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4월13일/듣기는 속히 하고(야고보1: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5. 1. 16:5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4월 13일 주일 예배

듣기는 속히 하고 (야고보1:19-)

오늘 야고보는 이제 본 서신의 중심 주제를 꺼냅니다. 본문의 주제는 사실 말씀을 듣고 이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실천으로만이 경건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의 원리를 부인하고 행위를 강조하는  듯한 이 말씀은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찾아 보기가 쉽지 않은 말씀이기는 합니다.

지금 현재 인간적으로 듣기 좋은 껍데기 복음만 많고 정작 실천이 없는 많은 교회들이나 교인들에게는 전혀 환영받을 수 없는 본문이기는 하지만 야고보서의 말씀은 바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복주의적 설교가 판을 치고 성공주의 신화가 교회 안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때 야고보서의 말씀은 인기가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복음의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 역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야고보는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반드시 너희가 이미 잘 알고 있다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해도 모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오히려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정도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당시 사람들이 몰라서 야고보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격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있고 외경에도 있고 여러 유대교의 문헌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유명한 말입니다.

당시에는 믿는 자들의 모임은 공적인 예배장소가 아니라 개인의 집같은 곳에서 이루어 져왔는데 이때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진리에 관한 토론들이 되어왔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집에서 벌어지는 토론이다 보니 공공규범이나 예의 같은 것이 좀 약했던가 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때의 올바른 토론자세로 이 격언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요즘도 이런 사람은 많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만을 펼치려 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때 흔히 오해가 일어나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내기 역시 더디 하라고 합니다.
사실 자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다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거나 막무가내로 오해한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하면 정말 분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성을 내게 되는 경우가 생기고 교회 공동체는 진리에의 탐구와 토론이 아니라 분쟁과 증오의 장이 되어 버리며 공동체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성낸다’는 것은 ‘분노와 화를 낸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은 솔로몬의 잠언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용사보다 나은 것”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분노를 당장 나타내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뿐입니까 과격한 말이 상대방의 노를 격동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잘 알려진 이야기를 지금 야고보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럼 왜 그가 다시 강조한 것일까요? 잘 안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사실 말은 쉽지 사람이 토론하면서 흥분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득부득 억지 주장을 들어주며 상대를 좋은 말로 차근차근 설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기의 주장이 틀렸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 잘알려진 말씀을 지금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 성내기를 더디해야 하는 지는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성내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깊이 분석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잘하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면 무슨 말을 못해’ 라거나 ‘화가 나면 무슨 짓을 못해’라는 말이 바로 성을 급하게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좋은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성내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공의’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깃들기가 어렵지요. ‘상대에 대한 용서’도 ‘너그러운 마음이 요구되어지는 자비’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성을 내지 말라고는 안하셨네요.
다음 21절에서 야고보는 성을 내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
이게 야고보가 적시한 성을 급히 내는 행동인데요 모든 더러운 것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속에서 나오는 것, 즉 우리의 말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넘치는 악은 마음속에서 악이 솟구쳐 올라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냄에는 분노와 악이 포함된 것입니다.
특히 넘치는 악이란 말에서 우리는 속의 화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이 악이 늘어나서 우리의 속에서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입밖으로 터져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 부글 부글 끓는다면 이를 제어하고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지요.

야고보는 더러운 것과 악을 내어버리고는 우리의 마음을 텅빈 상태로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그런데 이 말은 성도가 말씀을 제대로 들었으면 이제는 그 말씀을 자라게 해서 , 즉 실천해서 구원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결코 추악한 범죄나 불의를 보고도 입을 꽉닫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내기를 더디하라고 한다고 해서 불의를 보고고 성내지 않고 입도 눈도 닫고 설교만 듣고 앉아 있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한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듣는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능력의 말씀이고 이러한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심기워 졌다면 이걸 키워서 싹을 틔워서 자라게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보세요,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고 있네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래, 좋은 말씀이야 이제 세상 속으로 나가볼까’하고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다는 말을 잘못 해석해서 우리의 삶은 아무리 악해도 내가 예수믿는다고 예배당에 앉아있기만 하면, 십일조하고 건축헌금하고 직분자만 되면, 내 이름이 교회에 속하기만 하면 구원받는 줄 아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한 바울도 로마서 2: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들의 죄악을 묵과하지 않고 너희들의 행위를 보겠다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야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고 아무리 잘못해도 복만 내려주는 그런 하나님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신이 있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서 바르게 만들고 난 다음에야 복을 주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즉각 즉각 채찍으로 징계하시지 않고 우리가 회개할 시간과 기회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나아가 더 큰 은혜와 자비를 간구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주권이지 내가 그걸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행동은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다는 신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행할 생각이 없는 위선자들이 자기 만족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어디가서 믿는다는 얘기를 해서도 안됩니다.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좇지 않고 그 백성이 왕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원수 마귀의 가르침과 그의 법을 따른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믿는 자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고 하고 있네요. 자기를 합리화 하려고 하나님의 명확한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죄악된 몸에서 나온 옛사람의 속성이 자꾸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으로는 아무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듣고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멘, 주여 당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라고 한다면 그가 과연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스스로를 합리화 하기 위해서 잘못된 복음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에서 ‘믿기만 하면’ 이란 말을 우리는 예배당에서 설교말씀을 듣기만 하면,
성경을 읽기만 하면
예배당에 앉아 있기만 하면
헌금을 하기만 하면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기만 하면’ 이란 말에서 믿음은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적어도 이를 부끄러워하고 안타까이 여겨서 반드시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은 해야 되는 것이 정상이지요.

야고보는 23절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을 조금 덧붙이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지만 돌아서면 곧 잊어 버리는 사람과 같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거울은 오늘날의 거울과는 달리 구리의 표면을 갈아서 비추어 보는 정도입니다. 아무리 자세히 자기의 얼굴을 살핀다 해도 오늘날처럼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의 모습은 자세히 살필 수 있어도 정작 자기의 모습은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모습이 지금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도저히 알지 못하므로 자기의 잘못된 모습을 고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뒤돌아서면 자신에 대한 반성도 사라집니다. 그냥 남들의 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시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동거울로 희미하게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나 잘못을 책망하고 착한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도 정작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자기 반성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거 아무개 이야긴갑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들여다 본다’는 말은 그냥 힐끗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몸을 굽히고 들여다 보다, 주의 깊게 들여다 보다, 호기심을 가지고 조사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적극적 태도를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나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시나?’ 이렇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는 것은 그냥 율법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18절의 ‘진리의 말씀’이나 21절의 ‘마음에 심긴 도’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댓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여기서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그런데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특히 모든 성경말씀 가운데서도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말씀을 듣기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사랑의 율법을 실천하는 자에게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행하는 과정 자체에서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행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착한 일을 했구나하는 뿌듯함, 그리고 이 세상을 선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성취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는 만족감, 하나님에게 이러한 행동을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어지고 하는 이런 친밀감과 하나님에 대한 고대같은 것들이 마구 마구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을 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것으로 장차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 요구하는 경건을 위한 두가지 실천사항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혹시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여기 적힌 ‘고아와 과부’는 그냥 가난하고 약한자를 나타내는 관용어지 이를 문자적으로 제한해서 고아와 과부만 돕는다고 생각할 분은 안계시겠지요?

구약에 주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라는 표현이 잘 쓰였는데 세상이 변해서 아마 나그네는 빠진 것 같네요. 또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이지 환난 중에 있지도 않는 고아와 과부를 돕는다고 환난 중에 있는 안(?) 고아와 정상(?) 가정을 방치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속에 물들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너무 세속의 물결이 많이 들어와서 도저히 한두사람의 힘으로 정화하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온 교인들이 다 같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새로워 져야 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닦아야 하며 어렵고 약한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경쟁의 논리, 효율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것들
음란과 사치, 편당과 미움 그리고 증오
거짓 증거와 모함, 그리고 탐욕
우리의 몸에 밴 이기적인 태도들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사탄이 주는 것이지 우리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품안에서 우리가 거할 때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행복해 지기를 원하셔서 가벼운 멍에만을 부과하십니다.
나만 좋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피해를 보는 것도 원하지 않으시지요.
또 다른 사람들만 좋고 나는 그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보아서 아파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 함께 주의 품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고자 한다면 우리가 주의 법을 지키며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거는 하고 이거는 하지 말고 시시콜콜 간섭하시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서 실컷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보호를 받지 않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이길려고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는지.
우리 인간이 위대해 보입니까?
뭐든지 다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하,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발바닥의 적은 근육하나, 뼈 하나가 잘못되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삼주동안 바닥을 기어본적이 있습니까?
잇몸이 부어서 골이 울릴 정도로 아픈 경험이 있습니까?
서양 사람들은 ‘고장’을 out of order라고 합니다. 질서에서 벗어남.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나서 행복해 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파멸과 고통을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거해라, 그리고 이거는 하지마라고 하실 때는 그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그렇게 간섭하시는 겁니다. 아무려면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망치려고 이런저런 명령을 하시겠느냐 말입니다.
사탄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워낙 인간의 고통이나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결코 함부로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만하고 잠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실천 사항 두가지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마라는
이 명령을 지키고 그래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복의 근원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4월 1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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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행동하는 것은 참 많이 다르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동양고전에서도 지행합일 이라고 해서, 아는만큼 행할 것을 추구하기도 했지요. 저는 듣고 행함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할 때, "비추어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봄,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비추어봄 같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기독교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 대한 자기반성을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은 없는가? 설령 저지르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말은 했을 것이다. 설령 말하지 않았어도 생각은 했을 것이다." 이런 고백의 근본에는,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는 존재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반성하며 더 철저하고 열심히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태도가 단연 돋보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일침을 날립니다. "정의가 없는 왕국이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강도떼도 나름으로는 작은 왕국이 아닌가? 이 무리도 우두머리 한 사람이 지배하고 약탈물은 일정한 원칙에 따라 분배된다" 그래서 그는 당대 로마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 높던 대주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정의로운 왕국이 되기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정의로운 사회의 꿈을 외면해 버리고,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은 커녕 욕만 주구장창 들어먹고 있다면, 우리는 정녕 자기를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은 없는가? 설령 저지르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말은 했을 것이다. 설령 말하지 않았어도 생각은 했을 것이다." 작은 생각 하나에서부터라도, 신실하기를 원했던 모습. 저는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성합니다. 그래서 반성합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