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8월25일/긍휼과 겸손과 오래참음을 옷입고(골로새서3:1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8. 26. 15:4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25일 주일 예배

긍휼과 겸손과 오래참음을 옷입고 (골로새서3:12-)

저는 교인들에게 성도라고 부르는 것을 꺼렸습니다. 왜냐면 분명히 우리는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성도라고 불러야 겠습니다. 왜냐면 성도라고 부르는 이 말이 기도가 되어서 우리 교인들이 모두 성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솔직히 예수쟁이라고 해서 뭐 별다른 사람도 아니고 돈이 필요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일반인들하고 똑 같이 사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요?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아파하고 위로하며 때로는 동정도 했다가 거짓말도 슬쩍하고 원리원칙대로 너무 인간미없이 살지 말고 뭐 그렇게 그렇게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정답일 것 같은데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믿는 사람, 그래서 새사람이 된 사람 즉 성도가 실천해야 할 덕목들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진짜 어려운 것들만 있습니다. 말은 하기 쉬운데 지키기가 너무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있으니까 도대체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한번 살펴 봅시다.

5-11절에는 성도가 버려야 할 옛사람의 성품과 행실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해야 할 성품과 행실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바울은 본문에서 세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본문에 나열한 덕목을 실천해야 할 성도들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이란 세 개의 단어입니다.

먼저 성도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참된 구원에 참여할 자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택하여진 자들에게는 한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자신이 받은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따라서 하늘나라의 상급이 달라 진답니다.

두 번째 성도의 특징인 ‘거룩하고’란 단어의 뜻은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떼어놓은’, 또는 ‘구별된’이란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 인간에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상태가 아니고 목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코 거룩해 질 수 없으므로 거룩을 목표로 살아가다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서야 비로소 거룩해 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땅에서 우리가 막 살아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표는 보다 더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과 분리되는 삶을 말합니다. 물론 완전히 세상과 분리되어 산속 동굴이나 바위절벽 위에서 이슬 먹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거룩을 좇아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을 뜻합니다. 교회라는 단어 역시 세상에서 불러 내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카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영어의 콜이란 말입니다. 소명, 부르심. 이 말은 결국 세상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말하고 이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교회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천국을 목표로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 하나님의 정의와 공법이 다스릴 나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우리는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

실제로 우리가 거룩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죄많은 인간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을 좇아서 나아가라고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끝으로 사랑하신 이란 말은 하나님이 성도를 사랑하고 즐거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를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거는 좋은데 이런 사랑을 입고 있는 우리는 이제 몇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어야 합니다.
긍휼은 사실 창자나 장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동정과 자비심같은 감정들이 일어난다고 여겼거든요, 긍휼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자비는 ‘도덕적으로 선함’을 말합니다. 물론 ‘친절’이나 ‘인자’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래서 자비의 최고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또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주님의 행동이 바로 우리에게는 자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친절을 입었기에 우리 역시 이웃을 향하여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도덕적 무능함과 무가치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겸손은 기독교 최대의 미덕 중 하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의 지극히 낮은 마음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해야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어떤이는 하나님은 은혜를 겸손이라는 잔 속에 채워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할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첫째 아담의 범죄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입니다. 아담은 스스로 신처럼 높아 지려 했기에 은혜를 박탈당하고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죽게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스스로 낮아 져서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까지 내려갔기에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기독교인의 최고 필수 덕목입니다.

다음으로 온유는 온화, 친절을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부드럽지만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외유내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지만 남에게는 그들의 약함과 어려움을 동정하며 친절하게 보살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온유는 십자가 앞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잠잠하셨던 주님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자신의 성질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래참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인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쉽게 , 그리고 성급하게 보복하지 않는 자기 억제를 말합니다. 행악을 갚는데 더디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다섯가지 품성은 그리스도가 가지신 것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임하는 우리들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품들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내기가 여가 어려운게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의 육신은 죄악가운데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실 죄와 친하고 의와 친하지 않습니다. 그냥 본성대로 하면 죄를 쉽게 짓고 착한 일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해야만 이러한 품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만이 우리의 죄성이 끊어 질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다섯가지 성품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다섯가지 성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인격을 만들어 가는데 엄청난 세월이 걸립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건 오히려 시작입니다.
이러한 성품으로 옷을 입고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을 입고 성도가 해야 할 제일 첫 번의 일은 용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혐의’는 법률적인 용어의 뜻과는 다릅니다. 비난이란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 날 수 있는 불평거리 또는 책망받을 만한 실수를 말합니다. 명백하고 중대한 범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불평거리가 생겨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그럴 수도 있지뭐...다음부턴 더 조심하면 되지”
용납한다는 말은 ‘지지하다. 견디다. 받다’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계속적인 지지와 함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관용적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용서하다란 말은 원뜻이 빚을 면제하다, 은혜를 수여하다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라는 말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잘못을 서로 용서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인정하는 관용적 태도를 가지는 공동체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엄중한 죄나 불법을 조장하고 묵인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간통을 계속 저지르거나 교회의 돈을 횡령하는 죄를 계속해서 저질러도 용서해 주고 덮어주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우발적인 실수를 용서하고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인간을 용납하고 선성을 북돋우라는 말입니다. 함께 노력하여 더 멋진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섯 가지 성품으로 옷을 입고 해야 할 제일 첫 번째 일이 바로 용서입니다. 기억합시다.
여기서 나아가서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용서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
기가찹니다. 용서만 해도 어딘데 거기에 사랑까지 더하라니......이거 너무 어려운데요.

여기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이기심이 배제된 자기 희생적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랍니다.
앞의 겸손이 최고의 덕목 중에 하나였다면 이건 문자 그대로 최고의 덕목입니다.
본문에는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그리스도의 다섯가지 성품을 가지고 남을 용서해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사랑까지 하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본문은 말했는데 아직도 바울의 요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말은 주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는 말씀을 바울이 기억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그분의 최고, 최후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이 풍진 세상에 두시고는 안심이 안되어서 주신 것이니까 결코 시시한 선물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소유하게 되면 세상이 아무리 요동친다 하더라도 마음에 두려움도 염려도 없고 근심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최후의 선물로 돈이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평안을 주신것입니다. 여기서 평강이 바로 평안입니다.
주님이 소유하셨던 평안은 뭡니까?

예수께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위에서도 평안히 주무셨던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떡 때문에 고민할 때도 전혀 염려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기에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평강이 주장하게 한다는 말은 평강이 지배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평안할 것을 말합니다.

조금 뽀시락해도 “우짜꼬...”하며 방방 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믿고 그가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나 참고 인내하며 평안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장하게 하다는 말에는 심판자로 행동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할 순간에 그리스도의 평강을 좇아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인간의 눈에 이롭게 보이는 대로 결정하지 말고 성령이 평안한 마음을 주시는 대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아도 절대로 손해날게 없는데도 왠지 기분이 찝찝하고 불안하다면 이는 성령께서 우리가 그러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어 우리가 평강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평강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본문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새사람, 즉 성도가 된 목적이 바로 평강 때문이랍니다.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구원받은 이의 특징이 평강의 마음인데 우리의 마음이 항상 평안하려면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뉘었던 벽을 허물고 하나님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이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두려우며 염려와 근심걱정에 있던 것이 바뀌어 평안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평안을 주기위해서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도들 사이에서도 평안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한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요, 그 말이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라는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평강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당시 골로새교회는 이단 때문에 분열되어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은 이단을 몰아내고 서로 화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바는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집단구원을 보게 한 것입니다. 개인구원을 넘어서 교회와 사회, 나라와 인류의 구원과 행복을 보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평강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되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감사는 한두번 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감사가 계속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해야 함을 말합니다. 기쁠 때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슬프고 어려운 일에 처해도 감사한다면 결국에는 그 감사대로 우리의 삶이 감사한 삶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감사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읽고 가르치며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혼자서만 그리하지 말고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되면 말씀대로 살고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가며 말씀이 우리 공동체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은 예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 하는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대로 예배하며 감사함으로 찬양해야 한다는 것하고 실제로 본 단락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실천사항의 항목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맨 나중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지요. 우리가 다섯가지 성품으로 옷입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만일 반대로 우리가 밤낮 아버지께 찬양하며 설교하고 기도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않고 그러한 성품으로 옷입지 않고 평화와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지극히 형식적이며 오히려 그러한 종교적 율법이 인간을 억압하고 괴롭히며 오히려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망령되이 일컫게 만드는 죄악이 되는 것이므로 여기서 예배가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에 감사함으로 찬양하고”라고 당부하십니다.

당시의 이단들은 율법의 준수, 의식에의 참여, 금욕같은걸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보일 것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히 거하고 그 말씀이 시키는 바대로 행하며 평안가운데서 서로 사랑함으로 한다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도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당부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로 본문을 끝맺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모든 일을 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말은 모든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욕심대로 행동하면 안되고 내 행동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지 아니면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는 지를 먼저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합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어야 겠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한 것이 너무 많아서 헷갈립니까? 너무 어려워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 잊어버리고 이 마지막절 17절에서 요구하는 것 두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나의 행동이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것인가 그를 영광되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감사를 아는 것은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가장 첫 번의 덕목입니다. 더구나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일합니다.
그러면 무슨 무슨 덕목이니 무슨 무슨 행동이니 하는 세부적인 것을 다 잊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로서의 삶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드리고 보니 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답이 본문 속에 있네요, 감사하고요 저도 다 지킬려니 어려워서 그냥 끝에 두가지로 저의 좌우명을 삼고 나가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사십시오.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감사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감사를 더하실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생활하는 이에게 주께서 나를 그분의 눈동자의 중심에 위치하게 해서 특별히 나를 더 사랑하며 더 보호하시며 더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멋진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의 복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2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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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감사하다는게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는 게 뭘까요? 이건 다른 말로 지금의 현실에 "불만"을 가진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 불만은 결국 다른 곳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 이게 뭡니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환경을 불평하는 거지요. 이것이 일상화 되다보면, 그 인생은 얼마나 안타깝게 추락하고 마는지요. 예나 지금이나 이른바 투덜이는 어딜가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는게 정말 별거 아니고, 자기가 가진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해외 블로그에서 보았던 한 줄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저의 이상형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면 됩니다." 꽤 놀라웠던 이상형인데, 돈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고, 부드러운 성격도 아니고, 뛰어난 지식도 아닌, 단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

그렇다면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뭘 가진게 있어야 감사를 하지. 팍팍한 살림에, 일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세칭 "현실은 시궁창, 오늘도 무기력"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감사 역시도 행복과 마찬가지라, "발견"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저의 아주 졸렬한(?) 경험담인데, 포도막염으로 한 쪽 눈을 거의 반쯤 실명 위기까지 겪은 이후로는, 두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없이 책보고, 영화보고 한다는게 그 이후로 몇 배나 더 기쁘게 다가왔지요.

사람관계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서, 몇 번 괴이한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고 나면, 좋은 사람들의 존재감이 얼마나 더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참 별 볼일 없더라도 감사할 꺼리는 찾아보면 있다는 거지요. 잘 보고, 잘 걷고, 잘 소화되고, 심지어 오늘 하루 아프지 않은 것 만으로도, 감사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 사실 좋은 일보다는, 힘든 일이 더 많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자의 존재 때문에 속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할 일은 산더미 같고, 여유는 실종되어 버리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쳐 있다가, 휴일 조차 멍하게 보내기도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이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면, "그래도 내가 가진 무엇인가가 있구나"를 새삼 깨닫고 용기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매일 감사할 내용을 3가지, 5가지씩 작게라도 적어보라는 정신과 선생님들의 책들은, 정말 감사하는 태도가, 삶에 대단한 긍정성을 선물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동호회 활동을 하는 저는 가끔 이런 예찬론을 펼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보고 싶었던 것이)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 이 말에는 더 바랄 게 없이 기쁘게 삶을 누리겠다는 뉘앙스가 들어있습니다. 뭔가 아쉽더라도 기쁠 수 있고, 뭔가 부족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태도. 이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넉넉하게 끌어안는 태도라고 써도 좋을 것 같고요. 주어진 삶이 사실은 축복이고, 축제라면, 더 감사하게 축제를 즐기는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걸 우리 스스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잡스가 stay hungry 로 마무리되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는데, 계속 목마르고 배고프고 하면 어쩐지 힘들거 같고... 하하. 저는 계속 감사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잘 되면 "덕분에"라고 생각하고, 잘 안 되더라도 "괜찮아" 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요. 결국 꼭 좋은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 소박하고 작은 일에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인간 유형이 아닌가 싶네요. 잡문은 여기까지. / 2013.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