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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스타열전

#71 브라질의 의사 축구스타 - 소크라테스

친절한 시북(허지수) 2020. 6. 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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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이니, 블로그 초창기에 썼던 글인데, 여전히 축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어서... 게다가 동영상 시대니까요. 손을 약간 대서 업데이트를 해야겠다 싶습니다. 브라질 레전드 이야기 입니다. 후후.

 

 소크라테스? 그리스의 철학자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축구계에도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있으니, 바로 브라질의 슈퍼스타 소크라테스 선수입니다. 의사이기도 한 이 재밌는 축구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프로필

 

 이름 : 본명 Sócrates Brasileiro Sampaio de Souza Vieira de Oliveira
 생년월일 : 1954년 2월 19일
 신장/체중 : 192cm / 79kg
 포지션 : MF
 국적 : 브라질
 국가대표 : 63시합 25득점
 수상 : 1983년 남미최우수선수상 수상
 
 축구스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브라질에는 "황금의 4중주"(혹은 황금의 중원, 황금의 4인방등)로 불리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등장한 브라질의 최강의 미드필더진을 보고 모두가 부러워 하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네 선수가 당연히 등장하는데, 네 명 모두가 세계최고수준의 미드필더 였습니다. 유행했었던 바르샤의 판타스틱4 와 비슷한 느낌이군요. 여하튼 이 때의 멤버가 바로 지코, 팔카우(팔카오), 소크라테스, 토니뇨 세레조 이렇게 4 명입니다. 이들은 황금의 4중주를 연주하면서 브라질 축구를 이끌어 갑니다. 높은 공격력, 화려한 테크닉을 겸비하고 있어서 보는 이들마다 브라질 축구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어버렸습니다. 아르헨티나도 3-1로 완파해버립니다. 이 때의 브라질 팀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응원을 받았으나 아쉽게 82년 월드컵 우승팀이 되는 이탈리아에게 2-3 으로 패하고 맙니다. (이태리 전설 파올로 로시가 헤트트릭을 기록했던 유명한 경기지요.)

 

 소크라테스는 이 황금의 미드필더진의 멤버였습니다. 오른발을 사용한 정확한 인사이드킥을 잘 찼으며, 특히 힐킥은 정말 뛰어났습니다. 한편 PK를 독특하게 차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축구 선수 현역 시절에 의사면허를 땄으며 별명도 의사였다고 합니다. 그 지성(知性)을 축구에도 잘 접목시켜서, 선수시절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브라질 선수로는 드문 편인 190cm가 넘는 장신이면서도, 테크닉이 뛰어났고, 82년 월드컵 출장시에는 주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창조성이 넘치는 패스와 다이나믹한 드리블을 구사했던 소크라테스가, 콤비인 지코와 함께 공격을 해올 때면, 상대 수비수들은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습니다. 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명성이 높았던 1983년에 남미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82년에는 지코가 수상했지요.) 소크라테스의 드리블을 보면서 농구선수를 했어도 대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농담 섞인 찬사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독특한 외모, 특이한 PK, 황금 미드필더진의 캡틴, 게다가 의사인 선수, 이러한 각각의 요소들이 시너지효과를 낳으며 소크라테스는 현역 시절에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던 스타선수입니다. 의대생이던 19살 때, 명문팀에 입단했는데 입단 할 때부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해외에서 오퍼도 많이 와서 세리에 A 의 피오렌티나에서 한 시즌을 뛰기도 했었습니다.(25시합 7득점) 지코와의 콤비플레이도 유명하고요. 비록 그는 월드컵이라는 메이저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에 마음 속에 깊이 남는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치던 훌륭한 캡틴이었습니다. 1986년 월드컵에도 참가하지만, 당시 떠오르던 잘나가던 강호 프랑스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브라질은 패배하고 맙니다. 승부차기에서 명성이 높던 소크라테스는 1번키커로 나와서 불운하게도 실축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네요. 뭐, 커리어가 꼭 완벽으로 물들어져 있을 필요는 없다고 업데이트 하며 요즘은 생각합니다.

 

 한편, 1980년대 브라질은 군사정권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민주화에도 열심이었습니다. 피오렌티나에 이적하기 직전에 몇 십만명의 사람 앞에서 자유선거를 해야 한다고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은 1989년 자유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지요. 소크라테스는 현재 의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치 쪽에도 관심을 꾸준히 가지고 있어서 노동당의 일원으로 국회의원 선거도 참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술도 좋아하고, 대단한 애연가이기도 합니다.

 

 여담으로 소크라테스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었다고 하네요. 아버지도 의사입니다. 프로축구선수로 뛴다고 할 때,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비록 축구선수로 뛰어도 의사가 되겠다고 말을 하면서 프로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막내동생도 축구선수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고 하니, 몸과 마음이 출중한 집안인 듯 합니다. (웃음) 내용이 부족해서 조금 더 보강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 황금의 4중주 이야기 계속해서 준비해 보겠습니다!

 

 2008. 03. 13. 초안작성.

 2020. 06. 09. 가독성 보완 및 동영상 업데이트 - 축구팬 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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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바셋 이름 한번 기내.. 의사 외에도 철학박사 학위도 있다는군요. 제작년인가.. 잉글랜드 하부리그 어딘가와 계약하고 이벤트성 현역복귀를한 적도 있었습니다. 현역시절부터 헤비스모커로도 유명했지요. 유럽에서는 왜 적응을 못했나 의문입니다. 금연구역이 많아서? 2008.03.09 17:16
  • 프로필사진 친절한 시북(허지수) 헉 철학박사까지, 정말 엘리트두뇌군요. 유럽에서 뛸 때,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지코가 불러서 지코와 같은 팀에서 뛰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고향에서 좋아하는 선수들과 같은 팀, 같은 리그에서 뛰고 싶었던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피오렌티나에서도 성적만으로 본다면 충분히 괜찮았으니까요. 2008.03.10 10:58 신고
  • 프로필사진 peter 지코.팔카오와 더불어 '골든트라이앵글'로 유명했죠(세레조 포함할땐 황금4중주) 중1땐인 82년 월드컵은 잊지못합니다. 그깨부터 지금까지 브라질팬으로 자처하죠. 24개팀이 처음 출전한 대회이고 예선 후 12강이 3개팀 4개조로 나눠 각조 1위팀이 4강에올라 토너머트하던 독특한 대회..86년부터 지금이 토너먼트방식.예선32강은90년부터고요. 지코는 이태리 우디네세에서 잠깐 뛰고 브라질리그 플라맹고로 돌아옵니다. 그시절은 남미 축구가 경제적이유로 유럽으로 물밀듯이 가던 시절이 아닙니다.브라질.아르헨티나도 군사정권시절이고요. 82년월드컵전 아르헨과 영국이 벌인 포틀랜드전쟁때문에 한동안 영국과 아르헨은 앙숙입니다. 86년 마라도나의 원맨쇼경기때도 포틀랜드전을 떠올리며 경기했습니다.. 86년까지가 남미스타일 유럽스타일로 구분하던 시기라 봅니다. 80년대 말부터 토털압박축구로 인해 구분이 모호해지고,남미의 경제난으로 인해 대거 유럽으로 건너가다보니 비슷해지는 축구스타일로 변모...예전 유럽선수들은 베컴처럼 바나나킥으로 프리킥을 볼수 없었습니다. 남미선수들이 기술적으로 차는것을 보고 저또한 반했으니깐요. 분대스리가경기를 많이 중계하던 80년대초 전혀그런걸 볼수가없었어요.빨랫줄같은 대포알슛뿐..물론 남미선수도 없었고... 2008.03.12 23:46
  • 프로필사진 믹키 예선 32강은 98월드컵 부터 아닌가요^^; 2008.05.06 00:55
  • 프로필사진 친절한 시북(허지수) peter님 소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확실히 82년 월드컵의 마법팀이 바로 이 브라질 팀이 아니었나 합니다. 우승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웃음) 2008.03.13 08:50 신고
  • 프로필사진 바셋 피터님
    80년대 초는 남미선수들이 대거 유럽에 진출하던 시기가 맞습니다.
    남미독재와 선수들의 해외진출은 아무 연관이 없으며 포틀랜드전쟁은 더더욱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피엘을 염두하신 말 같은데 당시 이페엘은 남미가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선수에게도 매력이 없던 리그였습니다. 85년부터는 아예 유럽리그로 치지도 않았지요.
    남미선수들의 유럽 진출요인은 경제적 부분에서 찾아야합니다. 70년대 라리가가 남미선수들의 장이된 것은 언어적 요인도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스페인만 경기가 좋앗던 이유가 큽니다. 70년대말 부터 남미 경기는 사실장 아작납니다. 그런데 당장 몰려들지 못한 이유는 당시는 해외정보를 얻기가 힘들던 시기였기에 설명가능합니다. 정확한 검증없이 머나먼 남미의 선수를 데려다 쓸 클럽은 없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선수 검증의 장인 82월드컵 즈음해 주요 남미선수들은 물밀듯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세레조도 82년 이후 10여년을 세리에에서 보냈고, 팔카오도 6년을 있었습니다. 지코가 '잠시 유럽에 있었다'? 4년을 지냈습니다.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의 이력이 특이한 것입니다.
    80년대 이미 유럽은 개인기 위주의 선수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조직력과 수비를 강조하다보니 눈에 덜 띈것 뿐입니다. 바나나킥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걸 울나라에서 첨 선보인 것은 유럽의 벤피카였습니다. 1970년이지요.
    프리킥을 감는지 안감는지는 기술축구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80년대 독일에서도 근거리에서는 왠만하면 감아찾습니다.
    드레그백(이것도 유럽에서 먼저 나옴)이니 뭐니 하는 등등의 개인기술을 대개 축구용품의 진화에따라 같이 발전해왔습니다. 선수개인의 능력이나 대륙별 스타일과는 거의 무관합니다.
    넘 길었습니다^^
    2008.03.13 12:00
  • 프로필사진 친절한 시북(허지수) 에... ^^; 뭐 사람마다 견해가 다른 게 당연합니다만. 방금까지 틈틈히 팔카오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별명이 무려 로마의 왕이 더군요. 그만큼 유럽에서 성공한 대스타기도 하지요. 황금4중주라 부르는 것도, 네 선수 모두 정말 훌륭한 플레이와 활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저도 개인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왜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왔는지 의문이긴 합니다. 다만 그가 돌아왔던 팀이 당시 단짝 지코가 있던 플라멩고 팀이었고, 또 하나의 이야기로는 수비적 축구를 강조하는 압박적인 이탈리아 세리에 스타일이 별로 자신의 마음에 안 맞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달리 브라질은 압박보다는 템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한결 소크라테스가 스타일에도 맞으면서 편하게 뛸 수 있는 무대로 옮긴게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팀스타일이 안 맞아서 팀을 옮긴거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도 길었네요 ^^; 그냥 잡설입니다. 2008.03.13 12:34 신고
  • 프로필사진 케파 물론 80년대초 AS로마의 팔카오는 유명했죠... 마라도나의 바르셀로나행도 유명했고요... 그렇지만, 90년대 만큼은 아닙니다. 당시 EPL 경기는 KBS에서 종종 했지만, 정말 재미없는 킥앤러시의 단순한 경기.. 분데스리가는 차범근선수로 인해 MBC가 일요일 아침마다 중계해 줬죠.. 프랑크푸르트시절의 시절의 경기를 많이 해줬습니다. 초기라서 더 그런거 같습니다... 우승을 놓고는 루메니게의 바이에른 뮌헨과 함부르크SV가 경쟁하였던 시기입니다. 당시 최고의 리그이기도 했고요.. 세리아A나 프리메라리가는 당시 유럽은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그다지 관심도 없었죠...지금처럼 인터넷이나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던 시기가 아닙니다.. 포루투갈이나 스페인,이태리등 라틴 유럽은 남미 선수들이 활약했으나, 분명 90년대와 같진 않았습니다..80년대엔 남미 명문팀들의 내한도 활발히 이뤄지던 시기였고,도요타컵만 봐도 80년대 중반까지 거의 압도적 남미 우세이고, 유명선수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88년이후 세계축구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축구 전문가들도 90년대들어 유럽리그에 대거 등장하면서 구분이 없어졌다는 말을 분명히 합니다...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여 접목하는... 위의 소크라테스가 세리에A가 맞않았다고 한말은 실제론 월드컵에서 이태리전 끝나고 한 유명한 말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우리와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고 힘든 경기였음을 인터뷰했죠. 사실 그경기를 아침뉴스에서 접하고 녹화중계(우리나라가 진출 못했었기에..)를 보며 경기내용에선 이긴경기였으나,역시 세레조보단 좀더 수비적이던 바티스타의 공백을 느끼게한.. 두번째골을 빼았긴건 세레조의 패스미스(중앙쪽으로 패스한건 정말 그답지 않은...) 그리고 역대 세계 최고의 골기퍼로 선정된 디노조프의 신들린듯한 선방등 (솔직히 이게 더 결정적...브라질 골기퍼하고는 너무 비교) 또 안타까웠던 황금 미드필더진을 빛내줄 기대주 카레카의 대회 전 부상으로 인한 출전치 못한건 너무 안타까운... 당시 영국 도박사들의 11대10의 우승확률을 얘기하듯 정말 세계 최고였고 2차리그 이태리전까지 26게임 무패가도를 달렸고, 81~82년 아르헨과의 전적도 6승2무로 앞서있었으며 2차리그에서도 3대1로 이기며 승승장구했던..(먼저 경기한 이태리가 휴식기가 더 길었다는 장점이 있었다죠..) 81년 유럽투어를 방송서 특집 녹화중계를 해줘서 당시 세계최고인줄 알던 서독을 두번이나 이겼을땐 충격이었고 그때부터 팬이 되버린... 가장 가슴에 남던 대회이자 멤버로 보입니다... 수비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지극히 브라질다운 공격축구를 해서 94년 월드컵우승때보다 더 환영받았고 당시 '미래 지향적 21세기축구'라고 찬사 받았던 내마음속에 최고의 팀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009.06.24 10:03
  • 프로필사진 케파 참조는 네이버 디지탈 뉴스 아카이브에서 동아일보 1982년 6월 23일자와 6월 25일자 9면을 참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라 정확한 자료가 필요해서... 2009.06.24 10:06
  • 프로필사진 인자기쵝오 저사람은 못생기고 의사지만...인자기는 뭐 늙었지만 잘생겼든데..인자기는 공인회계사 ... 2010.06.20 22:09
  • 프로필사진 친절한 시북(허지수) 하하, 요즘은 외모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과인 처럼 생겨야지, 테베즈 처럼 생기면... 팬수가 달라지는 듯 ^^ (특히 여성팬!) 2010.06.20 22:1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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