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통일신라의 발전 - 왕의 시대, 귀족의 추락

시북(허지수) 2013. 3. 27. 17:00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없애버리자, 이제 당나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당나라는 욕심을 드러내며, 안동 도호부, 웅진 도독부, 계림 도독부를 차례차례 설치 합니다. 즉 한반도의 주요 지방에다가 각각 군사행정기관을 두면서, 거의 협박에 가깝게, 신라를 속국의 길로 내모는 셈이지요. 당연히 신라가 이럴려고 나-당 연합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이제 신라도 결사항전 태세로 바뀝니다. 그래? 당나라? 한 번 붙어보자! 속국을 거부하며, 어제의 연합은 오늘의 전쟁으로 바뀝니다. 나-당 전쟁의 시작 입니다.

 

 신라는 육지에서 펼쳐진 매소성 전투 에서 승리했고, 해상에서 펼쳐진 기벌포 전투 까지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깜짝 놀란 당나라는 안동 도호부가 멀리 요동 지역까지 퇴각하면서, 통일신라를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경계로 해서, 통일신라가 완성되었고, 새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신라가 거대 당나라를 이길 수 있었나요?

 

 전쟁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최전방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후방 역시도 중요하며, 특히 보급품을 얻는 것이 고대 전쟁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그동안 당나라는 신라의 적극적인 후원과 전폭적인 보급 지원 하에, 백제와 고구려, 왜구까지도 거뜬하게 이길 수 있었으나, 정작 신라가 강한 태도로 보급을 거절하며 나오자, 상당히 당황스러운 입장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당장 중국에서부터 물자를 꾸준히 보급해 와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한반도에서 싸우는 것이므로, 신라는 현지 사정에 밝은 장점도 있지요. 신라가 물자 지원을 갑자기 끊어버리자, 당나라의 전투사기가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다가 한반도에서 다죽겠다 싶었던 당나라 군사들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린 고구려 지역에 7세기 말 발해가 들어서면서 통일신라시대를 요즘은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자, 이제 통일신라의 모습을 살펴봐야겠지요.

 

 통일신라의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으로 이어지는 이 강력한 왕들은, 철저하게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귀족들을 약화 시킵니다. 통일된 거대국가의 왕이 되었으니, 이제 막강한 것입니다. 게다가 통일신라로 들어오면서, 성골이 대가 끊겨서, 왕과 귀족 사이에서 나온 진골 출신이 왕 이 되기 때문에, 반역의 우려가 있는 말 안 듣는 귀족을 지독하게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서 왕권을 강화시켜나갈까요? 정치적인 모습부터 살펴봅시다. 어쩌면 우리는 신라 왕권 최절정기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하하 :)

 

 태종무열왕은 귀족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상대등의 역할을 축소▼ 시켜 버립니다. 귀족대표에게 중요한 자리나 임무는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대신에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집사부의 시중▲ 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그 곳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킵니다. 귀족들은 지금 난리 났습니다. 왕에게 잘못 대들었다가는, 깡그리 집안 다 말아먹게 생겼으니까요. 이런 추세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문무왕이 되면, 외사정 제도를 실시합니다. 각 지방으로 국가의 사정관(감시관)들을 보내면서, 혹시 지방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왕이 꾸준하게 보고 받는 셈입니다. 고대에는 지방의 장들이 비상 시에 군대를 이끌 수 있었지만, 통일 신라 같이 왕권이 매우 강화된 시대에서는 지방의 힘있는 사람들도 조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낌새라도 잘못 걸리면 완전히 끝난다니까요. 또한, 상수리 제도도 있어서, 지방의 주요 호족세력들은 본인이나 아들, 딸이 일정기간 중앙정부에 붙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지방의 유력자들이 감히 대들지 못했겠지요.

 

 신문왕 때가 되면, 정말 많은 것이 변합니다. 지방제도를 9주 5소경 으로 나누며, 판을 다시 짰을 뿐만 아니라, 김흠돌의 난을 빌미로, 자신을 반대하는 귀족세력들을 그야말로 숙청해 버립니다. 후덜덜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신문왕이 김흠돌의 난을 조작했을 수도 있다"고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조금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정치란, 명분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인데요. 전제왕권의 전성기를 달리던 신문왕은, 자신을 비난하던 귀족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싶었고,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 반대파 모두를 과감하게 숙청해 버린 것일 수 있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귀족들을 숙청했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을테니까요. 즉 신문왕은 많은 면에서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한 모습이 있습니다)

 

 통일 신라는 이처럼, 통일을 맞이해 처음에는 왕의 힘이 아주 강력한 국가였고, 귀족들은 몰락해 가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정치와 함께 가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경제력 이겠지요. (대들다가 피바람 불었듯이) 정치적 힘을 잃어버린 귀족은, 경제력에서도 맥없이 무너집니다.

 

 귀족들이 누릴 수 있던 막강한 경제제도인 녹읍 마저도 신문왕 때 장렬히 폐지 됩니다. 녹읍을 통해서, 읍을 다스리면서, 세금 뿐만 아니라, 노동력과 군사력까지도 획득할 수 있었는데, 이제 이런 귀족의 시대는 끝장난 셈입니다. 물론 귀족들이 가진 모든 것을 한 번에 빼앗으면 대규모 반란의 위험이 있겠지요. 그래서, 녹읍 대신에 국가는 관료전을 지급하면서, 단지 세금만 걷어갈 수 있게 제도가 바뀝니다. 이리하여 귀족들의 군사적 기반은 사라지게 됩니다. (통일신라 성덕왕 때에 이르면, 아예 국가가 정전이라고 해서, 농민들의 땅을 상당부분 인정해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중간 수탈 세력이었던 귀족의 존재감이 사라져 갑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사회의 모습까지도 변하지 않았을까요? 네, 맞습니다. 진골 귀족의 파워가 사라져 가고, 그 자리와 역할을 다른 모습으로 채워나가는 것이 변화라고도 하니까요. 확실히 사회는 변했습니다. 지난날 폐쇄적인 신분 사회에서 성골과 진골에 밀려나서, 제대로 사회에 진출하기 힘들었던 6두품. 이들이 새로운 통일신라의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귀족 대신에, 이제 설총 같은 학자가 왕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적 식견을 펼치기도 하고, 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6두품이 뜨는 시대 가 되었습니다.

 

 또한 신문왕은 국학을 설립 하면서, 유학 교육을 실시 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 입니다. 유학은 전통적으로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충성을 강조합니다.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배우면서, 왕의 권한을 정당화 시켜주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고보면 신문왕은 정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움직였습니다. 정치적인 정적을 쓸어버렸고, 귀족의 경제력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고, 6두품이라는 새로운 세력을 등용하기 시작했고, (일종의 세뇌식)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철저하게 굳혀나갑니다. 거물 군주가 어떻게 해서, 왕권을 하나씩 강화시켜 나가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통일신라의 내리막길은 다음 문서에서 살펴보고, 영감을 좀 생각해 봅시다.

 

 이름난 정치가들 중에는 역사나, 미술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미술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김정운 교수님은 최고자리에 있으면 아주 고독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홀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용히 그림을 바라보는 행동을 통해서 고독과 싸워나가지 않았을까요. 고독한 자리에 위축되는 순간 정치인은 끝날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처럼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나가는 "사실"들을 엄격하게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드웨어격인 제도를 뜯어고치면서, 동시에 소프트웨어격인 생각의 틀까지도 뜯어고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거물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기본적 소양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여 나갈 때, 그는 엄청난 지도자가 되거나, 혹은 타락한 독재자가 되거나, 그렇게 되어가는 셈이지요.

 

 누구를 쓸 것인가? 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려운 문제로 통합니다. 사람만 잘 쓰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이야기도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본다면,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가까운 세력을 함부로 쓰지 않고, 새로운 세력과 잘 연대하며,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굳혀나갈 때, 권한은 점점 강화되어 감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어떤 집단이라도 내부의 부패와 함께 몰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존의 고인 물로는 안 된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하게 새로운 가치를 내걸고,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결국 "역사의 주연"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도 앞으로의 시대를 주름 잡는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해 본다면, 색다른 지점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너무 미래로 멀리 왔나요. 단지 시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역사는 배울 수 있는 통찰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부딪히고, 겪어왔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도는 앞으로도 계속 바뀔테고, 기회주의는 계속 될테지만,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이야기 하며, 누군가는 올바른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들을 계속 찾아낼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