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복있는 사람(마태복음5: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2. 1. 07:55

 

복있는 사람 (마태복음5:1-)

 

이제까지 예수를 제대로 믿기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다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이것저것 지적할 점도 많았고 예수를 믿는 것도 좀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게 변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도 좋지만 예수 믿고 복받기를 원해서 교회 나오는데 자꾸 복줄 생각은 안하고 예수만 잘 믿으라고 하니까 좀 답답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우리들이 좋아하는 복있는 사람이 되기위한 말씀을 배울 차례가 되었습니다.

 

복있는 사람
사실상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주님이 가장 좋아하신 말씀이 구원과 믿음과 사랑이었다면 우리네는 복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네 신앙은 복받기위한 신앙입니다. 뭐 그렇다고 이게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당연히 복받아야지요.

 

자, 그럼 신약, 특히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제부터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1.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먼저 본문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산상수훈을 배울 것인데 이 산상수훈은 실로 기독교 역사상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기념비적인 것입니다.  후세에 신학자들은 이 수훈은 ‘기독인의 대헌장’이라 또는 ‘기독교 도덕의 근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렇게나 강조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근본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법과 그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나라의 헌법?

 

예,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이 누가복음에선 평지수훈으로 나오는데 이게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평소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을 틈날 때마다 여러번 강조하신 것인지는 불확실 합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주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산이 어딘지에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핫틴 산이 바로 주께서 산상수훈을 내리신 산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산위에는 지금도 팔복교회라고 하는 교회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은 별로 높은 산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상부분에 넓은 평지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말씀을 듣기가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주께서는 바로 이 곳에서 앉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마태가 이 곳을 산이라고 표시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전해진 십계명과 비슷한 정도의 중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시내산에서 선포되었다면 새계명은 바로 이 산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란’ 말은 등산하다가 아니면 하산하다가 피곤해서 잠시 쉬려고 앉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선생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앉아서 가르친다고 합니다.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바로 이 중요한 말씀을 가르치시기위해 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르치신 대상인 ‘무리’에는 우리 말 성경이 생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 정관사 있쟎아요, 대상을 한정해서 지칭하는.
그러니까 그냥 저냥의 무리가 아니라 바로 ‘그 무리’를 보고 주께서는 무언가 가르침을 베풀고 싶어서 앉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그 무리라는 말을 쓰지는 않습니다. 문맥상 잘 아는 대상을 가리킬 때만 ‘그’라는 말을 씁니다.

 

그럼 본문에서 말하는 그 무리는 어떤 무리일까요?

4장 마지막에 나오는 무리를 말하는 겁니다. 25절에 ‘허다한 무리가 따르니라’에서의 ‘그 무리’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성경에 대한 가르침과 천국복음에 대한 설교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이적을 보고, 주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 광경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적을 일으켜서 공짜로 떡과 물고기도 나누어 주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나아서 걷고하는 확실한 볼거리에 흥미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단순히 이적을 일으키는 기적의 사나이로만 오해 할까봐 이제 그들에게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법에 대해서 가르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주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시려고 앉으셨는데 막상 앉으신 주님에게 나아온 자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병자를 고치던 그 기적을 보고 주님을 따르던 무리가 아니라, 이벤트의 주인공인 주님을 따르면서 그 이벤트,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려고 하는 흥미위주의 ‘무리’가 아니라

 

주님에게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고자 하고
하나님 나라백성으로 살고자 하며
진정으로 주님으로부터 삶의 깊은 지혜를 배우고자 하며
천국으로 이르는 비밀에 대해서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더 배우려고 하는 , 다시 말해서 배울 자세가 되어있는 자인 ‘제자’들이 나아온 것입니다.

 

뭐 꼭 12제자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지만 이때에 주님으로부터 산상수훈을 듣는 자들은 단순히 무리가 아니라 보다 더 주님에게 가까이 나아온 영적으로 선택된 제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더라도 마음의 자세에 차이가 있어서 무리와 제자로 나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제자들이 나아와서 산상수훈을 들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보다 소수의 보다 열심인 제자들이 주님의 앞으로와서 듣게 되었느냐면 바로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화려한 구경거리에만 열광하지 지루한 성경공부에는 열광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밋밋하고 지루합니다. 뭔가 자극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만을 하시는 주님에게는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기적을 행하는 서 계신 주님께는 얼마 던지 나아가서 칭송을 하는 무리들은 앉으신 주님에게는 상대적으로 흥미가 떨어집니다.
그 사실을 마태는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앉으시니...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애초에 주님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기를 청해서 가르치시려고 앉으신 것은 아닙니다. 무리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진 것이 염려되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서 앉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한번 가르쳐 보겠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주님을 보고 나아온 자들은 그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순전한 말씀이나 성경에 대한 체계적이며 깊은 공부만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뭔가 보여주고 기적이 일어나고 적어도 화려한 볼거리가 있어야 좋아합니다. 그놈의 눈이 항상 인간의 행동을 제약합니다. 사람은 결코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에 알면서도 번번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무리’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지요?

1절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태는 본문에서 무리와 제자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은 같은 곳에 서있습니다. 무리와 제자가 내용상으로는 구별되지만 결코 이들이 따로 따로 서 있었던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수많은 무리가운데 제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주님의 제자가 된 자는 소수의 선택된 자들뿐입니다. 누구나 교회에 올 수는 있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2.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상수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산상수훈은 산위에서 주신 교훈이란 뜻이지만 다른 말로는 팔복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니까 8가지의 복에 관한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천국시민들의 시민윤리에 대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산상수훈을 우리는 8가지 복에 관한 축복선언으로 받습니다.

 

그 말은 주께서 주신 산상수훈처럼 산다면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 것이지요. 그러나 신약에서의 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복이 복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근본윤리규범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로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거창한 산상수훈이란 말과는 조금 다릅니다. 단지 이러이러한 사람이 복이 있고 그들이 이런 복을 받을 것이라고 보상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전혀 천국시민의 신앙윤리에 관한 기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순서를 재구성한다면 충분히 계명이 됩니다.
‘천국을 소유하려고 하면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라는 말이 빠져있습니다.

 

여하튼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심령’이라는 말은 원문에는 ‘프뉴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프뉴마’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령을 지칭할 때 이 단어가 항상 쓰입니다. 그래서 심령이라는 말은 그냥 ‘영’을 의미합니다.
영이란 단어가 여기에 쓰인 것은 영이 인간의 보다 본질적이고 깊은 내면을 가리키며 전인적인 인간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의 의미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하면 ‘자발적인 마음으로 가진 것을 포기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란 말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해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고 충분히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이 물질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즉 ‘내면적 가난’을 의미한다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 산상수훈을 팔복에 관한 설교로 포장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실제로 가난한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 말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 즉 겸손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부자가 되어도 겸손하기만 하면 복을 받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으니까 더없이 좋은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주님이 하신 첫 번째 설교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난한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의 정도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부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가진 것을 일컫는 가난과 정말 누가 봐도 가난하다고 할 정도의 극심한 빈곤, 찢어지게 가난한 경우까지 다양한 경우를 다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말합니다. 누가 봐도 가난하다고 할 정도의 극심한 빈곤.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거지 나사로와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같은 사람을 일컫는데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세상의 소망이 모두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자를 뜻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천국을 주는 것입니다. 뭐라도 있고 뭐라고 할 수 있다면 세상의 소망을 끊고 하나님만 바라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때요? 뭔가 교훈을 받습니까?
아니면 ‘이게 도데체 무슨 소리야? 나는 가난하지도 않고 가난해 지고 싶지도 않은데 복은 받고 싶고 ...게다가 상급이 뭐 이래? 기껏 천국을 주다니. 천국은 그냥 예수를 믿기만 하면 가는 것 아냐?
골치아프네!‘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이걸 계명으로 천국 시민이 지켜야할 법도로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마음을 가난하게 가져라
아니면 겸손하게 마음을 비우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소망해라 그러면 너희에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글쎄요. 예수믿는 이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걸 복이라고 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데....그것 말고 뭔가 더 받아야만 그래도 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복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소가 몇 마리요 낙타가 몇 마리요 양이 몇이요 염소가 얼마요 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복만을 말한다면 좀 섭섭할 것 같습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걸로 보상이 끝난다면 뭔가 아쉬울 것 같습니다.

 

지상에 소망이 끊어지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이들에게 겨우 ‘천국에 넣어주께’라고 하는 주님의 축복선언은 어째 좀 싱겁습니다. 모자란듯도 합니다.
근데 성경은 이게 복이라고 합니다.
보세요, “복이 있음이여”

 

원문의 순서로 따지면 이렇습니다. ‘축복이 있으라, 복이 있으라’ 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여, 너희가 천국을 소유할 것이다.’ 보세요, 분명히 성경은 복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은 쉽습니다. 뭐뭐 하지마라. 그러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무얼 말씀하시는지 명확합니다.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을 안하면 됩니다. 그걸 안한다고 해서 뭔가 보상을 주시지도 않고 복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냥 ‘하지 말라’ 지요.

 

그런데 신약의 새 계명은 ‘하지 말라’고 하는 금지어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있음이여’란 축복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걸 지키는 자에게는 이러 이러한 상급을 주시겠다고 상급의 내용까지도 적어 두었습니다.
여기 본문에 사용된 복이란 단어는 단순히 심리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은 그 두가지를 다 뛰어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 고전에선 이 단어 ‘복(마카리오스)이란 단어를 신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잘못되거나 모자람도 없고 근심걱정도 없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
그러니까 정신적인 행복을 뛰어넘고, 게다가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복이 아닌 실질적인 복이며 , 또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행복은 지상에서 맛보기가 어려워서 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은 불완전하며 어느정도의 걱정과 근심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해서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자에게는 인간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정도로 행복한 상태를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조금 의역을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하는 솰롬 이라는 인사의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평강을 누리도록 항상 사람들마다 기원하지만 진정한 솰롬의 상태는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그러한 상태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란 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원문 상으로는 ‘하나님의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보좌에 계시므로 하늘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하나님의 왕권이 미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친다면 이곳이 천국이 되어야 하지만 천국이 이런 식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이 세상을 천국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이곳은 아직 하나님의 왕권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곳은 사탄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입니다. 다만 예수의 강림으로 하나님이 통치가 이제 이 땅에서도 이루저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땅이 진정한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주께서 재림하시는 것이 요구되겠지요. 그때까지 우리의 사명은 주께서 시작하신 천국을 점점 넓혀 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통치가 이곳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시제입니다. “~이다” 란 말은 현재형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오실 천국이나 과거에 하나님이 다스렸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천국이 이곳에 임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닌데 무슨 천국이 지금 현재 임해있다는 말입니까?

 

이래서 산상수훈이 굉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힘들고 가난하고 박해받는 수많은 이들에게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가난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비우고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가 된다면 그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천국시민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아래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속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억압받으며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과 충족된 상태속에 속하게 되고 그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되면 항상 기쁘고 평안한 상태, 문자 그대로 솰롬의 상태에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틀림없이 우리가 말하는
그렇게도 받고 싶어하는 복이될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부유하다고 큰소리쳐도 어떤 형태로든 걱정과 근심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없어서 걱정이 사람도 많지만 돈있는 부자들도 자식걱정, 남편 걱정, 부모걱정, 건강과 명예와 부를 어떻게 지킬지 같은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세상 재물을 의지하기에는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염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그만을 의지하는 이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걱정이 필요없는 문자그대로의 솰롬의 상태가 되는데 가장 필수적인 의식주문제야 당연히 해결해 주시는 것인데 우리는 우선 순위를 무시하고 기껏해야 하나님이 필수적으로 주시는 것인 의식주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한다면 하나님이 만드시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름값이 낮아지는 것입니까?

 

짐승들은 물론 무엇을 입을까는 걱정하지 않겠지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짐승들의 세계는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고 전장터입니다.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생령인 된 우리 인간이 기껏해야 짐승처럼 무엇을 먹을까를 가지고 걱정한다면 이는 우리를 존귀한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기의 형상을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얼굴을 먹칠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 살까만을 걱정하며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것을 입고 먹고 보다 좋은 곳에서 살까를 걱정하고 욕심내는 우리들이 그러한 욕심의 마음을 버리고 그 모든 염려를 아버지 앞에 다 내어놓고 아버지께 아뢰면 그리고 아버지의 도움과 힘을 의지한다면 죽어서 저 천국에 갈때까지 우리가 지옥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단순히 마음의 만족감만을 주거나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된 행복한 평강의 상태를 누릴 수 있다는 문자 그대로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그래도 우리가 요구하는 복과 비슷합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단순히 물질이나 육신의 복만을 요구했지만 그것을 주시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려고 하면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 내 소유를 다 팔아서 이웃에게 흩어버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을 소망하며 재물보다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소원하며 내 마음의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고 아버지만을 바라며 소망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염원하던 그 솰롬의 상태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2월 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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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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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가난한 마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잘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보면, 주인공의 사촌이 등장합니다. 이 부자 사촌은 36개의 선물을 생일날에 받았는데 불평이 끊이질 않습니다. 작년보다 선물 갯수가 1-2개 줄었으니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40개-50개 쯤 생일선물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지요. 마치 꼭 현대인 같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들이 그쯤 되어야 만족할 것이라고 쉽게 착각합니다. 가지고, 또 가지고...

 

반면 주인공은 단지 편지 한 통의 선물에 기뻐합니다. 너를 위한 새로운 소식이 있으니 기뻐하라, 여기에 참여해 보아라 라는 소식 하나에 기뻐하는 인생. 당장 가진 것은 없더라도 필요한 것들은 하나씩 채워지는 마법같은 인생. 이것이 곧 행복한 삶이고, 감사한 삶이겠지요. 물론 당연히 영화와 우리의 현실은 다르겠지만,

 

예수님의 복음 한 가지만 믿고 간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들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체험들이 쌓이고, 신앙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나가면, 점점 삶이 기적처럼 느껴지는 것. 그렇게 천국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201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