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복습겸 살펴보면, 1910년대에는 많은 국외운동기지가 있었습니다. 서간도 지역에는 신흥무관학교도 있었고요, 북간도 지역에는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도 있었습니다. 왜 있었을까요? 당연히 일제와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만들어 진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힘을 꾸준히 길러서 3.1 운동을 계기로 1920년대 항일 무장 운동이 펼쳐집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로 출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던 인물과 조직을 살펴보면요, 홍범도가 이끌었고요, 대한독립군 + 알파 입니다. 말하자면, 다양한 독립군들이 결합해서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나라를 짓밟고 있음에도, 1920년에 곧바로 국외에서 승리를 거두는거에요. 3.1. 운동에 이어서 이것을 겪어보니 일본이 굉장히 긴장하고 있습니다. 국경선 인근 지역에서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면서 일본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는거니까요. 그러자, 일본이 만주벌판을 이참에 정리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려고 해요.
다만 아직 만주사변(1931) 훨씬 이전이기 때문에, 일본군이라고 해도 마음껏 군대를 국외로 넘겨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명분이 필요했어요. 훈춘사건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내요. 봉오동 전투 이후에 훈춘사건을 일으키며, 중국 마적단들이 들어와 있으니까 일본이 진압하겠다고 계략을 짜낸겁니다. 물론 각본 있는 진압이니까, 미리 마적단에게는 돈을 주던가 했겠지요. 일본 공사관도 공격하고 불태우라고 마적단과 협의를 한 거에요. 실제로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 버립니다.
공사관이 불에 탔다는 것은? 그 옛날 임오군란 때, 성난 민중들이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었거든요. 그 결과로 일본은 자신들의 공사관을 직접 지키겠다며 무려 군대를 끌고 들어오는 것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럼 이번 마적단 사건으로 인해서는요? 네! 역사는 이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명분이 생기자 마자, 만주 지역에 일제는 군대를 끌고 들어오는 겁니다. 일본 공사관을 지키겠다며 대규모 부대를 끌고 들어옵니다.
한편, 독립군들은 백두산 근처로 이동을 해서, 김좌진 부대와 합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만만찮게 군대를 동원해서 독립군들을 때려잡겠다면서 으르렁 거리고 있고요. 양쪽의 긴장감이 간도지역에 맴도는 가운데,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청산리 전투의 시작입니다. 이 전투는 김좌진 + 알파가 이끌었습니다. 이번에도 연합군의 성격으로서 알파에는 북로군정서 외에도, 대한독립군도 있고, 천주교 신자들의 의민단도 있었습니다. 한 번 대규모로 싸워보는거에요. 따라서, 청산리 전투가 딱 한 번 일어난게 아니고요. 백두산 부근쪽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싸움이 일어나는거에요. 예컨대 백운평, 어랑촌, 완루구 곳곳에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다만, 일본에 가장 강력하게 타격을 가했던 것이, 청산리지역에 살고 있었던 한국사람들이며, 그 당시의 지형과 기후 등을 백퍼센트 활용했던 전투가 있었다는 것. 그래서 청산리 대첩이라고도 부릅니다.
살펴본다면, 어차피 우리나라 부대들은 게릴라 식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로 치고 빠지는 방식이 유효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당연히 각종 정보도 잘 공유되어야 했겠지요. 후원하는 조직과 기동성이 필수적이고요. 이게 다 맞아 떨어지면 인원이 부족하고 무기가 부족해도 얼마든지 승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만대군 이상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럼 직접적인 전투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여기 싸움이 일어날 법한 고개가 하나 있었고, 산 위에 독립군이 올라가 있었어요. 그리고 산 아래에는 마을이 있었지요. 마을 주민들이 일본군들에게 정보를 흘립니다. "지금 독립군들이 산 위에 올라가 있으니까 두 길을 따라 얼른 올라가시오~" 라면서 유인계획을 세우지요.
일본군들은 자기들이 정보를 맞춰보니 맞는 말이며, 좋은 기회이다 싶어서 두 개로 군사를 나눠서 한 쪽은 정면으로, 한 쪽은 배후를 향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사실 안개도 잘 끼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시나리오 처럼 펼쳐졌다면, 독립군 지금 큰일나서, 협공을 당하고 있는 위기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안개가 확 끼면서, 이 독립군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독립군은 숨어버리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성과 포성이 위 아래에서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독립군들은 총 몇 자루가 분명할텐데 너무나 싸우는 소리가 컸던게 뭔가 이상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독립군들은 이미 자리를 피했고, 일본군 병사의 시신들만이 나뒹구는, 처참한 장면이 일제 강점기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던 청산리 전투의 모습입니다.
일본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문제점이 보였단 말이지요. 일단 마을과 독립군과의 관계부터 끊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간도 지역(만주)을 쓸어버리려고 합니다. 너무나 열이 받았던 나머지, 조금이라도 독립군과 관계가 의심되거나 혐의가 있으면 죽이는 거고요. 또한, 마을과 마을을 고립시키고 집중 감시하는 일제의 정책. 이것을 우리는 간도참변 (1920) 으로 부릅니다. 나라가 힘이 없어, 타국에서 한인촌이 학살당했던 안타까운 역사이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정작 만주 사람들과 연계가 힘들었고, 독립군이 또 다시 이동합니다. 이번에는 굉장히 위쪽으로 올라가서 밀산부까지 올라가서 조직을 재정비 합니다. 대한독립군단이 조직이 됩니다. 대종교도 서일을 비롯해서, 김좌진, 홍범도 등이 이끌어 나가는 독립군 입니다. 덧붙여, 당시 종교를 분석해 보면 단군을 믿고 있는 민족적인 대종교 신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항일 운동에 있어서, 매력적인 종교가 대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소련 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자유시라는 곳으로 이동을 해요. 여담이 되겠지만 다들 정말 열심입니다. 예컨대, 홍범도는 자유시로 갔다가, 연해주로 갔다가, 중앙아시아까지 갑니다. 왜냐하면, 1937년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이후정책에 의해서 홍범도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동을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젊음을 항일 무장 전쟁에 다 바쳤던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좌진 같은 경우는 자유시로 가기 직전에 내려와서 3부 결성에 큰 역할을 합니다. 3부 이야기는 곧 아래에서 할테니 걱정마시고요.
여하튼 대한독립군단은 도와줄 수 있는 조직과 지역이 필요했습니다. 약소민족국가를 도와준다는 소련의 목표를 믿고,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대한독립군단은 소련 정부의 자유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럴수가 소련쪽에서 무장해제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라니요.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자 왔는데 무기를 버리라니요. 이러면서 소련 적색군과의 대립이 전개됩니다. 이로 인해서 독립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자유시 참변이 됩니다. (1921) 독립군들의 형편이라고 한다면 이처럼 많이 어렵습니다. 간도에서는 힘없는 백성들이 일제에 학살당하고, 자유시에서는 나라 없는 독립군들이 애써 믿었던 곳에 되려 당하게 되는 겁니다. 즉 나라가 없다보니까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중심이 없고, 여기도 저기도 비극이고, 계속되는 힘든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아, 어떤 친구들은 이런 대목들이 은근히 복잡한 편이라 근현대사의 좌절의 문턱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하, 그래도 힘냅시다.
더 이상은 갈 곳도 없고, 어쩔 수 없잖아요. 다시 만주로 들어오는 독립군, 이제부터는 3부를 결성하게 됩니다. 3부에는 참의부, 정의부, 신의부가 있습니다. 이 3부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행정 + 군사 를 담당하고 있으니까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참의부는 임시정부의 직속기구이고요. 정의부에는 지청천 같은 인물과 관련이 있고요. 신의부는 김좌진과 연결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군대까지 동원해가면서 독립군들을 다 쫓아내버렸단 말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독립군들이 러시아까지 갔다가 참변 (자유시 참변) 을 겪고, 독립군들이 3부 정부를 만든다며 다시 만주 활동을 재개하니까, 일본은 이번에도 강경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3부 결성에 대하여, 일제는 미쓰야 협정 (1925) 를 체결해 버립니다. 중국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잡아서 일제로 넘기면 무려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합니까. 한편, 중국인들에게는 참으로 굉장한 인간장사 아니었겠어요. 식민지 백성이라고 이처럼 타국에서 초라한 대우를 받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할 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일본으로서는 독립군들을 편안하게 앉아서 제압할 수 있는 협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쓰야 협정 때문에 독립군은 만주에서 굉장히 큰 압박이 됩니다. 1925년 치안유지법으로 인해, 안 그래도 국내에서 압박이 심해지는데, 국외까지도 강하게 설 자리를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일제의 압박도 참 집요하지요.
이렇게 계속되는 위기 앞에서는, 선조들도 생각이 있을 거 아니겠어요. 흩어져서 조직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 3부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모습이 있습니다. 3부 통합운동이 전개됩니다. 그 결과로 북만주지역과 남만주지역으로 나뉘어서 통합이 됩니다. 북만주 지역은 혁신 의회라는 조직이 결성되고, 남만주 지역은 국민부 라는 조직이 결성이 됩니다. 여기서 결정적 의문점!? 왜 통합인데 하필 2개 인가요!? 아직까지는 노선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에는 어려웠다 라는 걸 이해해 줘야 합니다 ㅠ_ㅠ...
여하튼 이제 1930년대 이들이 무장 투쟁을 주도해 나가는 장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혁신의회는 1930년대 한국독립당으로, 국민부는 1930년대 조선혁명당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이번 문서의 전반적인 흐름입니다. 흐름 뿐만 아니라, 잠깐 언급해둬야 하는 다른 조직들이 있습니다. 잠시 교과서 바깥의 영역이지만, 국내에서도 1920년대 초에 천마산대, 보합단 같은 단체가 무장 투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만, 여기까지는 교육과정 이탈이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해둡시다. 안 그래도 분량이 너무 많나요. 하하.
만주 외에 해외의 경우를 봅시다. 상하이에서는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 열리고 있었고요. 창조파와 개조파의 노선투쟁이 진행중이었고, 이게 결렬이 되고 임시정부가 위축되더라 까지를 기억해 두면 되겠네요. 일본의 경우도 기억해 놓을 사건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1919년 2.8. 독립선언과 1923년에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납니다. 이 때 조선인들이 방화한다,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다니기 시작하면서, 일본 민간인들에 의한 조선인 사냥이 전개됩니다. 약 6천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들이 죄없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비극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역사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혼란스러울 때마다 등장하는 타겟으로서 약하게 여겨진 조선인이 희생양으로 설정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번 문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라 없는 백성이 되면, 눈물과 비극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뚜렷하게 배울 수 있었네요. 긴 이야기니까 순서별로 보면 이렇습니다 ① 봉오동 전투 -> ② 훈춘 사건 (일본 만주 개입) -> ③ 청산리 전투 -> ④ 일제가 민간인 공격 간도 참변 -> ⑤ 전열을 정비 대한독립군단 -> ⑥ 소련으로 이동하다가 자유시 참변 -> ⑦ 3부 결성하고 다시 만주로 내려오자 -> ⑧ 미쓰야 협정을 체결으로 다시 한 번 만주에서 설 곳이 힘들어집니다 -> ⑨ 3부 통합운동 전개 -> ⑩ 그 결과로 북만주 (혁신의회) , 남만주 (국민부)가 결성되고 있더라 입니다. 자, 다음 이야기는 이어질 문서에서 또 계속하겠습니다. 혁신의회와 국민부 등 계속 배워나갈테니 걱정마세요~
오늘의 영감 - 이번 이야기들을 살펴보면서 역사는 간혹 우리가 좋은 취지로 어떤 일들을 해나갔음에도 그 결과는 더 나쁘게 펼쳐질 수도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느냐? 그것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결과가 두려움으로 다가올 지라도, 더 적극적으로 살라고 역사는 말을 걸고 있는게 아닐까요. 가능성은 항상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미래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서, 그렇게 당신의 인생들을 걸어가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많기에, 우리는 오늘을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무시무시한 저돌성을 끝까지 밀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능력에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행동을 열심히 사는 쪽으로 밀어보면, 그만큼 우리의 생각까지도 바뀔 수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