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구석기, 신석기 - 먹고 사는 것과 환경의 중요성

시북(허지수) 2013. 3. 19. 15:03

 앞으로 약 50개 남짓한 문서로 정리될 이 자료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 외에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참, 요즘은 한국사가 각종 시험의 단골 손님이기도 하고요) 나이가 들면, 역사 만큼 재밌는 공부도 드물지요.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가급적 누구나 읽기 편하도록 정리해 보는 편인데,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원래는 대단히 즐겁고 유쾌한 경험일테니까요.

 

 선사 시대의 생활을 생각해 본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의 문제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구석기 시대 (대략 70만년 전이라고 하는데) 일단 왔다고 합시다. 며칠 굶었어요. 죽게 생겼어요. 뭐라도 따먹거나, 뭐라도 잡아먹거나, 뭐라도 입에 넣어야 하겠지요. 운 좋게 좋은 지역이라, 이것저것 먹었어도 무한히 먹을 수는 없습니다. 또 배가 고프네요. 먹을 것을 찾아서 또 이동합니다. ★먹고, 이동하고, 먹고, 이동하고, 자연에 대한 먹튀의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과한 표현일까요.

 

 옷은 뭐 300만원짜리 모피(짐승 가죽)를 입으면 되겠지요. 아니 좋은 건 한 3천만원은 될지도 (...) 집이야 뭐 동굴이나 막집 들어가서 추위나 더위, 야생동물을 피하고, 잠자면 되겠지요. 아무래도 기록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에, 이 시대는 유적이나 유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원 검은모루 동굴,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단양 수양개, 청원 두루봉 등이 구석기 주거 유적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다보니 또 배고파졌네요. 저기 움직이는 녀석을 좀 더 쉽게 잡아먹으려면, 맨손보다는 뭐라도 들어야 겠네요. 일단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주먹도끼(뗀석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맨주먹이 아무리 쎄더라도, 돌들고 냅다 찍어버리면 진짜 무섭거든요! 잔인한 공포영화가 일상인 구석기 시대! 주먹도끼를 들고, 함께 있으면, 우리는 저 야생동물과도 싸울만했다 바로 이겁니다!

 

 최태성 선생님은 이 주먹도끼를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그립감"이라고 표현하는데 진짜, 표현 최고네요. 다른 말로 한다면, 돌만 딱 유심히 보면 어떻게 떼서 쓸 수 있을지 그들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 나름대로는 첨단적인 명품(!) 주먹도끼를 하나 쥐고 있으면, 많은 것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생필품 1호, 나에게도 그립감 죽여주는 주먹도끼를!!!

 

 여하튼, 무리를 짓고, 힘을 합쳐서, 위험한 동물도 사냥하는 등 배고픔 속에서 평등 사회 였다는 것은 꽤 재밌습니다. 생존 확률적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혼자 다녀서 사냥해서 먹고 살기 보다는, 여럿이서 몰려 다니면 좀 더 안정적인 생존을 도모할 수 있을겁니다. 오래된 속담 있잖아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 빨리 나혼자 많이 먹기 보다는, 나눠서 같이 먹는 쪽이 오래도록 사는데 유리했다고 해야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교과서에 의하면 지도자가 있다고 보는데) 의사소통을 비롯해서, 나름대로의 공동체적인 낭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먹을게 별로 없지만, 내일은 또 힘내서 나가보자, 라는 단순함의 행복이랄까요.

 

 문명사회가 될수록 더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약간의 오만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기에 비해서 잠자는 시간이 줄었으며, 더 빠른 속도로 걷고,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아주 자주 배가 고팠겠지만, 행복지수는 어쩌면 높을 지도 모릅니다. 거지가 조금 더 많이 번 옆의 거지를 보고 질투하고 부러워한다면, 이 선사시대 사람들은 옆의 배고픈 동료가 있다면, 뭐라도 잡아서 챙겨주고 먹여서, 같이 또 사냥을 나가야 하는 생존의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단은 제 생각이니, 넘어가도 됩니다 :) 어쨌든, 보험금 타기 위해서 가까운 사람을 죽이는 인간의 잔인성, 가짜 보험금을 타는 사기 금액도 해마다 증가하는 것을 볼 때, 돈과 욕심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행복으로 가는 문이 될 수 없음을 어렴풋이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자, 이제 B.C. 8천년이라는 그 신석기. 신석기 혁명은 유명합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거든요. 자연이 주는 달콤함과 비바람을 오래도록 겪어나가던 인류는 마침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 유명한, ★농경과 목축의 시작 입니다. 밭농사를 하고, 가축을 키우고, 배고픔을 좇아서 이동하는 힘든 생활을 마침내 극복할 무기를 집어든 셈입니다. 정착 생활을 하고, 한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옷도 만들고, 그물도 만들고, 원시적인 수공업이 시작됩니다. 집도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으로 제법 멋지게 지었습니다. (움집은 반지하에 원형 형태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나요. 사물을 대하는 시선이 바뀌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변화 되었습니다. 의, 식, 주, 모든 것을 바꾼 신석기 혁명. 바꿔 말해, 일반적으로 볼 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매력적인 통찰을 주기도 합니다.

 

 농경과 정착 생활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는데,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는 어쩌면 지겹도록(!) 들었을 테지요. 한 때 광고에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수학의 집합과 국사의 빗살무늬토기는 거기서 책을 덮는 대표적 아이콘입니다 (웃음) 그 외에도 간석기로 만든 각종 석제농기구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도 있습니다. 한편,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와 바람에서 각종 종교적인 감정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이 있습니다. 조개 가면 같은 것도 좋은 예겠지요. 여하튼, 신석기 시대를 씨족(부족)사회로 보고 있으며, 결혼은 족외혼을 통해서 하며, 아직은 배고픈 평등 사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부터 우리는 평등 사회의 슬픈(?)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 끝 - 이 아래부터는 전적으로 여담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조금은 황당하지요. 모두가 같은 사람이었다가,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기 시작하자, 계급과 신분이 생기기 시작하고, 소유권의 개념이 생기고, 토지소유가 생기고, 한편에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외치는 절규소리가 있고, 그 기나긴 싸움은 20세기를 앞두고서야 마침내 다시금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라는 자유를 되찾게 됩니다.

 

 한편, 애니미즘에 대해서 조금 조사를 덧붙이면, 수많은 종교나 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교적 사상입니다. 모든 사물이나 자연물에 정령(영)이 있고, 그들의 영혼을 인정하는 식이지요. 다른 말로는 정령신앙 같은 말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판타지게임 같은데 보면 흔히 나오잖아요. 물의 정령이니, 바람의 정령이니, 생각할 수 있는 것 마다 생명을 연결시킵니다. 현대에 와서도 스마트폰에 영혼이 깃들어서, 폰이 울리면 죽는다 식의 공포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볼 때, (또는 인형에도 정령이 깃드는 식으로는 추억의 사탄의 인형!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사물을 생명체로 보는 생각은 아주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겠네요.

 

 또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과학이 많은 것을 지배하기 전까지는, 식물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겠지요. 밭농사는 뿌리면 그게 수확을 가져다 주니까요. 그들은 이 상황을 정령의 힘으로 볼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씨앗을 심고, 정성을 조금 기울이면, 먹을 것이 나오게 되자, 자연에 대한 숭배도 자연스럽게 생겼겠지요. 자연을 이용하면서도, 자연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순수함도 조금 보입니다. 요즘이야 해안가를 땅으로도 바꿀 수 있을 만큼, 또는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만들고, 심지어 바다 밑으로도 해저 터널을 만들기 까지 할만큼 대단한 기술의 시대입니다만. 여튼 그렇게 놓고 보면, 신석기 사람들은 (식물이 자라고 비가 내리는 등) 자연에 대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어떤 설명이나 해답을 가지려고 했던건 아닐까 싶습니다. 탐구하고, 호기심을 가지는 인간의 본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비는 어떻게 해서 내리나요? 라는 단순한 질문도 사실 대답하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합니다. 꼬마애가 물어보면 사전배경지식이 없다면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요. 산은 산이고, 비는 비지 라고 답변하면 좀 그럴싸해 보일련지요. 현대야 당연히 사물에 대해서는 차갑게 대하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그런데 선사 시대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정령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는 어쩌면 그들 역시도 삶과 자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기를, 삶을 더 풍족하게 살기를 바라는,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비슷할 수도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물론, 자연은 여전히 지배하기 어려울 만큼 강합니다. 농약 없이 작물을 키우는 것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대단히 어렵습니다. 친환경이나 유기농이 비싼 것은, 그만큼 더 힘과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신석기 시대 이후로 대략 만년(BC8천,AD2천)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자연은 신비롭고, 경이로움을 주고,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개미 같은 작은 생물체들도, 그들 나름의 규칙을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21세기는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한할 줄 알았던 자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압도하던 자연은, 환경과 생각의 혁명을 통해 인간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나중에는 파괴당하고, 이제는 인간에게 조금씩 복수의 칼날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우려될 때도 있습니다. 배기가스 등 각종 환경에 유해한 것들을 제한하는 규칙을 뒤늦게나마 만들고, 친환경 기술을 철저하게 개발하는 인간의 미래는 밝을지 어두울지 저로서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흥망이 반복되기도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은 보물창고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다만, 밥굶는 사람들이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고, 물장사에 이어서, 공기장사가 뻔뻔스레 등장하지 않기를 소박하게 바랄 뿐입니다 :) 물 한모금만, 공기 한모금만 이라는 부탁에, 돈을 주면 주겠소. 라고 거절하는 끔찍한 순간이 오면, 아마 인간 최후의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 뭐, 설마 그 정도까지 인간 감성이 몰락하겠나 싶지만요. 두서없는 여담을 마치며, 석기 시대를 보면 환경이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상에서의 영감이라면, 이 환경을 최대한 다르게 바라보고, 움직여 본다면, 의식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영감을 주는 문구나 포스터, 메모 등을 주변에 보이는 곳에 놔두는 것도 상상력의 좋은 출발이지 않나 싶습니다.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