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이대로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적극적인 반원, 반권문세족 을 내세우면서, 개혁을 시작 합니다. 기득권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역사에서 한 번도 이 싸움이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외부의 원나라, 내부의 권문세족을 이겨내야 하니, 그야말로 정치적 전쟁 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원나라가 주춤할 때야 말로, 일어설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제까지 준식민지로 살 겁니까. 힘은 올바르게 쓰라고 있는 법이지요.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공민왕은 철령 위쪽에 있는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았고, 요동을 공략하면서 영토를 회복 합니다. 안으로는 원나라 내정간섭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시켜 버립니다. 원과의 연결고리는 다 끊겠다는 결연한 의지 는 계속됩니다. 몽골풍으로 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관제도 원래대로 돌려놓습니다. 일사천리로 개혁은 진행되었고, 신돈이라는 승려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공민왕의 오른팔 격인 "신진 사대부" 세력들도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줍니다.
친원파들은 이제 죽어납니다. 핵심 권문세족 기철은 숙청되었고, 그들이 휘두르던 정방도 폐지 됩니다. 이제 경제문제만 해결한다면, 고려는 국가적 위기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지요. 시험에도 단골로 나오는 기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서, 경제개혁에도 돌입합니다. 덧붙여, 신돈이 맡았다고 합니다. 이 도감(임시기구)이 했던 역할은 선명했습니다. 불법적인 대농장에 강력한 철퇴를 날리며, 백성들에게 땅을 되돌려 줍니다. 대지주가 아무렇게나 빼앗았던 토지와 노비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고, 비참하게 노비로 몰락했다가 양민으로 해방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자리만 잡는다면, 국가재정도 더 튼튼해 질 수 있었겠지요.
이 전민변정도감 대목은 고려 광종의 노비안검법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왕권 강화, 국가재정 확보 입니다. 이제 대지주들이 무법천지로 활동하는게 불가능해 졌고,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회복되어, 국가에 일정한 세금을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기득권이 쉽게 당하거나, 쉽게 쓰러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권문세족의 극렬한 반발 속에 신돈은 제거되었고, 수년 후 공민왕마저 불과 44살의 나이로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공민왕은 집권 후반기에 사랑하는 왕비를 잃고, 핵심 측근 신돈도 죽고서, 이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정신줄을 놓았다고 전해집니다. 좀 냉정하게 접근하면, 일반적으로 망국의 군주들은 나쁜 이미지로 물들어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혁군주가 설마 그 정도까지 몰락했을까 싶긴 합니다. (즉 폭정을 일삼아서 고려 말기 우리가 뒤엎었다 라고, 후대에서 역성혁명을 합리화 시킨건 아닐까 같은 시각도 필요합니다.)
참, 어떤 학생이 공민왕 최측근 신돈이, 왜 죽임을 당했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권력관계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인자와 2인자의 관계는 생각보다 팽팽할 때가 있습니다. 최고 권력자는 내심 2인자를 경계할 때가 많습니다. 삼국지의 조조가문과 사마의가문이 펼치는 역전극이나, 로마의 카이사르와 브루투스가 보여주는 측근 사이의 균열 문제는, 역사에서 흔한 일이었습니다. 당장 고려만 해도 무신정권이 암살로 막을 내리게 되었고요. 아주 쉽게 본다면, 2인자의 권한이 커지기 시작하면, 왕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신돈은 떠돌이 승려 출신이다보니, 반대파들의 거센 모함에, 왕의 마음이 흔들릴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한 사람이 이상한 헛소리를 하면 그냥 넘어가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돈 수상한데? 라고 떠들면, 인간의 판단력은 흐릿해 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활용해서 요즘도 여론과 평론 조작 기술이...)
확실한 것은 하층민들은 신분 차별 없이 사람을 대하는 신돈을 좋아했고, 사료에서는 나라를 망친 요승 이라고까지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지요? 이렇듯 신돈은 할 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러다보니 공민왕이 죽은 왕비의 묘를 크게 지으려고 할 때, 신돈은 백성을 위한 길이 아니라며 반대합니다. 인기가 높고, 권한이 많았던 신돈이, 공민왕의 눈에 점점 부담으로 느껴졌을 테고, 공민왕은 신돈을 끝내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너무 바른말을 했다가, 미움 받기도 쉽다는 것은, 정치가 가지는 슬픈 대목입니다.
여담으로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 (=원나라의 공주) 는 정말 사랑이 깊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특히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를 배척하는 공민왕을 도우며, 고국을 냉정히 배반하는데, 이 모습은 소설이나 영화로 아름답게 그려진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망해가는 나라 보다는, 자신을 아껴주는 공민왕을 더 소중히 대하는 것이 인간 마음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 너무 낭만적 시각인가요. 전적으로 여담입니다 :) 사람을 짓밟는 고국과 사람을 존중하는 타국이 있다면, 후자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어쨌든 공민왕의 개혁은 암살과 함께 실패로 끝났고, 기득권에 대한 균열 정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의 성장이 단연 돋보였지요. 부패한 대지주 권문세족을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신진사대부들은 훗날 조선 건국의 주체 세력이 되어갑니다. 지금으로 친다면, 잘 배운 중산층들이 들고 일어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꾸만 막나가는 권문세족이 농장을 확대해 가니까, 비판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후, 인기 높은 신흥무인세력과 손을 잡고, 역사를 움직여 나갑니다. 무인들 중에는 조선 태조가 되는 이성계도 있었고요. 이제 어떻게 되느냐~!
원나라가 힘을 잃어가면서, 중국은 이제 원-명 교체기가 되었고, 최영 장군의 건의로 고려의 무인들은 요동정벌을 떠나게 됩니다. 그 대표적 실력자가 이성계 였는데, 압록강 하류의 작은 섬 위화도에서 전격적으로 군대를 돌리면서, 최영 장군에 불복종 합니다. 위화도 회군과 함께 쿠테타의 시작이지요. 역성 혁명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또 조선 건국을 보면서 더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개경으로 되돌아와 정치를 장악한 이성계 세력과 신진사대부는 이후, 과전법을 시행하면서, 경제적 실권까지 장악합니다. 올바른 룰(규칙)은 중요하지요. 권문세족은 마침내 박살났고, 1392년 조선시대가 막을 엽니다. 다이나믹한 고려 정치사는 이제 마무리 되었고, 다음 문서에서는 고려의 경제 생활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영감 - 오늘은 짧게! 바른 말을 하면 왜 미움을 받나요? 라고 물을 수 있겠지요. 바른 말은 반드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좋은 지도자는 "불편한 말들을 얼마나 잘 듣고 실천할 수 있느냐" 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신돈이 죽고, 공민왕이 죽고, 다시금 권문세족이 10살짜리 우왕을 내세우면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자, 더 이상 고려는 없었습니다. 국가가 휘청대며, 망하기 직전까지도, 나만큼은 탐욕을 채워야 겠다는 친원파의 심리는 처절할 정도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면서 옷을 단정하게 입듯이, 우리에게도 역사적 거울이 필요하고, 거울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가 잘못되어 있구나 라고 알려주는 직언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꼭 필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컨대, 기장이 판단을 실수했을 때, 부기장 마저 얼떨결에 침묵하고 있다면, 비행기는 추락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잘못된 일들과 정책에 대하여, 분명하게 투표하지 않는다면, 거울이 사라져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로 가득찰 것입니다. 나쁜 놈들과 이상한 놈들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바꿔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공민왕은 실패했지만, 신진사대부는 결국 길을 찾아, 훗날 친원파 권문세족을 쓸어냅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축적된 부를 뿌리 뽑는 것. 역사가 반복된다면, 당연히 우리도 노력하여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