을 보냅니다. 목을 치는 형벌을 참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형벌은 성경의 어느 구절에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 고유의 벌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게 애굽이나 바벨론에서 행해지던 벌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벌이 아니라 이방의 풍습이 일반적으로 시행될 정도로 하나님하고는 멀어진 것 같습니다.

한편 왕의 사자가 엘리사를 잡으러 갈 때 엘리사는 집에서 사마리아의 장로들과 함께 구국 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보통 이런 회의는 왕이 주최하는 것인데 장로들은 이제 왕보다 엘리사를 더 신임하고 있습니다. 왕이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걸 이들도 아는 거지요.

왕의 사자가 엘리사를 잡으러 올 때 엘리사는 여호람을 가리켜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라고 부르면서 대문을 닫어 걸고 사자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살인마 아합의 자식이니까 당연한 말입니다만 .이 정도 쯤 되면 왕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진 겁니다. 아니 발에 짖밟혀 모욕을 당한다고 해야 합니까?

여호람은 사자를 보내어서 엘리사를 죽이라고 명한 후에 곧바로 후회를 합니다. 그래도 기댈 데는 엘리사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혹여 사자가 엘리사를 죽였을까봐서 사자를 친히 뒤따르는 겁니다. 엘리사는 그 소리를 듣고 알고 있었으므로 시간을 벌기위해 사자를 문안에 들이지 못하게 한 겁니다. 이정도로 신통하니까 국난을 맞이하여 백성의 대표들인 장로들이 왕궁이 아니라 엘리사에게로 와서 회의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사자가 도착했고 사자가 엘리사집의 장로들과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왕이 곧바로 들이닥칩니다. 아마 혹시라도 사자가 엘리사를 살해했을까 봐서 급히 따라온 겁니다.

따지고 보면 엘리사가 아무리 괘씸해도 엘리사가 없으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거든요.

여기 있네요.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스라엘 왕 여호람도 안겁니다. 자기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여호와를 바랄 수가 없답니다. 말을 그렇게 해도 실은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선지자에게 뭔가 좀 하나님께 간구해서 환난을 멈추어 달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평소에 왕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자기의 한마디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권력앞에서 그는 자기의 무능을 절감합니다. 더 큰 나라의 침입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람의 칩입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군대를 물리 칠 수도 없고 식량을 줄 수도 없습니다. 엘리사를 자기가 죽인다면 다음은 자기들이 죽을 겁니다. 아람의 포로가 되어서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거나 굶어 죽을 겁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권력이란게 이정도로 형편없는 겁니다. 사람들끼리 줄을 그어서 국경을 나누고 왕을 세워서 사람을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미약한 존재들입니다.

솔직히 인간의 입장에서 개미들의 왕, 여왕개미라고 해서 존중을 받을 만하다고 인간들이 생각합니까? 아니지요. 그냥 일반 개미들처럼 발로 밟아서 밀어 버리면 으깨지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절대 절명의 순간에 왕도 벼슬아치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왕이 아니라 선지자에게 온겁니다.

하나님은 참 자비하시네요. 살인자의 자식이 외치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인자의 자식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참상을 풀어 주리라고 하십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스아는 약 두되 반 정도입니다 7.3리터. 현재의 합분태 1.2리터에 은 다섯 세겔을 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건 말도 안되는 가격입니다. 물자가 풍족해진다는 이야깁니다. 굶주림이 해결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지는 말해지지 않습니다.

예언은 보통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됩니다. 그래서 ‘장래의 어느 날’에 이 예언이 성취될 겁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날짜까지 이야기 합니다. “내일 이맘때”

너무 너무 자세하고 확정적이라서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더구나 엘리사가 하는 예언의 내용은 너무 황당합니다.

그래서 왕과 함께 온 왕의 군마대장이 불신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군마대장은 왕의 병거에서 왕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원문상으로는 ‘병거에 탄 세 번째 사람’이란 뜻인데 왕의 뒤에 서서 왕의 병기를 들고 가죽끈을 잡고 굳건하게 서서 왕을 보호하는 군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손에 의지하는 자”입니다. 상당한 왕의 총신으로 고관입니다. 이 사람이 듣기에 엘리사의 예언이 너무 황당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로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엘리사의 선포에도 아무런 경외심을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웃습니다. 그러다가 엘리사의 저주를 듣고 맙니다.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보고 죽는 다는 이야기지요.

괜히 입한번 잘못 놀렸다가 죽게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감히 건방지게 하나님을 비웃은 죄입니다. 우리 인간들 중에서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생각에 , 왕과 같은 병거를 탄다는 교만한 마음에 하나님을 물로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행복한 예언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 날텐데 자기는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으므로 그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말도 안된다면 하나님의 선지자와 그 말씀을 비웃고 의심합니다. 그러다가 훼방하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심어 주는 겁니다. 믿음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이 하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왕도 가만 있는데 일개 신하가 건방지게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드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푸대접 받아도 됩니까?

하늘에 창을 낸다는 표현은 노아의 홍수때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말은 비대신 곡식을 소나기처럼 내려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능력도 비웃고 있는 것이지요.

보기는 하는데 먹지는 못한다는 예언을 듣고 이 사람은 무슨 말인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물론 듣는 사람들도 그게 무슨 말인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이 엘리사의 예언의 내용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는 사마리아 성문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이 사람은 무식해서 엘리사의 예언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사람은 다음날 사마리아 성문에서 사람들에게 밟혀 죽습니다. 갑자기 아람군대가 각종 식량과 물자를 내버리고 철수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일시에 성문으로 몰리면서 성문을 지키던 이 사람이 백성들에게 밟혀 죽은 것입니다. 7:16에 보면 이때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때요?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더불어 그 군마대장은 보기는 보았으되 먹지는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엘리사의 예언은 그의 죽음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의도한 바와 달리 설교가 너무 길어서 다음 주에 또 이대목을 설교하기위해서 본문을 약간 생략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너무 정확하네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이 굴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왕도, 왕의 군마대장도, 심지어 아람의 군대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하고 비웃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함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함이며 결국 그 죄는 죽음입니다.

지금 곡식가격이 얼만데....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길이 없는데....무슨 수로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 같은 의문과 의심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가집니다. 믿고 순종하느냐 아니면 믿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느냐.

중간이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체면도 지위도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걸 따지는 자가 있다면 진실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에 불과한데 그 신하인 일개 군마대장이야 정말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왕이나 군마대장의 눈으로 볼 때 엘리사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왕은 엘리사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앞에 서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스스로 왕이라고 엘리사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우쭐대는 왕은 여기에 없습니다. 참담한 현실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남의 탓을 하는 비인격적인 무능한 자의 모습만이 보입니다.

처음 여호람 왕은 사마리아 성에 닥친 위기를 엘리사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죽이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곧 자기의 명령을 철회하기 위해 급하게 사자의 뒤를 따릅니다. 게다가 엘리사 앞에서 이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위협하거나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대항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의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자려라고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죄악의 자녀였던 우리는 이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마침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 지는 세상이 임하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풍부하신 아버지와 연결되어 끊임없이 공급받으므로 복된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들어진 형상도 없고 그림도 사진도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집중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도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암울하고 도저히 헤어 나올 구멍이 없을 것 같아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논리와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자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결코 이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 또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이루어짐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말씀과 약속만을 믿고 담대하고 기쁘게 나갑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뭡니까? 약속이 뭡니까? 네가 나의 법대로 행하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 네가 나의 말을 순종하면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키고 보호하리라. 미증유의 장기 불황이 닥친다고요?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분의 날개아래 품어주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1월 2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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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직감적인 이야기지만, 하나님은 불의한 것을 참 싫어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갑자기 무턱대고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인가요? 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요즘 강렬한 한 가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살아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불의를 일삼고, 스스로와 타인을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쫓아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 그렇게 한 걸음씩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강렬한 믿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개념은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서 실재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에서 사용되어 지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다만, 그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사람이어야 할 뿐이지요.

개인적으로, 2012년을 돌아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올해 하반기는 거의 뜻대로 이루어 놓은 일이 하나도 없었지요. 앞은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실패 뿐인 인생에서 무엇을 건지거나 의미를 구하는 것도 부질 없어 보였습니다.

평소 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 처럼 많고, 해야 할 일도 무한히 있다 라고 저는 말하고 다녔습니다. 무척 바쁘게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방향성을 잃어버린채 둥둥 떠 있다" 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과 똑같지요. 진정성 있게, 삶을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중요한 일에 치열하게 집중하는 것. 손대지 않아야 할 일은 손대지 않는 것. 그런 단순함에서 나오는 것 같네요. 오늘 두서 없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칩니다. / 2012. 1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