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2월22일/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2(마태6:25-3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 1. 23:2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22일 주일 예배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2 (마태6:25-34)

오늘은 오래전에 설교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의 후속편이 되겠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의 우리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제자들도 동일한 걱정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주님, 그러면 우리는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보물을 하늘에 전부 쌓아 버리면 여기서는 어떻게 하지요?”라고 물어 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지요?”라고 묻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편이 되겠습니다.

먼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데 이 말에는 ‘너희는’ 이란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의 목숨을 위하여 너희들의 몸을 위하여” 라는 말이지요.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차이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된 너희들은 , 나의 제자된 너희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복을 받아 누리는 선택된 이들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어”

막연히 세상사람들에게 다 부어 주시는 복이 아닙니다. 오직 세상사람이 아닌 주의 제자들에게만 부어 주시는 복입니다. 오늘 믿는 우리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주의 자녀된 우리들이 마찬가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만 우리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 그런데 염려하다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나누어지다’란 말입니다.
무슨말입니까? 24절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재물과 하나님으로 나뉘어 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지만 재물이 주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재물과 하나님으로 마음을 나누면 이는 반드시 걱정과 염려로 돌아 오게 되어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날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황당한 말입니다. 요즘 돈없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까?

먹는거 입는거 말고도 집, 교육, 의료, 전기, 수도, 가스, 통신 같은 모든 것에 다 돈이 들어 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집이 없으면 초원에다 장막을 치고 그냥 살 수 있었는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선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만한 땅은 다 주인이 있고 아니면 사람이 거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는 몸을 누일 공간에도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래놓고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로 음식이 없거나 의복이 없으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소중한 목숨을 위하여 필요한 음식과 의복에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아버지께서 다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이 땅에 살지만 하늘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당장 염려하지 않고 모든게 잘될거라고 행복해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 제자들은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가지의 실례를 듭니다. 뭡니까?

공중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굶어 죽지 않고 잘 살아간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새보다 우리는 더 귀중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늘 아버지께서 먹여 살리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를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게 바로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다 책임져 주신답니다.

우리 주님의 설교는 시청각 교재를 잘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주는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보라는 말은 그냥 건성으로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이제껏 건성 건성 보아 넘겼더라도 이제부터는 자세히 관찰해 보고 그리고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껏 그냥 새가 당연히 먹고 살겠지라고 생각하고 건성으로 보아 넘겼다면 도대체 새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를 잘 살피고 이 새들이 굶어 죽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먹여주셔서 그렇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먹여 살리시는 새보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전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부산도 날씨가 조금은 추워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좌광천을 걷는데 오리소리들이 들려서 보니까 십여마리의 오리들이 물에 둥둥 떠 있습니다.
누가 먹이를 주는걸까요? 추운데 얼어 죽지 않고 살아 있는게 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오리들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된 우리들이야 아버지께서 먹이고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 나온 ‘귀하다’란 말은 ‘드물다’ 또는 ‘비싸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것과 완전히 분리된 확실히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새보다 당연히 더 귀하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하고도 확연히 구분되는 하나님의 나라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글쎄요, 아무도 못할걸요. 요즘 저도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의 키를 키울 수 있을지를 놓고 정말 많이 염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염려한다고 해도 결코 키를 키울 수 없습니다. 요즘 부모들 자녀들의 키를 키우려고 난리지요. 그러나 정답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키가 크는 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장 클리닉에서 키를 키울 수 있다고요? 글쎄요. 성장 보조제를 먹으면 도움이 된다고요? 하하, 글쎄요.

부모의 키에 따라간다고요? 천만의 말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는 본문의 ‘키’가 단순히 ‘키’를 말하기보다 수명을 의미합니다. 물론 어릴 때의 경우에 나이를 먹으면 키가 커지니까 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수명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하튼 키나 수명이나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해봐야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으로 우리의 의식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믿고 의지한다면 세상적인 것으로 나를 근심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옷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좀 웃긴 이야기지만 성경은 입는 것보다 먹는 것을 먼저 예로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는 것을 먼저 들지요. 예로부터 의식주라고 해 왔쟎습니까?
체면을 너무 중시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추운 곳에서 안입으면 얼어 죽으니까?
이스라엘은 더운 지역이니까 밤에만 좀 떨면 되니까 입는 것이 덜 중요합니까?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입는 옷은 정말 비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의복 때문에 정말 힘들어 했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면 밤이 되기 전에 도로 가져다주라고 하셨겠습니까? 왜냐면 그건 그 사람이 덥고 잘 이불이거든요.
우리가 잘아는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주님의 겉옷을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  외투를 훔쳐서 감추기도 했지요.

새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사는 것처럼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을 우리는 일반 계시라고 하지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을 우리는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사실상 자연의 곳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냥 보아 넘긴 꽃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따르지 못함과 같이 우리 하나님이 다 입히시므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란 말입니다.
혹시나 이 말씀을 어떤 상표의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하지 말란 말로 알아 듣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알마니, 샤넬, 구찌, 페라가모.....

참 여기서 백합화라고 번역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에는 백합이 없답니다. 그래서 백합꽃이 아니라 아네모네나 개양귀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이런 야생의 꽃을 누가 키우거나 입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데 그것보다 훨씬 귀하고 구별된 우리 하나님의 자녀, 하늘나라의 백성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고요? 내 아버지께서 입하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고 말씀 합니다. 비단에 금은으로 수를 놓고 물고기의 피나 귀한 열매로 염색을 해도 자연적인 한떨기의 꽃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인간이 만든 어떠한 천으로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들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들풀조차 입히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어찌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나라는 어찌된게 백만원이 넘는 패딩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비쌀수록 더 잘팔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옷자체를 입지 못해서 걱정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가끔 겨울에 헐벗은 노숙자나 걸인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옷의 기본 기능인 몸을 가리고 보호하며 따뜻하게 하는 기본기능을 충족시키는 옷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기본기능을 충족시키는 옷을 입는 것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한 벌 옷으로 낮에는 겉옷으로 밤에는 이불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와 닿았겠습니까?

그런데 걱정하지 말랍니다. 들풀보다 더 귀하고 확연히 구별되는 너희 자녀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입히실 것이랍니다.
그리고 “오 너희 믿음 없는 이들아!”라고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믿음이 없는 이들은 믿음이 적은 이들과 상통합니다. 결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 평소에는 믿음 있다고 자부하는 바로 우리들, 당시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먹고 살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랍니다. 믿음없는 이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 이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왜냐면 그들에게는 부자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지요. 무한대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 이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는 먹을필요도 입을필요도 없는 분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우리의 필요한 것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보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 신뢰하고 의지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주기도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존의 전쟁에서 허덕일 것이아니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이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네 고단한 삶이 풀릴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우리 주께서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돈을 쫓아가면 돈이 도망간다는 우리네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돈 돈 해봐야 인심만 잃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끼고 인색하게 부자가 된들 그게 지옥이지 그재물이 온전하며 그러한 재물이 주인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겠습니까?
돌고 돌아서 ‘돈’이라고 이름 한 그것처럼 오늘 나의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고 나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둡시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그 아버지께서는 내게 필요한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은 내일 스스로가 걱정하게 두고 우리는 오늘 현재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너무 허황되이 들립니까? 전혀 치열한 삶을 반영하지 못합니까? 세상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까?

아니요,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뿐만 아니라 빵도 필요함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오늘에 필요한 것들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얻기위해서라도 먼저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먼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아버지됨을 인해 우리에게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이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정의로 세상이 다스려진다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더 이상 우리는 억울하게 우리의 것을 빼앗기거나 짓밟히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땅에 여전히 악이 성행한다면 부자는 언제 누구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전전 긍긍하게 될 것이요 가난한 이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흙덩이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기에 우리가 비로소 생령이 된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와 더불어 영혼을 가지며 이 세상의 국민임과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문제는 육이 먼저가 아니라 영이 먼저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영은 불구가 되거나 굶주리거나 장애를 가지거나 못생기거나 한 것이 없이 그 하나 하나가 다 고귀하며 소중합니다.

육체가 비록 소중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떠나가게 되면 육체는 바로 썩어들어가서 결국에는 원래의 위치인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영은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영은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나온 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영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죄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단절되었지만 이제는 그 벽을 , 죄의 벽을 주께서 허무셨으므로 내가 오늘 다시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와 더불어 동행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육체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두려워하여 하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할 뿐 지금도 나의 옆에 아버지께서 계시며 나를 살피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내가 아버지께로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를 기도합시다.

나를 위하여 빌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런 기도는 할 시간이 없습니까? 내가 지금 죽게 되었으니 아무것도 다른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혼의 눈을 뜨고 내 안의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내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결코 나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나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나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 왜냐면 내가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2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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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건 매우 개인적이고 신기한 일인데, 저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메모를 어딘가에 해놓거나, 이미지를 따로 보관해 놓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이 흘러서, 이미 그것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하도 이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는 탓인지(?) 자기계발서 등에도 단골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원하는 삶이 있다면, 일단 적고 표현하라!

자, 완전히 다르게 접근한다면, 사람은 자기가 갖고 싶어하는 것에 "약하다" 라고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학이나 냉혹한 처세서에서는, 타인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주라 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무욕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함부로 조종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일반적인 사람이 욕심 없이 성인처럼 살아가는 것은... 생각해보면 너무 기준이 높은 것 같습니다 :)

저는 그래서 이 설교를 좋아하는 까닭이 조금 특이한 지점에 있습니다. "지금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전혀 슬퍼할 필요가 없으니... 때가 되면 세상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될 수 있으니... 전혀 걱정 하지 말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라" 라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채워주신다는 것,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가진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여유가 생깁니다. 가지고, 또 가지려는 마음 대신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는 힘도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잊어버릴 때가 저는 많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주어진 것들을 그냥 당연시 여기는 못된 습관들도 뿌리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잊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토록 귀중한 것이며, 그토록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한 번 뿐인 기회임을 생각해 봅니다. 그 시간을 염려로, 걱정으로 채워나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저는 이 찬송가 가사를 기억합니다.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을 갈 수 있는 까닭은, 주의 팔이 나를 지키시고, 주의 마음이 친히 나를 보호하심이라.

인생은 쓴 맛이며, 인생은 고단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가끔 기쁘게 느껴지는 것은, 홀로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며, 작은 믿음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기쁘게 살고, 소망하며 살며, 감사하게 살아가는 교인이 되고자 하는, 그 소박한(?) 꿈을 저는 잊지 않으렵니다. / 2014.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