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경제적 구국운동 - 방곡령에서부터 국채보상운동까지

시북(허지수) 2014. 1. 18. 01:25

 이번 문서에서는 경제적 구국운동들을 하나씩 살펴보려 합니다. 약간(?) 길긴 해도, 새벽 1시에 열심히 정리 중!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경제에 꾸준한 부담이 되었던 것은 "무제한 곡물 유출"이었습니다. 곡물이 자꾸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니까, 당장 조선의 곡물 가격이 꾸준히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정부는 1883년 경에 일본과 다시 협상을 하게 되었고, 이 때 방곡령을 내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1880년대 흉작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곡물은 일본으로 꾸준히 유출되었고, 조선 백성들은 굶주리고, 곡물 가격이 계속 오르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잖아요. 드디어 1889년 함경도와 황해도에서 대규모 방곡령을 전격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규정대로 1개월 전에 일본측에 미리 통보도 했고, 우리 이러다 굶주려서 큰일난다면서, "곡물 유출 금지(방곡령)"를 선언한 것입니다.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막상 방곡령을 시행하니까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분명히 1개월 전에 이야기를 했다 라고 주장했으나, 일본에서는 자기네들 접수하기 까지 시간이 좀 걸렸으니까, "그렇게 다짜고짜 방곡령 시행하면 안 된다"며 항의를 거세게 합니다. 헐?

 

 방곡령을 놓고, 일본과 수 년간 외교 마찰을 빚어오다가, 끝내 방곡령은 해제(취소)처리 되었고, 조선이 배상금을 지불하는 지경에 놓이고 맙니다. 아, 힘없는 조선이여! 참으로, 어이가 없긴 하네요. 그러므로 조약은 참 중요한 것이고, 실제 시행 때의 모습은 어떻게 되느냐를 유심히 살펴보는 관찰력이 필요합니다.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손해보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방곡령을 통해서 치솟는 조선 곡물 가격을 잡아보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는 것. 체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경제적 저항 형태로는, 아관파천 시점에 일어났던 "이권 수호 운동, 상권 수호 운동"이 있습니다. 역시나 하나씩 보도록 해요. 이권 수호 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로, 독립협회가 주도적인 활약을 했습니다. 독립협회 문서에서 다루었듯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한-러 은행 폐쇄, 절영도 조차 반대 (및 저지) 처럼 굵직한 일들을 이루어 냈습니다.

 

 이어서, 상권 수호 운동의 배경은, 서울에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이 들어와서 물건을 팔기 시작하니까, 기존의 서울 상인들, 즉 국가의 허락을 받고 물건을 팔고 있었던 시전상인들이 직접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소비자들 다 빼앗기고, 상권이 다 넘어갈 것 같거든요. 그래서 시전상인들은 "황국중앙총상회"를 결성해서, 상권을 수호하려고 했다는 점!

 

 여기서 잠깐! 이 대목에서 특히 시험에 잘 나오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민회와 신간회처럼, 이름이 비슷하다보니 헷갈리기 쉬운 문제니까 한 번 체크해 놓읍시다.) 독립협회는 나중에 해산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때 황국협회에 의해서 해산당하고 맙니다. 황국협회가 집회 장소에 난입해서 막 난리치고 깽판 놓고 하잖아요. 이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었던 단체입니다. 덧붙여 오래 전, 갑신정변 때 해상공국을 혁파하라는 주장이 등장하는데, 이 때 해상공국 역시 보부상들을 의미합니다. 정리하자면, 보부상과 관련 있는 단체는 황국협회, 혹은 해상공국! 입니다.

 

 그런데, 상권 수호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는, 황국중앙총상회 = 시전상인중심, 이라는 점을 꼼꼼하게 파악해 놓아야 합니다. 황국협회와 은근히(!)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아, 여담으로, 그나저나 왜 공부하는 분들 힘들게 황국이라는 말이 들어가냐고요? 1890년대 후반, 당시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했으니까, 황국 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셈이에요. (*저 어린 시절에 골목마다 "근대화슈퍼"가 있던 거와 비슷한 측면이랄까요? 아, 이건 웃자고 하는 농담...)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상권 수호 운동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상인들은 철시 투쟁을 합니다. 시장을 철수하고, 문을 닫는다는 거에요. 상인들이 단체로 문을 닫아버리면, 거주하는 서울 사람들은 막대한 불편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보니, 정부에서도 경찰들을 동원해서, "상점 주인 어디갔어! 문 열어!! 왜 그러냐!!" 라면서 압박을 가합니다.

 

 재밌게도, 이 때 시전상인들도 할 말이 있었던지, "우리가 왜 여는데!" 라면서 강력한 항의를 이어갑니다. 이 지점을 유심히 보면, 그만큼 사회가 이제 많이 바뀌었다는 거에요. 예전의 조선이었다면, 정부에서 나랏님이 와서 문 열라고 하면, 국가권력에 대해 감히 거부하기란 상당히 어려웠겠지만, 이제는 어느덧 세상이 변했다는 느낌을 확 주는 사료들이 많습니다. 하하. 예컨대, 시전상인 왈, "나라에서 나왔다고? 당신이 뭔데?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이렇게 철시까지 해가며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세부적 배경으로는, 독립협회가 나오는 이 무렵은, 이미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었잖아요. 또한 꾸준한 계몽 운동도 등장하고, 독립협회에서 인권을 강조하는 모습도 보여주잖아요. 즉, 사회가 전반적으로 자유권이 강조되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드디어 사람들의 의식도 성장하고, 생각도 달라지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참 신나고 재밌지 않나요? 하하, 저만 그런가요.

 

 이제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돌려, 1900년대의 모습으로 가보아요. 일본이 좀 더 노골적인 모습을 추진하고 있어요. 1904년 한일의정서를 통해서 군용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쓰고 말이지요. 특히 토지에 관심이 있었고, 땅을 좀 가져가고 싶었던 일본은 슬쩍 "황무지의 대규모 개간! 일본이 좀 할께!"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발하고, 맞서며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이 전개됩니다. 어떤 단체가 주도할까요? 애국계몽단체 할 때 살짝 언급했었는데, 기억나는지요. 에이, 모르겠으면, 지금부터라도 꼭 기억하려고 노력하면 괜찮아요.

 

 보안회가 중심이 되어서 황무지 개간 반대 운동을 시행했고, 또한 농광회사 라는 곳에서 "그러면 일본 대신에 우리가 황무지 개간할께!" 라며, 함께 반대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더욱이, 이 운동은 일본이 요구를 철회하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07년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합니다. 지난 문서에서 살펴봤지만, 일본은 차관을 굉장히 많이 제공했단 말이지요. 다시 말해, 조선의 빚이 지금 많이 쌓여있는 상황입니다. 이 때, 애국계몽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이, 이래서는 곤란하다, 큰일난다, 라고 판단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일제에 의해 국권이 자꾸 넘어가고 있는가? 그건 나라가 가난하고, 빚이 많기 때문이다." 라고 본 것입니다.

 

(조금 냉정하게 접근한다면, 당시 지식인들이 순수하다거나, 조금 순진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물론, 조선이 망국으로 향해가는 과정 속에서는, 차관을 자꾸 빌리며 빚이 늘어나고, 경제권이 박탈되어 가는 것도 컸습니다만, 전적으로 빚 때문에 망했다기 보다는, 외교권 박탈, 군대 해산 등 드러나는 노골적 제국주의를 막아내기엔 역량부족으로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래저래 1900년대의 상황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넘어갔지요. 1907년에는 정미7조약 하면서 고종 강제 퇴위 되었지요. 곧이어 군대 해산되지요... 그야말로 나라가 절단났습니다. 국채 보상 운동은 이 시기에 전개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시험을 대비해 ㅠ_ㅠ 중요한 대목이 있다면, 어디에서 이 운동이 출발했느냐 입니다. 국채 보상 운동은 대구에서 처음 출발했고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1920년대 국산품을 애용하자며 물산장려운동이 등장합니다. 이 때의 출발 위치는 평양입니다. 대구냐 평양이냐 출발 위치를 묻는 문제가 종종 등장하므로, 위치는 잘 파악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지금도 대구 동인동에 가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어요~)

 

 또한, 국채 보상 운동은 언론사에서 굉장히 많은 호응을 해줍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같은 인물은 국채 보상 운동을 끊임없이 홍보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열심히 맡았습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일이 진행되어나가고, 나라의 빚을 갚아가려는 분위기가 널리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몇 달 만에 엄청난 금액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좋았어! 좀 더 모으면 나라 빚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상황이 장난 아니게 흘러가자, 지금 일제는 매우 불편해 합니다. "양기탁? 뭐? 그 놈 구속시켜!" 그래놓고는, 양기탁에게 누명을 덮어씌우는 놀라운 전략을 선보입니다. "자네, 국채 보상 운동하면서, 돈 좀 모았다며? 그 돈 몰래 꿀꺽하며, 횡령했구만! 나쁜 XX!!!" 헐... 아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나쁘다고 하는건지...

 

 여기서 더욱 흥미롭게도, 양기탁은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일제는 국채 보상 운동에 대해여 타격을 입히는데 상당부분 성공했습니다. 일단 잡아놓고, 너 죄가 있다던데? 라고 혐의를 캐묻기 시작하면, 움찔하게 되는 겁니다. 이른바, 무죄가 분명해 보여도, 우선 흠집내기! 일단 할퀴기! 작전이랄까요.

 

 이렇게 자꾸 안 좋은 이미지를 덧씌우기 시작하면, 어느새 사람들은 "어 저 사람 횡령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문제가 있나봐..." 식으로 생각이 유도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혹자는 "에이~ 말도 안 돼.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황당한 전략이 통하겠어요?" 라고 되묻겠지만, 실은 오늘날까지도 종종 볼 수 있는 유력한 정치적 수법이라는 점. 그렇기에, 우리는 섣부른 판단 보다는,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를 살펴보는 여유로움과 지혜로움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국채 보상 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이 이어지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 그 정신만큼은 중요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일제가 차관(돈)을 막 빌려주면서 조선을 빚더미로 만들어 놓자, 거기에 맞서며 국채 보상 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었다는 점. 이 때, 금주하자, 금연하자, 물건 팔자 식으로 아끼고 아끼면서 돈을 모아나갑니다. 이런 장면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참 착하지 않나요.

 

 그로부터 길고 긴 시간이 흘러, 현대사회에서는 IMF 때, 금모으기 운동도 하고, 나라 어려울 때는 그렇게 함께 애쓰려는 모습들이 있었다는 점은,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찡하기도 하고... 여담이지만, 우리에겐 유전자가 남아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힘들 때는, 모두가 노력해보자. 막돼먹은 인간은 절대로 퇴출시켜야 한다." 같은 유전자 말이지요. 이제 다음 문서에서는 개항기 평등해지는 사회 모습을 살펴보도록 할께요. 근대사 경제 이야기도 벌써(!) 끝났습니다. 매번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의 영감 - 며칠 전, 믿기 어려운 통계 수치를 보았습니다. 청년 고용률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82년 이후, 역대 최초로 청년 고용률이 39.7%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IMF 한파 때보다, 지금의 청년은 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의미겠지요. 이 땅의 안녕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답이 보이지 않아 힘든 청년들에게, 저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제는 경제평론가 이원재 소장님의 이 이야기를 보고,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서점 주인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 돈은 아니더라도 적절한 수입을 올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존재가 되고, 자산을 엄청나게 불리고 키우려는 사람들만 정상인 사회가 된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을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오손도손 살아가기. 도대체 그런 여유 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자산을 엄청나게 불리고 키우기 위해서? 그래야만 평범한 삶에 그나마 근접할 수 있어서? 일까요.

 

 저는 차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소박하게 살면 되잖아요" 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살면 이상한 사람이 된 것처럼 비난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한 삶만을 살도록 강요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역설적이지만, 성공에 대한 강요야 말로, 이 사회가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실패한 자를 차갑게 폐기처리하는 사회. 인간을 한낯 부품으로 대우하는 사회. 부와 미를 집요하게 탐하는 사회.

 

 다만 저는 그럼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잊지 마세요" 라고는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어떤 모습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를 찾아 다니던 마르코 폴로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분이 되는 것, 두 번째는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구별해내 지속시키며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멋진 세상은 어딘가에 동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여, 더 나은 모습,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야할 희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작은 질문들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과는 과감하게 이별해도 괜찮아요.

 

 세상을 좀 더 낯설게 바라본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닐까요. 용기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낼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