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문서에서 이어지는 내용들입니다.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 외에도 많은 법령들이 등장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처음으로 추락했고, 일제는 빠르게 여러가지 법령들을 만들어 가지고선, 경제적으로 쭉쭉 수탈할 계획을 세웁니다. "야야, 얼른 뺏자, 다 뺏어버려!"
대표적으로는, 1910년대 회사령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회사를 세우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민족 자본이 힘을 모아서 회사를 세우려고 하면, 일제가 허가해 주겠어요? 당연히 쉽게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민족 자본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점차 친일적 행태에는 확실하게 보상하는 것 우리가 배워오고 있지요?)
또한 여러가지 법령 중에는, 광업령이라고 해서 광물도 함부로 캐지 못하도록 막았고요, 산림령을 만들어서 나무도 개인이 베어갈 수 없었고요. 예를 들어, 나무 땔감 좀 해오던 것은 이제까지 관행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일제강점기부터는 나무도 못 캐, 광물도 못 캐, 회사도 못 만들어, 어때요. 무척이나, 답답하고 술 권하는 사회라는 표현이 조금은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네요.
개항기 때부터 철도에 집착했던 일본은, 1910년대 들어서도 철도에 대한 욕심이 많았습니다. 경원선 (서울-원산), 호남선 등을 개통시켜놓습니다. 착착착, 일제 강점기가 시작하자마자, 이 땅의 나무 하나까지도 우리가 다 가져가서 써먹겠다는 욕심의 끝이 보이는가요. 시스템을 부지런하게(?) 깔아놓았고, 이제는 계속되는 일제의 정책들을 살펴봅시다.
이제 시간을 1920년대 근처로 돌려봅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일본은 여기에 개입을 하기 위해서, 자신감도 넘치는 시기라서, 전쟁 준비를 시작합니다. 물자가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시기였지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곡물값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시중에는 쌀을 구할 수가 없게 됩니다.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난 쌀폭동 사태를 하나 체크해 놓았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배경에서 설명했듯이 1910~1925년까지 일본 내 민주주의 발달으로 인해서, 농민들이 점차 노동자들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즉, 땅에서 농사짓고 먹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농사 대신에 무엇인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를 해놓고 본다면, 당시에 일본은 1910년대 Made in Japan 일제 성냥을 공산품으로 잘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예컨대 생일 케이크에 달려 있는 손으로 불을 붙일 수 있는 성냥 같은거 말이에요. 자, 농민들이 이렇듯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는 국가에서, 저임금을 유지해서 세계에 자랑할만한 국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무엇보다도 물가안정, 특히 쌀값을 안정시키는게 중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손쉽게 하나의 카드를 꺼내들게 됩니다. 조선을 집어삼켰으니까, 거기에서 쌀을 낼름 가져오자! 정말이지 강도가 따로 없네요. 에휴...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됩니다. 배경은 쌀폭동, 일본의 자본주의 발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요.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들이 있었을까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종자를 개량한다든지, 수리시설(물)을 확보하거나, 비료 등을 활용해서 더 많은 쌀을 만들어 내라고 압박합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게 뭐냐하면, 공짜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위해서 저수지 파주고, 비료 제공해주고, 더 고품질의 종자를 주고 그랬을까요? 그럴리 없잖아요. 그죠. 그럴꺼면, 아예 식민지 만들지도 않았을테고 말이에요.
따라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지만, 그 부담은 일체 농민들에게 전가시켜버립니다. 그러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쌀을 더 생산하는 것까지는 성공합니다. 치명적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요. 쌀 증산 성공 그 후, 쌀 증산량에 비해서 수탈량이 더 많았다는 것. 이 결과는 숫자로 표현하자면 이런거에요. 100가마 정도를 생산할 수 있는 땅이 있다고 해요. 여기다가 각종 증산 계획이라면서 프로젝트를 억지로 시키니까, 와우 130가마가 나왔다는 거에요.
그러면 일제가 양심적으로 30가마를 수탈해서 가져가면 될 것을... 우리의 원래 목표는 50가마 증산이니까, 50가마 다 내놔, 가져갈께! 라고 쌀을 다 빼앗아 가는겁니다. 이걸 철저하다고 해야할지, 지독하다고 해야할지...
이제 농민들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산미증식계획 이후, 쌀 증산에 겨우 성공해놨더니 정작 본인이 가져가는 몫은 더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농민들은 부담을 더욱 안은 상황에서 힘들여 많은 양의 쌀을 만들어서, 남 좋은 일, 일본 좋은 일만 계속 하는거지요.
일본도 이런 불만을 눈치 채고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만주에서 싼 잡곡을 수입해서, 수지타산을 대충 맞춰줍니다. 그러니까, 일제는 불만의 목소리는 교묘하게 잠재우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속해서 식민지 조선에서 노골적으로 이득만을 얻어갑니다. 그러면 우리 농민들은요... 한 끼, 두 끼 밥은 먹어야 하는데... 농사를 지어놓고, 기쁨 대신 슬픔을 얻어가야 하는 그 시대의 아픔! 이런 1920년대의 비극적이고 잔인한 풍경들은 문학작품 속에서도 드러나는 등, 우리를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여기까지 산미증식계획을 살펴보았네요. 그러면, 이제 일제강점기 경제파트 나머지 이야기들은 3부에서 계속됩니다~
오늘의 영감 -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것 중에는 "자부심"이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 53개국 중에 한국사람은 44위 정도의 자부심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 라기 보다는, "살아남기가 힘들다"라는 말이 어울리고, 좋은 리플 보다는 이른바 악플의 비율이 4배나 더 높은 불신사회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악플 따위에 공감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딘가에 베이게 되면, 살이 다시 회복되어 아무는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베이는 순간은 2-3초도 되지 않을테지요. 그렇다면, 결국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귀양길을 갈 때에도 무작정 슬퍼하기 보다는, 읽을 책을 함께 들고 가기도 하는 등 정말로 선비다운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힘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 앞에서 주눅들지 말고, 힘내야 합니다. 지금까지 힘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직도 시간이 있습니다. 열의가 꺼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