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및 무신 정권 성립

시북(허지수) 2013. 4. 13. 23:54

 1135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고려 문벌 귀족이 지배층일 때,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 끝? 암기식 한줄 국사에서 벗어나서, "서경천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문서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심층 이해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우선 외부상황부터 볼까요. 당시 고려는 북쪽에서 아주 강력해진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운 시점입니다. 금나라는 쳐들어 와서 대놓고 고려에게 요구합니다. "너희들, 사대 하시오, 너희는 이제 신하 나라다, 알겠소?" 이 때 이자겸을 비롯한 보수파 귀족들은 OK 를 선언합니다. 사대하면서, 나만 배부르면 되지, 라고 생각했던 셈입니다. 현실적으로 강력해진 금나라와 싸웠다가는, 서로 피곤해 질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요.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백성들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을 막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이른바 수도 "개경파"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아까 봤지요.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다 결국 실패했고, 이자겸 파들이, 인종 독살시도 한답시고 궁궐을 불태워버렸고, 내부 사정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개경파들의 보수적이면서 사대적인 태도에 강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서경파"가 등장 합니다. 묘청, 정지상 등의 서경파 는 진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주적인 고려가 되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잠깐 서경파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지요.

 

 지금 개경 시대는 갔다, 궁궐은 불타고, 복이 다 사라졌으니,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 호연지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우리의 기상을 펼치자, 금나라가 쳐들어 와서 우리를 신하로 대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굴욕이냐! 우리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나라다. 금국을 정벌하고, 칭제건원을 하고, 황제의 나라를 칭할 때다! 인종을 모셔오고, 서경에서 새로운 고려를 시작하자! 요약하면, 서경파는, 자주적이며, 패기 넘칩니다. (금나라는 물론 강했으므로) 살짝 이상적인 느낌도 나지만, 어쨌든 그들 눈에는 개경의 문벌귀족들이 보여주는 꼴사나운 행태가 너무 싫었던 셈입니다.

 

 잠깐 생각해 봅시다.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습니까? 중국과 사대하던 나라였습니까? 글쎄요, 중국과 충돌하고, 때로는 피곤한 전쟁을 불사하면서, 대군과 맞서왔던 패기 넘치는 나라잖아요. 불편해도 싸워봐야 한다고, 고구려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서경파는 호기롭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종 입장에서도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타국에 사대하면서, 귀족들 입김에 벌벌 떨면서 산다면, 그게 좋을리 없잖아요.

 

 그러나, 비교적 안정화된 사회에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난이도였습니다. 수도 개경파의 거센 반발 이 일어납니다. 조목조목 현실적 근거를 따져가면서, 강한 금나라에게는 사대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자고 "인종"을 계속 설득했고, 괜히 싸우지 말고 편안하게(?) 가야 한다고 왕을 다독입니다. 기득권에 위험이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철학이었지요. 그래서 수도 개경파를 두고, "신라 같은 생각"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싸우지 말자, 외세를 인정하자 식이지요. 합리적 노선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개경파 핵심 인물로 김부식 이 있습니다.

 

 두 파 사이에 거의 피보는 전투가 일어났지만, 결국 1135년 김부식의 승리로 끝나면서,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 로 돌아갑니다. 결과적으로, 보수파 문벌 귀족 집단이 이긴 것입니다. 이걸 두고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런 평가를 덧붙입니다. "조선사연구초 중에서 - 조선역사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서경 천도 운동이었다.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나아갔을 텐데, 김부식이 이김으로서 조선사가 사대적, 속박적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얼마나 (역사적) 대사건인가."

 

 일제시대의 배경을 놓고 이해해본다면, 저항하지 않았던 개경파의 유교 사대주의를 신채호 선생은 맹비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오게 된 원인이, 바로 외세에 대한 굴복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셈입니다. 다만 신채호는 묘청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음을 함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채호는 이 서경 천도 운동 실패에 대해서 다만 누구보다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러면서 묘청의 행위로 인해 자주적 기개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거의 미쳐서 통분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서경파가 더 강하게 준비하지 못했기에, 싸움을 이겨내지 못했기에, 이후 유교와 사대문화가 득세하게 되는 비극을 보며, 분노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시간이 흘러, 훗날 조선은 사대교린정책을 기본으로 사용하며, 오래도록 사대주의를 보여줍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충분히 현실적 노선이기도 합니다. 최소한 강대국 앞에서, 보수적으로 나라를 보장받는다는 측면에서는 말이지요.) 여하튼, 청청한 독립운동가의 눈에 사대주의 근성이 "스스로가 망국을 자초한 혐오스러운 태도"로 보인 것은 당연합니다.

 

 한편 왜 실패했음에도 묘청의 난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묘청은 고려 왕조를 부정한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인종을 서경으로 모셔와 정권을 획득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서경 천도 운동 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뭐 어쨌든 역사적 현실은 김부식이 서경파를 일망타진해 버립니다.

 

 질문을 던져보기 좋은 주제입니다. 과연 고려는 이 무렵, 금나라에 사대하며 현실적인 외교노선으로 갔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전쟁을 불사하며 금국정벌, 칭제건원을 하는게 좋았을까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소심한 제가 한 가지 예를 써본다면, 전면전은 위험할 수 있으니, 수도를 옮기고, 국력을 재정비하면서, 때를 침착하게 기다리면서, 실력을 키워나가는게 좋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일종의 변형 고구려식이지요. 참~ 제가봐도 패기없어 보이는 답변이네요. 하하.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흘렀습니다. 고려의 큰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1170년입니다. 자, 어쨌든 수도의 문벌귀족들은 여전히 기세 등등합니다. 서경파를 쓸어버렸고, 탄탄한 유교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고, 문(文)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로 대우받습니다. 그러다보니 무신을 깔보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강국 금나라와 사대도 했고, 이로써 당분간 전쟁 위험도 없고, 군부의 입김 따위는 우스운 셈입니다. 무신들에게 대놓고 창피를 주기도 했는데, 꽤 처참합니다. 고위직 무신의 수염을 태우면서 놀리지 않나, 심지어 대장군의 뺨까지 때리며, 문신들의 위세, 아니 오만함이 계속 됩니다. 너무 권력이 높다보면, 제어조차 안 되는 정신 나간 문신들이 계속해서 득세할 그 무렵...

 

 안고가던 모순은 시한폭탄 처럼 드디어 터집니다. 차별받는 무신들이 일어나면서, 문벌귀족 사회에 종말을 때려버립니다. 무신이 쿠테타를 일으키며, 많은 문신과 환관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해 버립니다. 오만한 문벌귀족 특권사회는 잘난 맛에 빠져 있다가, 잔인한 현실을 만나게 된 셈입니다. 왕은 바로 폐위되었고, 이름뿐인 명종이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당연히 실세는 무신의 우두머리 였지요. 역사는 꽤 다이나믹합니다. 칼로 이기면 꼭 칼로 망하기 마련입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 그것이 존경받고 좋은 모습이 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새로 들어선 100년간의 무신 정권은 혼란기 속에서 진행되는데 여러번 우두머리가 바뀌면서, 정신 없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굳이 써둔다면,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순으로...)

 

 더 슬픈 것은, 차별받던 무신들이 최고 권력집단이 되자, 이들은 자신의 뱃속부터 채우기 바빴습니다. 경제적 수탈은 문벌귀족 못지 않게 장난 아니었고, 쿠테타로 정권을 잡다보니, 신분의 위협을 느끼는 일이 많게 되자, 도방을 설치해서 경호팀을 꾸립니다. 사조직 친위대의 등장이지요. 이러다보니 무신정권에게 함부로 대들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그야말로 살벌합니다. 어쨌든 국가는 운영해 나가야 했으니, 정치는 무신들 회의기구 중방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나갔고, 무신정권의 아이콘 최충헌 시대가 되면, 정책결정 비상기구인 교정도감을 설치 해서, 입맛대로 정치를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60년 최씨 정권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정방으로 인사권까지 장악했으니, 모든게 최모씨 맘대로 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만약 당시 뉴스 같은게 있었으면 매일 시작부터 방송 되었을 겁니다. 땡,최충헌님께서 오늘... 땡,최충헌님께서 오늘... 9시 땡최충헌 뉘우스~)

 

 혼란기에 서로 제거해 버리는 위험성이 크다보니 사설 경호집단 도방이 등장했고, 나중에 최씨 정권 후기에는 아예 도적잡는 조직 이별초가 점점 커져서 삼별초가 되어갑니다. 국가의 돈으로 개인 친위대를 완성 한 셈이지요. (무인만으로는 정치가 조금 벅찼을까요.) 사회면에서는 서방제도를 통해서 문인을 등용하기도 합니다. (재밌게도 이렇게 서방을 통해서 등용된 새로운 문인 인재들이 훗날 신진사대부로 성장하며 활약해 나갑니다.) 어쨌든 자신들끼리 잘해먹다가, 이번에는 강국 몽골이 침입해 들어옵니다. 바야흐로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이 펼쳐지면서, 지배층의 판국은 확 바뀌게 되는데...

 

 지금까지 문벌귀족 → 무신정권 → 권문세족(친원파) 의 고려 중반 변천사를 돋보기로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다음 문서에서 대외 관계의 모습들과 대몽항쟁 등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두세줄로 요약하면 간단합니다. 이자겸의 난에 이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도 일어났다. 그러나 실패했다. 문벌귀족은 무신들을 마구 무시하다가 무신들의 쿠테타로 인해 격변을 맞이한다. (=1170년 무신정변) 자, 과연 이후 무신정권(최씨정권)은 원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다음 문서에서 계속!

 

 오늘의 영감 - 정리하기가 어느 때보다 피곤했던 기분입니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승자위주로 기록되는 편인데, 그렇다고 패자의 시선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읽고 생각해 볼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놓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균형을 추구한다면, 한쪽을 파렴치한 악당으로 만들지 않는게 필요하겠지요. 제 욕심일 수 있으나, 왼쪽을 배려하는 보수주의자, 오른쪽을 이해하는 진보주의자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극우와 극좌는 친구처럼 가까울 수 있다고 말하던 신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남을 비판하기란 쉽다고 누군가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적인 생각과, 새로운 생각들 입니다.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실현가능한 미래를 이루어 나가는 것, 고통스럽더라도 그렇게 걸어나가야 좀 더 나은 세상이 오는 듯 합니다. 허황된 747 비행기 보다는, 현실부터 봤으면 좋겠습니다. 2013년 1월, 20대 취업자수는 30년만에 최소숫자를 찍었습니다. 지금의 20대들은 인간대우를 받기 힘든 열악한 일자리가 싫다며, 대학 들어 가자마자 각종 자격증과 고시에 몰두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그러니까요. 저는 이 색다른(?) 뉴스를 보게될 날을 꿈꿉니다. "드디어 양극화 현상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드디어 자살률이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역대 최고의 청년 투표율입니다" 이런 날이 오게끔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적어도 지금 시대 청년들은 참 가혹한 세상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특권층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며 탐욕을 드러낸다면, 꼭 귀족들의 행태 같아서 어쩐지 씁쓸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네요. 오만한 태도와 달콤한 거짓말은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 오늘의 아픈 생각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