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9월8일/장래 일의 그림자(골로새서2:16-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9. 15. 22:5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8일 주일 예배

장래 일의 그림자 (골로새서2:16-19)

오늘도 역시 골로새서의 말씀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항상 그의 서신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지켜내기가 어려워서 저는 바울을 싫어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걱정도 되고요. 혹시라도 너무 과도한 짐을 짐으로 성도들이 낙심하여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질까 염려도 되고......

그런데 오늘은 같은 본문이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거 같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도덕적인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단이라면 결코 우리나라를 뺄 수가 없습니다. 전세계 이단의 성지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이 동네에서만 하나님이 네 명, 예수님이 한명이 탄생했습니다.

강증산, 문선명, 안상홍, 그리고 안상홍의 동거녀?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이 정도지 아마 더 많을 겁니다.
문선명도 안상홍도 죽었지만 아직 어머니 하나님이란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요즘도 종종 아파트의 문을 두드리며 전도하러 다닙니다. 안상홍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 아니 하나님이였나? 여하튼 안상홍 증인회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돌아 다닙니다. 게다가 이만희는 지금 말세에 남은자 144,000명을 얻는 답시고 12지파를 임의로 정해가지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매우 끈질깁니다. 그런데 앞에 네 사람들은 하나님이고요 이만희는 그리스도입니다.
따지고보면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이만희가 앞의 사람들에 비하면 조금 겸손한 편입니까? (웃자고 한 얘깁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도 역시 이단들이 침투해 있었고 이것이 멀리 떠나 있던 바울의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1.율법주의 이단
당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있던 이단들은 여러갈래가 있었지만 특히 16절과 17절에서 바울은 율법주의 이단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당시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 이단들이 바울이 그리스 로마세계에 개척한 교회들에 퍼져서 비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준수와 할례같은 걸 강요했고 이러한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로 새신자들을 낙심케 하고 교회를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이러한 이단들이 교회내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것과 딱 반대의 이단이 존재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므로 무슨 짓을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쁜소식 선교회의 박옥수 이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유대의 율법의식들이 결국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이러한 문제로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폄론’은 여기서 ‘판단하다’는 말입니다. 즉 그러한 문제로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제사 음식을 먹는 문제로 교회에서 조금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제 추석이 다가오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추석 차례상에 올랐던 음식을 먹는 것하고 우상숭배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삿상을 차리고 절하는 것이지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리낌없이 그 음식을 먹어도 됩니다. 단 마음에 스스로 거리낌이 있다거나 남의 눈에 예수믿는 사람도 우상숭배의 음식을 먹는다고 비쳐지는 것이 꺼려진다면 먹지 마십시오.

믿는자들이 바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에서지 결코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핵심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처럼 극단적으로 육체적인 삶을 무시하고 어떤 짓을 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음탕하며 허랑방탕한 삶을 즐긴다면 이것이 바로 성도를 어둠의 권세에 팔아넘기려는 이단인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느냐면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과 안식일을 인하여”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유대의 의식법에는 먹어야 될 것과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정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음식이라도 더럽고 때묻은 그릇에 있는 음료를 마실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당시 골로새의 율법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의식법을 가지고 비유대인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찝찝하거나 믿음 약한이의 건덕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도들은 이번 추석에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도 마음대로 먹어도 됩니다.
혹시라도 이 제사음식을 먹는 것이 믿음 약한이들에게는 제사에 참예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을 때는 그 형제의 믿음을 위하여 음식을 사양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게 뭐 굉장한 게 있어서 안먹는게 아닙니다.

두 번째로 판단하지 못하게 할 것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입니다. 여기서 월삭은 초하루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는 뭐 그렇고 월삭, 초하루에는 나팔을 불면서 봉화를 들어 백성에게 알리고 특별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규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음력 초하루에 특별 치성을 드리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러고 보면 우리와 유대인들은 비슷한 점이 진짜 많습니다. 마을마다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을 세우는 것은 우리의 마음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하고 비슷하고 , 성황당은 산당하고 비슷하며 월삭을 지키는 것도 비슷하고 자모음의 글자도 비슷합니다. 이건 다음에 한번 말씀드려야 겠고............
그런데 이러한 각종 유대의 절기를 비유대인들에게도 강요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런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공갈을 하는 이들을 보고 바울이 꾸짖는 겁니다.

어떤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골수 신자들로부터 아마 이단 소리를 들을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말은 주님이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지요.

절기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삶가운데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만 지킨다고 껍데기만 거룩한척 하면 그건 안식일도 절기도 제대로 지키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증한 껍데기를 걸치고 하나님의 앞에 앉았다면 그건 신성모독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죄를 보면 돌진해서 쳐부수고 싶어 하는 분이기에 죄를 짓고 하나님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없기때문에 혹시라도 나에게 신벌이 내릴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7절에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요?
공동번역은 이 말을 ‘이런 것은 장차 올 것의 상징에 지나지 않고 그 본체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워졌습니까?
영어성경 NIV는 ‘이것들은 장치 올 것의 그림자이나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먹고 마시는 것이나 각종 절기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어렴풋이 상징하는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그림자는 뒤에 그림자를 만드는 실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이미 그러한 율례를 폐하시고 제도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또한 그러한 상징들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이제 실체이신 주께서 오셨으므로 그를 경배하고 그의 말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안식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추석은 솔직히 많은 믿는 이들에게는 괴로운 행사입니다. 차례라는 게 있어서 집안이 전부 하나님을 따르지 않을 때는 심각한 분란을 야기합니다.
마치 영적인 전쟁같은 양상을 띱니다.
무슨 무슨 집안은 하나님께 ,무슨 무슨 집안은 사탄에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사탄에게 속하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은 무신론이라고 주장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제사에 참예하는걸 거부합니다.
그래요, 제사는 거부하시고 그 음식은 드셔도 됩니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내라고 축제를 즐기라고 주신 귀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추석이 마치 추수감사절처럼 하나님이 주신 오곡백과에 감사하고 가족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먼데 있던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즐기는 그런 멋진 행사가 된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추석의 현대적 재발견인 것이고 영적인 전도의 장이며 어둠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2.신비주의 이단
바울의 당부는 계속됩니다.
율법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에서 이제는 천사를 숭배하는 이단에 대하여 경계합니다. 요즘은 천사 숭배가 없지요? 그런데 이 말은 신비주의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특비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비가 있어야 됩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라고 하면 신비가 모든 것에 앞선다는 말입니다. 신비를 제일로 치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이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자칫 이단으로 빠질 우려가 높습니다.
당시 골로새의 천사 숭배 이단들은 천사를 경험하거나 천사를 숭배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서신에서 꾸짖고 있습니다.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 말은 ‘아무개를 상받기에 부적격하다고 선언하다’는 말입니다. 즉 천사를 숭배하지 않는 사람에게 불리한 판단을 내린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다가 그를 수종드는 천사까지 숭배해야 하고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천사가 한둘도 아니고...........
이건 뭐 예수믿고 종의 멍에를 제대로 매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반대의 상황으로 점점 몰아 갑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러한 체험을 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교파에서는 방언도 못하면 그건 성령받은게 아니라는 말로 방언을 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동네도 교리가 좀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나 은사가 구원의 조건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18절에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란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우리가 너무 죄가 많고 하찮은 존재이므로 직접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할 천사를 숭배한다는 논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꾸며낸 겸손’인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사제입니다. 천주교의 사제. 제가 개인적으로는 천주교의 사제분들을 상당히 존중합니다만 고해성사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직접 하나님앞에 내어놓고 고하지 못하고 인간 사제를 중간에 세워서 그에게 죄를 고백하고 또 사제가 죄를 사해준다는 것은 바로 당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해 있던 천사숭배 이단의 인간판 입니다.
사람이 누구의 죄를 사해줄 권한이 있습니까? 말도 안되지요.

누구의 죄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 이가 용서는 해 줄 수 있어도 그 죄 자체를 사해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해진 틀안에서 해석하고 전하며 영적으로 무리를 지도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숭배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요 천주교의 사제를 영어로는 ‘father’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웃기지 않습니까? 숭배까지는 아니라도 아버지라니요.
게다가 로마교황에게 하는걸 보면 마치 그가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라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의 천사숭배 이단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정도는 천주교의 사제나 성인제도와 비슷합니다.

성 프란시스( 샌 프란시스코) 니 성 베네딕트,  성 어거스틴 이니 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중간매체 없이 하나님을 직접 뵙고 그에게 우리의 기도를 재신 전달해 주는 자’이지요. 웃기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의 장벽을 허시고 운명하실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셨는데 무슨 중간 매체가 필요합니까?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바울 사도 역시 천주교에서는 성인입니다. 죽고 난 오랜 후에 마구 붙이는 겁니다. 성 바오로. 베드로도 성인이지요. 성 피터, 산 피에트러. 성 안드레,
웃기지 않습니까?
이게 다 천사숭배가 말하는 교리의 기본 원리와 비슷합니다.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비천한 존재이므로 우리와 하나님을 매개해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를 섬겨야 한다.

이렇게 보면 당시 골로새 교회를 어지럽혔던 천사숭배 이단이 박멸되지 않고 살아 남아서 천주교가 된 건 아닐까요? 하하, 농담입니다.
제가 결코 천주교도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천주교의 사제들을 존중하고요 천주교에서 하는 일들이 매우 좋은 일들이 많아서 우리 개신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거하고 교리의 맹점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요한이 천사로부터 신천신지에 대한 계시를 받고 놀라서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하자 천사가 이를 막은 일이 있습니다. 경배는 하나님에게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경배’는 ‘신적인 경배’를 말합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자기들이 천사를 보고 그를 숭배하여 영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헛되이 과장하고’
그런데 천주교의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인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병이 낫거나 기적이 몇건 이상 일어나야 성인으로 추대된다고 하니 어째 쫌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게요 부처님에게 예불을 드렸더니만 이적이 일어났다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부처란 ‘깨달은 자’라는 말입니다. 사람이란 말이지요.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잖아요. 누구나 깨달으면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누가 겸비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해서 순교하고 헌신했다고 해서 그가 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으로 기도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성도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아마 죽은 성인 아무개도 결코 자기를 신적 반열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신적 반열에 올립니까? 바나바와 바울이 자기들을 쓰스(제우스)와 허메(헤르메스)신이라고 할 때 대경하며 말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여하튼 천사숭배를 야단친 바울도 성 바오로 성인이 되어서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대신에 바오로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지요.

“성 바오로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천사가 하나님의 주위에서 가까이서 수종들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말해 주기가 더 쉬워요?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라서 예수님에게 부탁하면 더 잘들어준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기도한다. 어째 논리가 천사숭배하고 비슷하지요?

그런데 그에게 기도하고 경배했더니만 신적 역사가 일어났다면 이건 뭐 .......곤란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천사숭배 이단들의 죄는 두가지입니다.
“헛되이 과장하고”
이들은 자기가 본것과 체험한 것을 너무 중시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가 본 것과 체험한 것을 과장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보지 않고도 보았다고 하고 체험하지 않고도 체험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지난주에 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 바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제 슬슬 거짓말을 시작합니다. 더 재미있게 하기위해서, 또는 더 자기를 신령하게 보이려고.
그리고 이들은 체험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교만하여져서 예수를 붙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신비한 능력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해서 그리스도도 안중에 없습니다. 마치 사탄이 스스로 높아져서 , 아담이 스스로 높아져서 신이 되려고 한 것과 동일한 범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간증하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간증이 거듭될수록 더 극적이고 멋있게 변하기 때문에 거짓이 많이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강단에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지요. 더구나 그 거짓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 아니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망령된 일을 하는 이유는 이들이 아직 옛사람을 벗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새사람들 앞에서 신앙 간증을 한다는 것이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19절에 있지요.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자기가 대신 그 영광을 가로채려 하는 것입니다. 이게 처음 마귀가 했던 일입니다.
그래요, 구원의 조건이 천사숭배나 신비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그를 머리로 붙드는 것이지요.

우리 성도들은 그 머리로부터 온 힘과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지요. 그의 말을 듣고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요. 형제들이 연합하는 것입니다. 또 힘을 공급받아서 주의 교회가 자랍니다. 이 것은 성도를 자라게 하시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성장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바로 신앙과 교회를 성장시키는 주요인이 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금욕주의 이단
세 번째로 바울은 금욕주의 이단들을 경계합니다. 너무 허랑방탕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금욕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금욕주의자들은 무조건 금욕이 아니라 영과 육을 철저히 분리하여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러운 것으로 보아서 인간의 모든 악한 것은 육의 더러운 생각과 정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여 육체의 욕망을 죽임으로써 거룩에 이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고행으로 몸을 괴롭게 하고 육체의 정욕을 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상당히 이러한 것이 거룩해 보이지만 이것 역시 이단적인 생각입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고 금식하고 산속에서 자신을 철저히 격리하며 육신에 채찍을 가하며 못으로 찌르고 그래서 내 속에 죄악된 모든 욕망을 끊어서 육체로부터 자유로와 진다고 하는 생각은 불교도나 인도의 요가와 비슷합니다.
이교적 요소가 다분히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도 지나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로부터의 해탈, 껍데기를 벗는다는 말인 ‘해탈’이 여기에 쓰입니다. 어때요?
솔직히 아무리 금식하고 육체를 괴롭혀도 우리가 육체를 벗는 방법은 죽음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반려로 주신 여인이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합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인류는 오래전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왜 한세대만 살고 죽을 인류를 위해서 그러한 일을 하셨을까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많이 많이 지어서 모두 지옥가라는 말입니까?
기도할 시간이 모라자는데 잠이 오니 잠을 깨기위해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요? 여러분, 이건 결코 제대로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잠오면 자세요.

그게 하나님이 주신 법칙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멍에나 저주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말씀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흙을 사용해서 곱게 빚어서 자기의 귀중한 생기까지 불어 넣어셔서 만든 것입니다. 엄청나게 귀한 선물입니다.

임금님이 하사한 물건은 소중하게 대대로 전해집니다. ‘집안의 광영’이니 뭐니 하면서.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몸뚱이는 왜 멸시합니까? 하나님이 그정도로 웃깁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러므로 금욕주의 이단이 칭찬이 아니라 야단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러면 애초에 왜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 더러운 곳에 자기의 거룩한 생기를 불어 넣으셨겠습니까? 생기를 불어 넣자 생령이 된지라. 어때요? 생기를 더러운 육신에 불어 넣어서 생기가 더러워진게 아니라 생령이 된 것처럼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사탄의 속박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해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 같은 이단들이 골로새교회에 침투한 것을 비난하고 이러한 이단적인 행태를 당장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이나 시대, 장소는 다르지요. 그런데 이러한 이단들의 기본 논리는 오늘날에도 알게 모르게 이어져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주위를 둘어보아 경계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태도를 취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평안과 기쁨의 신앙생활을 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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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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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정말 타종교인들이 보면 싫어하겠구나 싶은... 그런 내용입니다만. 일단은 늘 하던대로 올려둡니다. 항상 보면 개신교는 그 배타성으로 인해서 욕먹고, 나쁜 행실로 인해서 두 번 욕먹는 몹쓸 종교가 되기도 하니까요. 다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쓸데없는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단호한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허전해 지면 꼭 무엇인가를 찾아서 소비하려고 합니다. 그게 먹을 것이든, 가벼운 TV프로이든, 특정한 경험이든 간에 말이에요. 게다가 접근하기 부담스러운 게 생기면, 꼭 좀 더 간단한 것을 강렬히 원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당부들이 실천하기 거북하게 다가오자, 사람들은 "에이 그냥 믿으면 구원받지" 라면서 간단히 퉁쳐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당연히 믿으면 구원받지만, 그렇다고 엉망진창 행실이라면, 그게 교인의 삶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쉽게 믿으려는 경향, 쓸데없는 걸로 채우려는 경향, 거기에서 벗어난다면, 훨씬 간단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래전 길선주 목사님으로 기억하는데, 그저 강단에 올라가 내가 잘못한 게 있는 몹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그 정직함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높은 기준 앞에서, 넘어지고, 반성하고, 다시 더 좋은 모습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렇게 교인으로서 성숙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답게 펑펑 울고, 사람답게 한없이 기뻐하고, 그렇게 삶을 누려가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런 순전한 신앙이 오늘날 꼭 필요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 2013.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