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항일 독립 전쟁 3부 - 조선 의용대와 한국 광복군

시북(허지수) 2014. 12. 12. 22:38

 

 이 문서의 취지는 전반적인 흐름을 잡아가는 것이 목적이에요. 많은 양의 단체와 인물들을 한꺼번에 다 외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흐름들을 잘 짚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1920년대 국내에서 좌우 합작으로 공개단체 신간회가 있었다, 혹은 항일무장 전쟁을 하는데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만주사변으로 인해 한중연합이더라 같은 여러가지 흐름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면 괜찮은거에요. 이번 문서에서도 중요한 조직 2개만이라도 꼭 배워보도록 합시다. 화이팅!

 

 1935년에 조직되는 중요한 단체가 있습니다. 민족 혁명당이 있어요. 김원봉이 중심적 인물인데요. 김원봉이라고 한다면 의열단장이기도 하고, 1920년대 활동을 했는데, 왜 또 이렇게 등장했는가 하니, 김원봉은 그동안의 활동을 거쳐보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겁니다. 아~ 이게 폭탄을 계속 던진다고 해서, 누군가를 죽인다고 해서, 조국 광복이라는 힘겨운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니라고 생각을 점차 바꾸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친일파나 일본군 장교 한 사람을 처단해도, 또다시 그 자리에는 누군가가 들어오더란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 투쟁보다는 당을 조직하고 군사를 조직해서 활동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노선을 바꾸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김원봉은 이제 의열단원들을 사관학교 같은 곳에 보내가지고,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자신이 사관학교를 만들기도 하는 등 새로운 준비를 하는거에요.

 

 세부적인 것은 설명이니까 읽고 넘어가면 됩니다. 외우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 구체적으로 민족혁명당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가 하면, 조선혁명당(지청천), 한국독립당(조소앙), 의열단(김원봉) 이렇게 등장을 해요. 그러면 의문이 듭니다. 지난 문서에서는 한국독립군에 지청천이었는데!!! 왜 헷갈리게 왔다갔다 하나요.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의 특수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열악한 환경에서 일제와 싸워나갔기 때문에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지청천 장군은 이름도 여럿 있었고요. 따라서 이름이나 일시적인 단체를 가지고 외우려고 한다거나, 혼란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다만, 커다란 흐름을 잡아두는게 중요한 거에요.

 

 우리는 이름이 다 비슷해 보여서 힘들기도 한다지만, 고민할 필요나 수학적으로 맞게 연결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한국사시간에 걸맞게 아, 그 정도로 선조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가명을 쓰고, 다양한 단체명으로 활동했구나를 파악하면 됩니다. 따라서 민족 혁명당에서 구성되어 있었던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안 외우셔도 좋습니다. 일단 배경설명을 위해서 등장만큼은 꼭 해둬야 하니까요. 읽고 넘어가두시면 OK 입니다.

 

 민족혁명당은 좌 우 합작의 성격이 있어서 중요합니다. 좌우 합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미래지향에서 역사적인 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민족 혁명당은 조직이 지나치게 의열단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보니까, 민족주의 진영에 있었던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중국 관내에서 조직을 하나로 다 합치자고 했음에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김구였고요. 그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연합을 하게 됩니다. 이 세 단체는 한국광복운동 단체연합회를 조직합니다. 여기까지 절대 외울 필요 없어요! 시험에 절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왜 이 복잡한 걸 설명하는가 하니, 민족혁명당에서 상대적으로 우측에 있는 사람들(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이 빠져나오면서, 민족혁명당은 그 노선이 변경되는 걸 보게 됩니다. 당연히 좌의 색깔이 더 강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쯤에서 김구 이야기도 했으니,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을 들어가 봐야겠어요. 임시정부는 1920년대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올라오고 있는 포인트가 있었는데 바로 한인애국단의 활동이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이 전선을 확대합니다. 이 과정에서 애국단원 이봉창의 천왕폭살시도(1932)를 보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요.

 

 그러자, 일본은 이미 중국의 적이 된 상황에서, 이봉창이라는 사람이 천황폭살시도를 하자, 중국신문에서 아쉽게도 이 사건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묘사를 합니다. 중국신문이 천황을 죽어야 마땅했을 것이라고 태도를 취하자, 일본이 가만히 있질 않아요. 전쟁이라는 극단으로 가던 일본은 이런 사건 하나라도 기회로 이용해보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세계의 시선이 만주쪽으로 오면서 세계 여론이 좋지 못하던 일본입장에서는 꼬투리 잡을 게 생긴거에요. 그 돌파구로 중국신문을 물고 늘어집니다. 자기네들 국부테러 앞에 조선편을 들면서 망언하는 중국도 나쁘다며 물타기 하는거죠. 일본 천황이 죽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 이런 걸 가지고 시선을 휙 돌린 겁니다. 만주사변에 이어서, 일제는 곧장 상하이 사변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A라는 만주지역을 불법적으로 막 가져가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지잖아요. 이 때 다른 B라는 상하이 지역에 막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하는 겁니다. 그러면 A라는 행위가 잊혀진다는 겁니다. B라는 지역을 설령 갖지 못하더라도, A라는 지역을 가져가거나 협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상하이 사변은 이런 것도 목표로 하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장에 바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합니다. 당시 상하이 총사령관이 사망하는 등 윤봉길의 폭탄은 대성공합니다. 이봉창, 윤봉길이라는 애국단원 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그 당시에 중국 국민당 (그 당시의 집권당) 의 장개석은 매우 놀라워 했습니다. 그 많은 중국인들도 못하는 것을 조선은 단 한 사람이 해냈다고 극찬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한인애국단이 속해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이 중국에서 이뤄지게 되는겁니다. 윤봉길의 폭탄은 그 역사적 의의가 대단하지요. 한편 이제 상하이는 일본의 추적도 시작되었고요, 이 지역을 떠냐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의 확산도 되다보니 중국 정부도 상하이를 떠나게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임시정부는 충칭이라는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전반적 배경을 길게 살펴보았고요, 따라서 민족혁명당에서 남아있는 조직은 의열단 밖에 안 남았는데요. 민족혁명당도 조직개편을 해요. 조선민족혁명당 (1937) 으로 이름을 바꾸고요. 이름에 너무 민감해 할 필요는 없고요. 하하.

 

 이들은 또 다른 좌에 있는 세력들이 모아가지고, 조선민족 전선연맹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산하부대를 기억하면 됩니다. 조선의용대 (1938) 결성! 그러면 왜 중요할까요.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 한인 최초의 무장투쟁조직 입니다. 말하자면, 중국 관내에서 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부대를 만든거에요. 왜 중요한가하면, 우로는 김구의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이고요. 좌로는 김원봉도 중국 장개석과 굉장히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의열단 가지고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지만, 끊임없이 방법을 추구해 가면서, 이를테면 김원봉은 이들 단원을 황포군관학교 (=중국사관학교) 에 입학을 시켜서, 일본과 맞서 싸울 실력 있는 군사를 기르는 겁니다. 장개석의 교류관계가 있으니 가능했던 거고요.

 

 이 대목, 조선의용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 중국 관내 최초라는 거 시험에 잘 나와요. 왜냐하면 나중에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지는데, 이 한국광복군은 1940년이니까 중국 관내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진 군대가 아니라는 점. 흐름 속에서 우리가 이런걸 파악해야 하겠지요!

 

 이제 1940년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임시정부 쪽에서는 충칭에 정착하였고,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요. 그 다음에 산하부대라고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1940)을 조직합니다. 아시겠지요~ 한국광복군은 뭐. 시험에 너무너무 잘 나오죠. 인도,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기도 하고요, OSS(미국전략정보국)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요. 미국과 손을 잡고 국내 진공작전도 계획합니다. 그리고 1941년도가 되면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건국강령을 발표합니다. 강령에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반영이 됩니다. 삼균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 민족, 국가간 균등해야 한다는 거에요. 개인은 교육에서, 민족은 자결(스스로결정)에서, 국가는 불가침하자는 주의에요.

 

 한편, 조선 의용대는 그 안에서 갈등이 좀 있었어요.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장개석과 연결고리가 많았지만,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중국 국민당의 지원 아래 조수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직접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국민당에 휘둘리지 말자 해서, 김원봉 노선을 반대하는 거에요. 그래서 의용대가 끝내 분리가 됩니다. 1942년이 되면 김원봉은 결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싸우자는 세력들은 (중국 우파인 국민당과의 사실상 결별이라 할 수 있으며) 화북지대 옌안에, 중국 내에 사회주의자들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이들과 함께 대일항전을 하며, 호가장 전투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화북지대에서 조선의용군 (1942) 으로 결성되더라 까지를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1940년대 국내에서는 조선건국 동맹이 만들어집니다. 여운형이 주도합니다. 40년대 국외에서는 이처럼 중국 관내에 조선의용대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부는 임시정부 충칭으로 이동했고 (김원봉 합류), 일부는 화북지대의 옌안으로 가서 무장 투쟁 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의 산하 조선의용군 으로 싸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영감 - 복잡해 보이지만,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그리고 이봉창과 윤봉길 정도는 꼭 기억해 두신다면 좋겠다 싶습니다. 윤봉길은 20대 중반의 나이로 폭탄을 준비해서 상하이에서 터뜨렸는데, 하나는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서, 하나는 자결하기 위해서 준비해 갔다고 하지요.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때로는 단 한 사람이 해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것을 이루어 낼 힘도 그 안애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