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에브라임에 미가라는 사람이(사사기17: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2. 7. 20:17

에브라임에 미가라는 사람이 (사사기17:1-)

 

오늘 살펴볼 본문은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도 끝이 나고 여기서부터 사사기 끝까지 사사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사사기의 맨 뒤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사사시대의 맨 마지막에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본문의 일은 사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살아 있던 시절 즉 이스라엘 12지파가 가나안에 막 들어가서 각 지파의 땅을 분배받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죽고 얼마 안있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시기를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평안이 지속되면 급속하게 부패합니다. 종교적으로 먼저 부패가 일어나고 다음으로는 도덕적인 그리고 성적인 부패가 일어납니다. 그정도 되면 이제 막장인거지요.

 

왜 도덕적인 부패보다 종교적인 부패가 먼저 일어나느냐면 종교, 즉 인간의 사상과 신념을 종교가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대중들의 도덕적인 해이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도덕이란게 원래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념이나 도덕관에 의지하는 것인데 이걸 사회의 신망을 받는 종교지도자가 비판하고 민중들을 계도하는 것이 정상인데,

 

종교인들이 타락하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종교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그러다 보니 아무도 일반인의 도덕적 타락을 제어할 수 없고 마침내 법의 강제 조항이 등장해서야 겨우 겨우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막는 단계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법도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그 실례로 우리나라에도 간통을 저지른 어떤 여배우가 자기가 간통을 저질러서 적발되어서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하자 헌법재판소에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이를 폐지해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재판관 9명중에 5명이 간통죄의 계속에 찬성을 했고 4명이 반대를 해서 한명차이로 겨우 겨우 간통죄가 아직도 존재하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이 노는걸 보면 이미 실제적으로 간통죄는 폐지된거나 마찬가지로 거의 사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들의 타락을 법이 혼자서 막으려고 해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왜 이런일이 벌어지느냐면 실제로 간통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엄격하게 의법조치를 하게되면 엄청난 전과자를 양산하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의 법관념이란게 도덕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잘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이제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타인의 중심지로 울창한 삼림이 있습니다. 게다가 유대지역보다 강우량이 더 많고 토양도 더 비옥하고 약간은 높은 구릉지대로 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지요. 성경에서는 요셉이 다른 아들보다 두 배로 몫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장자권을 가진 것으로 나오는데 과연 이들은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곳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시대에 유명한 종교중심지인 성막이 있던 실로도 바로 이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역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미가라고 번역되니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은 ‘미카예후’입니다. ‘미가’는 이름이 될 수가 없는게 ‘미’는 ‘누구?’라는 뜻이고 ‘카’는 ‘~처럼’이란 뜻이기 때문에 미가라고 한다면 ‘누구처럼?’이 되기 때문에 이름일 리가 없습니다. 여하튼 이 사람의 진짜 이름은 ‘미카예후’입니다.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

 

상당히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행위는 전혀 신앙적이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어머니의 돈 은 일천일백 세겔을 훔쳤다가 어머니가 저주하자 그 저주가 자기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어머니에게 훔친 돈을 도로 돌려 줍니다. 1세겔은 약11.4g입니다. 미가에게 고용된 제사장이 받는 연봉이 년10 세겔이므로 일천 일백 세겔의 은은 엄청난 거액입니다. 오늘날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거액입니다.

 

이렇게 아들이 자기가 훔쳤다고 자백하고 돈을 도로 돌려주자 어머니는 아들이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 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 이건 좀 웃깁니다. 도둑질을 한 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다니 기가 찹니다. 아마 저주의 말을 취소하려고 대신에 축복의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는 있어도 결코 축복의 대상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보면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념이 얼마나 썩었는지 나옵니다. 절대 선 그 자체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둑질한 자녀를 축복하다니! 그러나 그게 그 당시 사람들의 관념으로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답니다.

 

2.내가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은을 도로 찾은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 것으로 모자랐는지 아들을 위하여 신상을 새기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상을 만들 은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린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우시죠?
우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우상을 만들려고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드린다니 도데체 이해도 어렵고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결코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이 여자는 지금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고 가증히 여기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인양 표현합니다. 왜냐면 이 여인은 자기가 만드는 우상이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이 여인은 지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우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님에게 신상을 만들기위해 은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 신하고 그 신하고 같은지...그런데 놀랍게도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이런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고 한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아론이 있었쟎아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게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말했지요.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보이는 금송아지위에 안보이는 하나님이 타고 계신다?
이 여인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여인뿐 아니라 누구도 하나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형상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꾸 자기의 형상을 만들고 이것이 신이라고 숭배하다가는 정말 우상을 섬길까봐 아예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인데 이 여자는 지금 버젓이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하면서도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도 이 여인의 황당한 짓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타락했기에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인은 은 일천일백개 중에서 은 이백개를 가지고 은장색에게 의뢰해서 은으로 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노동자가 4일을 일해야만 겨우 품삯이 은 1세겔이었다는 것을 본다면 은 이백세겔짜리 신상도 매우 고가입니다. 이걸 미가의 어머니가 만든 이유는 자기가 모르고 퍼부은 저주의 맹세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가를 위한 수호신의 개념으로 신상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미 미가의 집에는 신당이 있었답니다. 실로에 회막이 번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는 자기 집에 신당을 만들어 두고 있습니다. 원문에는 하나님의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행동을 지금 미가나 미가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미가는 이스라엘이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지어서 아들중의 하나와 나중에는 레위 소년을 한명 고용해서 제사장으로 삼고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여인은 심각한 착각 속에 있습니다.
사사로이 은신상을 부어 만들고 이를 가지고 여호와의 형상이라고 하고 마치 제사장인 것처럼 에봇을 만들어 입힌 레위인이 신당을 지킨다고 해서 여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 됩니다. 왜냐면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명령, 십계명중에서 제2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봇은 원래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의복을 말합니다. 이는 금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로 짜서 어깨에 걸치는 의복입니다. 그런데 이 옷의 앞에는 주머니가 달려있고 여기에는 실 끝에 두 개의 복석을 매달아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합니다. 이를 우림과 둠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제사장의 거룩한 의복을 개인이 사사로이 집에서 만든 신당지기에게 지어 입혔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신성모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자기의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이 일로 자기에게 복을 주실걸로 믿는다니 얼마나 엉터리같은 말입니까?

 

게다가 이 여인은 또 드라빔을 만들었습니다. 이 드라빔은 작은 신상으로 고대 근동에서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가지고 가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 일도 있는 물건입니다.

 

게다가 레위인외에는 될 수 없도록 규정한 제사장을 에브라임 지파인 자기 아들에게 시킨 것입니다. 물론 레위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은 모두 아론의 혈족으로만 이루어지는데 이 여인은 지금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이래도 이 여인은 이게 범죄인지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걸로 믿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무지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혼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속에 물들어서 마치 미가의 어머니와 같은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습니까?

 

6절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초기에 이스라엘에 강력한 권력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 판단하며 이를 처벌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이단이 출몰한다고 해도 이를 비난할 수 있을 뿐이지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의 이단투쟁에 대해 우리끼리 이단이니 삼단이니 싸운다고 생각하지 결코 중요한 문제로는 인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싸우는 우리를 보고 쓸데없이 시끄럽게 군다고 색안경을 끼고 볼 뿐입니다.

 

가령 교단신학교가 있습니다. 각 지역마다 노회들이 연합으로 한 개씩을 만들고 여기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전도사 자격을 줍니다. 그런데 어떤 큰 교회에서 그 교육기관을 믿을 수 없다고 자기교회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만들고 자기 교회의 전도사로 그 사람들을 씁니다. 이거하고 미가의 어머니가 한 망동하고 뭐가 드리지요?
그래놓고는 우리의 이 행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위고 하나님이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사실상 종교의 타락은 성직제도의 문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떤 집단이 자기들의 경제적 이익, 또는 교단내의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신학교를 만들고 이를 졸업한 자들에게 성직을 부여한다면 이는 교회를 죽이는 행위가 됩니다. 결국 이러한 관행들이 무자격 신학교를 양산하고 수준미달의 교역자를 만들어 내어서 결국은 교회의 신뢰를 땅에 떨어트립니다. 이는 하나남이 기뻐하는 행위일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만드는 중죄일까요?

 

누구는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사도를 뽑을 때 신학교를 만들었냐? 무슨 자격제도를 만들었냐?
물론 없었습니다. 그러나 잘 보세요. 우리 주님은 자기가 몸소 제자들과 함께 3년반동안 합숙하시면서 그들을 교육하신 겁니다. 그리고 졸업요? 그건 주께서 승천하실때까지 주의 곁에 있는 것으로 인증이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 시험에서 실패하고 탈락한 것이지요.


주께서 승천한 이후 남은 제자들은 12사도의 결원을 채우기위해 총회를 열어서 자체적으로 만든 자격요건을 충족한 두 사람을 추천하고 이들에게 제비뽑아 사도의 직을 줍니다. 이들의 조건은 뭐겠습니까?
“요한의 세례 때부터 주께서 올리워 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출입한 자 중에서”

 

여기에 추천된 사람 중에서 떨어진 사람이 바로 요셉 유스도인데 이 사람이 만일 나는 이러한 제비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독립해서 교단을 만들고 자기가 사도가 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냐면 총회가 결의한 자격과 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지금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로교니 침례교니 감리교니 성결교니 순복음 교회니 로 나뉘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동일 교파내에서도 각종 파벌로 나뉘어 있습니다. 장로교는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었고 다시 예수교 장로회는 합동이니 통합이니 고신이니 대신이니 연합이니 보수니 정통이니 하는 이름들을 걸고 총회장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런 곳에서 무자격 교역자를 만들어 내니까 세상에서 목사의 이름값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더 문제는 목사들 중에서 전과자, 악명을 떨치는 자, 범죄자, 무식자, 부도덕한자들이 나올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배워야 목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도 인성에 대한 제대로된 검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성직을 남발하면 결국은 기독교회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가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고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3.사설 제사장
그런데 미가의 집에 한 레위인이 왔습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으로부터 왔는데 지금 살곳을 찾아 다니는 중이랍니다. 미가는 그 사람이 레위인임을 알고는 그에게 자기집 신당의 제사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합니다. 연봉으로 은 열 개를 주기로 하고 말입니다.

 

이 레위인이 만족하게 생각하고 그 집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처음 미가의 도둑질로 시작된 일이 점점 커집니다. 체계를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요 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은 돈많은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게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돈으로 신당을 짖고 은으로 신상을 만들고 에봇을 지어서 자기가 고용한 제사장에게 입히고 그에게 월급을 지불한다고 해서 그게 성전도 아니고 그가 비록 레위인이기는 하지만 제사장이 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제사제도와 성직을 무시함으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신분은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이랍니다. 요나단이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모세의 후손이 바로 자기의 조상(증조 할아버지)이 반포한 제도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입니다. 성경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의 증손자에 해당되지만 글쎄 히브리어의 용법상 아들이란 말이 워낙 촌수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세의 후손이란 것은 명확합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모세의 증손자가 미가의 집에서 벌이는 사설 신당의 사설 제사장이 되는 것에 만족했을까요?
그 이유는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베들레헴 사람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아서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감격도 가나안에 땅을 분배받은 감격도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신심도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는 새로운 땅에서 먹고 살기위해 그 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반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땅의 신 아세라와 비와 우레의 신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농사를 짓는데는 땅이 좋아야 하고 비가 잘 내려줘야지. 전쟁의 신, 산의 신 여호와가 무슨 소용이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우상에게로 쏠려갔습니다.


가나안에 처음 들어와서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 원래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그 분깃이 되기 때문에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들은 전국의 48개 성읍에 나뉘어 살았고 지역사람들의 종교활동을 책임졌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십일조 중에서 생계비를 받게 되어있었는데 아마 요나단의 가족도 처음에는 레위인이 거주할 수 있는 48개 성읍중의 한곳에 거주했을 것이지만 주민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았고 그래서 레위인들의 삶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요나단이 살았던 베들레헴은 레위인에게 지정된  48개에 들어가는 성읍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의 가족은 48개성에서 못먹고 살아서 새로운 땅인 베들레헴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죽고 정말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모세의 자손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됩니다. 상상하기가 어렵지요.

 

만일 모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자기가 일생을 바쳐서 해방시킨 백성들이 자기의 자손들을 홀대해서 자기의 자손들은 지금 유리걸식하는 처지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성읍을 벗어나 이리저리 빵을 얻기위해서 다니다가 결국은 사설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기는 처지에까지 이르렀으니.

 

미가의 집에서 요나단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여기 17:12에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라고 되어 있지요?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집례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가 아무리 모세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그는 원칙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신전이 있고 에봇을 입고 레위인으로 건국의 영웅인 모세의 자손이 하나님에게 제물을 불살라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 제사가 온전한 제사가 될 수가 없음에도 미가는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고 말합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일반인들의 종교심이 이렇게 급속히 사그러든 이유는 뭐겠습니까?
바로 돈 때문입니다. 여기도 지금 돈 은1100세겔을 잃어버린걸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사람들은 돈 때문에 하나님이고 뭐고 다 잊어 버린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신은 간섭하고 괴롭히는 엄숙하고 무서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그냥 아무리 잘못해도 아무말 하지 않고 주는 제물이나 받아 먹으면서 자기들에게 복만 주는 우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성도들 중에 그런 생각을 가진 분은 안계시겠지요?

 

4.단 지파는 거주할 땅을 구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단지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나단이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살땅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이다 미가의 집에 온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파도 역시 자기 지파의 정주할 땅을 얻지 못해서 새로운 땅을 찾아 가다가 미가의 집으로와서 요나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18:1의 “단 지파는...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단지파는 당연히 여호수아 생전에 땅을 제비뽑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살 땅을 찾게 된 것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바로 단지파가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에 미리 살고 있던 원주민을 몰아 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서 산위로 쫓겨 올라가서 살다가 도저히 좁은 땅에서 소출도 없고 척박한 땅에서 살 수가 없어서 새로운 평야지대의 땅을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면 단지파가 그곳에 가보니 비옥한 평야지대에는 철병거를 가진 선진민족이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단지파는 겨우 청동기 몇자루와 지팡이와 물매를 가졌기 때문에 겁이 나서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장정만 6만 사천사백명을 자랑하던 단지파도 무기의 열세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원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척박한 고산지대로 쫓겨 올라간 거지요.

 

막상 산위에 가보니 철병거가 쫓아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좋은데 농사가 안됩니다. 나무도 없고 물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땅, 목초지도 없어서 가축도 키울 수 없는 땅에서 견디지 못하고 단지파는 새로운 땅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파가 전부 이주한 것으로 보기는 좀 어려운게 18:2의 “단 자손이 ...그들의 가족 가운데”라고 했는데 여기서 단지파가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 지파보다는 작고 가족보다는 큰 클랜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파는 먼저 다섯의 정탐꾼을 뽑아서 자기들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찾아 보게 한 것이고 이 와중에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 들렀다가 요나단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파는 아마 미리 자기들이 이주할 땅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땅에 대해서 조사하려고 한 것이고 그 도중에 미가의 집에 들러서 요나단을 만나 자기들의 장도에 대해 하나님에게 물어 보아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요나단이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요나단은 지금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미가의 신당은 우상 신당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결코 찬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을 성도들이 잘 지키도록 권면하고 인도하는 곳이지 우리들의 수호신적 개념으로 복만을 비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새로운 거주지가 마음에 든 단지파 사람들은 이주를 하면서 다시 미가의 집을 찾아 갑니다. 그곳에서 요나단을 만난 단지파는 요나단에게 한 집안의 제사장이 아니라 한지파의 제사장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요나단은 두말하지 않고 단지파를 따라가는데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져갑니다. 물론 요나단의 것이 아니므로 훔쳐간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미가는 출타중에 자기의 신상과 제사장과 집기들이 도난당한 것을 알고는 단지파를 쫓아가서 항의해 보지만 단지파는 600명의 군대로 그를 죽인다고 위협하여 미가에게서 신상과 제사장을 강탈합니다.
자, 요나단 개인으로는 한 집안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면 이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무지몽매한 이들의 어리석음과 이기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게다가 세속적으로는 절도와 배신이 있습니다. 또 힘으로 뺏고 뺏기는 신상을 생각해 봅시다. 힘으로 뺏을 수 있는 신상에다 대고 복달라고 비는 단지파를 생각해 봅시다. 이게 정상적일 리가 없습니다.

 

나중에 단지파는 북이스라엘이 세워졌을 때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됩니다. 일찍부터 우상숭배의 전통을 가지게된 단지파의 단이란 도시에 금송아지 우상이 세워진거는 당연한 거지요.
게다가 요한계시록에서 인침받는 144,000을 이야기할 때 생명책에서 빠진 지파가 됩니다. 단지파는 이스라엘 지파에서 지워진 것입니다.

 

요나단도 함께 생명책에서 지워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세운 건국의 영웅의 자손이 생명책에서 빠진다는 건 참으로 기가 찬 일입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서 유다지파 다음으로 많은 수를 자랑했던 단지파는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결국 단이라는 한 개의 자그마한 도시명만 남기고 사라져 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단군이 다스리는 고조선이 바로 단지파가 온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뭔가 좀 그럴듯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기사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사사기의 기자가 말한 것처럼 정해진 규례가 없이 사람들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느낌을 받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실로에 있는 성막에만 계시나 아무데고 계실 수 있지, 별것도 아닌걸로 떠들고...웃기네. 이런 마음입니까?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진정한 교회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모인 모임을 말합니다. 결코 교인들이 모이는 건물이나 시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예배당이나 교회당이지 교회 자체는 아닙니다.
더하여 아무리 건물이나 시설이 그럴듯해도 그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18:4에 보면 “그들이 나를 고용하여”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고용이란 말은 원문상으로는 부당한 방법으로 뇌물을 주다란 말입니다. 즉 고용도 정당한 고용이 아니라 부당한 고용이란 말입니다. 레위인 청년은 스스로 받게 된 십세겔의 은에 만족했고 제사장의 직분에 만족했지만 그것이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삯꾼 목사들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렇게 부당하게 임금을 받고 부당한 곳에서 부당한 일을 하게 된다면 그가 삯꾼입니다.
미가의 집을 위해서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행위를 하는 이는 결코 제대로된 이스라엘의 제사장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 청년도 스스로 미가의 집 제사장을 하고 있지만 자기가 부당하게 고용되었음을 인정한 것이지요.

 

왜냐면 그는 무자격자이며 조상의 위명을 이용하여 생계유지의 방편으로 성직을 더럽힌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단지파가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될래 아니면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될래 하는 소리에 두말도 하지 않고 주인집의 재산을 훔쳐서 단지파를 따른 것이지요.

 

앞에서 그는 미가의 집 아들들 중의 하나같이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극진하게 대접받은 모양입니다.
목사들 중에서 사례금을 많이 주는 곳으로 보다 큰 곳으로 메뚜기도 아닌데 자꾸 뛰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목사가 아니라 생활인으로서 삯꾼 목사입니다. 그리고 이런 삯꾼 목사들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개인도 문제가 있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가 그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버젓이 성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게 미가의 시대 뿐이었겠으며
그런 황당한 목회자가 요나단 뿐이겠습니까?

 

수많은 장로들이 모여서 청빙위원회를 조직해서 기도하고 초빙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3년도 안되서 범죄를 저지르고
범죄를 저질러 사임하는 사람을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 교회 목사로 초빙하는 그 정신나간 당회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교회에 과연 하나님의 영이 존재할까요?
그런곳도 우리가 정상적인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십자가가 걸려 있고 붉은 벽돌에 넓을 홀이 있고 제단이 있다고 해서 그걸 하나님의 진실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 교회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 교인들의 전체적인 영적인 상태가 지금 말이 아닙니다. 이단들은 발호하고 세상은 교회를 조롱합니다.
우리는 결코 생활인 삯꾼이 아닙니다. 그런 삯꾼은 교회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돈값도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

 

회개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이 영과 영교하도록 기도해야 하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그게 안되었다면 이제 스스로 죄를 자정할 수 있는 정도는 되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나를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한국을 지탱하는 것은 대통령도 군대도 재벌도 아닙니다. 이 나라의 생존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안에서 제대로 생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땅의 교회들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의 등불이며 시대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그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2월 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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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언젠가 신문에서 홍세화 선생님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본의 탐욕에 맞설 마지막 두 보루가 학문과 종교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학가는 학교 안에 장사를 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건물인 명동성당도 이제는 상당부분 장사하는 곳처럼 보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은 정확하게도 돈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의 보다는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편의라는 것이 많은 경우, 가진 사람을 위한 편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한 영혼은 모두가 귀중한데, 우리는 꼭 그것을 구분시켜서 돈 많은 사람을 더 좋아하려고 하고, 끌려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학문이 절대 권력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학문은 "간판"이 되었고, 종교는 "장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어딘가에서 선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아직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먼 곳에서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하고 작은 응원은 마칩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