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백제 의자왕부터 출발해 봅니다. 삼천궁녀 설화로 알려져 있는 욕먹는 의자왕은 실제로는 그렇게 막돼먹은 군주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사려깊고 총명한 인물에 가까웠지요. 신라의 배신으로 성왕이 전사한 것을 기억하며, 백제는 힘을 모으자마자, 바로 신라에게 칼끝을 겨누며, 무섭게 맹공을 펼칩니다. 의자왕 은 옛 가야지역의 최대거점 대야성을 빼앗는데, 당시 대야성에 있던 신라의 유력자 김춘추 일가의 사위와 딸이 사망합니다. 김춘추는 딸도 죽고, 사위도 죽고 참 불행했었지요. 백제가 매섭게 몰아붙이자, 신라는 급한 상황이 됩니다. 신라가 급할 때 찾아가게 되는 그 곳, 추억의 고구려가 있었지요. 몇 세기전 왜구를 몰아내며 우리를 도와준 고구려, 이번에도 도와주지 않겠니~?
신라의 사신으로 파견된 김춘추는 급히 고구려 로 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의 실세였던 연개소문은 상당히 강한 요구를 하며 신라를 압박합니다. 한강 유역을 내놓으면, 도와주겠다고 일침을 놓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선대의 진흥왕이 얼마나 고생해서 얻은 한강 유역 입니까. 신라의 김춘추는 당연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고구려는 열받아서 김춘추를 옥에 가두기까지 합니다.
간신히 옥에서 빠져나온 김춘추는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찾아갑니다. 사이 나쁜 왜구로 갈 리는 없을테고, 급기야 당나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당나라는 신라와 협상에 성공 합니다. 이유도 있었지요. 당나라는 당태종이 직접 지휘하며 고구려을 함락하러 갔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대패하며 피를 본적이 있습니다. (역시 강력한 고구려!) 당태종 입장에서는 이참에 신라와 손잡고, 숙적 고구려를 물먹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요. 또한 당나라는 고구려만 먹으면, 백제 신라까지 모두 내 땅으로 만들고 싶어했겠지요. 마침내 나-당 연합군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타겟은 신라를 거세게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의자왕의 백제였지요. 아아...
백제의 멸망 직전의 유명한 장면은, 영화로도 있는 황산벌 전투, 그리고 백제의 충신 계백 장군입니다. 계백은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서는데, 나-당 연합군 18만명에 맞서서 이길 수야 없었지요. 계백은 포로로 잡혀 노예처럼 살아갈 처자식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죽이기까지 하며, 장렬하게 전투에 임했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백제는 패배했고, 수도 사비성은 함락되었으며, 660년을 끝으로 백제는 멸망 합니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전쟁이 일상화 되었던 삼국시대. 이 시기를 살고 있던 사람들은 사실 힘든 날들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전쟁은 일부 기득권층에게는 확실히 유익이나, 많은 서민들에게는 피곤한 일상일 수 있습니다. 이름 없는 병사로 불려가고, 때로는 처자식이 죽거나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계백이나 김춘추 같은 명망가 사람들의 가족도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죽고 죽이는, 먹고 먹히는, 시대는 어쩌면 참으로 가혹한 시간들이 아니었을까요.)
한편, 백제는 멸망 후에도, 흑치상지, 복신.도침 이 부흥 운동을 주도 하며, 끝까지 사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663년에는 "백강 전투"라는 국제전까지 일어납니다. 친한 사이였던 왜가 백제의 멸망을 보다못해서, 4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지원에 나섭니다. 백제 부흥세력과 왜는 마지막까지 나-당 연합국과 싸움을 벌이지만, 당나라는 강하고 압도적이었지요. 이 전투 이후로, 백제 부흥 운동도 사실상 막을 내립니다. 4만명이 넘게 와도 안 되는데 어쩌겠어요. 한편 당시 백제의 상당한 유적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제가 완전히 떨어졌고, 이제 나-당 연합군의 2차 목표는 강대한 고구려가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나요. 일찍이 수나라가 대군을 끌고 왔을 때도,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으로 대승하며, 수나라를 거의 몰락시키기까지 했던 날선 호랑이 입니다. 당태종도 끈질기게 쳐들어오다가, 안시성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는 중국 통일왕조 2개국을 막아내는 저력이 있습니다. (가령 작고 강한 핀란드가 20세기 중반 소련과 맞서서 맹렬히 전투하며, 발트 3개국과 달리 끝까지 소련에 흡수되지 않았던 것처럼) 고구려는 강대국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기상을 펼칩니다. 다만, 전쟁이 계속되어갈 수록, 국력이 서서히 떨어져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야 했겠지요.
게다가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자식들이 내부 권력 다툼을 하느라, 정치 불안정 이 이어졌고, 드디어 나당 연합군이 끈질기게 공격을 계속 퍼붓자, 668년을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두 거대한 나라,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대로 소멸됩니다. 물론 저력의 고구려 역시도 멸망 이후에도 안승, 고연무, 검모장이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고군분투 해봤지만, 끝내 나당연합군의 거대함을 이길 수 없어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위너는 나-당 이고, 루저는 백제-고구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당나라의 욕망 가득한 반전은 다음 문서에서 살펴보고요.
두 나라의 멸망과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점은 오랜 논란거리 였습니다. 당연히 지금도 특정한 정답이란 없습니다. 보통은 신라의 입장이 좀 얄밉게 보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몰락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발점을 한편으로 찾아가보면, 총명했던 의자왕이 신라를 맹공격 하면서부터,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서의 처음 지점을 의자왕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따져본다면, 의자왕은 신라의 배신으로 선대의 성왕이 전사하고, 한강 유역을 잃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을테고요.
정리하자면, 6세기 신라는 절호의 기회에서 한강을 차지했고, 이후 7세기 위기이자 기회에서 당과 연합하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 고구려는 신라의 도움요청을 거절했고요. 대가 없이는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은 고구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안 그래도 수-당으로 이어지는 잦은 전쟁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를 도와 백제와 전쟁을 펼친다는 결단은 상당히 위험한 길일 수도 있었겠고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조직 중심이기 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정치를 해나간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 왕안석이 평하기를, "연개소문은 누구보다 비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했다" 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그 뒷처리가 엉망이 되자, 그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서 마침내 고구려가 침몰하는 셈입니다. 인물 중심의 정치는 그가 있을 때는 아주 힘있게 나갈 수 있지만, 정작 그가 사라지고 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부작용도 생기는 듯 합니다.
당장의 떠오르는 예들이 있지만, 워낙 많은 예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도, 좋은 나라가 된다면, 정말 훌륭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라는 역설적인 말이 생각납니다. 각각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가 일어나서 칼을 들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고대 국가에서 이렇게 높은 의식을 생각할 수는 없겠고요. 지금에 와서라도 우리는 "거인 의존증", "리더 의존증"에서 벗어나는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위대한 대장이 나오면, 저절로 살기 좋은 세상이 올꺼야, 같은 생각이야말로 위험한 판타지일 수 있습니다. 누가 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고, 주의하고, 함께 올바른 일들을 행할 때, 좋은 세상은 조금씩 다가올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