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일제의 식민통치 2부 - 1920년대 문화통치의 특징

시북(허지수) 2014. 7. 15. 01:15

 지난 문서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920년대로 넘어오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1919년 3.1 운동이었습니다. 3.1 운동은 1919년 당시의 시대적 환경인, 파리강화회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났던 운동이기도 합니다. 대규모로 일어났던 저항으로 인해서, 일제는 통치 형태를 1920년대부터 바꾸게 되었고요. 뭐,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3.1운동에 대해서는 다른 문서에서 또 자세하게 배우게 될테니 걱정마세요. 하하!)

 

 1920년대는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번 문서에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해요.

 

 먼저 서론을 겸해서, 일제가 무단통치 → 문화통치로 넘어가게 되는 과정이, 전적으로 3.1 운동 때문에 통치 형태를 바꾸었느냐?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조금 복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3.1 운동은 일제가 통치 형태를 바꾸는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따라서 3.1 운동으로 일제가 바뀌었다고 표현한다면 일정 부분 맞습니다. 그렇지만, 엄격하게 접근한다면 일본 국내에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민주주의 발달) 을 거쳐가고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통치흐름이 일본 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문화통치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3.1 운동 + 일본국내의 변화가 함께 맞아떨어지면서, 더 이상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일제가 판단했던 셈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1920년대 문화통치의 내용으로 갑니다. 공포와 강압 대신에 문화적으로 통치한다고요? 따라서 일제는 1920년대부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들을 느슨하게 허용해주는 자세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조선 사람들이 약간은 숨을 쉴 수 있게끔 여유를 선물해 주는걸까요? 더 좋은 세상이 된 건지, 아닌지, 함께 느껴보도록 해요.

 

 문화 통치는 한 마디로 "기만하다" 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기만이 뭔가요. 남을 속인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앞에서는 관대하고 포용적인 정치를 하겠다고 방향을 선언해놓고선, 뒤에서는 미운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중징계를 날리고 있으면, 이런 꼼수, 사기행위를 보고서 "기만하다"라고 표현하는 거에요. 슬슬 감이 오지요? 일제가 무슨 사기를 치는지, 흥미를 가지고 함께 살펴봅시다.

 

 먼저 총독 제도의 변화가 있습니다. 1910년대가 무관 출신 총독이었다면, 1920년대부터는 문관과 무관 양쪽이 가능하도록 형태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니까 1920년대부터는 군인 말고, 민간인 출신의 총독도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에요. 하하, 그런데 중요한 게 뭐냐면요. 잘 보세요! 문관 총독이 이제 가능만 할 뿐이야!!! 실제로는 오는 총독마다 죄다 군인이야!!! 따라서 일제강점기 시기가 막을 내리는, 1945년이 될 때까지도 문관 총독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조금 느슨해 지는 것 같이 발표해놓고서는, 실상은 여전히 군인 총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쭉...

 

 글자만 딱 바꿔놓고, 조항만 딱 바꿔놓고, 실제로는 전혀 적용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모습. 진짜 나쁘네요.

 

 두 번째, 헌병 경찰이 달라집니다. 무단 통치의 핵심이던 무서운 헌병 경찰 제도를 다르게 개편하는데요. 따라서 1920년대 문화통치부터는 헌병 경찰 → 보통 경찰이 됩니다. 오? 이건 확실히 더 좋아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보통 경찰이 도입되자, 일제는 경찰서를 늘리고, 경찰의 숫자도 쭉쭉 늘려버립니다. 음... 비유하자면, 그 전에는 강하고 세게 통치하던 것을, 이제는 아예 대놓고 많은 경찰을 풀어서 통치하겠다는 거에요. 따라서, 반일이나, 독립운동을 했다가는 계속 감시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화 통치라더니, 감시자가 늘어났어요. 참 이상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기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또한, 1925년이 되면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막을 내리고, 일본에 치안유지법이 등장하는데요. 그 악랄한 법이, 조선에도 그대로 들어옵니다. 따라서 치안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잡아들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같은 사상을 이야기하면 감시당하고 또는 구속되는거에요. 하하, 이게 무슨 문화 통치인지 좀 황당하긴 하죠? 그래서 말에 속으면 안 되는거에요.

 

 세 번째,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허용됩니다. 언론의 자유가 조금은 생겼어요. 그러나!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일제에 의한 검열과 정간(일시정지)이 이어집니다. 기사가 좀 맘에 안 드네? 그러면, 바로 기사 없애버리는 거에요. 따라서, 당시 신문들을 보면, 뜬금없이 새하얀 여백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거기에 기사가 있기는 있었는데, 검열과정에서 한 방에 훅~ 짤려나간 겁니다. 언론의 자유가 조금 생기긴 했다고는 하는데, 이건 뭐 자유라고 말하기에도 씁쓸하지요?

 

 네 번째, 도평의회, 부.면 협의회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 부, 군, 면 등의 행정구역에 약간의 자치를 허용하게 됩니다. 취지야 그럴듯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기만이 들어가 있지요. 일부분만 자치를 허용했을 뿐, 전면적 자치 허용은 아니었습니다. 자치를 하게 해주겠지만, 뭐,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치하라는 거죠. 어떻게 본다면, 문화통치라고 해놓고는, 좀 더 세련되게, 혹은 얍삽하게 통제하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자주 나오는 대목!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서 교육합니다" 문화 통치 중에서는 다행히 이것만큼은 조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에 출제 빈도가 높아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뻔한 질문, 다음 중 문화 통치 기간에 해당하는 것을 모두 고르시오? 그러면 선택지에, 문관과 무관이 가능하고, 보통 경찰이고, 조선-동아일보 허용, 도평의회, 이런 것들은 기만책이라서 어쩐지 잘 보인단 말이지요! 그런데, 조선어를 필수로 지정하였다 라는게 있으면 기만적인 일제 개XX 하기엔, 왠지 좀 좋아보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분명히 문화통치가 아닐꺼야 하면서 빼먹었다간 곧바로 틀리는 겁니다! 따라서 문화통치 중에서는 - 조선어 필수 과목 지정! - 이것도 들어가 있음을 특히 잘 체크해 둡시다. 시험에도 강한 한국사!

 

 마무리 할겸, 큰 틀로 한 번 1920년대를 다시 조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문화통치 때, 일제는 친일파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지난 문서였던 1910년대의 공포 분위기 기억나지요? 따라서 1910년대에는 헌병경찰과 이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서로 맞서고, 싸우는 구도였다는 말이에요. 1919년에는 대규모로 3.1운동도 일어나고요. 그런데 1920년대가 되니까, 일제가 문화통치로 전략을 싹 바꿨잖아요. 여기에는 한 가지 비극이 숨어있습니다. 이제는 일본이 직접적인 강압통치에서, 입장을 한 발 정도 슬쩍 빼버리는거에요.

 

 식민지 통치? 세세한 것들은 그냥 말 잘 듣는 조선 사람들 〓 친일파들에게 시켜버리자! 그러면 조선은 자기네들끼리 싸우고, 제대로 뭉쳐지지도 못하지 않겠어? 쉽게 말해, 1910년대가 일본인 vs 조선인의 구도였다면, 1920년대 부터는 일제가 적극적인 친일파 양성을 하면서, 조선인 vs 조선인 대립구도로 만들려고 계획해 나갑니다. 이 점을 날카롭게 파악해 두신다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문화통치 혹은 기만통치의 장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습니다. 3부 1930년대 이야기는 다음 문서에서 계속! (아래에는 그냥 개인적 잡문이니 패스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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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영감 - 몇 년 전에 있던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계시다가 귀국했던 저의 은사님께서 모자달린 피자가게에 저를 데려가서는, (모처럼의 만남인데도) 대뜸 한국이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이다! 라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저는 반쯤 실망했고, 반쯤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중국이 커지고, 미국 사람들이 이제는 떠오르는 중국에 움찔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인구 5천만에, GDP가 1조달러가 훨씬 넘는 나라가 위험이라니? 솔직히 별로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1시간 넘게 은사님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느 날 사라져, 중국이 될 수도 있다, 일본이 될 수도 있다, 라며 걱정하시길래, 저는 민족을 사랑하는 보수주의자의 지나친 걱정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2014년 7월. 저는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던 강상중 교수님의 글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꼭 반사해 놓고 가려 합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단지 한국사 공부하실 분들은 이 대목은 그냥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하하.

 

 "‘경제안보’는 중국에, ‘국가안보’는 미국에 의존하는 한국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신제국주의적인 각축 속에서 이율배반적인 입장에 빠져들고 있다. 중국과 미국에 각각 다리 한쪽씩을 걸치고 있는 상황에서, 미·일안보를 방패로 정치·군사 대국으로의 방향전환을 하고 있는 일본을 어떻게 견제하면 좋을 것인가. 게다가 북한의 위협과 대치하는 한국으로선 일본과의 제휴는 피할 수 없다. 분명히 제국주의적인 대립 구도 속에서 한국은 어디에 다리를 두고 어떻게 그 존립을 유지해 갈 것인가, 큰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수와 혁신의 대립을 넘은 ‘보수·혁신 공존의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남북 관계를 극적으로 진전시키는 것이 불가결하다. 중국이나 미국, 일본이나 러시아와 같은 제국주의적인 국가의 패권분쟁 속에서 중규모인 분단국가 한국은 국내의 대립을 해소해 ‘분단’이라고 하는 구조적인 제약에 묶이지 않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것이 안된다면, 한국은 더욱더 제국주의적인 대립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존립 그 자체가 위험에 빠져버릴지도 모른다. 한국은 해방 후 지금까지 없던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대한민국 존립의 위협. 신제국주의의 한복판. 미국이 일본을 눈감아 주고 있는 상황. 저는 이 문제를 놓고, 참 공부를 열심히 하는 지인과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습니다. 지인은, "한국은 외교에서 대놓고 한 쪽을 선택을 하기가 난감하니까, 사태를 잘 지켜보면서 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라는 원론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일본은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군사화를 밀어붙였습니다. 2014년의 어느 지점. 비슷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무척 섬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국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외교적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유로, 강한 일본을 떠들고 있는 일본 극우세력에 제대로 반대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 점이 슬펐습니다. 세대가 갈라져서 서로를 비난하고, 지역이 갈라져서 서로를 비난하고, 그렇게 언제까지 우리끼리 싸워나가는 것이 분명히 큰 독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2014년 독일이 월드컵 우승을 했고, 저 같이 축구 광팬이라고 하던 그 메르켈 독일 총리는, 상대방의 정책까지도 필요하다면 들어보고 포용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10년 가까이 집권 중이기도 하지요. 상대방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로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하루 빨리 이 험난한 시기를 다시 한 번 헤쳐나갈 수 있었으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