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도 아니고, 배경 이해에 문서 하나를 할당하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천천히 가는 비둘기호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은,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역시 배경을 잘 파악해두면, 사건을 한결 재밌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말하자면 이번 문서는 "왜 애국계몽운동이 등장했는가?" 에 대한, 기나긴 답변정도. 여하튼,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이야기 출발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추락하는 직접적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꺼잖아요. 그죠? 항일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 국권피탈에 맞서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문서에서는 그 한 가지인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고요. 자! 과연, 넘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서, 애국계몽운동은 어떤 방법을 선택했던 걸까요?
조금 길지만, 우선 배경부터 한 번 볼께요. 조선의 국권이 빼앗기는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볼께요. (*물론, 국권 피탈 과정은 나중에 일제 강점기 문서를 정리할 때, 아주 자세하게 볼 수 있을꺼고, 이번 문서에서는 기본적 흐름을 가볍게 느껴본다는 취지이므로 부담없이 접근하면 충분해요. 언제나 그렇지만, 이 정리는 참고용으로서 재미와 흐름을 중시하니까요!)
1904년 러일 전쟁을 통해서 러시아와 일본간의 균형이 깨지고 맙니다.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러시아 까지도,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철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일본이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외세를 통한 체제 유지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만약, 외세의 균형이 깨지고 한 쪽이 일방적으로 커져버린다면, 그 나라의 속국이 되어버릴 위험이 커집니다. 일본이 10년 사이에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또한 뒤에서는 조선은 내꺼라며 미국 영국과 협의를 해버립니다. 참으로 암울합니다. 조선은 일본의 강력한 입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외교적 방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904년 이후, 점점 식민지로 추락해 나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주내용은 애국계몽운동이므로, 여기서는 국권 피탈이 되는 과정에서 그 핵심적인 것만 따라가 볼께요. 이게 뭐야? 너무 내용이 많아? 라면서 부담가지시면 안 돼요~ 그냥 편안하게! 아래의 내용을 지금 억지로 다 외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건 개요일 뿐이고, 나중에 일제 강점기를 배우며 하나씩 열심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꺼에요. 걱정 마세요!
국권이 넘어가는 과정은 이러합니다. 1904년 한일의정서! 일본이 군용지를 마음 껏 사용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며, 1차한일협약을 체결합니다. 고문을 파견함으로서, 고문정치를 시행하지요. 쉽게 말해, 일본에 의해 외교고문과 재정고문이 파견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입맛대로 정책이 좌지우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가 더 지났어요. 1905년에는 2차한일협약을 체결하는데요. 이것이 그 유명한, 을사조약 입니다. 핵심은 외교권이 박탈되었다는 것이고, 통감정치가 시작됩니다. 이 때 부임하는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 였고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고종이 강하게 반발합니다. "이건 아니잖아! 내가 싸인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일본 맘대로 뭐하는 짓이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합니다. 그러자 일본 측에서는 외교권도 없는 나라가 어디 감히 특사를 파견하니 라며, 뒤에서 초강력 백태클을 걸어버립니다. 분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이윽고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켜 버리고, 순종을 즉위시킵니다. 이 때 조약을 또 맺습니다. 한일신협약 (1907년 정미7조약) 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차관이 일본인이 되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정부 각부처의 실권이 넘어갔으며, 차관정치의 시작이었지요.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어버립니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체결해서, 사법권을 박탈당합니다. 그 다음 해는 알다시피 조선이 끝나지요.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조선은 일제 식민지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한 번만 더 다시 봅시다. 고종이 아관파천의 결단을 했을 때만해도,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다툼을 하는 절묘한 균형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균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고, 이후 줄줄이 이어지는 협약을 통해서 국권이 다 빼앗기고 있구나를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응을 했는가? 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집권층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외세를 활용하는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예전의 여러 위기 때마다 외세가 개입하는 모습은 이제 지겨울 만큼 익숙한 장면들입니다. 그래서 조금 독하게 말하면, 이건 활용이 아니라 외세에 의존하면서 정치를 했던게 아니냐 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음, 그러면 정치 권력이 없었던 일반 사람들은 어떤 대응을 했을까요? 여러 장면들이 있습니다만, 이번 문서는 그 하나의 노선인 애국계몽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구, 배경이 너무 길었네요 >.<)
애국계몽운동의 흐름은, 멀게는 개화파 지식인들의 출발시기, 가까이는 독립협회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물론 독립협회는 정부의 탄압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독립협회 사람들을 다 총을 쏘아 죽여버린게 아니었고, 그냥 말그대로 해산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이 되면, 독립협회를 계승하는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납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은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사회진화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개화운동과 독립협회를 계승하였으며, 사회진화론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 이쯤에서 질문이 들어오겠지요? 그러면 사회진화론은 뭔가요?
사회진화론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개념으로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동물세계의 법칙을 인간세계에 적용시킨 이론입니다. 그래서요? 하하, 그러니까, 우리도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자, 힘을 키우자! 라고 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간 것입니다.
실력을 키우자! 구체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에 집중하고, 언론을 만들고, 식산흥업(경제발달)을 하자! 라고 대안을 제시하고 실행해 나갑니다. 근본 핵심은 실력 향상, 사람들을 계몽하자는 측면이 강합니다. 또한, 이런 흐름들은 후에 일제강점기의 실력양성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면, 교육을 위해 오산학교, 대성학교를 세웁니다. 언론은 대한매일신보 등을 창간합니다. 이 시기의 신문발행은 계몽의 측면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두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식산흥업을 위해, 자기(도자기)회사, 태극서관(서점) 등을 통해 경제발전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면, 애국계몽단체들에는 뭐가 있었는가! 다음 문서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의 영감 및 장문 - 문서 내용과 연결되는 생각꺼리 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재밌는 대목이고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회진화론의 밑바탕에는 경쟁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약한 존재는 적자(적응하는자)가 되지 못했으니까 생존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회진화론의 결정적 한계는 뭐냐하면, 만약에 우리가 강자가 되지 못한다면? 열심히 해보니까 결국 우리는 약자로 판명이 되었다면? 이 경우,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음을 그냥 인정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던 일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친일파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이 가진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실력을 키워서 강해지자는 장점도 분명 있지만, 끝내 약자로 판명되면 가차없이 체념하고, 주어진 비극적 현실 앞에서 약자는 어쩔 수 없다며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만 합니다. 과연 그러한 걸까요? 생각해보면, 요즘도 사실 사회진화론자의 주장들이 이곳저곳 널리 있습니다. 얼마든지 전개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어렸을 때부터 경쟁논리를 체화하기도 합니다 - 승자가 많은 것을 차지하는게 당연하며, 약자는 "니가 노력하지 않아서야" 라고 자신의 몹쓸 행동을 정당화 하기도 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싹쓸이 하는게 당연하잖아!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쟁이란, 발전을 위해서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점도 분명 있지만, 또한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을 경시하는 문제점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지나친 경쟁 보다는 나눔과 연대라는 가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경쟁과 나눔이 서로 상호보완을 해나갈 필요가 있지 않나 라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승자에게는 그 뜨거운 열정에 박수쳐주고, 약자에게는 일으켜주어 다시 기회를 주는 시스템의 구축. 이 점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이와 반대로, 잔인한 사회를 구축해, 승자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약자를 무참히 짓밟는 체제로 가면, 이런 사회는 행복과 아주 거리가 먼 사회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고요.
여담으로,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며, 구한말 일본의 침략 실상을 알리고, 계몽운동에 열정을 불태우던 외국인 어니스트 베델은 1909년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안타깝게도 그 말은 얼마 가지 못하였고, 1910년 한국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애국계몽운동에서 활약한 외국인이라고 할까요. 당연히 일제가 탄압했으며, 죄를 물어 재판에 두 번이나 서기도 했습니다.
저는 참 신기했습니다. 한 외국인이 바라보는 구한말의 조선, 영국인인 그는 남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기도 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정작 일부 조선 사람들이 체념에 빠져서, 이제 이 민족은 답이 없는 약소한 존재라고 결론내리며 친일로 돌아서기 시작할 때, 누군가는 다르게 생각하며, 감옥으로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힘이나 승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닐테지요. 오히려 위험한 것은,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힘이 없으면 누군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는 노예근성, 이런 의식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우리가 힘을 가졌을 때에는 타인을 돌아보는 여유가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힘이 없을 때에도 얼마든지 할 말은 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