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마가복음15:42-4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4. 18. 00:1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마가복음15:42-47)

 

오늘 우리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를 무덤에 장사한 일에 대해서 살펴 볼 것입니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그럴 수도 있지. 묫자리 하나 준게 그렇게 큰 일입니까? 그 안에 뭔가 놀라운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반문할 수가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본문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다. 

 

1.준비일


42절에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감탄한게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가 유대인들을 참 한심하다고 완악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했지만 이런건 배워야 합니다.
이들은 안식일 전날을 일컫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일, 안식일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을 만들어서 이날 안식일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솔직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율법주의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입장에서도 이들의 준비일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리를 한번 봅시다. 지금이야 주 5일 근무가 보편화되었지만 예전에는 주 6일 근무였고 토요일날은 오전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밤은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이었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일들이 토요일 저녁에 밤에 몰려있습니다.

 

내일 직장에 가지 않는다는 해방감이 자칫 일탈을 불러 일으키고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뒷날을 생각하지 않고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다음날 주일에 교회에 오기가 어렵습니다. 교회 예배는 보통 오전 11시입니다. 물론 9시도 있고 10시도 있고 심지어 8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보니까 오전 8시와 9시 예배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성가대원들이야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예외로 친다면 일반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의 숫자는 매우 적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밤을 정신없이 보내고 피곤에 절어서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늦게 늦게 일어나서 움직이기 때문에 주일 오전에 예배에 참석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중고등부를 맡았는데 그때 중고등부의 예배시간이 오후 2시 였습니다. 그런데 몇몇 학부모들이 그렇게 되면 애가 하루 종일 교회에 있게 되고 공부를 못한다고 하면서 주일 오전9시로 예배시간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잠을 잔다고 교회에 올 생각을 안하니까 이들을 깨운다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주일을 준비한다는 준비일의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준비일 날 예수님이 처형된 것입니다. 정확히는 오후 3시에 주께서 운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하루는 우리처럼 아침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후6시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겨우 세시간이 남았습니다. 안식일 날에 장사를 치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되기 전에 장사를 치르기위해 서두른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형을 받은 상태입니다. 즉 나무에 시체가 달려있는 것이지요. 나무에 시체가 달려있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의 시체가 안식일날 나무에 걸려 있어서 안식일을 부정하게 만들게 될까봐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병행기사인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21:21-23에 보면 나무에 달려 죽은 시체를 밤새 두지 말고 그 당일에 장사하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정신없이 서두른 것입니다.
이때 등장한 이가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2.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43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시체를 달라고 했는데 그 앞에 ‘당돌히’란 말이 왜 들어갔을까요? ‘당돌히’란 말은 원문의 뜻으로는 ‘무서워하지 않다’입니다. 즉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할 때 전혀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대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누구라도 예수의 여당으로 밝혀지면 크게 경을 칠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예수와 연관이 있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 분위기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모두 흩어졌던게 바로 그런 분위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시절이 험한때이므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그런판에 나타나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이 사람이 예수와 연관이 깊구나 하고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그냥 일반인이아니라 유대 식민지 국회격인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예수를 유죄로 평결하고 그의 사형을 강력하게 요구한 곳이 바로 산헤드린 공회인데 그 공회원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마련한 무덤에 장사하려고 시체를 요구하는 것은 보통의 인연으로는 어렵습니다. 숨겨진 예수의 제자 같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지금 정치범 즉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죽은 것입니다. 역적죄를 진 것이지요. 그런데 역적죄의 특징이 뭡니까? 삼족을 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이 이처럼 행동한 것은 공범으로 오해받을 충분한 근거가 되는 행동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달라하니’란 말 앞에 ‘당돌히’가 붙게 된 것입니다.

 

결코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이며 공회원인 그의 삶을 끝장낼 수 있는 일생일대의 큰 모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체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돌히’가 붙었습니다.
이런 광고 기억하십니까?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홀로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광고. 지금 아리마대 요셉이 바로 그런 입장입니다.

 

아리마대는 지명입니다. 학자들은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 소빔’이 바로 ‘아리마대’일 것으로 여깁니다. 더구나 요셉은 매우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성경의 표현대로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존경받는 이란 말을 예전 성경에서는 ‘존귀한’ 이라고 했는데 이는 ‘권세가 있는’ ‘영향력이 있는’ ‘부유한’ 이란 뜻입니다. 돈과 권세 그리고 명예까지 모두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할 행동을 합니다. 왜입니까?

 

여기 있네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라는 자’라는 말은 유대적 표현으로써 매우 경건한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별히는 바로 메시야 대망사상을 말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메시야가 오기를 지극하게 기다리는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그는 분명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의 죽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가능성이 없어졌는데도 그는 에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유대나라를 구원하지 못하고 이미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은 지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죽으면 묻힐려고 준비한 새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려고 합니다.

 

그는 도데체 왜 그럴까요? 예수에 대한 미련 때문에?
아니면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한때 마음속으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에 대한 최후의 선물?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이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시체를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성공한 유대인이었던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시체를 요구하는 행동은 자기가 숨어 있던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은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는 예수에 대한 인간적인 의리를 더 이상 저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3.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이상히 여겨

 

보통은 십자가에 달리고 나서 하루만에 잘 죽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시체를 벌써 내어달라고 하는 요청에 이상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지 6시간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의 좌우편 강도는 그때까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리고 혹시라도 도주할까봐서 그들의 다리를 꺾었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 전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다리를 꺽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죽은게 불행중 다행일까요?

 

이렇게 빨리 주님이 숨을 거둔 이유는 그가 보통 십자가 사형수보다 너무 큰 고통을 겪었다는 말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질, 가시 면류관, 게다가 골고다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런 일련의 고통들이 주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숨지게 한 것입니다.

 

너무 일찍 숨을 거둔 사실을 이상히 여긴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4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에만 이 사실이 나와 있는데 이 사실을 기록한 의도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에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게 아니라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살아났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나라의 무덤이 우리나라의 무덤처럼 숨을 쥐지 못할 정도로 흙으로 덮는 방식이 아니라 바위동굴에 그냥 집어 넣는 것이기 때문에 기절했다가 죽은 줄 알고 무덤에 넣었는데 깨어났다는 그런 의심이 나온 것이지요.

 

백부장이 예수의 죽음을 확인했다는 기사는 바로 그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이나 고대에서나 변함없이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우리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불신당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죽은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그런데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심각한 일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부활 신앙을 빼고 나면 몇가지 기복주의와 인류에 대한 박애주의만 남을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신비를 추구합니다. 만일 이성만으로 종교를 꾸미고 싶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 될 것입니다.

 

4.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시체를 백부장으로부터 받은 요셉은 그 시체를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습니다. 이사야53:9에 보면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님은 지금 부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묻힘으로 그 예언을 성취한 것입니다.

 

유대의 무덤은 바위를 파내서 만든 동굴 무덤입니다. 그 안에 향유와 몰약을 바른시체를 세마포에 싸서 넣어 두고 입구를 돌로 막습니다. 그런데 이 돌은 매우 무겁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냥 돌로 입구를 막는 것이 아니라  입구를 막는 돌이 홈이 파인 무덤입구에 꼭 들어맞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입구를 돌로 막으면 그 다음부터는 장정 5-6명이 달라붙어도 쉽게 굴러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당시에 ‘기절설’말고 또 다른 설이 나왔는데 ‘시체 도둑설’입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기위해 자기들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각종 설들을 막 만들어 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설들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강력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예언을 잊지 않았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을 봉인하고 파수꾼으로 하여금 무덤 입구를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봉인이라 함은 돌과 무덤의 틈에 진흙이나 밀납을 부어 도장을 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부로 이 봉인을 풀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이 봉인을 파하는 것은 총독의 권위와 대제사장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이므로 엄중히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파수꾼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시체를 도둑질하기가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당시 시체가 사라지자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서는 부활했다고 유언비어를 날포한다는 시체도둑설이 퍼졌는데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인 것입니다.

 

5.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마지막으로 본문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 혼자서 한 것이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어서 예수의 장사를 확인했다고 하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잘 아시지요? 주께서 일곱귀신을 쫓아낸 여인으로 유명하고 요세의 어머니는 누구일까요? 학자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글로바의 아내.

 

그러니까 이 두 마리아들이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들도 역시 대단합니다. 예수의 12제자들 중 그 누구도 장례식에 참여 하지 않았는데 이 두 여인은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여자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여성들에 의해서 성장했다고 보면 맞습니다. 여자들의 열심과 헌신이 오늘날의 거대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보더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쓰여 무덤의 위치를 거듭거듭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들이 엉뚱한 무덤을 찾아 가서 예수의 시체가 없다고 착각했다는 일부의 주장도 부인합니다.

성경은 이 일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이 위험에 처했는지 아니면 후환을 겪었는지 그 뒷감당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말메스베리의 윌리암이란 사람이 소개한 전설에 의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빌립에 의해서 기원후 63년경에 골 지방(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보내졌고 요셉이 영국의 첫 기독교 정착지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시 글라스톤베리 지방의 터를 세웠답니다. 게다가 중세시대 왈터 맵이란 사람이 적은 전설에서는 요셉이 성배를 영국으로 가져온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 성배에 얽힌 전설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어디까지나 믿기 어려운 전설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설이 나온 이유는 아리마대 요셉의 삶에 대해 기독교 사회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당연히 여러분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주님의 부활을 여러분에게 변증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느냐?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주님의 시체를 당돌히 요구했고 자기가 준비한 새 무덤에 그를 장사지냈다는 것에 초점을 두려고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에서 국회격인 산헤드린 공회원이고 부자였답니다. 공회원들 중에서도 그는 매우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주님의 시체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본문에 ‘당돌히’란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제가 여러분의 생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주님은 내가 잘살게 도와 주는 분이지 결코 나의 모든 것을 걸만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기 보다는 그냥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이제까지 믿어왔으니까 습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교클럽이고 기독교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사교클럽에 무슨 성령의 감동이 있고 문화에 무슨 믿음이 필요합니까? 인간의 이성을 벗어난 것에는 전혀 신뢰를 두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감격에 전율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복주의가 문제라고 합니다. 기복주의가 왜 문제인가요? 복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복을 주는가가 중요하지 복을 받는 방법이 얼마나 올바른지 그 목적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에 합한지는 따지지 않습니다.

 

솔직히 점쟁이나 무당을 보면 복을 받는 방법이 매우 단순합니다. 돈을 몇천만원이나 드려서 부적을 쓰고 굿을 하고 주로 그런 식이지요. 심청전을 보면 노한 용왕신을 달랜다고 공양미 삼백석에 여자를 사서 파도가 치는 바다에 던져 넣습니다. 주로 이렇습니다. 복만 받을 수 있다면 남의 생명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복주의가 무서운 겁니다.

 

솔직히 복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예수도 제대로 믿고 그 보상으로 복을 받는다면 가장 적합한 방식이겠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 인간의 복에 대한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래서 가격을 매길 수 없을만큼 중요한 복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것을 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말로는 그것도 복이지 하면서도 우리의 모든 생각은 물질, 즉 돈에 초점이 쏠려 있습니다.

 

그는 건강이 복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건강을 잃을 때까지는 그걸 복으로 생각지도 않습니다. 당연한 걸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가족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보통 그걸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족 간에 서로 미워하고 이혼을 하고 풍비박산이 나면 그때서야 뒤늦게 가족 간에 사랑하는 것이 정말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왕따를 당하지 않고 학교 폭력에 노출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것도 실로 큰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보다 공부 잘해서 전교 1등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돈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하니 대단한 것입니까?
천만에요. 공부잘하면 좋은 대학에 좋은 과에 들어가고 그러면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기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즉 공부잘하는 것과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돈돈 거립니다. 그래요, 돈은 중요하고 좋은 아이템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귀한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생각을 조금 넓게 가지고 바꾸어 봅시다.

저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에게 올인한 것을 가지고 감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에게 감탄하는 것은 그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지는 시점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에 더 감탄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무덤에다 장사지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적어도 주님을 끝까지 배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었다면 혹시라도 장래의 일을 보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단순히 사고사했다면, 예수님이 그냥 자기에게 큰 은혜를 베푼것에 감사해서 무덤을 제공했다면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로 죽으셨네요. 그와 연관이 밝혀지면 로마에 반역하는 국사범이 되고 재산도 몰수되고 신분이 격하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의 목숨도 위험한 그런 무시무시한 신분으로 죽으셨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그의 시체를 요구해서 그의 시체를 자기의 새무덤에 세마포로 싸서 장사지냈다는데 요셉의 위대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현세태에 정말 찾아 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더구나 정치가들은 배신을 밥먹듯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야 하고 한명의 부자가 태어날려면 천명의 거지가 만들어 진다는 세태속에서 정말 찾아 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전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중세까지 내려온 전설에 의하면 그는 정말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그의 제자로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을 항상 따랐던 12제자들은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이 보였기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막상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는 그를 부인하며 그를 팔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주는 잡히시던 날에 철저하게 버려지셨습니다.
심지어 주는 가족들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암울한 시점에 아리마대 요셉은 굳이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는 실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가 입을 다문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가 메시야일 것을 강력하게 바랐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그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에 오히려 주께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이게 바로 부활의 역설입니다. 기독교에서 죽음은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인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주는 부활하셨고 끝까지 자기를 배신하지 않은 아리마대 요셉에게 주께서 어떻게 복을 주셨겠는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복이 되지 않고 그를 믿는게 오히려 화가 된다면 언제든지 그를 부인하고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지.

 

평소에 주는 그냥 장식처럼 한구석에 계시다가 막상 우리가 어려울 때만 그 어려움을 피하게 해줄 호신부처럼 생각되어지지는 않는지.

여러분, 우리는 그를 단순히 이용하기만 하고서 그에게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요?

 

예수 믿는데 무슨 의리를 따지냐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따를 때 끝까지 주를 따르면 그가 놀라운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시세가 불리하여 모두가 주를 버릴때에도 끝까지 주를 버리지 않고 그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인간들의 삶에서만 의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의리를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입만 열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주시고 저렇게 해주시고 달라고 하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그만 달라고 하고 내가 과연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지를 고민해 봅시다.

 

주가 하시는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를 더하시리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한번 이 말을 믿어 봅시다.
그는 나를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는데 나는 그에게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그런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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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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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일깨우는게 아닐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일들은 한 발짝 떨어져서 봐야 그제서야 아,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며, 주님의 길을 따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다 도망쳐버린 제자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 나라도 그랬겠지요. 아리마대 요셉을 본받을 수 있다면 그 믿음과 인품이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달라고 떼쓰는 믿음에서 그대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주의 길을 굳세게 계속 걷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성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헌신할 수 있는 한 가지라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라며, 힘차게 살아가는 용기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당장에는 아니 뵈어도, 혹은 당장에는 손해이고 어리석어 보여도, 장기적으로 우리가 복을 받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사실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으로, 한 걸음만 더 하나님께 다가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조용히 응원해 봅니다. / 2016. 04.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