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8월18일/브엘세바에서 희망을 보다(창세기21:8-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8. 21. 20:5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18일 주일 예배

브엘세바에서 희망을 보다 (창세기21:8-21)

오늘 우리는 사막에서 헤매는 한 모자를 만납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하갈이며 애굽의 왕궁에서 궁녀로 있다가 아브라함에게 보내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한 때 아브라함의 후계자 이스마엘을 낳고 족장의 부인으로 부귀영화를 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부인 사라에게서 이삭이라는 아들이 나고 난 다음 이 모자는 찬밥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삭이 세 살이 되어서 이제는 죽을 위험이 없다고 인식되자 마침내 이 모자는 사라의 질투로 말미암아 사막으로 쫓겨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사막에서 살아가는데 제일 어려운게 뭡니까? 요즘 날씨가 무지 더운데 제일 필요한건 그래요 바로 물입니다. 물이 제일 필요합니다. 물이 있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음식이 필요합니다. 떡 한덩이와 물 한가죽부대를 가지고 사막으로 내몰린 이 모자의 가련한 신세가 오늘 본문에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척박한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보려고 온갖 불리한 조건을 다 가지고도 아등바등하는 현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요. 그래요, 이 세상은 마치 사막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타는듯한 혀를 축여줄 한방울 물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브엘세바에 들어온 하갈과 이스마엘의 여정도 순탄치 못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삭말고 다른 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삭은 총 세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본부인 사라, 그의 여종으로 부인이된 하갈, 그리고 후처인 그두라
특히 그두라에게서는 많은 자녀가 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도 이삭의 형인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에 관하여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이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지금 이슬람교도의 조상이 됩니다. 이슬람교도의 최대성지인 메카의 카바사원은 전설에 의하면 처음 아담에 의해서 지어졌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공동으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동의 조상입니다.

이스마엘은 하갈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삭보다 13년빨리.
처음 이스마엘이 태어나자 아브라함은 매우 기뻐했고 하갈은 여종의 신분에서 부인의 신분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던 집에서 아들이 생겼으니 얼마나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만 13년만에 이삭이라는 동생이 생겼는데, 이삭은 본부인 사라의 아들입니다.
당연히 사라는 그때부터 하갈과 이스마엘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들의 권력욕은 실로 굉장할 때가 있어서 사라 역시 자기의 배로 낳은 아들 이삭이 후계자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한 끔찍한 보복을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마엘은 천대를 받기 시작했고 사라의 눈에 가시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짜를 부립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
1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떡과 물한통만을 주고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정말 비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렇게 비정한 짓을 저질렀지만 마음까지 편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1절에 보면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원문에는 ‘그 일이 아브라함의 눈에 심한 악으로 보여졌다’로 되어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역시 사라의 질투로 인한 이스마엘의 축출이 심히 악한 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가 매우 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서 해준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그는 비정한 짓을 저지릅니다

자기의 아내와 자식을 그렇게 비정하게 쫓아내다니......
게다가 아무것도 주지않고 겨우 물 한가죽부대와 떡 한덩이만을 가진 모자가 사막으로 쫓겨납니다.
이제 그들은 떡과 물이 떨어지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하갈은 죽을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물도 음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비정한 처사에 하갈은 차라리 이대로 죽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친아들 이스마엘이 13년간이나 누려오던 후계자 자리를 이삭에게 빼앗기고 그녀는 어쩔줄 모르고 빈들을 방황했습니다..

1.브엘세바들에서 방황하다
브엘세바란 말은 우리말로 7개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영어에서 7을 세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어의 ‘세바’와 영어의 ‘세븐’이 비슷하지요.
그 일곱우물이 있는 곳에서 지금 하갈은 물을 찾지 못하고 갈증이 나서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될 것은 종종 7이란 숫자는 완전수를 나타내므로 실제로 7개란 의미도 있겠지만 아주 많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7이나 12같은 수는 신과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나타내는 3과 인간을 나타내는 4가 더하거나 곱해지면 나오는 숫자가 바로 7과 12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브엘세바는 우물이 7개가 있어서 브엘세바이기도 했겠지만 실제로 우물이 많다는 뜻으로 지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서 물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면 그곳에는 분명히 7개의 우물이 있지만 실제로 그 지역은 사막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네게브사막이 바로 그곳입니다. 성경에는 남방이라는 말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물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는 지금 자기와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위한 물을 찾기위해 사막을 헤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우물들은 단한개도 눈에 띠지 않습니다.
마침내 가지고 온 한가죽부대의 물도 다 떨어지고 그녀는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아래 두고 화살을 쏘면 닿는 거리쯤에 가서 목이 말라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고 있습니다. 당시 화살이 어느정도 날아갔을까요?

당시 이지역의 화살은 겨우 50m정도, 많아봐야 100m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떨어지기는 했겠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어제까지 히브리족장의 아내로서, 자식으로서 호강하던 그들은 이제 집에서 쫓겨나서는 황량한 사막에서 타는 목을 축여줄 물 한모금이 없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머니 하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식의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스스로 자살을 꾀한 하갈이지만 자식이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은 역시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는 가련한 것입니다.
7개나 있다고 하는 우물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2.소리를 들으셨다
마침내 하갈도 자식의 맞은편에 앉아서 방성대곡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희한합니다.
본문에는 어머니가 방성대곡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엉뚱하게도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답니다. 성경에는 아이가 어떻게 했다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면 내가 그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 아이는 지금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17:20절에 이미 약속하신바 대로 이스마엘에게도 12방백이 나겠다고 합니다. 방백은 나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12지파로 이루어졌듯이.......

그러나 지금 보면 이삭은 이스마엘의 1/10도 채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여기서 방백은 나라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12지파가 모여 한나라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더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지금당장 눈에보이는 이스마엘의 참상은 정말 가긍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보다 겨우 1/10의 복을 약속받은 이삭은 히브리족의 족장의 아들로서 호강하고 있는데 그보다 열배의 복을 약속받은 이스마엘은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기직전입니다. 기가찹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가 비록 집에서 쫓겨나도 그와의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나타나셔서 옛 약속을 상기시키시고는 그와 그의 어머니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식의 목숨을 연장하려고 그늘도 거의 없는 떨기 나무 아래두고 화살 한바탕거리에 떨어져서 울고 있는 바로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 아이의 소리, 방성대곡하는 엄마의 소리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약속받은 12국가의 조상으로 내정된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3.눈을 밝히시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하나님은 정말 굉장하신 분입니다.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고는 아이의 눈이 아니라 그 어머니 하갈의 눈을 밝혔답니다. 그것은 아직은 아이가 아니라 하갈이 행동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스마엘은 적어도 10대 중반의 나이여서 충분히 우물을 찾아낼 수 있는 나이였지만 하나님은 그 나이가 아니라 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아니라 하갈의 눈을 밝히신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 하갈이 이스마엘을 보호해야 하므로. 아직 하갈이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12개의 거대한 나라를 이룰 자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여하튼 19절에서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갈의 눈의 이전에는 어두웠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하갈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기서 샘물이란 단어를 주목합시다
이 샘물이란 단어는 실제로는 물구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샘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물이 펑펑쏟아져서 주위에 물웅덩이가 나무사이에 드러나는 그런 광경은 아닙니다.

즉 사막이란 지형에서 물의 증발을 막기위하여 물웅덩이위에 덮개로 잘 덮어두어서 얼핏보면 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웅덩이가 아주 잘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덮어놓고는 그 옆에 물샘이란 표시를 해서 여행객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놓은 그런 곳입니다.
여행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표시까지 해 두었지만 하나님이 그 눈을 밝히시지 않자 물을 옆에 두고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일곱 개나 되는 우물을.

네게브 사막과 일곱 개의 우물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실 수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내 곁에 풍부한 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눈이 뜨이기 전에는 나는 그 우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발견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요, 그렇게나 중요한 우물이 이미 내곁에 있습니다. 그것도 무려 일곱 개나...일곱은 종종 많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완전수입니다. 열둘과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많은 우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민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물이 없어 목이 마릅니다. 열국의 조상이 될 아이지만 지금 당장 나와 함께한 이는 어머니 한분 뿐입니다. 과연 나의 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질 징조는 어디에 있나요?

4.활쏘는 자가 되었더라
마침내 우물을 발견한 그들은 이제 그 사막에서 기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장성하고 난 다음에는 활쏘는 자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활쏘기의 전문가, 명궁이 되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셔서 사막에서도 물을 발견하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13절에 이미 하나님은 ‘그로 한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결코 죽을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고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마침내 사막에서 목이 말라 차마 자식의 죽는 것을 볼 수 없다고 그것도 그늘이라고 떨기나무아래 자식을 두고는 자기는 뙤약볕아래 앉아 방성대곡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역사의 주재자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그 분, 여호와 하나님은 사막에서 그가 죽기 직전에 나타나셔서 그의 일생동안 함께 계셨고 마침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냥 큰 민족이 아닙니다. 지금의 북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이슬람권, 세계 최대종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일곱 우물이 있는 지역에서도 물을 찾지 못하고 갈하여 방황하다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밝히실 때에야 만이 비로소 우리가 물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셋째는 하나님은 절망의 순간에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를 살리신다는 사실..왜
그분이  약속하셨으므로.

거대한 12나라를 이루려고 하면 지금 그래도 적어도 한부족의 족장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족이 주위를 평정하고 점점 키워서 나라를 만들고 그 나라가 커져서 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어머니 하갈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껏 가지고 있던 떡과 물 한통마저 떨어져서 이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은 지독히 척박한 사막이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남부, 성경에 종종 남방이락 표현된 네게브 사막에서 그들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사막 중에서도 그들이 있는 곳은 7개의 우물이 있는 물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이었습니다. 거기서 점점 세력을 넓히던 이스마엘은 나중에는 전설에 의하면 거대한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 메카까지 간 것 같습니다. 한때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 아브라함과 화해를 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로 이스마엘은 사막의 정복자였습니다. 그는 브엘세바 우물가에서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있던 아버지의 기업도 차지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였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자기를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였습니다.

하갈조차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죽음 앞에서 넋놓고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 아이를 들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절망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죽기 직전에야 그가 나타나셔서 새로운 용기를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솔직히 한 여인과 한아이가 사냥으로 사막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비록 샘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사람이 물만으로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막일지라도, 황량해 보일지라도 그곳은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난 곳입니다. 드디어 신령한 눈을 뜨게 된 곳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밝히시매 바로 거기에 물샘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주위에 풍부한 물샘 7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떡과 물한통이 다하여 죽을 수 밖에 없으리라고 절망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너는 지금 죽을 수 없어, 왜냐면 너를 통하여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일은 너무나 방대해. 그러므로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우리가 한때 가졌던 기업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우리의 출발이 조금은 더 멋지고 든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맨주먹으로 다시금 처음부터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사명을 주신 내 아버지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터를 잡은 곳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 네게브 사막이었습니다. 성경은 빈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곳의 지명은 브엘세바입니다. 일곱 개의 우물이 있는 곳.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죽게 하나님이 놔 두시지를 않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라도 사실은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 우리의 기도는 바로 그것을 보게 해 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래요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내가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나에게 그분은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절대 절명의 순간에 나타나셔서 내 눈을 밝히십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어질 그때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적은 것들이 지금 딸랑딸랑합니까? 타는듯한 무더위에 물 한가죽부대와 떡 한덩이, 그것도 두사람이 먹고 살아나가야 된다면 세상에 그걸 누구입에 붙이겠습니까? 이걸 다 먹고는 죽으리라!

그런데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는 나의 주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내가 승리할 수 있다고 힘을 주십니다. 나의 눈을 밝히시고는 샘물로 나의 갈함을 적셔 주십니다.
인간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브엘세바는 축복의 땅입니다.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붙드신 거룩한 땅입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가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걱정도 있고 여러 가지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로 우리를 이끄신 것은 우리로 그대로 있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시작하게 하려하심입니다.

그렇게 나갑니다. 그렇게 나갑시다. 믿음을 가지고 나갑시다. 아버지 나의 눈을 여시사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복을 찾게 하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산증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1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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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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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괜히 썼다가 "누"가 되는게 아닐까 걱정은 합니다만, 어차피 진실은 그 자체로 힘이 세다고 생각하고, 여담을 옮겨 싣습니다. 21일 수요일 점심을 홍 목사님과 함께 하면서, 저는 신부님들이 요즘 "핫"하다면서, 연일 이어지는 시국선언이 감동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종교는 "정부기관의 개입을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되는가"를 물었지요. 그건 곧 "정의"와 관련된 것이라고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가만히 놔두고 침묵하고 있다면, 그게 어찌 종교인이라 하겠는가 라는 겁니다.

지나가는 말로, 홍 목사님은, 우리도 그럼 (소수지만) 시국선언 한 번 할까 라면서 웃으며 이야기 했는데, 정말 고맙게도, 21일 늦은 오후, 마침내 개신교 목사님들까지도 시국선언에 동참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나라의 종교는 참 깜깜할 때는 멋지게 할 말을 하는구나 싶어서 내심 기뻤습니다.

작년 12월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저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어느 나라가 국민을 호구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여론 조작을 지금 시대에 하겠냐" 싶었었지요. 제가 순진했고, 제가 틀렸습니다. 눈 먼 권력자가 볼 때 국민이란, 조작되기 쉽고, 바보같아 보이는 존재 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고, 실제로 반칙과 무리수를 감행하면서, 결과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당하던 국민들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제 잘못된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합니다. 선서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권력의 하수인들 앞에서, 마침내 사람들이 "당신들, 그건 정말 아니잖아요." 라고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민주주의를 기만하고, 돈과 권력이 신이 된 것처럼 내맘대로 막나가는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악습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종국에는 부패로 침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서는, 다시는 이런 부정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칙이 아닌 상식이 통하는 사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뻔뻔함이 득세하는 게 아니라, 정직하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 우리가 이런 사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저는 다짐합니다. / 2013.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