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대문화사 4 - 건축과 탑, 고대의 멋을 찾아서.

시북(허지수) 2013. 4. 6. 21:01

 사람마다 멋에 대해서 가치관이 다르겠지요. 기준은 달라도 우리는 "멋진 사람"을 좋아하며, "멋진 것"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참, 제 경우에는 "멋진 시간"을 선호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노트를 옮기며, 생각을 정리해 보는 지금 시간도 요즘은 참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번 문서에서는 고대의 건축과 탑들을 천천히 즐겨봅시다. 외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순간부터, 어쩌면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바뀔 수 있습니다. "우와~" 하고 감탄하는 마음이 저는 좋습니다. 매사에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쿨한 태도는 호기심을 잃어버렸다는 슬픈 증거일 수도 있지요.

 

 자 건축부터 출발, 고구려에는 안학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요. (넓이가 약 38만 제곱미터. 둘레가 약 2.5km.) 여담으로, 위키에 따르면 터만 있음에도 북한의 국보2호가 안학궁이라고 하네요. 저는 통일이 되면 평양에 가서 한 번 이 터를 터벅터벅 걸어보고 싶습니다. 하하.

 

 백제에는 미륵사 가 있습니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는데, 과거에는 미륵사 건립 배경으로, 백제 서동 왕자(=무왕)와 신라 선화 공주가 결혼해서 미륵신앙을 담아 미륵사 절을 지었다고 했는데,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다가, 고대 기록이 발견됩니다! 이 결혼신화가 후세에 덧입혀진 "설"일 수도 있으며, 기록에 의한 진실은 백제 왕후가 건립을 발원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역사는 이처럼 후대의 발견에 의해서 수정될 수 있음을 한번쯤 생각해 보기에도 좋겠네요. 하기야 당시 적국(신라)의 공주와 결혼한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서 쉽게 일어나기 어려운 듯 합니다.)

 

 신라에는 황룡사 가 있었습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호국불교의 위용 을 나타내주는 엄청난 크기였으나, 훗날 고려시대 때 몽골에 의해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경주에 가보면 터만 남아 있는데, 9층 목탑은 지금 기술로도 만들기 쉽지 않을만큼, 엄청난 공을 들여서 만든, 60미터가 넘는 거대한 탑이었습니다. 아 몽골 미워요!

 

 통일신라는 세트로 함께 정리해두면 좋을텐데, 불국사와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까지 통일을 이룩하고 잘 나가던 신라의 느낌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덧붙여 통일 직후에 조성한 연못 안압지(=월지궁)도 같이 느껴봅시다. 음, 이번에는 과감(?)하게, 안압지는 위키피디아판 사진을 올려보겠습니다.

 

 

 복원된 안압지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인가요. 여유롭게 거닐면서, 국격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지 않나요. 봄날에 가족과 함께 유적지도 보고, 함께 대화도 나눈다면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975년 발굴되면서 유물만 3만점이 넘게 나왔고, 14면체 주사위도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주사위 각면에 술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 잔을 기울이며, 운치를 즐기는 귀족들의 연회장. 잘 나가던 시절 호화롭게 사는 귀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 참 그리고, 발해에는 주작대로가 있었습니다. 주작대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므로 참고해 두세요.

 

 이제 불상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고구려에는 금동불상(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이 있었고, 백제에는 절벽에 새긴 마애불, 백제의 미소로도 통하는 "서산마애삼존불" 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가 일품입니다! 신라에는 배리삼존불이 있었고요. 삼국시대불상들은 재밌게도 웃고 있는게 특징 이지요. 아무래도 불교를 알리는 목적에서, 초기에 제작된 불상들은 온화하고 웃는 모습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시대 공통적으로 유행하던 것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입니다. 이 역시도 그윽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가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참 인상적이게 보여줍니다.

 

 통일신라하면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 본존불"이 있습니다. 엄숙한 모습이 특징인데, 삼국시대 불상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또한 발해에는 이불병좌상이 있습니다. 자자, 서둘러 탑까지도 살펴봅시다. 탑의 층수는 지붕이 몇개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붕의 끝부분이 살짝 올라가면 백제계 탑이고, 지붕 밑면이 반듯하면 신라계니 참고합시다. 탑 하나를 건립해도 두 나라의 양식이 사실상 약간씩 다르다는 것도 재밌지요.

 

 백제는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대표적인 것이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 입니다. 부드러운 느낌과 여성미가 느껴진다고까지 하는데, 참 아름답습니다. 섬세한 백제의 멋이 사랑스럽다랄까요. (농담입니다만, 탄탄하고 네모반듯한 남성미 보다는 유려하고 기품있는 여성미가 저는 좋습니다. 뭐, 제가 남자니까 당연한 거겠지만요 -_-;;;)

 

 문화재는 그 시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 을 생각해 봅시다. 신라 왕권 절정기인 신문왕 때 세웠던 탑이니 만큼, 그 남성미가 장난 아닙니다. 크기도 크고, 박력도 느껴지고, 통일을 기념하는 느낌의 힘찬 기상을 맛볼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중기가 되면, 석가탑, 다보탑 처럼 안정감과 균형이 느껴지는 완성미의 탑들이 세워집니다. 10원짜리 혹시 있으면 한 번 살펴보세요. 다보탑의 창의적이고 통일적인 느낌은 신라멋의 최절정판 입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진전사지 3층 석탑 이 있는데, 탑신에 불상을 새겨넣은 특징이 있습니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있는 형태인데, 시험의 단골손님이니 꼭 한 번 찾아보고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 탑이 세워진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물었을 때, 통일신라 말기라고 감을 잡을 수 있다면, 아 그야말로 국사의 현자가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통일신라 말기에는 선종이 유행하였기에, (경전 보다는 스승을 기리는) 승탑이 유행 했고요, 발해에는 석등과 돌사자상 이 있었다. 라고 체크해 두면 완벽합니다. 음악은 그냥 상식을 겸해서 읽어두시면 되겠습니다. 고구려의 왕산악이 거문고의 대가였고, 신라의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습니다. 신라의 음악인으로 백결선생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역시 여담으로 덧붙이면, 백결선생은 너무 가난해서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었는데, 이 때문에 백결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거문고를 타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는데, 어느날 아내가 떡방아 소리를 부러워하자, 방아타령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낭만주의자. 선생은 후원을 거절하고, 궁색한 생활을 자처했으며, 청렴결백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줄 알았던, 백결선생의 멋이 참 근사합니다.

 

 고대문화사 정리를 마치며, 일본과의 관계가 간혹 문제로 나올 수 있으므로 몇 개만 정리해 봅시다. 시대적으로 삼국시대는 일본 아스카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남북국시대는 일본 하쿠호 문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담징은 호류사 금당벽화 로 유명합니다. 또한 혜자라는 인물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 수산리 고분벽화 가, 일본 다카마쓰 고분벽화와 유사하다는 것도, 두 나라의 왕래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백제와 왜가 가까운 사이 였음은 몇 번 언급했던 것 같습니다. 백제에서는 아직기, 왕인 등이 백제문화를 전달해 주었고, 천자문과 논어들이 전해집니다. 일본 고류사에 있는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백제에 있던 것과 거의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겼습니다. 호류사에는 또한 백제관음상이 있고, 더욱이 고대 일본에는 남백제촌 이라고 불리던 지역이 있었을만큼, 두 나라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어느 문화가 더 우월하다 식의 논리는 조금 피하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껏 우리가 한국사 공부를 해오면서 알 수 있었듯이, 한국의 고대사 역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즉 우리나라도 중국에서 흘러 들어온 문화를 우리 것으로 재창조 했던 것처럼, 일본 역시도 전파된 문화들을 일본 스타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특유의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문화적 상대주의를 생각하지 않고서, 왜는 미개한 ㅇㅇㅇ으로 비난한다면, 마찬가지의 논리로 발달했던 중국문화에 비해서 미개한 ㅇㅇㅇ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문화 역시도 인간과 유사해서, 출발 보다는 마무리와 재창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일 신라에서도 교류가 이어졌고, 승려 심상이 일본 화엄종 발달에 영향을 끼쳤고요, 강수와 설총의 유학이 일본 하쿠호 문화가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이 달달 외우기 보다는, 문화라는 것이 결국 서로 전해지는 것이구나, 또 수용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띄게 되는구나 라고 생각해 보는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 보면요.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2013년 4월 현재 재생수 15억을 넘어섰습니다. 한류라는 한국스타일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는데, 어떤 나라에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춤이 좋아서, 또 어떤 나라에서는 멜로디나 재밌는 퍼포먼스가 즐거워서 좋았던 것일 수 있습니다. 저마다 문화는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남스타일=말춤이 전부야" 라고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일 테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흥겨운데다가, 웃음이 나오는 코드가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저는 신나는 말춤은 멋지게 못 따라하겠습니다. 하하.

 

 오늘 영감은 조금 뜬금없지만(!) 고백으로 대신해 봅니다. 이제 다음 문서부터는 고려가 될 것입니다. 보통 중세로 부르는 역사들이지요. 제가 좋아하던 사람들은 보통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좋았습니다.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다 로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오늘의 모습을 경계해 보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제 기억의 역사선생님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때때로 참 엄격했었습니다. 또한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의가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는 저로서는, 아무리 닮아보고 싶어도, 좀처럼 닿기 어려운 경지였지요. 저는 허균같은 대인이 되는 것이 소원이지만, 현실에서는 늘 소인으로서 부족함 투성이로 살고 있음을, 다만 탓하고, 또 탓합니다 :) 저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부족한 모습도 조금씩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혹시 저처럼 자책스타일의 사람이 있다면, 때로는 약점을 인정하고, "그래도 괜찮아" 라며, 보듬는 지혜도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힘내시길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