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무신 → 권문세족으로 넘어가기 전에, 고려의 대외 관계를 정밀하게 이해한다면 좋을 것 같아서, 문서를 따로 준비했습니다. 호기로웠던 고려의 초반부를 느껴본다면 좋겠다는 측면도 있고요. 주변의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맞짱 뜨자면서 정면으로 붙는 경우가 있고, 평화롭게 가자며 외교적 협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굴욕적이더라도 외세의 강력함을 인정하고 사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재밌게도 고려는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가의 분위기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차근차근 고려를 침입한 주변 민족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조금 도식화 시켜서 간단히 요약하면 우선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초 호족이 주류일 때는, 거란이 쳐들어 옵니다. 10~11세기 거란은 무려 3차례에 걸쳐서 침입을 해오지요. 나라가 새로 개국하고 첫 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자주적이고, 패기도 있지 않겠어요. 거란과의 싸움에서 고려는 승전보를 날립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후 막장(?) 문벌귀족이 득세할 때는, 강력해진 여진(금나라/12세기)이 쳐들어오는데, 이 때 보수적 문벌귀족이 사대적인 태도로 전면전을 피한 것은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무신정변 후, 최씨정권이 들어선 13세기가 되면 난리가 납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절대강자 몽골이 쳐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징~ 징~ 징기스칸~ 장난 아닙니다. 또한, 이후 14세기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침입합니다. 고려사는 끊임없는 외부 압박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선조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선 거란과의 전쟁부터!
아아, 강국 거란! 3번이나 침입해 들어오는 거란!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힘있는 세력으로서, 중국 송나라까지 위협할 만큼 강했습니다. 자 잠시 거란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거란은 지금 송을 치고 싶은데, 뒤가 좀 으스스 합니다. 거란은 과감하게 송을 치러 갔다가 뒷치기를 당하며 망할 위험도 있습니다. 신흥 강국 고려가 딱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고려는 친송 정책을 펼치며, 송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더욱 불안합니다. 한마디로 고려가 눈엣가시 였습니다. 전쟁에서 보급과 후방의 중요성은 엄청납니다. 이걸 확보하지 않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란은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부터 손보기 위해 움직입니다.
거란, 그 첫 번째 침입은 서희가 막아냅니다. 무엇으로 막았을까요? 빛나는 외교로 막습니다. 서희는 거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간절히 원하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서희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송과의 관계를 끊을테니, 대신 우리 고구려땅 강동6주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안하며, 외교 담판 승부를 펼친 것입니다. 거란 소손녕 장군은 군대를 철수시키며,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줍니다. 서희는 전쟁도 피했으며, 국토도 확보했으며, 외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의 놀라운 명장면입니다. 이걸 우리 민족사에서만 본다면, 땅넘겨주고 속은(?) 거란이 바보 같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냉정히 본다면 전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단 어느 정도 안심한 거란은 잠시 뒤, 중국 송나라를 맹공하면서 조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문화와 경제가 발달하며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게 매년 비단 20만필, 은 10만냥씩 제공해야 했습니다. 거란은 이로써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넓게 본다면, 거란도 손해보는 외교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는 것, 외교의 힘입니다.
어쨌든 강국이 된 요나라(거란)는 가만히 고려를 보고 있는데, 약속이 좀 이상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여전히 교류하고 있고, 요나라와는 적극적 교류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명분만 노리고 있던 요나라는 1010년 강조의 변을 빌미로, 본격적인 고려와의 전쟁을 또 시작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강조의 변으로, 목종이 살해되면서 폐위되었는데, 명분은 "왜 너희 마음대로 폐위시키고 교류하지 않느냐" 였겠지요. 어차피 명분일 뿐이고, 강동6주를 다시 빼앗고, 송과의 단절을 제대로 해놓기 위한, 거센 압박에 가깝습니다. 요나라는 왕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침입해 들어옵니다. (제2차 고려-요 전쟁) 절대 쉽지가 않습니다. 초반에는 고려가 대패를 경험하며, 수도 개경까지 함락되고, 거의 벼랑 끝까지 내몰리면서 지독한 위기상황이 되고 맙니다. 이제 항복하자는 목소리까지 들려옵니다. 그러나 강감찬 같은 인물들은 할 수 있는 방법을 끝까지 찾아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복파 중신들에 강하게 반대하며, 왕실과 조정을 나주까지 피난시키며, 결정적인 한 수를 모색합니다.
이 때 대활약한 인물이 있으니 양규 입니다. 그는 포로가 된 수만명의 백성을 구해내며, 국경지대에서 결사항전을 이끌었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퇴로, 보급로 등의 후방 입니다. 지금 요나라가 깊숙히 개경(개성)까지 들어와 함락시켰다지만, 자칫하다 돌아갈 퇴로가 차단되고 보급이 중단된다면? 고려 땅에서 치명적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된 결사항전 앞에서, 피곤해진 요나라는 결국 물러가기로 합니다. 고려는 요나라를 철수시키기 위해, 사절을 보내 송과의 관계는 반드시 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간신히 고려는 회복할 수 있었고, 요나라 입장에서도 위험한 무리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고려가 쉽게 항복하지 않자, 부담스러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11년 정월, 왕실은 잠시 잃었던 수도 개경으로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생각할 수록 분합니다. 마침내 고려는 결단 합니다. 이렇게 지낼 수 없다. 강동 6주 반환을 거절해 버리고, 요나라와 단절해 버리고, 다시 송나라와 교류를 시작합니다. 고려는 이제 또 다시 요나라가 쳐들어 올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합니다. 철저한 준비 끝에, 1018년 발생한 제3차 고려-요 전쟁에서는, 고려가 만반의 태세로 전투에 임하며,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킵니다. 1019년 강감찬 장군이 이끈 귀주 대첩 입니다. 10만명의 요나라 대군 중, 겨우 수천명만이 살아서 도망갔고, 고려는 대 요나라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쟁에서 침략군이 이기기 위해서는 정말 강한 파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상대방을 압도할만큼의 힘이 있지 않다면, 침입해 쳐들어가 완벽히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요나라는 이번 전투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제압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현실적 판단이 섰습니다. 그러므로 이후 동북아시아는 고려, 송나라, 요나라 간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세 강대국이 어느 정도 비슷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고려의 대외 관계는 상당히 근사합니다. 자주의 힘도 있고요. 고려는 회복한 강동 6주 위에 천리장성을 쌓고, 수도 개경에 나성을 둘러놓습니다. 지난 날의 아픈 경험을 반성하며, 미리 대비해 놓는 셈입니다. 천리장성 축조의 의미는, 이제 거란 뿐만 아니라 성장하는 여진 세력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여기까지 참 좋았는데... 문벌귀족이 득세하고,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고려의 외교노선은 이래저래 변화를 맞이합니다. 생각보다 문서가 너무 길어져서, 이 이야기는 다음 문서에서 다루도록 할께요. 지금까지의 고려 대외 관계는 "항복은 없다" 였습니다만... 글쎄요. 하하. 상황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왜 그토록 문벌귀족의 외교노선 충돌(=서경 천도 운동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조금 느낄 수 있습니다.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고구려 → 고려의 기상이 잠들어 버린 것이 그 얼마나 비통한 일이겠어요. 어쨌든 대외 관계는 다음 2부 문서에서 계속...
오늘의 영감은 서희와 현실적 노선의 힘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준다, 그러면서 내가 필요한 것을 받는다." 우리나라가 이것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문닫고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 주변국들에게 주기만 하고, 빼앗기기만 한다면, 한마디로 주변국들 좋은 일만 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행위 입니다. 현명한 상황판단과 정확한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 이것을 능숙하게 이용해 국가를 지켜나갈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러한 외교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려가 1차 2차 침입을 위기 속에서 막아낸 결정적 한 수는 "대화를 통한 타협"이었습니다. 그리고 실력을 키워서 3차 침입 때는, 확실한 해결을 해버립니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해결책이 당장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막막합니다. 그럴 때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과의 대화, 누군가와의 대화가 실마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흐릿하게 내가 느끼고 있던 대안을, 좀 더 선명하게 알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제대로 준비하고 갖추어 나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저 한 걸음의 태도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 걸음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결정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일도 해가 뜨는데, 좋은 날도 오겠지? 아닙니다. 해는 확실히 매일 저절로 뜬다지만, 좋은 날은 노력해야만 맞이할 수 있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