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신라의 발전과 중흥 - 늦바람은 강하고 무서운 법

시북(허지수) 2013. 3. 25. 18:33

 삼국시대에서 신라는 발전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었습니다. 초창기의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라고 보기 힘들며, 지배층도 박,석,김 3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다가 4세기에 들어와, 오랜 세월 집권하게 되는 내물왕 때 와서야,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마련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내물왕은 지배자의 칭호를 이사금에서 마립간(대족장이라는 뜻)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도록 하는 등 어느 정도 국가로서의 자리를 잡아나갑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신라가 자발적으로 정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국가는 좋든 싫든, 외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어있습니다. 신라는 4세기 말에 왜구의 침입으로 심하게 고생했고, 수도가 넘어갈 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신라는 다급하게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구하며, 고구려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세상에 절대 공짜란 없는 법입니다. 도움을 받았기에, 신라는 거의 고구려의 속국으로 추락하며,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구려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뼈아픈 시기였지요. 밑으로는 왜와 가야에게 시달려, 위로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아...

 

 미약했던 신라가 삼국시대를 끝내는 주인공이 될 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4~5세기, 200년 넘게 한반도의 주도권은 백제와 고구려가 피흘리며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신라는 결정적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그야말로 놀라웠습니다. 지도자의 결단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생각해 보기에도 좋습니다. 신라의 반전스토리를 천천히 따라가 봅시다.

 

 5세기 절대강자 고구려의 장수왕이 중원(충주)밑 까지 내려오자, 백제도, 신라도, 많은 지역을 빼앗기며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백제의 요청으로, 나.제 (백제와 신라) 동맹 이 맺어집니다. 신라는 6촌을 행정적 6부로 바꾸면서, 서서히 과거의 미약한 모습과 단절해 나가며, NEW신라의 깃발을 조금씩 다져나갑니다. 지증왕이 되자, 더 이상 과거의 신라는 없었습니다. 지증왕의 개편 을 살펴봅시다.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정합니다. 마립간에서 왕으로 명칭도 바뀝니다. 오래도록 내려왔던 순장제도도 과감히 폐지합니다. 우산국(울릉도)에도 진출해서 신라에 복속시킵니다. 경제적으로는 소농사인 우경을 실시하며, 발전을 도모합니다. 6세기 부터 신라의 발전은 눈부시게 빨라집니다. 왕의 명칭을 달고 시작하는 새로운 신라의 3명의 왕은 연달아 신라를 강국으로 만듭니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으로 이어지며, 신라는 판을 새로 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며, 골품제를 정비합니다. 이제 거의 중앙집권국이 된 것입니다.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빌미로 마침내 불교까지 공인 하며, 본격적인 내부 정비를 완전히 마칩니다. 536년이 되자, 건원 1년, 독자적 연호까지 내걸며, 새로운 신라의 패기 넘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병부를 설치하고, 가까운 금관가야를 정복하는 등 법흥왕은 신라가 발전할 수 있는 엄청난 발판을 세워놓습니다. 한편 가야를 정복할 때, 김해 김씨외에는, 가야귀족을 거의 다 몰락시켜 버렸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가야 출신 김해 김씨의 후손 김유신이, 나중에 신라의 장군으로서 역사의 중심으로 걸어나오는 것도 재밌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삼국시대 최강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 근초고왕과 비견대는 패기의 왕, 젊은 진흥왕 을 만나볼 시간입니다. 진흥왕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선대가 화려하게 키워놓은 이 새로운 신라를 여기에서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밀어붙이며, 신라를 한반도의 중심으로 세울 것인가. 진흥왕은 강한 신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불교교단을 정비하고, 화랑도를 국가조직 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를 치고 올라가며, 북쪽으로 강하게 진출합니다. 6세기, 오랜기간 튼튼하게 준비되었던, 위세 좋은 신라를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진흥왕은 삼국 역사에 손꼽히는 비범한 결단을 합니다.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며, 한강을 신라가 차지한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신라가 완전히 일어설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진흥왕은, 끝없이 영토를 늘려가면서,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듭니다. 1세기 이상 지속된 나제 동맹을 파탄 내며, 백제의 성왕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 시킵니다. 또한 지금의 함경도 지역까지 올라가며, 진흥왕순수비 를 세웁니다. 거의 한반도 최북단인 마운령비, 황초령비를 보면, 진흥왕의 패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래로는 남아있던 대가야를 정복하였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창녕비, 단양적성비를 세웁니다.

 

 특히 한강 유역의 북한산비 는 굉장한 의의가 있습니다. 신라는 마침내 중국과의 직접교류 가 가능한 위치까지 올라섰습니다. 말하자면 진흥왕이 있었기에, 이후 통일신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강을 점령하고, 여길 내주질 않아야, 신라가 더 이상 남에게 간섭받는 초라한 속국따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진흥왕은 굉장히 능수능란한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백제인들에게는 역적, 신라인들에게는 명군. 진흥왕은 그런 왕이었습니다. 한 번 제대로 자리 잡은 신라는 한강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당나라까지 끌어들이며, 훗날 통일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문서에서 또 살펴보도록 하고요.

 

 이제 시험대비용으로 간단히 3국의 통치시스템 중요한 부분만 짚고 넘어갑니다. 각 나라마다 귀족회의를 일단 알아둬야 겠고요. 고구려-제가회의,백제-정사암회의,신라-화백회의(만장일치제), 또한 특수행정구역이 있었다는 것도 출제경향 중 하나겠지요. 고구려3경, 백제22담로, 신라2소경(강릉,충주)이 있습니다. 한편 고대에는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방관을 파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쟁 시에는 지휘관이 되어서, 각 지방을 군사조직처럼 이끌었다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 입니다. 지금으로 친다면 지방관은 그 지역의 전투대장 정도 되는 상당히 영향력 강한 사람이라 하겠지요. 당연히 국가에서 신임할 수 있는 사람들 위주로 파견되었겠지요. - 여기서 끝 -

 

 여담 :: 나중에 7세기경 나-당 연합군 정도 오게 되면, 신라는 그딴식으로 통일을 해야 했느냐 라고 욕먹을 때가 있습니다. (외세를 함부로 쓴다는 건, 잘못된 점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당시 상당히 살벌했습니다. 고구려도-돌궐과 친선관계였고, 백제와 일본이 친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지요. 바꿔 말해, 한반도는 한 쪽이 스스로 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고향땅에 순수비를 세우는 등 당연히 신라가 마음에 안 들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힘을 모아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하자, 정작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와 힘을 모읍니다. 서로 손잡는 흥미진진한 소용돌이는 다음에 또 보고요.

 

 기회의 측면에서 신라는 대단히 영리했습니다. 속국처럼 혹은 평범하게 이대로 죽어사느냐, 그게 아니라면, 대국으로 나아가 이곳을 지배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진흥왕의 결단은 상당히 놀랍고도 무서운 수준이지요. 한강을 차지하고 있으면, 백제의 거센 압박이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감 있게, 마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고 말하는 듯한 그 패기. 한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나라 신라. 천년의 로마 처럼, 천년의 신라 역사가 있다면, 그 중에서 젊은 진흥왕은 단연 인상적입니다. 결국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오늘날 접대와 향락에 물든 대한민국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새 시대의 젊은 사람들을 언제나 응원하고 싶습니다. 출발은 늦었지만, 과거와 단절하는 용기는 누구보다 빨랐던, 신라는 결국 대세가 됩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모습들을 단절하고, 새롭고 적극적인 모습을 향해서 나아간다면, 인생 역시도 바뀌지 않을까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긍정하고,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본다면 좋겠습니다. 과거에 안주하고 있는데, 저절로 좋아졌더라, 식의 이야기는 "역사에서는 없는 일"이니까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