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4월21일/우물가의 여인(요한복음4: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4. 22. 18:0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4월 21일 주일 예배

우물가의 여인 (요한4:1-)

요즘 사람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 진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물질중심의 가치관이 너무 강하고 이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아무런 정신적인 지주라는게 없습니다.
종교인들은 이미 부패했고 학교도 언론도 이미 사회로부터 무시를 넘어서 멸시의 대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급격한 물질주의 배금주의 가치관을 제어하고 무너진 사람들의 가슴을 채워줄 정신적 가치를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교가 무너진 이 땅에 기독교적인 가치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땅에서 채 꽃피우기도 전에 시들기 시작해버렸습니다. 오죽하면 이미 말라 비틀어져서 그루터기만 남은 불교에서 다시 가지가 뻗어 나고 잎이 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가 ‘오죽하면’ 이라고 한 이유는 불교는 마음의 안식을 주지만 그뿐 현상을 바꾸는 힘은 없습니다. 원래 불교는 마음을 비우는 인도철학에서 유래했고 스스로 ‘깨닫는자’ 라는 부처의 경지를 최고로 칩니다. 한마디로 신과 기적이 없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에 가깝습니다.
물론 불교가 후대로 오면서 부처가 아닌 보살들이 강조되고 신이와 이적이 강조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철학적 전통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위치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낮은 위치에서 주님을 만나는 건 뭘까요?
바로 나 자신을 주님앞에 그래도 내어놓고 만나는 것이지요. 나를 덧칠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무슨 무슨 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죄인되어 추악한 나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민낯’이라는 의미의 ‘쌩얼’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우리가 화장을 왜 합니까? 얼굴의 잡티와 주름, 그리고 피부 트러블 같은걸 감추고 보완하려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걸 영어로 ‘메이커 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뜻은 ‘사기치다’란 말입니다. 그래요, 사기를 치는 것이지요. 나를 보다 그럴듯하게 내어 놓기 위해서 화장을 하는 건 사기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뭐, 여자들은 화장을 하는 것은 예의요 에티켓이라는 황당한 말로 자기를 합리화하는데 남에게 잘보이고 싶은건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그런지 화장품이 얼마나 비싼지........하하, 농담입니다. 자, 그럼 다시 본문으로 가 봅시다.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한 우물이 있습니다. 이 우물은 야곱이 파서 이용한 매우 오래된 유명한 우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우물에서 오늘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 납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던 한 여인이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있는데 행동하지 않았던 한 여인이 마침내 결단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 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모습은 오늘 보통의 우리들과 같습니다. 이래서는 안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행동하지는 못하는 의지박약의 인간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다가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때에는 요단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택했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갈 때는 직접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서 가십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무대는 예수님의 최종목적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길의 한 점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납니다. 어쩌면 주님은 이런 상황을 만드시려고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땅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사마리아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밟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에는 요단강을 건너서 북상하여 갈릴리 맞은편에 다다르면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로 들어가는 매우 불편한 돌아가는 길을 이용했습니다.

물론 지름길을 이용하기위해 사마리아를 지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엄격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하기위해 요단강 건너 베뢰아로 여행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왜냐면 사마리아인들과 마주치는 것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마리아를 지나 가는 이들도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치 않기위해 음식을 싸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에서 음식을 구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지요. ‘상종한다’는 말에는 그릇을 함께 사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릇도 함께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 정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했고 천대했습니다. 사실 이 사마리아인들은 지금도 150여명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모세오경에서 나오는 유일한 여호와 신앙의 전통 계승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사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심산에서 지냅니다. 고고학자들이 그리심산 정상에서 사마리아인들의 성전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자, 배경설명은 이쯤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들은게 뭐 큰일입니까? 죄지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요, 사실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소식이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어간 것은 매우 큰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리새인은 단순한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이들은 유대의 종교적인 문제를 심의하고 조사합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발호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례 요한이 처음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에 요한을 조사하려고 사람들을 파견하기도 한 겁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이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소리친 부분이 요한복음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에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사교집단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혹은 반란? 그래서 지체하면 또 조사단이 나와서 헛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번거로운 일을 피하여 주님은 이때까지 세례를 주던 유대에서 벗어나 갈릴리로 돌아 가시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빨리 가려고 하셨을까요?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지름길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마리아땅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이 기존의 유대교 고위층과 대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갑자기 성경본문에 괄호를 한 부분이 보입니다. 2절 전부가 괄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이 말은 예수님이 단 한사람에게도 직접 세례를 주신일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로 놀라운 사실이지요? 우리는 지금도 세례를 거행하는데 이게 사실은 주님이 베푸신 적이 없답니다. 다만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시켜서 세례를 베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말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자기가 직접 주지 않아도 자기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대신해서 세례를 주었다면 주님이 세례를 주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초대교회 시대에 바울서신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누구는 예수파고 누구는 베드로파고 누구는 바울파고 누구는 아볼로파고 하는...........
그리고 바울은 자기는 그 중에서 단 두사람에게만 직접 세례를 준걸로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예수파고 하나님파라고 말하지요.

바로 이 말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이나 예수님의 제자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는 것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파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으로부터 받는 것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받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죄를 회개하는 회개의 세례임에는 별다를게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누구 누구의 라인이니 영향력이니 제자니 하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빽, 배경이지요. 파벌이라고 해도 좋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리고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죄씻음의 표시라면 누구에게서 받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안에 바로 서 있기만 한다면 장로교인이니 순복음 교인이니 침례파니 감리교니가 전혀 중요하지 않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지 저러니 싸우기 싫어서 주님은 교회를 접고 근거지를 옮긴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조금 우리가 순수하지 않은 생각으로 성경본문을 살핀다면 예수님은 결코 물세례를 주는 요한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요한의 세례나 제자들의 세례나 다 예비적 성격의 물세례인데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표시이기도 하지요.

3절에 보면 “유대를 떠나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표현은 다른말로 포기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조사를 앞두고 지금 한창 잘되고 있는 교회를 접고 갈릴리로 도망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주의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단어를 보면 주님은 아마 이 사마리아길을 자주 이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마리아를 지나는 길을 이용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전통에 반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사마리아땅을 밟는 것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는 것이 나를 더럽힐 수 없다.’

여하튼 사마리아의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 일이 벌어 집니다.
참, 성경본문에서는 동네라고 표현했지만 동네가 아닙니다. 폴리스, 요즘말로 하면 성입니다. 수가성, 규모가 제법 되는 성벽을 두른 도시입니다.
이 수가성은 세겜 인근일  걸로 생각되어 지고 있습니다.

수가성에 막 도착한 주님은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습니다. 당시이런 우물곁에는 여행객이 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용법에 의하면 이 우물은 수맥에 위치하여 가끔씩 물이 솟아나기도 하지만 그 솟아나온 물을 가두어 두는 거대한 저수조같은 곳인 것 같습니다. 자연과 인공이 가미된 우물이지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밑에는 석회석으로 되어있고 위는 돌로 쌓은 우물로 깊이는 34m이고 위로 갈수록 입구가 점점 좁아지는 물을 가두어 두는 웅덩이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고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뚜껑이 덮여 있는 그런 구조의 우물입니다.

요한은 특이하게 이때의 시간을 기록합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육시는 어느 때를 가리킬까요? 유대력으로 육시는 정오를 말합니다. 로마력으로 육시는 오후6시를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로 로마력을 따랐는데 성경학자들은 이때만은 유대력으로 육시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분위기상 유대력으로 육시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요한이 이렇게 육시라는걸 밝힌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한낮의 무더위를 피하시기위해 물도 마실겸 우물가에 앉았다고 보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도 없는 한낮에 혼자서 물을 길러 나올 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지역의 여인들은 주로 오후6시경에 물을 긷습니다. 그리고 한낮에는 너무 덥기 때문에 물을 길러 밖으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무도 없을 때 물을 긷습니다.

왜겠습니까? 다른 여자들을 피하기 위해서 이지요.
왜 피해야 하는 지는 뒤에 나오지만 여인의 신분이 여염집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불결하다고 피하기 때문에 혼자서 아무도 없을 때 물을 길러 나온 겁니다. 어때요?
사마리아인들은 혼혈들이기 때문에 순혈주의를 주창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천시되었습니다. ‘상종도 하지 말자’ 그런데 그런 천시받는 사마리안인들로 부터도 천시받는 참으로 기구한 여인이지요.

이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가 주님으로부터 물 한잔을 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이 가련한 여인과 주님이 만난 것은 어찌보면 기적입니다. 왜냐면 유대인이 보통 사마리아인들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습니다. 유대의 정결례에 의하면 사마리아인과 접하면 부정해 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은 남자에 비해 죄가 더 많은 걸로 여겨졌습니다. 약간 말도 안되는 논리이기는 하지만 혼혈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답니다.

게다가 이 여자는 그런 여인들 가운데서도 배척받는 왕따입니다. 사람들을 만날까봐서 일부러 아무도 없는 한낮에 물을 길러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주님을 만난 겁니다. 제자들은 수가 성내로 먹을 것을 사러 갔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음식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 음식 역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주님의 제자는 유대교의 정결례같은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물론 이때도 사도 요한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둘의 대화를 목격한 것 같습니다. 문체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나온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기 너무 너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주님이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날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뭔가를 요청하십니다. 목마른 여행객에게 물 한잔을 주는 건 당시 중동지역의 여행객에 대한 당연한 의무같은 자선이었습니다. 나에게 복을 받기위한 기회를 주는 것이므로 이런 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감사해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을 만나면 , 그리고 그분의 요청을 받아서 그걸 이행한다면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항상 뭔가를 주시기 전에는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지요.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복주시기 위함 입니다.

여하튼 주님의 물한잔 요구를 받은 사마리아 여자는 놀라서 주님에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하며 선뜻 물을 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단 이 여자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주기 위해서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한 이가 누군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주님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수는 문자 그래도 살아 있는 물이라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고여 있는 물을 죽은 물이라고 했고 흐르거나 솟아 오르는 물을 생수로 여겼습니다.
학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생수로 생각하고 생수는 성령으로 간주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죽어 있는 물과 살아 있는 물로 대조될 수 있습니다. 수가성 우물의 물은 고여 있는 물이므로 죽은 물로 주님이 주시는 물은 살아있는 진리의 물이라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여인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이 우물은 깊이가 약 34m에 달했고 이 우물에는 물통이 없었습니다. 아마 물을 길러 오는 이들이 두레박을 가지고 오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럴 수도 있습니다. 두레박이 있었지만 사마리아인과 두레박을 함께 사용하기 싫어서 사용하지 않을거라는걸 여자가 알고 있다는 거지요.
본문의 ‘상종하다’란 말은 원래는 ‘그릇을 함께 사용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긴줄이 달린 두레박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주님이 무슨 물을 준단 말입니까? 이 여인은 이 우물의 물을 준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두레박이 없는 주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한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을 이야기 하고 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이야기 하니까 둘의 대화가 쉽게 통할 리가 없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엉뚱하게도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라고 묻습니다. 야곱이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는데 당신이 뭔데 우리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여인은 비록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지만 스스로는 야곱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사람들로 부터는 근본도 모르는 여자라 무시를 받지만 스스로는 근본을 잘알고 있네요.
여자가 12절 하반부의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 우물의 수량이 풍부하고 그정도로 수질이 좋다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당신이 야곱이 판 이 우물보다 더 좋은 물을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이 여인은 지금 야곱과 주님을 비교하지만 유대인은 모세와 주님을 비교하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개 보다 큽니까? 어찌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전하겠다고 합니까?”
사람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 때문에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제해야 합니다. 엄친아.........

여러분,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지금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한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왔음에도 우리가 영안이 떠여지지 않아서 기껏 누구보다 크냐는 타령만하고 정작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복주시기위해서 허락하신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13절과 14절은 우리에게 시시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살아 있는 물과 죽어 있는 물의 차이가 여기서 나옵니다. 물론 죽었다고 해서 진짜로 죽은 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영적인 비유입니다.
자, 주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물은 갈증을 해소하는 기능을 하지만 한번 먹는다고 해서 영원히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마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투입하는 물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시 목마를걸 생각해서 언제까지나 우물곁에서만 살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먼길을 갈려고 하면 우물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주시는 물은 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느냐 하면 여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바깥에서 자꾸 부어 주어야 하는 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영원히 샘솟듯 솟아 나는 물이기 때문에  주가 주시는 물은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을 수 있게되는 것이지요. 쉽게 얘기할까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전능하신 하나님 그가 다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주인으로 주님을 완전히 모시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주인은 마셔도 그때뿐 또 목마른 유한한 물질이 됩니다. 찰나의 쾌락이 됩니다. 한때의 자그마한 권력이 됩니다.

그 모든 것을 필요없게 하시고 그 필요를 넘어서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을 모실 기회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가 놀랍게 변화되어 질 것입니다.

제가 조금 다르게 이 부분을 해석해 볼까요?
우리의 욕심을 충족시키려 하면 한이 없다는 것이지요. 물질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하고 쾌락은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됩니다. 게다가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에 이걸 충족하게 되면 더 큰걸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은 “더 더” 하다가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겁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구주를 모시고 나면 나에게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가 다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가 주시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바뀌는 거지요. 한마디로 욕심이란거 자체가 없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물질도 권력도 쾌락도 계속해서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은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주기도문에 나와있는 “내일의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욕심을 버리고 깨닫는 자가 되라는 불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불교는 세상은 바뀌지 않고 내 마음만 바뀌는 것에 비해 기독교는 나의 마음이 바뀌고 동시에 세상도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나의 마음과 행동이 바뀌고 여건이 변합니다. 왜냐면 주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법칙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적의 주인공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수가성의 여인은 주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주께서 주고자 하는 물의 정체도 모르면서 단순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 만 생각하고는 그 물을 주기를 요청합니다.
처음 주님이 물을 좀 달라고 할 때 주지 않은 이 여인은 지금 오히려 주님에게 이런 멋진 물을 내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이 여인은 주님이 누구인지 주님이 주려고 하는 물이 어떤 물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얻고자 하는 여인의 욕망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목이 마르기 때문에 갈증을 채우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물을 길러 나와야하는 이 여인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는 것은 소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다소 엉뚱한 명령을 하십니다. 지금 주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는 뭔가 겉돌고 있습니다. 둘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소통이 안된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요.
16절에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말은 단순합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 분석하면 세가지의 독립된 명령어가 있습니다. 가라, 부르라, 오라.

단순합니다. 마치 전도의 용어같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는 생략된 단어가 있습니다. ‘이리로.’  그래요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신 이리로 너의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입니다.
뭐,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얻는 것에 비해 너무 간단한 명령입니다. 그냥 집에 가서 남편을 만나서 그를 주님께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생수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건 거저나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명령이 어떤 사람에게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면 이 여자의 대답을 보십시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불러 오고 싶어도 남편이 없답니다. 죽었나? 아니면 멀리 갔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란 말은 헬라어로 듣게 되면 즉시로 의미가 전달됩니다. 뭐냐면 ‘나는 결혼한 남편이 없습니다’ 즉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있지만 결혼한 남편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어때요, 이여자의 말속에서 뭔가 죄의식이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의 부정을 숨기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남편을 불러 올 수 없는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자는 정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때부터 이 여자의 영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주님으로부터 육적인 생수만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여인은 비로소 자기의 참 모습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 나와서도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제대로된 상태가 아닙니다. 아직도 회개에 이르지 못했기에 성령님을 영접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동력이자 우리가 믿음안에 있게 하는 힘입니다.

주님의 영안으로 이여인의 참 모습이 나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
여기서 우리 성경의 번역이 약간 논란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니라 ‘남자’로도 번역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다섯 남자가 너에게 있었고 지금 너에게 있는 여섯 번째 남자는 합법적으로 결혼한 남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의 이 말속에 다섯 남자가 모두 불륜상대란 말은 아닙니다. 남편도 있을 수 있고 단순히 동거만 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 당시에 합법적으로 다섯 번 결혼하고 다섯 번을 이혼한다는 것은 솔직히 조금 무리일 것 같습니다.

여하튼 정말 놀랍습니다. 이 여인의 참상이 정말 가련합니다. 다섯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결혼하지 않고 동거만하는 부정한 상태입니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여자는 세상의 천대와 무시를 받고 배척을 받는데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이 여자는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도록 물을 길을 필요가 없는 영원히 솟아오르는 샘물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지금 주님에게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로만 은근슬쩍 주님으로부터 생수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가 크게 한방 먹은 겁니다. 주님의 질문으로부터 자기의 실체를 깨닫고 죄책감을 담아 자기의 실체를 고백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한)남편이 없습니다’란 말에서 동거를 연상하기보다는 과부인척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처음 만나는 외간남자에게 동거상태를 알리려고 하는 것보다는 생수는 얻고 싶고 남편은 불러 올 수 없어서 그냥 변명을 함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덮어 두고 싶었겠지요.

이 여자는 지금 두 번이나 은근슬쩍 넘어 갑니다. 처음 물좀 달라고 했을때도 물을 주지 않고 유대인이 나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며 대꾸합니다. 게다가 생수를 준다는 말에 혹해 그 물을 얻기위한 조건인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에도 은근슬쩍 남편이 없다는 말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 중에서 이런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만 뭔가 죄를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은근슬쩍 묻어 가려고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물은 토해 내신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뭔가 물질적인 것을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교인들의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크고 번듯한 교회만을 찾아 다니는 사람 중에 그런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다 못해 그럴듯한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교회만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면서 정작 가장 필요한 생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정작 우리가 구해야 되고 얻어야 될 것은 육신적인 물과 이 물을 떠먹기 위한 두레박과 같은 도구가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 주실 수 있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인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영적으로 자기의 실체를 깨닫고 주님 앞에 고백하며 주님을 바로 만나서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교회나오는 가장 첫 번째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기만 하면 주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과 사건에 일희일비하며 앙앙거리지 말고 먼저 내 속에 주님을 모십시오. 물은 마시면 그때만 갈증을 해소할 뿐 또 다시 목마르게 되면 또 물이 필요하고 이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살지 말고 아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신 주님을 내가 모셔야만 합니다.

그런데요 이 생수이신 주님을 얼렁뚱땅 모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곳에는 함께 거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요? 나의 죄를 회개하고 먼저 죄를 깨끗하게 해야 비로소 우리 주님을 내 속에 모실 수가 있는 겁니다.
죄를 회개하는 첫 번째가 바로 죄인된 나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고백하는 거지요.
그냥 마음이 괴롭다고 속이려고만 하지 말고 내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우리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비로소 여자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내가 자세히 당신을 관찰해 보니 당신은 선지자다. 그러니까 나의 숨겨진 실체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주님이 누구인줄 몰랐던 것에 비해 주님에 대한 인식이 일보 전진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면 주님의 그런 지적에 관해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고 시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주님을 인간 선지자로만 인식합니다. 아직까지 주님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합니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때의 ‘주여’는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나 자신의 주인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에 불과합니다.  이 여자의 인식은 점점 진일보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생수를 얻으려면 멀었습니다.

오늘은 이까지만 해야 겠습니다. 다음주에 나머지 부분을 계속해서 봅시다.
그리고 간단하게 오늘의 결론을 내야 하겠습니다. 뭡니까?
첫 번째는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시면 결코 우리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물질은 결코 영원히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 우리 욕망의 갈증을 채워줄 물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내안에 모시는 것 만이 그러한 갈증들을 영구히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내안에 주를 모시려고 한다면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죄인된 나의 죄를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먼저 내 죄가 느껴져야 그것을 회개하는게 가능하지 은근슬쩍 말로 덮고 넘어가려고 하면 결코 내 죄를 회개할 수가 없고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용인하지 않으시거든요.

교회와서 말많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말도 많지만 여기에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물을 달라고 하면 물을 드리고 남편을 불러오라하면 남편을 불러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주님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권유하여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4월 2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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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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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이번 설교를 듣다가 상당히 놀랐습니다. 너무 사실적인 묘사라서 그렇습니다. "불통"의 모습을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여인은 제발 이 비참한 삶 대신에 영원한 샘물을 좀 달라고 하고, 주님은 생수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말하면서도, 여인에게 물 한 모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마음에 남이 있던 "선대"라는 말이 계속 맴돕니다. 이걸 바꿔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여, 내가 당신께 선대 하였으니, 당신도 나를 선대하소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저절로 기도를 들어주시고, 만사를 형통하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분의 뜻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 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올바르게 서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는, 자신에게 정직하고, 이웃에게 잘하려는 태도 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주께서 돌보시고 채워주실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의 요구는 생각보다는 어렵고 까다로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힘껏 길어놓은 물을 달라거나, 갑작스레 남편을 데려오라거나,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점이야말로 와닿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선한 일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분명히 마음의 저항과 부담이 느껴질 것입니다. 아깝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냥 편하게 입으로만 예수 믿고, 복 받아 잘 살면 그만이지 라면서 대충 합리화 하는게 훨씬 편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셨을 겁니다. 이른바 대충대충 미지근한 삶으로는 "제대로 된 공동체"를 만들거나,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을 이루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서양식 유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좋은 관계가 되고 싶나요? 1. 생각만 하지 마시고, 연락을 해보세요. 2. 연락만 하지 마시고, 직접 만나세요. 3. 직접 만나기만 하지 마시고, 선물을 주세요. 간단하지요. 가장 좋은 관계는 만나서 무엇인가를 나눠주고, 나눠받는 관계라는 의미 입니다. 물론 이 나눔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대화나 기쁜 일, 슬픈 일도 나눌 수 있습니다. 감히 이런 유머를 적용시킨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직접 만나서 함께 하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위장된 가짜 교인이 아니라, 진짜로 남을 돕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부담을 감수하고 실천하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설교에서 여인은 끝까지 물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집요하게 영원한 생수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여인과 같을지 모릅니다. 여인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인간적이며, 솔직한 스타일 입니다. 적어도 뻔뻔하거나 위선적이지는 않습니다. / 오늘날 우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생각할 줄 아는 여유와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함을 주는 사람이 많은 곳이 천국이며, 불평을 주는 사람이 많은 곳이 지옥입니다.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혹시 욕심과 이기심이 앞서서, 게으름과 변명으로 둘러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됩니다. / 2013.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