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9월15일/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골로새서1:9-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9. 15. 23:0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15일 주일 예배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골로새서1:9-14)

오늘 본문도 지난주에 이어서 골로새서를 계속해서 설교합니다.  그런데 순서는 거꾸로입니다. 지난주보다 앞의 본문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사실 바울의 골로새교회를 위한 중보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느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주일을 마치고 나면 이번 주에 한국 이대 명절인 추석이 다가옵니다. 날씨도 서늘해 지고 마음도 넉넉해 지는 그런 한가위 축제가 시작됩니다. 날짜도 기가 막혀서 무려 오일 간의 긴 추석이 됩니다. 사람들은 약간은 들떠 있습니다. 이 많은 날을 어떻게 놀 것인가?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귀향을 위한 열차표를 예매한다고 난리가 나고 역시나 사상최대로 해외로 출국할 걸로 보여집니다. 한쪽에선 오른 물가 때문에 차례상이 간소해진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경기불황 때문에 저가형 선물이 많이 팔린다는 이야기들이 들려 오고 있습니다.
집앞의 떡집에서는 ‘추석송편 맞춥니다’란 광고 문구가 걸려있습니다. 택배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답니다. 명절 분위기 납니까?

그런데 우리네 추석은 사실 마냥 좋기만 한 날은 아닙니다. 한편으론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론 골치 아픈 명절입니다.  노처녀, 노총각들의 스트레스
실업자들, 취업준비생들의 스트레스

다행히 직장이 있어도 ‘엄마 친구 아들’ 운운하면서 주는 스트레스는 끔찍합니다. 그것도 일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지인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게 되거나 듣게 된다면 아예 그런 이들을 만나는걸 피하게 됩니다.
친구와 이웃과의 비교로 인한 스트레스

오늘 뉴스에 이런게 있었습니다.
“국민75% 노력해도 계층상승 어렵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그래서 또 스트레스.

며느리들의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시월드’
음식준비와 시댁어른들의 접대는 며느리들을 피곤하게 합니다.
사위도 마찬가집니다. 처월드에서 시달립니다.
이것 때문에 추석을 지내고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말다툼이 벌어져서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뉴스에 보도가 됩니다.

제사라도 지낼라치면 완전히 여자들은 죽어 납니다. 며느리들끼리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 집니다. 일적게 할려고. 나는 이렇게 하는데 왜 너는 안하느냐? 인터넷에 이런 일로 고민하는 글을 올리면 기발한 대처방법이 답글로 올라 옵니다.
뭐겠습니까?

“예수를 믿어 버려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 안지낸다”
기발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나 교회와 목사를 욕하던 사람들이 여기서는 또 예수와 교회를 이용하려 합니다. 하하. 웃자고 한 얘깁니다. 우리야 그렇게라도 예수믿게 되면 좋지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벌어 집니까?
왜 이런 것들이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반도는 오랜 기간동안 흑암의 권세 속에 있었습니다. 부처들과 보살들, 원시천존과 태상노군 그리고 산마다 있는 산신령들, 마을마다 있는 서낭당과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들, 오래된 나무나 큰 바위, 험한 지형들에는 어김없이 촛불이 켜져있고 그곳에 영험한 신들이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아직도 염라대왕과 저승사자들은 이땅의 죽음을 꽉 잡고 있습니다.
더구나 괴기와 공포로 포장된 귀신 영화들이 아직도 끊임없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려 듭니다.
심지어 인간이 달에 왔다 갔다 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달에게 치성을 드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닷가에는 용신각들이 있고 점집과 철학관들은 규모는 아닌데 숫자로는 교회와 절을 훨씬 넘어 섰습니다. 심지어 미신을 배격한다는(?) 절에서 조차 산신각, 칠성각, 용왕각들이 있습니다. 금정산의 고모당을 지은곳이 바로 범어사입니다. 왜냐면 불교가 도저히 토속 미신을 배격하고는 자리잡을 수가 없었기에 타협한 결과입니다. 이땅에 기독교 성직자가 약10만 정도라는데 이들은 약 30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굉장합니다.

각지의 이름난 명승지에는 예외없이 비룡폭포니 와선대니 신선대니 옥녀봉이니 하는 존재들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땅은 한마디로 사탄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었습니다.
한반도에 기독교가 전파된지는 200년이 조금 넘었고 개신교가 전파된지는 겨우 백여년에 불과합니다. 이정도의 역사로 이 땅을 뒤덮고 있는 흑암의 권세를 벗겨내는건 솔직히 역부족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진정한 빛의 자녀로 행하지 않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겨우 확보된 해방구, 하늘을 향한 문의 자리마저 위태롭습니다. 야곱이가 벧엘세서 잠에서 깨어서 그렇쟎습니까.
이곳은 하늘의 문이요....
겉으로 거대해져가는 듯이 보이지만 교회의 영적인 힘은 점점 쇠약해져가고 세상을 향하여 도덕적인 우위에 있지 못하는 교회의 목소리는 세상에 대해 힘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요원합니다. 오히려 이 땅의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를 박해하는 형국이 되고 있습니다.
뭐 여기에 대한 요인은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것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사탄은 이땅을 다시금 자기의 확고한 영토로 수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자식들과 빛의 자녀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들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 바로 추석이고 설날입니다.
처음의 의미와는 완전히 달라져서 오로지 제사만이 중심이 되어 버린 투쟁의 장이 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이단들이 들어와서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기도합니다.
저는 이걸 이단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교회들로 바꾸고자 합니다. 규모를 키워서 이땅 자체로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복 만을 추구하는 이땅의 기독교도들로 바꾸력 합니다.

솔직히 이들이 바로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떨어진다고 할까요?
그래도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은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더 가까이 가기위해,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뱡향을 잘못 잡은 건데 요즘 교회들은 궁극적 영적 구원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냥 육적인 이 땅의 복락만을 추구하니까요. 바른 목표가 아니라 이들은 목표 자체가 아예 다른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영적인 복락과 구원의 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나만 잘되고 우리집이 잘되고 육적으로 부유해지고 출세하는 걸로만 목표를 잡고 나가다가 이러한 목표에 위배된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가르침도, 주님의 보혈도 가차없이 짓밟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을 위하여 , 교회 안에 침투한 잘못된 풍조에 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존 교회의 잘못된 추구와 행동이 사실은 이단들이 발호하는 가장 큰 빌미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이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교회들, 어둠속에서 헤매는 이땅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무신론과 폭력과 사기와 억압이 점점 심해지고 구조적 불균등 때문에 우리는 점점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조그만 먹이를 놓고 피터지게 싸우는 이전투구의 지옥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흑암의 권세에 굴종하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선지자들, 주의 종은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럼 바울은 이런 이단들에 휘둘리는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무엇을 빌었을까요?
바울은 이러한 이단에 휘둘리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랐기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상당히 순수한 분이군요. 그리고 골로새 교인들도 역시나 순수합니다. 하나님을 잘 몰라서 이단들이 들어왔다. 그래요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몰라서 이단이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서 이단이 들어오는 것이지요.

“기존의 교회는 다 멸망 받을 가증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기존 교회에서 나와서 우리 교단으로 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교회와 목사의 부패와 부정이 바로 박옥수니 안상홍이니 이만희니 하는 이단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근거입니다.

1.하나남의 뜻을 아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지는 이주 전 설교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계신데요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자신 없습니까? 완전한 회복은 글쎄요........
바울은 성도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기를 원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보세요. ‘알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요구하기만 하지 과연 하나님이 나를 위한 어떤 바람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어쩌면 교인들에게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그냥 자기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받아 들이면 그뿐이지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알면 뭐하겟습니까?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도 자기의 논리와 이성에 벗어나거나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자기의 뜻에 어긋나면 말씀을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바울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총명과 지혜의 그릇에 넘쳐 흐르도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심으로 자기의 바람을 우리가 알도록 하십니다.
단지 우리는 성령의 조명에 순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지혜와 총명은 굉장히 많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지혜는 헬라어로 ‘소피아’이고 히브리어로는 ‘호크마’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이지요.
이 말의 뜻은 ‘인간과 신의 일들에 관한 넓고 완전한 지성’ ‘ 가장 높고 완벽한 의미에서의 정신적 탁월성’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지혜’가 아니라 ‘신령한 지혜’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정신적 탁월성이나 이성적 이해력으로 얻게 된 지식이 영지주의 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생기는 이해와 확신, 그리고 말씀에 기초하여 살므로써 얻게 되는 지혜와 통찰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다 빼고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명령에 따른 삶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나가면 세상적인 이상한 방법이나 학문탐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과 말씀대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2.구체적인 기도제목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도록 기도한 바울에게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네가지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열매를 맺는데 여러 가지 수식어가 막 따라 옵니다. 하나님을 ‘범사에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거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요?
주께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주께 합당히’ 즉 ‘하나님께 합당히’ 란 말은 당시 아시아 지방의 비문에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입니다. 특히 버가모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뭐가 주께 합당한 삶일까요? 그걸 알기위해서 주를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선한 일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는 아름다운 열매와 같은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요 뭐가 ‘선한일’일까요?

이 선한 일의 대표적인 것이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
당시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대표되는 당시의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선한 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는가를 생각하면 무엇이 ‘선한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표준이 바로 ‘이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금 황당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성도의 모든 삶의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전체적인 특징을 말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단순히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것을 넘어서 용서하고 사랑하며 평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이고 모든 일의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전 주와 이주 전에 했습니다.

두 번째의 구체적인 기도제목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더 자라는 것입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뜻일까를 항상 생각하며 알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하려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잘 알아야 하쟎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지식이 자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하나님의 뜻대로의 삶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가는 것이고 우리가 삶속에서 점점 더 많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점점 더 거룩해 지는 것이지요. 성도의 궁극적인 거룩함을 위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겁니다.
그걸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 제목은 강한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삶 가운데 닥칠 수도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내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결코 나를 끝가지 이대로 두지 않으시리라는 믿음 때문이니까 강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강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담한 현실과 힘든 추석 때문에 너무 낙망하지 마십시오. 불신 가정의 며느리 성도 여러분!
인간의 힘으로 의지로는 결코 어려운 삶을 극복하고 평정을 유지하며 감사하며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러한 강한 믿음을 주셔야 되는 것이고 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인내하며 궁극적인 상급을 소망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의 ‘견딤’은 어려운 환경을 인내하는 것이고 ‘오래 참음’은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데요 뭘 감사하느냐하면 우리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인된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거룩하다 하셔서 성도가 되게 해 주셨기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사 빛의 나라,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주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져서 빛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로 옮겨주셨다는 것이지요.

맺음말
따지고 보면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서 옮겨서 하나님의 나라, 빛의 세상으로 옮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이 없다면 그곳으로 옮겨 갈 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주신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격을 부여하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흘림으로 그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서 깨끗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어두운데 있을 필요가 없고 빛의 나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소망하며 견디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며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가 역사하시고 그가 사랑하시는 나를 이대로 두지 않으실 것을 내가 믿기에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께 합당하게 행해야 하고 우리의 삶가운데서 선한 일에 힘써야 하며 그러기위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점점 더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연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아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말씀에 조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 이단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서 바울은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삶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이러한 삶을 살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죄악이 침투하고 이단이 침투하여 잘못가고 있는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로 인하여 영적인 암흑 속에서 고통받는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직도 흑암의 권세에 속해서 무거운 멍에를 매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이 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대한 군대를 양성해서, 엄청난 경제적 부를 쌓아서, 자녀를 많이 낳아서 나라를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이예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다 갖추어 져도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정신이 쇠퇴하면 결코 나라를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형편없는 나라를 보존하자는 말이 아니라 흑암의 권세가 아니라 빛에 속하여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는 그런 나라를 보존하자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먼저 우리 성도들이 깨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에 반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흑암에서 벗어 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위하여 저도 바울처럼 기도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빛의 자녀처럼 삽시다. 그래서 이 땅에 만연한 어둠과 흑암의 권세를 몰아 냅시다. 다시는 추석 때문에 제사문제로 이기심과 질투로 지나친 경쟁과 스트레스로 추석이 꺼려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서로 서로 고대하며 즐기며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빛에 속한 우리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힘이 모자란다고요.
그래요, 그러면 먼저 우리가 빛의 자녀처럼 살고 모든 이들도 그렇게 살기를 위하여 기도하면 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15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기심은 간단한 농담에서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거지요. 첫째, 사촌이 땅을 사봐야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둘째, 나아가 그와 비교함으로서 나의 삶이 더 초라해지기 때문에, 자꾸 배가 아픈 겁니다. 이건 오늘날 명절 날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촌이 취직하고, 결혼해서, 애까지 낳으니, 배가 아프다 못해서 가기 조차 싫어!!!"

우리의 마음은 어느덧 그렇게 물들어버려서, 좋은 일에 칭찬해 주고,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친절과 배려가 실종되어 버린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덧 그렇게 메말라버려서, 남의 불행에 대해서만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따끔한 소리와 각종 조언폭탄을 해주는 이상한(?) 친절을 베풀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세워서, 저마다 자신만의 성벽을 건설해 나갑니다. 굳건히. 더 굳건히.

가끔 2천년 전에 왜 예수님은 다른 말도 아니고, "서로 사랑하라" 라고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담을 세우는게 훨씬 더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21세기는 "너 없이도 즐겁게 잘 살게끔" 디자인 되어가고 있습니다. 비어진 사랑은 다른 대체물을 향해서 쏟아붓고 만족하면 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취미생활에 몰두하고, 타인을 지워나가고, 그냥저냥 잘 사는 듯 합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 성 밖의 사람들을 향한 적대감은 커져가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세상. 정말로 세상은 가만히 두면, 절로 우중충한 잿빛으로 변해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물결에 거부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들, 사랑을 실천해 보려는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힘든 사람들에게 말없이 그저 밥한끼 사줄 수 있는 여유, 잘 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넓은 마음, 너와 내가 같은 사람이자, 아픔을 느끼는 존재라는 자각. 그렇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삐뚤어진 모습을 자주 발견하는 저 역시도 잘 안 됩니다. 아마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사회비판세력의 선두에 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백마디 사회 비판보다, 직접 이웃을 도와주는 작은 실천이 더 값진 것임을. 우리가 사랑의 아들의 나라. 천국 같은 일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네요. / 2013.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