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경제파트 이야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첫 번째로는 외국과의 조약들을 상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외국과의 조약은 개항기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 점을 테마로 해서, 부담없이 읽어내려간다면 충분할 듯 합니다. 게다가, 일종의 복습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부담없이 개항기 내용들을 경제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꺼에요. (이미 다루었던 이야기가 많을 것이므로) 아주 쉬워요. 하하.
첫 출발은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 시작합니다. 강화도조약의 기본적인 내용으로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이 해양측량권, 치외법권 등을 가져가는 내용이 있었고, 심각한 불평등조약인 것까지 기억나면 뭐 충분하겠지요. (강화도 조약이 뭐람? 이라면, 이 문서를 참고해 볼만 합니다. → http://srw.kr/1393)
그러면, 강화도조약에서, 좀 더 구체적인 세부규칙 두 가지를 더 파고들어가 봅시다. 번호를 앞에 표시할께요.
① 조일무역규칙 -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3무 입니다. 세 가지가 없다는 건데요. 무관세, 무항세, 무제한곡물유출입니다. 사실 관세가 없다라는 것은, 당시의 조선 입장에선 대단히 불리한 조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은 후발자본주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경제력 면에서 일본보다 한 발 밀린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따라서 무관세로 일본의 괜찮은 물건들이 조선에 값싸게 들어오기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간 떨어지는 조선의 생산품들은 줄줄이 문닫아야 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기술우위를 앞세워, 싸고 질좋은 면제품들을 조선 시장에 가져와 막 풀어버립니다. 이러면서 전통적인 조선의 수공업자들이 죄다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제한 곡물유출은 부작용이 특히 심각했습니다. 마치 블랙홀처럼, 조선의 곡물이 일본 쪽으로 쭉쭉 빨려들어갑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저임금 수출정책을 강력하게 추구했고, 저임금을 위해서는 곡물 가격을 적정하게 유지하는게 필수적이었습니다. 생활물가가 안정되어 있을수록, 임금인상의 동력도 자연히 줄어드는 편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대목! 이제 치명적 문제는 조선의 상황입니다. 일본으로 대거 곡물이 유출되고, 당장 조선에서 먹을 곡물이 귀해지기 시작하자, 곡물가격이 지속적으로 계속 올라갑니다. 한마디로 먹고 사는 비용이 올라가는 형태였지요.
그러므로 조일무역규칙 이 대목 단 하나만 본다고 해도, 불공정한 조약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음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봅시다. 수공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이 지금 대거 망했지요. 게다가 쌀을 먹고 살아가던 기층 민중들의 생활이 어려워 집니다. 쌀값 오르고, 생계비 오른다는 건, 참으로 삶이 고단해지고 팍팍해지니까요. 외국과의 조약은, 삶의 모습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 꽤 흥미로운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선 정부는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 나름대로 수습을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어디까지나, 조약은 급하게 혹은 함부로 맺어서는 안 된다라는 점. 실력이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② 조일수호조규부록 - 간행이정이 설정됩니다. 어려운 뜻은 전혀 없고요, 부산 같은 개항장 내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설정합니다. 처음에는 10리 안에서만 거래하라! 라고 정하였고요. 또한 개항장 내에서는 일본화폐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면제품을 가지고 들어왔고, 쌀을 가지고 나가는 체제. 즉, 미면교환체제를 유지해 나갔는데요. 그런데, 간행이정 10리(약4km)로 인해, 그 범위 밖으로는 거래하러 나갈 수 없었습니다. 활동범위가 상대적으로 넓지 않았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는, 거류지 무역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잠깐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일본산 면제품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소비하게 된거에요?
개항장에서 일본제품을 사갔던 전통적인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보부상이라든지, 객주 같은 상인들의 손을 거쳐야만, 원하는 소비자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상인들은 보부상과 객주에게 물건을 주었고, 그 보부상과 객주는 물건을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판매합니다. 네, 중개무역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큰 그림으로 멀리 떨어져서 관찰해본다면, 초창기의 무역하는 모습은, "거류지 무역에 의한 중개무역의 형태" 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말이 좀 복잡하지, 쉽게 쓰면, 일본상인이 정해진 자리(4km이내)에 머물면서 중간상인에게 이것 좀 팔아줘 하면서 대거 물건을 주면, 중간상인은 소비자에게 나눠서 팔았다는 거에요.
한편 흥미로운 것은, 이 시점에서 보부상과 객주들은 "정말로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었던 중개무역"이었다는 것! 일본상인에게 괜찮은 물건을 싸게 산 다음에, 소비자에게 이윤을 붙여서 물건을 팔았으니, 돈을 상당히 많이 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조선의 수공업자와 기층 민중들은 힘들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중개업자들은 대박찬스 였다고, 파악해 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분명 이득을 취하는 사람도 등장한다는 것.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무역 목적의 부산항 외에도, 1880년에 원산항이 열리고, 1883년 인천항까지 열립니다. 원산은 러시아 남하를 막는다는 군사적 이유로 개항되었고, 인천의 경우 수도인 서울과 가까우므로, 정치적 목적으로 열린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인 1882년에는 아주 중요한 조약이 등장합니다. 미국과 조약을 맺기 때문입니다. 사실 반발도 많았습니다. 영남 만인소에서는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며, "서방과 조약이라니? 말도 안 된다!" 라며 거세게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어쨌건, 우여곡절 끝에 결국 미국과 조약이 체결됩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입니다. 이 조약도 들여다보고, 주요내용정리를 시작해봅시다. 번호를 이번에도 붙이겠습니다. ① 관세가 설정됩니다! 어? 일본과는 없었는데요? 네, 미국과의 조약에서는 관세가 처음부터 들어갑니다. 지난 날, 관세 설정을 안했다가 피눈물 나는 현실을 깨닫았으니, 미국과의 조약은 관세를 도입한 것입니다. 또한, 이 흐름을 바탕으로 일본과의 조약에서도 무관세를 수정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고요.
② 거중조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미국이 개입해서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라는 조항입니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고 위안이 되는 말 같지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외교적 수사로만 그칠 수 있습니다. 외교적 수사가 뭔가요? 다시 말해, 나라가 힘이 없거나, 매력적이지 않고 가치가 없다면, 외교 조항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거중조정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후에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이 뺏기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고종이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사실상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외교와 역사에선 영원한 우방, 영원한 적국 같은 개념은, 너무 안일한 현실인식이 될 수 있음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지요.
생각해보면 1871년 처음 미국과의 만남은 어땠습니까, 함선이 와서 포를 쏘고, 사람도 죽고, 우리의 적으로 느껴졌던 나라가 미국이었습니다. 이것을 신미양요라고도 하고요. (그래서 유생들이 그로부터 11년 후, 미국과 대뜸 조약맺는다고 하니, 말도 안 된다며 극렬히 들고 일어난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니, 그랬었는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는, 미국과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되기로 했습니다. 아하, 적에서 친구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나중에 또 배신을 하고, 정작 조선의 뒤통수를 때리잖아요. 인간으로 친다면, 어쩐지 믿음이 별로 안 가는 모습이랄까요?
그러나, 조금 엄격히 접근한다면, 외교는 자국의 국익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비정하고,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무대가 외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외교를 테이블 위에서 하는 전쟁이다 라는 재치 있는 표현도 하고 있습니다. 자연히, 오늘날 한국도 외교역량은 아주 중요하겠고요.
자,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미국과의 첫 조약은 꽤 출발이 좋아보이는 건 분명합니다. 관세도 제대로 하기로 했고요, 거중조정으로 위기 때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조약은 보통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보통은 서로가 윈-윈 하는 관계를 지향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내어줄 건 내어주고, 얻을 건 확실히 얻곤 하니까요. 조미수호통상조약도 그랬습니다. 좋은 대목도 있지만, 역시나 독소 조항도 있었으니, ③ 바로 "최혜국 대우"가 들어갑니다. 미국과의 조약에서 최초로 들어갔고요. (*사실, 앞서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만 하더라도 불평등 조항인 건 분명하나 최혜국 대우 조항은 없었습니다. 시험에서 종종 물어보니 잘 체크해 둡시다)
그러면 최혜국 대우가 뭔지도 꼼꼼하게 살펴봅시다. 요즘 쓰는 말로는, 자동 업그레이드, 자동 업데이트 조항이라고 보면 적절하겠네요. 한 번 예를 들어볼께요, "만약 조선이 일본에게 광산채굴권을 하나 줬다면, 그러면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이 조항이 들어있는 나라에게도 비슷한 이권(철도권, 통신권, 삼림권 등)을 동일하게 줘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건 후폭풍이 엄청난 겁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마다, 다 이 최혜국 대우 조항을 끼워넣으며 조약을 맺습니다.
결국 나중에 아관파천 사태가 일어나며 최혜국 대우 조항은 "펑"하고 난리가 납니다. 전에도 문서 하나를 들어서 제목으로 썼지만,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이 피신했고, 그런 상황에서 공짜 점심은 없단 말이지요. 러시아 한테 뭔가 굵직한 이권 하나를 내줘야 했습니다. 쉽게 말해, 러시아한테 답례로 이권 하나 건네줬다가, 최혜국대우 조항으로 인해, 줄줄이 다른 나라와의 조약도 몽땅 자동 업데이트... 따라서, 타국에다가 무려 아홉 개의 이권을 더 줘야만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최혜국대우는 조선에게 있어선 대표적 마이너스 조항, "너란 놈 때문에..." 라는 조항입니다. 물론, 냉정히 보면, 조약이라는 게 우리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외교라는 것 자체가 이익과 이익의 싸움이 맞붙어서 합의를 이끌어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50대 50의 결과값이 가장 이상적인 균형이겠지만, 거기서 얼마만큼 더 노력해서 우리가 51이 되도록 할 것인가, 이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강화도 조약은, 이건 뭐 조선이 멋모르고 일방적으로 당했던, 거의... 10대 90, 0대 100으로 조선에게 불리했던 치명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끙! 이건 뭐 진짜 보이스피싱 수준?)
그리고, 청나라가 중간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적극적으로 알선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건 덤으로 체크를 해두면 되겠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 조선이 대국 러시아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막고, 또한 러시아를 강력히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의 연결"을 하기 원했습니다. (*역시 덤으로 체크한다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할 때도 청나라가 권고를 해요. 굳이 일본과 전쟁을 펼쳐서 혼란스러워 질 필요가 있겠니, 조약은 세상의 흐름이니, 큰 거부감을 갖지 말고, 한 번 해보라고 청나라가 권고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다르게 보면, 개항 초기 청나라의 시선 및 영향력은 상당했었던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조선과 청나라의 연결고리를 끊어놓으려고 지속적으로 많은 작업을 시도하였으니까요.)
헉... 너무 길군요. 여기서 잠깐 끊고, 2부에서 1882년 이후의 모습들을 계속 살펴볼께요. 빠른 업데이트가 되지 못하는 점은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올해 안에, 결국 완전히 다 끝내지 못해서 마음 아프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여튼, 언제나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영감 - 몇 가지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습니다. 요즈음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최근의 관심은 "무엇이 인간을 기쁘게 하는가?" 입니다. 특이한 대목에서 하나의 답을 찾아서 소개할까 싶습니다. 강판권 교수님의 이야기 입니다.
"나무에서 배운 것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기주의란 말에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어설픈 이기주의자가 문제지, 철저한 이기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기주의와는 다릅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을 완성해야 남에게 어떤 역할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애쓰기에, 무수한 나뭇가지로 그늘을 만들고,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여주고,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줍니다. 자기를 위해서 충분히 애써야 합니다. 치열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품어선 안 됩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타인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봅니다. 대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 하고... 그렇게 또 온라인으로 좋아요를 누르고, 오프라인으로 회답의 대자보를 붙이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면, 저는 "나는 걱정없이 잘 지내요" 라는 말이, 얼마나 무심하고, 아픈 말이었는가를 심히 돌아보게 됩니다. 10년이 더 흘러도, 그렇게 수십년이 더 흘러도,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그렇게 자기 목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기를 저는 열렬히 응원합니다.
제게도 근래에 가장 가슴 뜨거웠던 대목이 있으니 한 번 조명을 비춰보려 합니다. "사람의 의식은 달리는 기관차 앞에 있는 헤드라이트와 비슷한 것이라서 그 빛이 앞길을 비추지 않고 내부를 향하게 되면 큰 재앙이 일어나(정혜윤, 여행 혹은 여행처럼 中)" 우리의 의식이 나만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이 재앙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비춰본다는 것은, 괴롭고 불편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앞길을 비춰본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충분히 애쓰고, 자신의 모습을 꼭 품에 안고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의식이 세계를 향해서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곤궁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시인 브레히트의 말입니다. 자신에게 치열하길, 주어진 세계 앞에서 당당하길, 저는 열렬히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