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대문화사 2 - 고대 불교의 핵심 원효와 의상

시북(허지수) 2013. 4. 4. 10:37

 7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가 되면서, 불교는 신앙 체계를 성립하면서, 이론적으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불교의 발달 입니다. 불교사의 출발이자, 한 획을 그은 인물로는 역시 "원효"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원효는 정말 굉장합니다. 이론가이면서도 실천가였고, 개혁가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파계승으로도 유명합니다. 옷도 대충 입고, 결혼도 하고,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추고... 보통 스님들이 정갈한 차림으로, 묵언을 행하기도 하고, 소탈한 느낌을 준다면, 원효는 해골물 사건으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엄청난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합니다.

 

 지난 문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교들이 초기에는 지배층의 소유와 논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어려운 초창기 불교와, 글자 중심의 불교 대신에, 정토종(아미타신앙)을 전파하며,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민중을 위한 불교로 다가갔습니다. 이 긴 이야기를 짧게 9글자로 요약하면,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 물론 짧게 암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본다면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조금 더 살펴보지요.

 

 원효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외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잠깐 불교 교리를 생각해 보면, 부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석가모니를 두고 현세불 이라고 말합니다. 현세의 부처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극락세계의 부처가 있으니 바로 아미타불 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아미타불은 "극락의 부처에게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극락으로 가는 길이, 나무 아미타불을 외치는 것이라니, 얼마나 민중들이 좋아했겠어요. 원효는 말하자면,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불교를 민중을 위해서 끌고 내려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멋지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저는 원효 이 사람 무슨 혁명가 느낌까지 들 정도 였습니다. 이론과 실천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참 근사합니다.)

 

 원효는 십문 화쟁론(화쟁사상)을 주장했는데, 싸움과 화합을 하나로 보는 특징적이고 놀라운 사상이기도 합니다. 보통은 종교는 이분법을 들고 나오는 편인데, 선을 쌓고, 대립적인 악을 멀리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를 들어, 추함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면, 원효는 결국 조화로운 것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셈인데, 상당히 심오합니다. 그러다보니, 부처와 중생도 구분하고 나누지 않습니다. 극단적 개념까지도 하나로 볼 수 있는 방법. 그 열가지 문이 십문 화쟁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한다는 원융회통사상도 원효의 주장입니다. 또한, 일심사상은 현실은 덧없고, 마음이 중요하므로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유명한 원효의 해골물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이라는 점. 지금 생각해봐도 아주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백성들이 종교에서 소외되고, 사찰이나 탑의 공역에 시달리던 시대에,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이루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갔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그의 말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 는 여전히 힘이 느껴집니다. 따뜻한 마음 없이, 기계적으로 살아간다면, 해골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 있다는 것은 "마음가짐"으로 증명되는거 아니겠어요. 해골 같은 삶을 던져 버리고, 내 마음은 "살아 있네~" 라고 외칠 수 있는 건강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렇게 본다면, 원효가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던 것도 살아 있음을 맘껏 누리는 대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원효의 절친 의상을 살펴봅시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주장하며, 화엄종을 발달 시킵니다. 의상은 일즉다 다즉일 에 대해서 말했는데, 말 그대로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은 곧 하나이다 라는 사상입니다. 많은 것을 하나로 본다는 것은 국가와 왕권을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통일신라가 되면서, 통합책을 추구하던 국가 입장에서는 딱 맞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렇듯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다 하나라는 이야기는 의상의 커다란 업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조화롭고 통일된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데, 불교는 커다란 역할 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도 언급해야 겠네요. 일종의 기행문으로서, 인도(천축국) 5국과 그 부근의 여러나라를 여행하고서 기록한 중요한 사료입니다. 이 사료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밝혀지게 되었는데, 혜초를 생각해본다면 이 역시 놀랍습니다. 8세기에, 자신의 한평생을 올인하면서, 걸어서 외국을 기행하는데 전부를 쏟아붇는 혜초의 인생. 생존 외에도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었다면, 이것은 질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눈앞의 일들만 급하게 하루 하루 처리하다가 인생을 모두 보낼 것인가? 아니면 진짜 마음에 담아두었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직접 이루어가면서 살 것인가? 남들이 거의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하고, 기록하는 혜초의 선구자적인 모습 역시도 인상적입니다.

 

 자, 이제 신라 하대의 불교 경 을 생각해 봅시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뒷받침 하던 교종(교리나 경전)이 중심이었는데, 신라 말기로 오면, 드디어 선종(실천, 수행)이 유행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세상에서 그 출발은 텍스트일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신라 하대 혼란기로 접어들면, 골품제의 모순과 진골간의 치열한 왕위다툼 등 행동의 모순이 자꾸 일어나니까, 경전이 잘 먹히지 않습니다. 지방에서는 다들 선종을 환영하게 되었고,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이, 지방 호족들에게는 그야말로 필이 딱 꽂히는 아주 멋진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왕즉불을 생각해 봅시다. 왕이 곧 부처라면, 내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면, 왕도 될 수 있지 않겠어요. 선종은 통일신라 무렵에 들어왔지만, 특히 신라 하대에 유행을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방 호족 세력과 손잡았다는 것도 중요하고요. (아, 덧붙여 신라 하대의 지방 호족하면 풍수지리설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풍수지리를 도입한, 도선은 심지어 신라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했는데, 결국 망한 것을 보면, 도선은 시대적 감각이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고대의 유교를 살펴보지요. 고구려에는 고등교육기관 태학이 있었고, 지방에 경당이 있어서 유학과 무술을 함께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남북국시대에는, 발해에 주자감, 신라에는 국학이 설치되기도 했고요. 인물 중에는 (원효 아들이기도 한) 설총은 공부를 많이 한 유학자였는데, 화왕계를 통해 왕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고대에는 나름대로 유교도 있었다는 점을 같이 염두해 둔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신라의 김대문은 자주적인 책들 (화랑세기, 한산기 등) 을 편찬합니다.

 

 신라 하대에는 6두품 출신의 유명한 학자가 있지요. 유학파 최치원! 글을 그렇게나 잘 썼다고 하는데, 신라에 돌아와서 국가 개혁을 논하는 시무책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시무책은 거부되지요. 이후 최치원은 실의에 빠져서 변방으로 내려갔다고 전해집니다. 여담으로, 부산 동백섬 일대를 "해운대"라고 부른 것도 최치원이라고 합니다. 최치원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경관! 여름에는 해운대의 동백섬을 보고, 달맞이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지요. 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곤란한가요. 하하. 다음 문서에서는 고대의 과학과 고분을 살펴봅시다.

 

 오늘의 영감을 떠올리면, 저는 역시 원효와 불교의 대중화 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두 가지의 선택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활용해서, 진입장벽을 세우는 것입니다. 남들이 못 들어오게, 시스템을 만들고, 누가 들어올 사다리를 걷어차버립니다. 여기 들어오려면 값비싼 대가를 내시오. 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진입장벽을 낮추고, 대중화 시키는 것"에 인생을 겁니다.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며, 그 방법을 끝없이 고민하고, 누구나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며, 어떻게든 힘없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조직의 흥망을 생각해 볼 때, "진입장벽"을 더 쌓거나, 혹은 더 낮추거나, 이 대목이 중요한 듯 합니다. 일부 사람만 볼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강력한 권력이 되고, 이것은 부패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왕권 입맛에 맞게 제공하던 교종이, 결국 민중의 마음를 잃어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어쩌면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 통찰일지도 모르겠네요. 소수의 특권을 밀어주고 진입장벽을 세워놓는다면, 그 끝은 필연적으로 부패와 붕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