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요시야 율법서를 찾다(열왕기하22: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4. 30. 01:08

 

요시야 율법서를 찾다 (열왕기하22:3-)

 

본문에서 살펴볼 요시야는 남유다의 제16대 왕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사실 열왕기에 보면 여러 왕들에 대한 소개에 들어가면서 이 왕들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 표현도 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의 요시야 왕은 괜찮은 평가를 받은 왕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피면 살필수록 단순히 괜찮다는 평을 넘어서 정말 멋진 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시야 왕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초를 놓다’는 뜻이고 그는 아버지 아몬 왕이 24세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겨우 8살에 왕위에 올라서 무려 31년간을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왕좌에 있었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0도 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하나님은 요시야 왕이 유다의 멸망을 보지 못하도록 그를 빨리 데리고 가셨다고 생각됩니다.

 

요시야가 주전 609년에 죽고 난 직후부터 17대 여호아하스 왕이 이집트에 끌려 갔고 이후로 유다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고 이를 트집 잡아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쳐들어와서 18대 여호야김 왕을 죽였고 19대 여호야긴 왕을 세웠지만 그는 8살에 즉위하여 겨우 석달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결국 다음 왕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의해 즉위했다가 바벨론을 배반하자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고 일생동안 감옥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주전 586년에 유다가 멸망하지요.

 

요시야가 죽고 23년만에 멸망한 겁니다. 만일 요시야가 살아 있었다면 유다가 망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큰 섭리가운데 이미 정해진 것이고 요시야에게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손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왕18년에 왕이 서기관 사반을 성전에 보내어 성전을 보수하도록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을 보수한 것이 이 왕의 가장 큰 업적입니다. 성전을 보수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그럼 역대 왕들은 전혀 성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단 말입니까? 글쎄요, 이제부터 우리 한번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22:1에 요시야 왕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 팔세라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요시야 왕에 대해서 기록한 때는 왕18년의 성전을 보수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전의 일은 전혀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열왕기를 보면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왕의 모든 행적을 시시콜콜 적는게 아니라 종교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가장 의미있는 사건만을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요시야의 진정한 업적은 왕이 되고 무려 18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성전보수. 요시야는 왕이 되고 무려 18년이 지나고 나서야 성전을 보수합니다. 그리고 이걸 하나님은 그의 가장 인상적인 업적으로 기억하시는 겁니다. 다른 성경 본문을 보면 그는 이전에도 상당히 바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무려 1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성전보수부터 기록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은 다릅니다.

 

왕18년이라고 하면 그가 대단히 오랜 세월을 보낸 것 같지만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입니다. 아직 한창 때입니다. 이제 겨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만한 때입니다.

왕은 재위 18년에 서기관 사반을 성전에 보내어 왕의 명령을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전하게 합니다. 뭐라고 했는고 하니 성전을 수리하되 그 비용은 ‘백성들이 성전에 드린 은’을 가지고 충당하라고 합니다.  나라에서 부담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백성들이 낸 돈을 가지고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서기관은 왕실의 공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보관하는 직책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반은 너구리를 뜻합니다. 이 당시에는 이상하게도 동물 이름을 본따서 사람 이름을 짓는게 유행이었답니다. 이 서기관 사반의 아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호했다는 기록이 예레미야서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이끈 중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여하튼 요시아 왕은 이 사람 서기관 사반을 성전의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보내서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합니다. 단순한 수리가 아니라 실제로는 성전을 중수하는 정도의 큰 공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큰 돈이 듭니다. 이 돈을 성전에 드린 은으로 충당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왕의 명령에서 말하는 요지입니다. 성전에 드린 헌금을 이용해서 성전을 중수하라!

 

성전을 수리하는 것은 대제사장의 당연한 임무인데 이걸 왜 왕이 간섭할까요? 제사장이 보고 성전이 수리할만하면 하는 것이고 아니면 안하는 것이지 왕이 뭘 성전에 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수리하라 마라고 합니까?
왕의 열심히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게다가 돈도 안주면서 성전에서 가지고 있는 돈으로 수리하라고 하는 것이 영 모양새가 좋지 못합니다. 마치 남의 잔치상에 감놔라 배놔라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이 사람은 오지랖이 너무 넓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걸 요시아 왕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런데 특이하게도 유다에서 왕의 주도로 성전을 중수한게 세 번 있는데 이 세 왕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왕입니다. 요아스와 히스가야 그리고 요시아. 왜 이럴까요?

 

그것은 제사장들이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뭐 돈이 없어서 성전을 수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세명의 선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들이 통치하던 때였다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로 유명한 사람들이었고 성전이아니라 우상의 신전에 돈을 쏟아 부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다의 국교를 담당한 대제사장은 왕이, 나라가 집단으로 우상을 숭배하던 때에 무얼 했을까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하는 패기가 왜 대제사장들에게는 없었을까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면 하나님이 결코 너희를 그냥 두지 않으실 거라는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그래서 이 세 명의 선한 왕들이 제사장이 아니라 왕의 주도로 성전을 수리하게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 하도 성전을 수리하지 않으니까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이란 말이나 ‘(성전)문지킨 자가 수납한 은’이란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열왕기하 12:4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모두 세가지가 포함됩니다.

첫 번째는 ‘사람의 통용하는 은’입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사람이 번역할 때 ‘상고의 통용하는 은’이란 말을 참고해서 번역한 것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하면 ‘사람이 건너갈 때 드리는 은’이란 말이 됩니다. 일종의 주민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말로는 인두세, 사람머리수만큼 걷는 세금.

 

그러니까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장정으로부터 걷는 돈을 말합니다. 이 돈은 해마다 걷는 것으로 원래로 하면 성전에서 거두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거두어야 하고 성전세가 아니라 국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국고에 들여야 하는 돈입니다. 이걸 요시아 왕은 국고에 넣은 대신에 성전수리에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원래 성전에 사용하는 돈이 아니라 걷기는 성전에서 걷어도 소속은 원래 국고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국고 대신에 성전 수리에 사용하니까 당연히 왕이 돈을 성전수리에 지출한게 됩니다. 그러니 왕이 대제사장에게 큰소리 칠만 합니다.

 

두 번째는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입니다. 그러니까 서원한 사람이 드리는 돈이나 장자나 첫 태생의 동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속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돈은 원래 율법책에는 기록되어진 것이지만 우상숭배자 왕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알이나 아세라를 숭배하기 위한 목적에 사용된 것을 다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원하여 드리는 은입니다. 앞의 두 개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라면 세 번째 돈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순수한 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와 세 번째 돈은 성전세가 확실하지만 첫 번째 세는 분명한 국세입니다. 그런데 이 돈을 국고에 들이지 않고 성전수리용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은 왕이 지원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세명의 왕들이 성전을 수리할 때 이 돈을 사용하게 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전 문지기는 모두 세명이었고 이들은 대제사장과 부제사장과 함께 언급이 되어서 아마 매우 막중한 직책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물론 성전 문지기는 레위인입니다. 그럼 왜 문지기가 이렇게나 중요하게 여겨졌을까요? 성전을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 거룩하게 지켜야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성전 문지기들이 백성들이 성전에서 드린 은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시야 왕은 서기관 사반을 대제사장인 힐기야에게 보내어 문지기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사용하여 성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직접 건축비를 집행하도록 하지 않고 ‘역사 감독자’의 손에 맡겨서 그들이 직접 ‘성전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을 수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역사 감독자나 성전 작업자는 성전에서 원래부터 근무했던 레위인 중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했는고 하니 혹시라도 이 돈이 성전을 보수하는 이외의 용도로 사용될까봐 싶어서입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있을 부정이나 횡령을 막고 또는 다른 급한 용무 때문에 성전보수가 지연되거나 부실해 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 정책인 것입니다.

 

요시야 왕 18년 당시의 성전은 성경표현대로 부숴진 곳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부숴진’ 이란 말은 원래의 의미로는 ‘쪼개다, 터지다’에서 유래하여 ‘갈라진 틈, 파괴된 것’ 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아 왕의 선대왕인 아몬이나 그 전의 므낫세 때에는 우상숭배가 성했기에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등한시 되고 당연히 성전에 가지 않으니까 성전이 부숴지고 갈라지고 파괴된 부분이 많아 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자 왕들은 성전을 방치하는데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성전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들의 눈에는 성전이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이 자기네의 전제정치를 비판하고 백성들을 마음대로 착취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알과 아세라의 전을 만들고 그 선지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정작 여호와의 전을 훼파하고 그 자재를 우상의 신전에 가져갔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성전은 피폐해지고 퇴락해 간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요시아 왕이 또 수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목수와 미장이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급하고 또 필요한 자재들을 사게 하라고 하면서 특이하게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그들이 진실하게 행했기 때문이랍니다.
당시 성전수리를 맡은 책임자인 레위인들이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히 일했기 때문에 그리고 성전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왕은 그 돈에 대해서 사후의 감사까지 생략했다는 말입니다.

 

요즘도 사실은 성전증개축이나 수리, 그리고 교육용 기자재 구입 같은 일에 다소간의 비리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건축비의 10%를 공식적인 리베이트로 돌려 주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입니다.

 

요시야 당시의 성전개보수 책임자들인 레위인들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재정을 집행했고 이것은 너무나 정직했으므로 회계감사도 불필요할 정도였다니 당시에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올발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직한 감독자와 신실한 일꾼들이 만나니 당연히 성전의 보수가 잘 진행됩니다.

 

모든 것들이 순조롭게 이루어 집니다. 요즘말로하면 민관군이 합심해서 하나님의 대 역사를 진행하는 겁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해 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은 율법서를 찾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율법서를 발견했다는 말은 요즘 생각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성전에 성경이 있는게 당연하지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그런데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이건 마치 요즘으로 치면 기도의 응답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만국 중에서 택하신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원망과 한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때 발견한 성경책을 모세오경이라거나 또는 신명기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율법서에 무엇이 적혀 있습니까?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 그리고 너희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해 줄 것이고 너희가 저렇게 행동하면 내가 벌을 내리겠다는 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모세 오경, 또는 그 중에 신명기입니다.

 

당시 이미 북의 형제 이스라엘 왕국은 망했고 남쪽의 유다 왕국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메대의 공격으로 쇠퇴해 가고 있고 유다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이집트와 바벨론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약소국이 줄타기를 한다면 이리저리 공물을 바치고 환심을 사려고 아부하고 정말 힘들게 사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도 늘어 나고 정치적 압력도 거세지고 ...게다가 이들은 아예 유다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고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 예루살렘을 품고 있는 택한 백성들이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기록한 책이 바로 신명기인 것입니다. 모세오경 역시 마찬가지의 책입니다.

 

보통 종교개혁을 이룬 유다의 왕들을 보면 그 왕의 전대나 전전대에 가장 극악하게 우상을 섬기고 폭정을 휘두른 기간인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왕의 전대인 아몬이나 전전대인 므낫세는 정말 악랄한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극악한 짓을 하게 되면 하나님은 벌에 벌을 내리고 열국 중에 포로로 흩어버리고 기근으로 치겠다는 내용이 나와 있는 책을 읽게 되자 왕은 옷을 찢은 것입니다.

 

‘아, 우리나라가 그렇게 했기에 하나님이 지금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벌을 내리고 있는 중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힘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해야 겠구나!’ ‘철저한 종교개혁만이 이 나라가 사는 길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구나!’

 

물론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요시아를 버렸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영문도 모른채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영적인 부패와 타락을 방치하게 하고 엉뚱한 곳에 헛된 노력을 쏟다가 죽게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요시아가 이제 어른이 되어서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섬기려고 하자 하나님은 그에 화답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네가 하기만 하면 내가 틀림없이 너에게 복을 주겠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좀 이상한 점을 느낍니다. 힐기야가 발견한 이 율법서가 이전에는 왜 발견되지 않았을까?
율법서는 양피지 두루마리로 된 것으로 그 부피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필사로 해서 신명기서를 기록하면 양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그 책이 모세오경 전체였다면 부피가 아주 커집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힐기야가 사반에게 성경책을 발견한 것을 이야기할 정도라면 이건 힐기야도 처음 발견한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거나 전에 없던 것이 발견되었다는 정도의 큰 사건인 것이지요.

이 율법서는 어디서 발견되었을까요?

 

본문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병행기사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열왕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역대기에는 나옵니다. 역대하34:14에 “무리가 여호와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래요, 연보궤 옆에서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이 율법책을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율법의 정한대로 언약궤 옆에 두었던 성전 비치용의 율법서로 봅니다. 그런데 아몬이나 므낫세가 성전을 고의로 훼손하고 성전을 탄압하자 이 성경책이 혹시라도 훼손될까봐 누군가가 이 성경책을 숨겨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궤 옆에서 연보궤 옆으로 옮겨서 숨겨둔 것을 연보궤에서 돈을 꺼내려고 하다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처럼 성경이 흔할 때가 아닙니다. 우상숭배에 미쳐있던 사람들이 그 비싼 양피지에 성경책을 기록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요시아 왕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이 성경책을 읽는 서기관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옷을 찢었다는 것을 보면 왕도 성경의 내용을 자세히, 정확하게 듣게 된 것은 처음인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그와 같으니 당연히 이스라엘이 어려운 것입니다. 원래 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질 때 이스라엘이라는 전통적인 이름을 북쪽 왕국이 가져간 이유는 당연히 북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북부가 열지파 남부가 겨우 두지파로 구성되었기에 북쪽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쪽을 지파명을 따서 유다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거의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쪽의 유다에 속한 두 지파 그리고 앗수르에 끌려가지 않고 북부에 남아 있던 유민들이 모여서 겨우 겨우 나라의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요시아왕은 성경책을 읽어나가는 서기관의 목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민족을 위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옷을 찢게 된 것입니다.

 

사반은 처음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성경을 받아 들고는 냅다 읽기 시작합니다. 소리를 내어서 읽었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들고 왕에게 가서 역시 그 앞에서 읽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읽은 수준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로 보면 사반은 왕 앞에서 율법책을 크게 읽어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듯이 큰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네가 이러이러한 죄를 저지르면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벌하리라”

 

그래서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자 마자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시아의 마지막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약간은 다른 내용이지만 요시야왕의 후에, 요시야가 16대 왕이고 여호야김이라는 왕이 18대왕인데 이 사람은 바베론의 침략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룩이 가져다 준 예레미야서를 칼로 베어 화롯불에 태웠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이대로는 안된다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하고 ‘그런 소리는 듣기 싫어, 축복의 말씀도 아니고 벌을 준다, 저주한다는 말씀이 적힌 글은 태워버릴 거야’라고 하는 왕과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처우가 다른 법입니다.

 

아마 요시야는 성경에 대해서 막연히는 알았지만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인 전대 왕들의 행태를 볼 때 유다왕실에서 율법을 교육한다는 것은 사실 힘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요시야는 종교적인 열심 때문이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의 간섭하에 흐려진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남 유다의 독립을 확고히 하려고 그 구심점인 성전을 중수한 것은 아닐까요? 민족종교인 여호와 신앙을 확립한다는 정도의 개념으로 접근한 것은 아닐까요?

 

여하튼 요시야는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들었고 율법의 지엄함과 자기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지금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대로는 민족의 멸망을 막을 수 없음을 명확하게 알게 되자 보다 적극적인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수리한 것에서 나아가 전국의 우상을 타파하고 북부의 이스라엘 영역에까지 하나님의 뜻을 펴고 우상숭배자의 시체의 뼈가지 찾아내어서 그것을 단의 불에 태워버리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요시야가 죽자 그 사후의 왕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며 패악하고 음란한 짓을 저지르며 공의가 땅에 떨어지면서 유다는 외세의 간섭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은 바벨론에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시아가 죽자 바로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라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와 거대한 경제적인 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애를 많이 낳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따지고 보면 그동안 사람값이 없었습니다. 좁은 국토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대우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경쟁이 싫어서 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먹을건 적고 먹으려는 이는 많으니까 필연적으로 극심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청년실업에 대한 대책은 아예 있지도 않습니다.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게 없거든요. 게다가 있는 자들의 갑질도 만연되었습니다. 사회의 병리현상에 대해서 말하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요,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번영과 독립을 유지하려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민들의 도덕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질보다 정신을 더 소중히 여기는 풍토가 살아나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돈이 생기자 우리나라의 절에 있는 부처상이 변했다고. 절의 기와가 변했다고.

 

넘쳐흐르는 돈을 가지고 세계에서 제일 큰 선 돌부처, 선 구리 부처, 앉은 구리 부처, 여기에는 금칠까지 했습니다. 누운 돌부처, 앉은 돌부처. 크기 경쟁을 하지 않는 곳에서는 숫자로 경쟁합니다. 일만개의 옥부처. 만불전이라고 합니까? 일천개의 도자기로 된 부처. 기와는 구리 기와로 하고 게다가 심하게는 금으로 입히기까지. 요즘 도시 주변으로 가보면 금부처가 심심챦게 눈에 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으로 그거 하고 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IMF사태로 한국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뭐 돌부처는 남았으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 늘어나는게 뭔지 아십니까? 재실 만들기. 돈이 많아져서인지 제사를 안지내고 외국여행을 가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대신 정신적인 공허감을 그걸로 메꾸려고 하는지 재실을 꾸미는 집안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동네는 현대식 집인데 한옥은 한 채도 없는데 재실만 덩그러니 있습니다. 기와를 얹고 좋은 목재로 그럴듯한 재실을 짓고 후손들이 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는 그 앞에 서서 절을 합니다.

 

그리고는 옛날 양반이 된 듯한 기분을 냅니다. 양반가의 위상을 드높인다고 하는데 글쎄요. 차라리 그 돈으로 한옥을 짓고 살면 좋은 텐데 그건 불편해서 싫고 재실만 덩그러니 지어져 있습니다. 예부터 내려오던 재실이 아닙니다. 새로 지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조선이 망하기 직전에 급속하게 퍼진 제사를 생각합니다.  갑오경장으로 반상의 차별이 철폐되면서 법적인 제약이 없어지자 양반들이 드리던 제사를 지내고 싶어서 급속도로 조선 천지에 제사가 퍼졌고 제사의식서가 팔려나갔으며 제사를 지내면서 양반인양 한 정황이 생각납니다.

네가 지금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의 건물을 만들고 제사상을 차린 그게 누가 준 것이냐? 하고 하나님이 한탄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재물을 왜 주었겠느냐? 우리 아버지의 탄식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원래 자본주의가 오래되면 부의 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일어나는 변동은 부자가 가난해 지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위쪽으로의 변동은 일어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씀씀이가 잘아 졌습니다. 작아 졌다는 거지요. 나, 내 가족, 내 부모형제, 내 자식 이런 것만 생각하지 나를 뛰어넘는 우리를 생각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발전이 없습니다. 허구 헌날 달라고 하는 기도에 내 가족,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부모 내 동생 이런 식입니다. 내 내 내 내....우리를 위한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는 전혀 나와는 상관없습니다. 교회도 나라도 나에게는 거저 건성으로 기도하는 척만 하는 곳이지 진정으로 나에게는 안중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로도 모자라 주변의 거센 압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100여년 전의 구한말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음란과 사치와 방종, 그리고 부정과 부패와 사기와 협잡이 만연합니다.

 

게다가 하나님 비방하기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자취를 없애려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세상의 거센 도전에 응전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치부하고 편하게 살려고 세상에 손을 비빕니다.

 

서울광장에 동성애자들의 망측한 행사가 벌어지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죽이고 또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죽이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해합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성인들의 성생활까지 국가가 간섭할 수 없다? 여러분 장난이겠지요? 국가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치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합니다. 그럼에도 점점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너희들은 절대 이것을 먹어서는 안돼 ’하고서는 못먹는 음식을 남들에게 팝니다. 세멘트를 만들면서 산업폐기물을 섞어서 발암률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방사능 폐기물을 돈 벌려고 국내로 반입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입니까? 또 그걸 허가해준 정부는 어떤 생각으로 그랬습니까? 음식에 농약을 치지 않으면 농사가 안된답니다. 그런데 시중에 나와 있는 비싸게 팔리는 유기농 식품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보이스 피싱에 파밍에 금융사기가 나날이 진보합니다.

기업가가 애국하는 길은 한 개입니다. 기업을 키워서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겁니다.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재벌들은 수백조의 돈을 쌓아놓고도 미래를 대비한답시고 직원들을 뽑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라내고 있습니다. 말은 좋습니다. 구조조정.
재벌이나 정치가가 해외로 빼돌려서 탈세지역에 묻어둔 돈이 한국이 세계에서 세 번째랍니다. 중국과 러시아 다음이라는데 이거 뭡니까?

 

백성은 음란하고 이기적이며 통치자는 교활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여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지 못하고 손비비기에 바쁩니다.  학자들은 밥을 위하여 신념을 버렸습니다. 국방비는 줄줄 새고 공금은 눈먼 임자 없는 돈이 되었습니다. 개인과 집단이 통째로 썩어서 돌아갑니다.

 

마지막 희망이라는 교회는 이미 등불을 꺼버렸습니다. 아무도 이 어두운 현실에 불을 밝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임의로 가공되어 잘했다 잘했다 또는 잘된다 잘된다만 남았습니다. 정말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밝습니까? 정말 이대로 좋습니까?

 

요시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옷을 찢었지만 매주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져도, 심지어 하루 한순간도 쉬지 않고 티비와 라디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누구하나 반성하지 않습니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폭주기관차입니다. 그러나 폭주하는 멸망으로 가는 기관차를 멈출 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때리지 못하고 빈 허공만 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요시야가 죽고 난 다음 유다가 급속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단기간에 바벨론에 멸망당한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불과 이십년 후 아니 불과 몇 년 후부터 엄청나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남에도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적군들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되어있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만 울려 퍼졌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그걸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를 다시 돌아 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나라를 보존하고 가정을 보존하겠습니까? 강한 군대, 엄청난 부, 조상의 가호, 삼천리 강토에 흩어져있는 나무와 바위와 당산목과 거북바위와 용바위, 그리고 각종 우상들?

아니요, 아니요. 우리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네 이웃에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부모에게 효도하라. 음란하게 굴지 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거 십계명에 다 있는 말씀이지만 우리나라의 고조선부터 내려온 8조 법금에도 있는 법들입니다.

요시야 한사람으로 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지연은 시켰을 겁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도 중요하고 그 지도자의 이상에 공감하고 행동하는 동역자들도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이 사회를 개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은 함께 멸망할 것입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발 비껴나서 저들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도 정신없이 돌아가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과 격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상고하세요. 그에게 집중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조금도 가공하지 말고 그대로 직면하고 받아 들이세요. 그 말씀의 거울에 현실의 우리를 정확하게 비추세요. 그리고 회개하세요. 그리고 함께 세상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서도록 노력합시다. 그리스도의 꿈을 우리가 공유하여 같이 나아갑시다.

 

하나님 없이 나간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가졌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가지지 못한 각종 혁명 역시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까지 겸비하고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갑시다.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을 위해 함께 나아갑시다.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 역시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내 자식과 내 가정과 내가 걱정입니까?
세상이 너무 불안하고 불확실합니까?

 

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가장 확실한 분, 결코 변개함이 없으신 분.
확실한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그를 의지하고 그와 함께 나아갑시다. 그가 복을 주실 것이며 그가 책임지실 것 입니다.
그런 멋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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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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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밀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의 결혼에 실패했고, 먼눈으로 기른 딸들은 밀턴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밀턴은 이렇게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지식이 뛰어나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를 가장 잘 지고 가는 자가, 신의 가장 훌륭한 종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월등히 잘 나가야 한다거나, 엄청난 부를 과시한다거나, 이른바 우월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나만의 성공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삶에 사명이 있는가? 얼마나 노력하며 사는가? 그런 단순함에 저는 강한 끌림을 받습니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범한 날의 소박한 결실이 있는가? 그렇게 매일을 노력하며 산다면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요시야도 율법서를 찾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혼란의 시대 속에서, 자기 신념을 지켜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 위대한 가능성의 존재라고 저는 믿습니다.

 

먼 옛날 선조들은 귀양길을 가더라도, 유배지에서 책을 펴고 다시 공부에 힘을 쏟았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매 순간 우리가 가능성 앞에 서 있기를. 불편하고 좌절스러운 시대라고 너무 원망만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 앞에 제대로 당당히 서 볼 것. 그런 우리들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