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2월17일/변화산의 예수님과 제자들(마가복음9: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2. 20. 15:5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17일 주일 예배

변화산의 예수님과 제자들 (마가9:2-)

정관의 저희 집 뒤에는 백운산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소학대와 매암이 있지요. 소학대는 사실 볼거 없지만 매암은 평평하고 큰 바위뭉치가 있기 때문에 그럴듯해 보입니다. 사실 저희 교회 이름인 영암교회도 이러한 바위에서 따온겁니다.

영적인 바위
제가 예전에 도봉산에서 기도할 때도 거대한 바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청년들이 그 바위를 영암기도원이라고 지었지요. 여기 정관에서도 백운산에 거대한 매암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매가 살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산이 별로 높지는 않지만 날이 흐릴 때는 구름으로 뒤덮인 모습이 장관입니다. 저도 이 산에서 특히 매암에서 밤기도를 한일이 많은데 여하튼 산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저 산위에 무언가 신비한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산위로 산위로 올라가는지 모릅니다. 특히 그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들은 기를 쓰고 올라 가려고 합니다. 뭔가 인간세상과는 다른 신비로운 것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지요.

이와같이 복잡하며 논리적이고 과학만능의 세상에서도 우리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세상을 동경합니다. 정신없이 세상에서 살다가도 가끔씩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산속에서의 전혀 다른 신비한 일탈을 꿈꾸기도 합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교회당에 가서 설교듣고 기도하고 찬송부르는 그런 일상적인 경험 말고 뭔가 신비한 경험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싶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싶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되어지는 놀라운 이적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위가 좋다고 해도 영원히 산위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산에서 한 몇일씩 기도하며 노숙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박이라고 합니까?
그런데요 결국은 가지고 올라간 것을 다 먹고는 내려와야 되지 산에서 뭔가를 구해서 먹고 이용해서 삶을 계속 영위하는건 어렵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결국은 내려와야 합니다. 비록 내려오고 난 다음 산위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해도 결국은 내려와서 새로운 힘과 음식과 도구들을 보충하고서야 다시금 산위의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도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신비한 산위의 경험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변화산에서의 신비한 체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변화산’이란 산은 없습니다. 다만 이 산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했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는 이 산이 어느 산이었는지는 성경에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아주 높은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산위로 올라가셨습니다. 누가는 주님이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라 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명의 제자에게 기도에 관한 훈련을 특별히 시키시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위에서 주님의 모습이 변형되셨습니다.

어떻게 변형되었냐하면 그 옷이 광채가 나고 아무리 빨래를 잘해도 도저히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희게 변한겁니다. 본문에서는 옷만 변형된 것 같지만 이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는 얼굴이 빛났다고 하고 누가복음에는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얼굴과 옷에서 다 같이 광채가 나고 심히 흰옷을 입게 된 겁니다. 사람이 산위에서 이렇게 변하면 우리는 신선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양식으로 보면 주님은 지금 신선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위의 광경은 세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된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나와있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누가9:29에 보면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모습이 변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시지만, 그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할 때에 비로소 그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함으로 능력을 나타내고 기도함으로 변형되고 기도함으로 시험을 이긴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그도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놀라운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에 불과한 우리는 당연히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 놀라운 이적을 맛보고 싶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복받고 잘살고 싶습니까? 일단은 기도하십시오. 아마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뭐 최소한 니 복장부터 고쳐라 고 하실지................
기도할 때에 모습이 변형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여실히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하고 모세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자이며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이 땅에 다시 올 것으로 믿어 지는 자입니다. 모세는 우리가 생각할때는 죽은 것이지만 유대인들은 모세 역시 죽지 않고 산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살았으되 산게 아닌 마치 신선같은 사람들입니다. 한자로 산에 사는 사람을 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한 사람들이지만 조금 다르게 본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구약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로 표현합니다. 대부분의 당시 유대인들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을 나타내는 이가 바로 모세이며 선지자의 대표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광경은 그가 성경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예언의 주인공, 메시야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대적으로는 말씀과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대입해 보려 합니다. 뭐냐면 목사의 기본자세이지요. 성도의 기본자세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 주님을 모신가운데 능력과 말씀을 겸비해야 한다는 표시라고 해석하는 것이지요. 유식하게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다?

우리는 흔히 문무를 겸비하니 재색을 겸비하니 같은 말을 씁니다. 사실 문무를 겸전하거나 재색을 겸비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만 치우쳐서도 안되고 능력에만 치우쳐서도 안되며 이 두가지에 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는 것이 더해져야만 완전하고 이상적인 신앙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한쪽으로 치우치는 반쪽짜리 신앙이 아니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완전한 신앙상태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점점 쇠퇴하고 있는 것도 저는 이들의 변질, 비리와 부패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어졌다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논리적인 세상에서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기독교를 무시하고 능력이 없는 교회를 조롱하는 것이며 사람개인에게도 교회에게도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에 법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어떤 말씀을 나누고 계셨을까요? 마가복음에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이들이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말씀하다”고 할 때에 원문으로는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신중히 의논’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구속사적 대사건을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상세하게 의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위에서 가벼운 환담을 나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한자리에서 서로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주님에게 제안을 합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짓자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들이 초막을 짓겠다는 말입니다. 왜 초막을 짓습니까? 여기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변화산 위에서 영원히 살고자 초막을 짓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좀 이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뭐냐면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너무 무서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왜 무서웠을까요? 인간이 신을 보고 경외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옷이 희고 또 빛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주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너무 너무 두렵고 놀랐습니다. 그 신적인 모습에 경외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지금 초막이야기를 한 것이랍니다.
실제로 병행기사를 기록한 마태는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여짜와’는 한글 성경 번역의 오류입니다. 실제로는 ‘대답하여 가로되’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전혀 질문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대답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입니다.

누가는 여기에 대해서 “곤하여 졸다 깨어” 영광스런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이같은 엉뚱한 소리를 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 것이 바로 그들이 기도하지 않고 졸다가 깨어서 엉겁결에 한 말이라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세사람의 제자를 특별히 뽑아서 이들에게 기도훈련을 시키시기위해 산으로, 그것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 가셧습니다.
아마 “얘들아, 너희는 여기서 기도하고 있어라 나는 저기서 기도하께”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기도하다가, 또는 기도하는 척 하다가 곤하여 잠이 들어버린 겁니다. 아마 높은 산을 올랐기 때문에 매우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눈감고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든게 아닌가 합니다.

이들은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도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당시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일은 잘 없었을 테지만. 여하튼 조용하게 기도해야 하는 일은 제자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었는데 주님의 변화된 모습과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신비로운 광경을 보고는 베드로가 엉뚱하게 초막을 짓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비한 현상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도 산에서 기도할 때 구름이 봉우리를 감싸면 뭔가 신비한 느낌이 듭니다. 그 속에서 마치 주님이 계실 것 같고 말씀하실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마 구름가운에서 임재하신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임재가 아니라 그냥 목소리만 들린것이기는 합니다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은 굉장히 신비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굉장합니다. 무어라고 하는고 하니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저도 이런 말 한번 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여하튼, 이 소리가 들리고 정신을 차린 제자들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서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의 기술방식이 조금씩 다른 이유는 그들이 기술한 책의 독자가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마가는 로마인들에게, 누가는 그리스인들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적었기 때문에 독자들이 중요시하는 관점을 고려하다 보니까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달라 지는 겁니다. 즉 동일한 사건을 보고 기술했지만 강조점은 서로 다른 것이지요.

여하튼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구름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오직 같이 산위로 올라온 예수님과 자기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이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초막셋을 짓자고 하지요. 누구를 위하여 짓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래요, 베드로는 산아래로 내려가기가 싫었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기가 장차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인류구원의 대속의 제물이 되셔야 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런 남을 위한 삶, 희생의 삶 말고 우리를 위하여 여기 이 좋은 곳에서 그냥 살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주를 믿고 그의 법을 받고 능력을 받는 것은 우리가 잘먹고 잘살고 복받을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믿고 당연히 잘먹고 잘살고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결국 우리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초막 셋을 짓고 산위에서 살자고 한 베드로의 엉뚱한 말을 수용하시지 않은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좋은 예수를 우리끼리만 믿고 우리만 복을 받자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이기심이지요. 좋은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우리만 이 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남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뮤지컬에서 장발장이 죽기 직전에 부르는 노래의 가사도 있잖아요.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천국에 가려고 하면,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을 살면 결국은 그 속에 있는 나와 우리를 함께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나라지요.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짓고자 한 초막은 장막이란 뜻도 되고 나무나 짚으로 지은 간이 주택을 일컫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영구히 산위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이 황홀경을 연장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산 아래는 자기들끼리 해결하라고 합시다.” “여기가 좋사오니 세상에서는 자기들끼리 해결하라고 합시다.”

이 말은 분명히 좋은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바로 산아래의 일입니다. 인간세상의 일을 그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산위에서만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의 능력을 받았다면 산아래에 가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세상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만이 아니라, 우리만이 아니라 다 함께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엎드려서 벌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가셔서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무서워 말라”고 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과 동일하고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그냥 맑은 날입니다.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자 나머지 부분은 그냥 생략합시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권능을 행하기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 세상을 떠나서 우리를 격리시키고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러한 장소로는 이스라엘이나 중동에서는 사막이 주로 애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산이 바로 그런 장소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2/3가량이 산이기 때문에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에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주말에는 도시 근교의 산은 등산객들로 뒤덮이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주중이나 약간만 떨어진 산에는 인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산에서 기도하기를 즐겨했고 많은 수의 기도원들이 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오늘날 절들이 시내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교회의 기도원들은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참으로 산기도를 좋아 합니다. 낮에 산에 있는 것도 좋지만 밤에 산에 있는 것도 더 좋아합니다. 마치 산위에서의 밤기도는 뭔가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해 줄 것 같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때는 연천의 소요산부터 시작해서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사태산같은 근교의 산들에 자주 가서 기도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저희 동네 뒷산인 이튼 폴이 있는 곳의 산, 산 가브리엘위에서 기도하기를 즐겨했습니다. 부산에서는 금정산과 윤산에서 그리고 이곳 기장에서는 백운산에서 기도하기를 좋아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산에서 기도하기를 좋아 할까요?
그것은 신비한 체험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신비한 체험? 그래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과의 신비한 시간을 가지기를 원하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드시 그 기도처가 산일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하라고 되어 있는 교회당이나 기도원, 심지어 자기집의 거실도 충분히 기도할 공간입니다. 정 시간이 없고 장소가 없다면 걸어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고 이 기도는 우리자신만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도 주께서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나자신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주님의 큰 일을 소흘히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능력, 복, 재능같은 모든 것들은 나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기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조금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산아래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해가지고 서기관들에게 논쟁에 휘말려서 궁지에 몰려 헤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주님이 내려가셔서 귀신을 쫓아 내고야 비로소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만일 이 좋은 곳에서 우리끼리만 행복해 있다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 놀라운 이적과 신비로운 체험들이 종종 기록되어 집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 중에서 그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이적을 예수님 당시, 기껏해야 초대교회로 한정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말씀만 파고 있습니다. 말씀을 중시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중심의 신앙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의 또다른 면인 체험과 이적에 결코 등한시 해서는 안됩니다.

솔직히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는 각종 사건들이 믿어 지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셨다느 표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그러한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는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말씀과 체험은 결국은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체험이 성경에 비추어 보아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체크하는 것이지요. 성경말씀은 큰 테두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신앙체험이 제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의 역사뿐만 아니라 악령의 시험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체험이 다 성령의 역사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말씀으로 무장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었다는 대목은 정말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나 마가는 엘리야를 앞에 두기도 하고 모세를 앞에 두기도 합니다. 각자 강조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신앙이 말씀과 성령체험이라는 두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산위에서 체험한 영성을 가지고 산아래 세상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나자신만을 위한 믿음, 그리고 말씀이나 체험의 하나만을 강조하는 믿음은 반쪽짜리 믿음입니다.

우리가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균형잡힌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2월 1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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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코멘트는 정직하게 쓰기! 저는 솔직히 말하자면, 변화산에 따라 올라가게 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기에 초막을 지어서 영원히 근심없이 살자고 말한 취지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정말 좋은 것을 보았으면, 그들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하고 아름다운 진주를 보았다면,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사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따라 올라간 세 명의 제자는 이미 그 가치로운 영화를 보았기에, 이 기쁜 순간들 속에서 행복하게 걱정 없이 살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무자비(?)하게도, 예수님은 이들을 뿌리치고 다시 산 밑으로, 세상으로 내려 갑니다. 그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분은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 속으로 걸어 갑니다. 이 모습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저는 기독교의 핵심가치가 "자발적인 자기희생과 헌신" 이라고 느껴집니다. 남들이 "너 인마 그렇게 바보처럼 살지 말고 적당히 호사도 누려가면서 다 그렇게 사는거지" 라고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일 때, 예수님의 선택은 단호합니다. 우리가 호사를 누리면서, 이웃이 죽어간다면, 그것이 어떻게 믿음이라 하겠는가? 라고 엄숙하게 질문하는 듯 합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예수님의 높은 기준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 아픕니다. "나 먹기도 힘든데, 이 좋은 것을 나눠주라니요" 가만 보면 예수님이 인간에게 너무 높은 기대를 하고 계신건 아닌지 살짝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할 수 있을거야, 믿음을 가지고 행한다면, 너희가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나눔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어서가 아닙니다. 이른바 황금률도 아니며, 증여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본을 보여주셨기에, 그를 따르는 성도로서의 당연한 의무 입니다.

 부자가 언제 세상의 모진 비난을 듣습니까.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사회에 조금도 환원을 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를 욕심쟁이 스크루지로 비난합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가 언제 그 능력을 잃어버립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그 분의 가신 길을 조금도 따르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진 비난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설교는 안일함을 경계한다는 측면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경험을 하고, 행복한 일들을 만났을 때 :: 우리가 이 기쁨에 취해서, 영원히 현실을 외면하고 안주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을 만나서 이 기쁨에 대해서 알려주고, 함께 나누어 가며, 현실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 갈 것인가? 우리는 중요한 선택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며, 행동은 이웃에게 모질게 대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믿는 축복받은 삶이라면, 우리의 행동 역시 그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 나눠주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토록 그렇게 살아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 2013.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