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항일의병운동 2부 -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시북(허지수) 2013. 12. 11. 18:27

 2부 이야기 입니다. 지난 문서에서 개인의 투쟁을 살펴보았다면, 이번 문서에서는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보려합니다. 크게 세 가지를 정리할 수 있는데, 어렵지 않을 꺼에요. 중요한 대목을 체크해보고, 각 의병투쟁의 흐름을 이해해 봅시다. 크게 본다면, 개화파의 흐름이 애국계몽운동과 연결되고, 위정척사파의 흐름이 항일의병운동과 연결된다는 도식도 알아두면 좋겠고요.

 

 먼저 볼 것은 1890년대의 사건입니다.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을 거치면서 등장하는 사건 - 을미의병이 있습니다. 을미의병의 특징은 양반 유생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민석, 이소응 같은 인물들이 있으며, 음 약간의 한계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나라가 위급한 순간에 의를 위해서 들고 일어났다는 점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유생들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왕을 중시한다거나, 질서를 중시하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장면으로 들어가 볼께요.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뒤를 이어 을미개혁을 통해 단발령이 강제 시행됩니다. 그런데 단발령은 극렬한 반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내 부모가 준 신체를 어떻게 강제로 손대려는가!" 사회적으로 난리가 났지요. 자, 그런데?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단발령을 강제로 안 하겠다고 한 발 물러섭니다. 게다가,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김홍집도 죽었고, 이제 고종이 "의병들은 이만 돌아가시게"라고 해산을 권고합니다. 보다시피, 고종이 권고해산을 권유하자, 결국 의병이 해산합니다. 왕이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유생들 입장에서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기에는 어려웠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볼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 있던, 을사의병의 모습입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신돌석은 이름부터 포스가 남다르지요! 을사의병에서는 평민 의병장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신분에서 의병장이 나왔고, 한층 더 격렬한 투쟁을 보여줍니다. (*또한, 신돌석은 이어지는 정미의병까지도 활약하기도 하고요.)

 

 최익현에 대해서 잠깐 조명해 볼까 합니다. 최익현 참 많이 등장하지요. 대원군 탄핵과 관련된 인물이었고, 개항 반대에 앞장섰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령, 도끼를 들고와 내 목을 먼저 치고 개항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행동들에 전반적인 일관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최익현이 추구하고 있는 보수주의 노선에 어긋나면 "아니다!" 라고 할 말을 하는 모습이 기품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보수가 무엇인가요? 수구당이나 그런 부정적인 느낌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보수란, 기존의 갖고 있는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는 왔다 갔다 철새처럼 기회에 영합하는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은 더더욱 보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조 있게, 사회의 전통적인 질서와 올바른 태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권력에 아첨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닌, 잘못된 일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보수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해외 사례를 잠깐 보면, 보수적 성향의 프랑스 장군이자 전 대통령인 드골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들을 봐주지 않고 청산했음에도, 그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딸을 사랑하고, 진보당 당수보다 더 검소하게 살았던 것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보수... 참 멋지지 않나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보수주의자의 품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하튼 최익현은 대원군 탄핵, 개항 반대, 단발령 반대, 의병 투쟁을 전개합니다. 의병 투쟁 때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의병 투쟁 도중에, 지방군인 진위대와 맞서게 되는데, 최익현은 "어찌 조선 사람들끼리 이렇게 싸우고 있어야 하는가!" 라면서 스스로 진위대에 잡히기를 자처합니다. 최익현은 진압되었고, 대마도로 끌려가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킬 때, 그의 나이 70대. 그러므로,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세 번째, 1907년 정미의병은 대표적인 인물로, 이인영, 허위, 홍범도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참 잘 나오는게 정미의병이기도 합니다. 늘 문서 정리하면서도 느끼지만, 이런 드라마 같은 개개인의 이야기들 앞에서도, 어떤 대목이 시험에 자주 나오고, 또 중요한 대목이 어디며, 이러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마음 아픈 이야기 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역량 부족한 정리의 한계이다보니, 부디 너그러이 양해를...)

 

 1907년 한일신협약에 의해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대대장 박승환도 격분하며 자결하였고... 그래서 해산된 군인들이 정미의병에 합류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즉, 규모가 굉장히 커졌고, 의병전쟁화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13도 창의군(연합 의병)이 결성되고요.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제의 군대해산 명령에, 우리는 불복종 하겠다고 의병들이 대거 들고 일어난 셈이지요.

 

 외국에다가 우리 의병은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민란이나 반란이 아니라, 왕의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고 있는 합법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라고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미의병은 한계가 조금 있었습니다. 창의군을 이끌던 총대장 이인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짐을 싸고 내려가 버리고, 허위가 지휘를 이어가는데... 이 이인영의 행동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런 행동은 논술 주제나 한 번쯤 고민을 해볼 필요는 있겠지요. 이인영의 경우, 아이들에게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로 밀리는 상황에서, 나라보다는 개인의 효를 중시한다는 것은 정당화 되기 어렵다는 느낌은 듭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에서 무엇을 앞에 둘 것인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또한, 높은 자리는 그만큼 높은 책임도 따른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결국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일제에 의해 정미의병까지 진압되었으나, 그렇다고 다 접어버린 건 아니었습니다. 전라도 지역에서, 싸움은 계속되며 호남의병이 들고 일어납니다. 일제는, 의병들에 대해서 마지막 소탕작전을 한다는 의미로, 남한대토벌작전(1909년)이 전개되었습니다. 물론 토벌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일본측 입장에서의 단어선택입니다. 의병이 무슨 토벌대상이겠어요.

 

 그래서, 이쯤에서 우리는 이제 조선의 빛이 완전히 꺼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네, 여기가 개항기 정치사의 마지막 문서입니다. 다음 문서부터는 개항기 경제와 사회 모습 등을 살펴보려 합니다. 의병들은 이제 나라 밖,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곧이어 1910년 일제강점기가 되었고, 이후에는 의병투쟁의 흐름들이, 나라 밖에서 이어지며 계속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갑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짧게 정리한다면, 한쪽에선 애국계몽운동으로 열심히 싸워나갔고, 또 다른 한쪽은 의병을 일으키며, 내가 지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국권 피탈을 막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선조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고, 치열하게 살아갔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의 꿈,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그 꿈.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하는걸까요? 답은 각자의 몫으로 비워두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 말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천하흥망필부유책(天下興亡匹夫有責).",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데는 한낱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오늘의 영감 -  나라가 위태로울 때, 싸움에 나섰던 사람은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수는 무관심이라는 녀석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고, 아웃사이더로 사는 게 좋겠다는 몹쓸 생각을 어린 시절에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귀찮아" 한 마디면, 많은 것을 변명하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 불편함을 좀 감수하고, 피곤함을 좀 감수하면서까지, 즐겁고 멋진 일들을 해나가다보면, 그런 삶이 오히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박한 깨달음 이후, "절대로 삶을, 그리고 순간순간을 귀찮아 하지 않기를!" 이것이 저의 소박한(?) 바람이 되었습니다.

 

 .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이 무척이나 춥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이야기를 하나 반사해 놓고 가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박용후 형님의 강의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추운 날 잘 어울리는 멋진 이야기 입니다. 오늘날 20대 기준으로 약간만 각색을 하겠습니다 :)

 

 청년은 지금 술약속에 늦었습니다. 날씨도 추워죽겠고, 절친이 기다리고 있건만! 그런데 술집 입구에서 꽃파는 할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청년, 꽃 좀 사줘..." 청년은 묻습니다. "날도 추운데 왜 꽃을 팔고 계세요?" 할머니는 딱하게 답합니다. "우리 손녀딸이 아픈데 약값이 없어... 이렇게라도 꽃을 팔아야 약값이라도 마련할꺼 아닌겨"

 

 청년은 선뜻 만원짜리를 꺼내어, 꽃을 사고 할머니를 격려합니다. 이윽코 청년이 꽃을 들고 후다닥 술집에 들어가는데... 절친 녀석은 입구에서부터 오고 있는 청년을 보자마자, "너 인마!" 당황한 듯 이야기를 곧장 꺼냅니다. "저 할머니 사기꾼이야!!! 이 동네에서 항상 손녀딸 아프다면서 꽃 팔고 있단 말야!!! 할머니 손녀딸도 없대!!!"

 

 이런! 아니, 그런데? 청년은 갑자기 표정이 환해집니다. "진짜? 레알(real)? 쩐더(真的)? 아 다행이네, 손녀딸이 아픈 게 아니었네! 야, 인마 한 잔 하자, 건배!"

 

 저는 아인슈타인의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 기적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세상을 비난하고 억울해하며 살기에는, 우리네 멋진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게 아닐까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