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리뷰

시북(허지수) 2013. 2. 4. 18:20

 매력적인 로맨스 영화 비포 선셋. 그다지 길지 않은 영화인데다가, 아름다운 프랑스 파리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영화가 끝나버린다는 그 영화 입니다. 실제 촬영도 15일만에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적어도 담겨져 있는 내용만큼은 정말로 9년이라는 시간이 담겨 있는게 아닐까 생각되어 집니다. 각본을 참 현실감 있게 잘 썼다고 해야할까요. 더욱이 제가 하필 극중의 남녀처럼 32살이기 때문에, 더 와닿는 부분이 컸던 것 같습니다. 친한 친구들이 결혼하고, 또 현실에서 힘들어하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또 프랑스나 한국이나 같으니까요 :)

 

 사랑했던 사람을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기억들은 추억으로 간직해야 아름답다는 것은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세월이 흘러서 보게 된다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고, 상상과는 다른 모습일테니까요.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은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내고, 그 후 인연이 끊어져서 어느덧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20대의 젊음이란 영화의 표현대로 뜨겁고, 어리석었지요. 30대의 만남이란, 그래서 훨씬 더 차분하고, 현실감이 넘치게 됩니다. 파리를 걸으면서 두 사람은 변해있는 삶을 솔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지쳐 있는 32살의 모습을 털어놓고, 공유하지요. 오늘 이야기는 바로 "낭만의 추락에 대하여" 입니다.

 

 

 제시와 셀린은 확실히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제시는 베스트셀러 작가 이고, 결혼도 했고, 귀여운 아들까지 두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남부럽지 않은 삶이지요. 셀린은 어떤가요. 그녀 역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했고, 새로운 남자친구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성공한 두 사람의 인생에서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과연 이것이 정말 성공한 인생인가? 나아가 이것이 정말 행복인가?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제시는 불행하다고 고백합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것은 오래전 일이고, 사랑이 아니라 의무로 살아가고 있다고 적나라하게 말합니다. 셀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던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랑 받고 싶어하고, 삶을 견뎌내는 것을 우울해 합니다. 그 원인은 바로 "낭만의 결핍"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물론 배가 고플 때는, 밥먹고 사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저는 "아름다운 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없는 삶이란, 말라 비틀어져 가는 화초처럼, 괴로운 삶의 연속이지요.

 

 당연히 아름다운 순간만 계속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런 날은 일생에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저는 동갑내기 오랜 소꿉 친구와 축구 이야기를 늦게까지 하면서 즐겁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는 마지막에 인상적인 한 마디를 던집니다. "오랜만에 정말 즐거웠다" 정말 즐거운 날은 몇 번 안 되고, 하루 하루 일상의 무게를 견뎌가는 것 조차, 버거운 것이 어른의 힘겨움일 테지요.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러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현실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는 이유도, 이 지점에 있습니다. 비포 선셋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과는 정말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은데, 자주 만나서 함께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하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꼭 그렇게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습니다. 트러블이 일어나고, 갈등이 발생하고, 때로는 상처받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일상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많은 로맨스 영화와는 다르게 비포 선셋은 독특한 여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표현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지내는 어려움 이랄까요.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어렵고, 또 함께 지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으니까요.

 

 너와 내가 만나서 꿈같이 행복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따뜻한 날들이었다, 라는 것이 일반적인 로맨스라면, 이 영화에서는 꿈같이 행복했었지만... 따뜻하고 소중한 날들이었지만... 이라고 표현됩니다. 점3개의 여운이 가득한 영화입니다. 특별한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대화를 쉼없이 나누는 일상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의외로 이 점을 좋아하는 분들도 많겠지요. 영화 같은 일상은 비포 선셋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라면 어디를 가도 영화의 한 장면이 되는 것일테니까요.

 

 영화를 보고난 후에, 조금 이상한 느낌, 색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생각만큼 슬픈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묘하게 들었습니다. 사회적인 피부를 입고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못하고,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래서 무거운 일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배려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작게나마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시와 셀린처럼 가깝지만 서로를 배려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낭만이 추락해도, 즐거운 인생은 있다 라는 것입니다 :)

 

 아마도 마지막 장면이 강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겠지요. 제시는 계속 셀린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셀린은 너무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연주하며, 춤을 춥니다.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또 그대로 영화는 끝나버리네요. 아마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절로 눈물이 나올꺼 같습니다. 그 뒤에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이른바 "열린 결말"이라고 해도, 적어도 그 두 사람의 그 날 하루 해질녘까지의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찬란한 일상"은, 가슴 속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순간"으로 또 영원히 남을테니까 말입니다.

 

 끝으로,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낭만적인 20대 때,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보았다면, 선라이즈가 더 인상적인 영화가 될 테지만, 30대 때 이 두 영화를 보게 된다면, 선셋이 더 인상적인 영화로 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시선은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변화해 간다는 것을 이것만큼 잘 보여주는 영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 의미에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훌륭한 역작이 아닐까 싶네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