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제7의 봉인 (The Seventh Seal, 1957) 리뷰

시북(허지수) 2013. 2. 4. 00:11

 이 영화에 대해서 리뷰를 쓸 수 있다면, 그 어떤 영화 이야기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이 영화만큼은 바로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주제가 무거워서 였을까요? 아니면 마음이 먹먹했던 걸까요? 솔직해 지는게 어느 때보다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서 "두려움"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도 무섭게 제게 다가왔던 겁니다. 그래요 1957년 영화입니다. 흑백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만큼은 참으로 섬뜩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가지는 힘이겠지요. 아무리 연출기술이 발달하고, 풀HD 고화질 시대가 되고, 3D로 영화가 제작되고, 선남선녀가 나와서 눈을 즐겁게 해준다 할지라도, 그 안에 정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면, 결코 좋은 영화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7의 봉인은 대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입니다. 바로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삶" 이라는 것이지요. 배경은 14세기의 이야기지만, 이 주제는 모든 이들이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사자와의 체스를 두면서 이야기는 출발합니다. 무거운 글이 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오늘이야말로 도망가지는 않겠습니다. 덤벼라 사신! (웃음)

 

 

 저는 삶에 대해서 의문을 품으면서 살아왔습니다. 10대 때는 구부려지지 않는 무릎 때문에,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에 시달렸고, (※시간이 흘러서 다행히 몸은 회복되었습니다) 20대 때는 아는 아이가 백혈병에 걸려서, 왜 이런 일이 그 친구에게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도 사회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만 먹고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저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쩐지 희망고문 같아서 였습니다. 사회는 노력만 한다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간단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인지도요. 그래서 서른이 넘어서도 저는 길을 잃고 흔들리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기사 블로크는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길을 잃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지만,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돌아온 고향에는 페스트가 창궐하고, 인간의 도덕성은 땅에 추락했으며, 사람들은 종말이 가까웠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인간을 화형시키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사회를 보면서, 그는 갑자기 죽음의 사자를 만납니다.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이 죽음의 사자라는 녀석은 그렇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가 봅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는 사신과의 체스를 제안합니다. 적어도 틈틈히 체스를 두는 동안은 삶을 조금이나마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내기는 승낙되었고, 블로크는 이제 고향을 둘러보면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이 그토록 믿어왔던, 신의 존재가 부재중 입니다. 이 느낌을 제가 현대적으로 감히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휴대폰에는 지금 신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수차례 전화를 거는 겁니다. 그런데 도무지 전화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이들의 공통된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꿈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 고통을 겪는 중요한 시사점 이기도 합니다. 즉, 두드려보아도 응답이 없을 때의 그 허무감.

 

 더욱 놀랍게도 그 허무감을 표현했을 때, 그것을 듣고서 답을 주는 것은 신이나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죽음의 사자 입니다. 상징적인 장면이지요. 아무리 고민해봐야 결국 죽는다 라는 것. 도망칠 수 없다는 것. 누구나 마찬가지라는 것. 그렇다면, 기사 블로크는 이제 어디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나요? 어디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나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표현하자면, 20년간 사랑했던 것이 사실은 가짜 였다고 생각될 때, 혹은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 상실감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나요? 라고 물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은 여기서 "나눠주는 장면" 을 선택합니다. 블로크가 웃음을 띄게 하고, 살아있음에 감격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나눠주는 것이 무엇인가 거창한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산딸기와 우유. 한 마디로 한 끼의 식사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냥 나눠주었을 때, 블로크는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의미며,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과 살포시 겹쳐치는 책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나치시대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누군가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오고, 먹을 것을 보내오고, 이런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받던 사람은 거기서 인간의 신성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의외로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즉, 나눠준다는 것은 인간을 살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잔인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남을 때릴 지언정, 남에게 맞고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살아왔습니다. 살아남는 것, 생존하는 것이 강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눠준다는 것은 미친 짓"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눈다는 것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내 빵을 나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3일치를 먹을 수 있는데... 라는 합리성이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정확하게 타인의 자리는 실종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큰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갑게 말하자면, 인간의 신성이 실종된 사회를 만들어 가는게 아닐까요. 생존만이 우선되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로 돌아와서 죽음의 사자는 기사 블로크 외에도 몇몇 사람을 더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의 장면이 나오지요. 누군가는 죽음 앞에서 맹렬히 저항하고 거부합니다. 죽기 싫다고 발버둥을 치고, 때가 아니라고 매달려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쓰러집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죽음 앞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응시합니다. 슬프긴 하지만, 이제 삶에서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삶의 끝을 준비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이것저것 다 손에 쥐고 있으면 죽는다는게 얼마나 싫고 아깝겠어요. 그러나 자신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 해나가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서도 좀 더 담담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욕심을 좀 더 내려놓을 것, 빵과 우유를 나눌 것, 세상의 부조리함 앞에서도, 신의 부재 앞에서도, 자신이 믿는 선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것. 그리하여, 죽음의 문턱이 언젠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날에,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인생이라는 여행도 참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