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사무엘상 30:1-20)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많습니다. 때로는 전혀 뜻밖의 청천 벽력같은 소식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주 가끔은 파안대소할 만큼 행복한 소식도 들려올 때도 있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야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아무 때나 갑자기 들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는 정말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다가 갑자기 닥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이 아예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내 맘대로 조종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인 이상 이 인간세상에서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하루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일들이 어쩌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섭도록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성장이 멈추는 것은 육체적인 면에 그치는 것이고
우리의 내면은,
우리의 지혜와 신앙은,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성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어려움은 우리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앞날을 알지 못하기에 이 고비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인지 마귀가 주는 재앙인지 혹은 단순한 인간 욕심에 따른 유혹의 결과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계기로 우리가 성장할지 아닌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저 흘러지나가는 일회성 에피소드인지 아니면 장구한 섭리의 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게 일회성이 아니라 장가과제라면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계시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진정으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를 향한 그 계획을 알아야 겠습니다. 알려면? 그래요,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가 정말 굉장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려면 몸도 건강해야 합니다. 몇일 전 나무 아래서 제가 기도할 때 짧은 시간이지만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제 몸에 있는 것들이 훅 나가버린 듯 했습니다. 기도하기 전까지는 그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배도 고파지고 다리도 휘청거리고. 집에까지 겨우 겨우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나에게 오셔서 알려 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고 기다리며 그의 뜻을 알 때까지 나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실 분이 아니야’하면서 그를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와 함께 가는 한 결코 세상이 나를 이길 수 없어!’
만일 그 어려움에 혹여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해서 좌절한다면 하나님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과 그 일행들이 블레셋의 망명지에서 큰 환난을 당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냥 환난이 아닙니다. 다윗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환난입니다. 다윗은 몰랐겠지만 그가 이 환난을 이겨내고 왕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망명객으로 쓸쓸히 사라지는가하는 중차대한 기로의 환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면 블레셋의 왕 그러니까 블레셋 5도시 연합의 군주인 아기스가 다윗을 이스라엘에 쳐들어가는 전쟁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기스는 이스라엘의 제일 맹장인 다윗이 자기를 도와서 사울 왕을 치게 되면 이스라엘을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전쟁에의 참여를 명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이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평판을 끝장내고 희망을 없애는 그런 끔찍한 일입니다. 동족을 배신하고 오히려 앞장서서 동족에게 쳐들어간 매국노를 누가 좋아하겠으며 누가 왕으로 세우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일은 다윗의 신념에도 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엄격하게 금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이 전쟁에의 참여를 거부할 명분이 없습니다. 블레셋의 왕 아기스의 식객으로 망명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주인의 청을 거부할 도리가 없습니다. 애들처럼 꾀병을 부려서 참여를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기스 외의 다른 군주들이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중에 혹시라도 다윗이 배신을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하면서. 그래서 다윗은 아기스의 의심을 사지 않고도 對 이스라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전쟁 중에 다윗의 거주지인 ‘시글락’으로 가 있도록 명령했고 다윗과 그 군대는 시글락 으로 왔습니다. 혹시라도 전쟁 중에 블레셋 군대의 뒷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다른 군주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막상 다윗의 망명지인 시글락으로 돌아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처자들을 사로잡아 가버렸습니다. 다윗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기위해 아기스에게로 모든 군대를 다 끌고 갔기 때문에 시글락을 지키는 군대가 없는 틈을 타서 아말렉 사람들이 노략질을 감행한 것입니다.
겨우 겨우 원치 않는 전쟁에의 참여를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성은 불탔고 처자들은 모두 사로잡혀 갔습니다. 눈앞이 캄캄했겠지요.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4절에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게다가 이제는 부하들까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흉흉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6절에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좀 웃기는게 아말렉 족에게 분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자기들의 대장에게 돌을 던지려 합니다.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
왜 우리들의 본거지 방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블레셋으로 망명할 때 그를 따라온 것은 어쩌면 다윗에 대한 동경이나 정의에 대한 지지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출세하게 되면 한자리 하려고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다윗의 친척이거나 그 패거리로 몰려서 사울 왕 치하의 이스라엘에서는 어찌할 수 없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정작 침략자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만만한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로 군대를 끌고 간 것은 다윗이 마음대로 한게 아닙니다. 아기스의 명령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게다가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도 다윗이 독단적으로 결정한게 아닙니다. 아마 당시에 그들도 다 블레셋으로의 망명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블레셋으로 망명할 수 있었지 모든 사람이 다 반대했다면 갈 수 있었을까요?
당시 다윗을 따르는 군대는 모두 600명입니다. 군중심리에 의해서 한사람이 돌을 들어 치면 다른 이들도 따라합니다. 이들에게는 그것이 정당한가 아닌가보다는 그냥 화풀이 희생양이 필요할 뿐입니다. 다윗도 아내들이 잡혀 갔습니다. 같은 피해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 합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일이 안될때는 항상 지도자를 욕했고 서로 싸우고 으러렁거렸습니다. 새삼스런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이것은 일생일대의 위기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봐도 이것은 큰 위기입니다. 역사의 분수령이라 할 만합니다. 만일 이때 다윗의 미숙한 대응으로 이 망명자 공동체가 와해되었다면 역사에서 다윗왕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뿌리로 난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오셔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내었더라”
다윗에게로 원망이 쏟아 졌는데 다윗에게는 과연 죄가 있습니까? 원망할 근거가 있습니까?
다윗은 이전에 아말렉을 약탈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이 보복하러 온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윗은 아기스의 명으로 전쟁에 참여하기위해 군대를 몽땅 끌고 가서 시글락을 비움으로써 시글락이 침공을 당하도록 만든 전술적 실패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일부러 그런게 아닙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고 그 역시 피해자임에도 대중들의 분노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돌을 들어 다윗을 치려고 하는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다윗의 대응책을 보십시다.
7절에 보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다윗은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린게 아니라 하나님께 묻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를 묻기 위해서 제사장을 찾고 그에게 에봇을 요청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이 입으려고 요청한 것은 아닙니다. 대제사장의 옷인 에봇 앞부분에 주머니가 있고 그 안에 우림과 둠밈이 있는데 이걸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그걸 입고 자기에게 오기를 바란 거지 다윗이 입으려고 요청한게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원문의 뉘앙스는 매우 정중하게 제사장에게 요청한 겁니다. 강제적으로 명령하거나 재촉한게 아닙니다.
1.먼저 기도하라
8절에 보면 다윗이 묻는 말이 나옵니다.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자, 봅시다. 다윗은 그 위기의 순간에 자기의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에게 예배합니다. 그에게 기도함으로 그의 뜻을 구합니다. 다윗의 이런 면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한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잘 보면 사람들은, 적어도 여자들과 자녀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여러번 보입니다. 사람이 일단 죽어버리면 원상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살아 있다면 원상회복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일이 걸리고 수고를 해야 할뿐 얼마든지 기회가 생깁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 번째,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닥치면 먼저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물읍시다. 그가 지시하시는 대로 합시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 여기 본문에는 약간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쫓아가라고 직접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제사장이 기도를 하고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 둘 중에 하나를 손으로 집어 냅니다. 이 돌맹이는 줄로 연결되어 있고 양쪽 끝에 우림과 둠밈이 달려있는데 그 나온 돌을 가지고 가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나오면 가하다는 뜻이고 다른게 나오면 아니라는 뜻이다. 뭐 그렇게 하는 겁니다.
2.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8절에 “그를 쫓아 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말은 이렇지만 반드시 아말렉을 따라잡고 잡혀간 여자들과 자녀들을 도로 찾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적이 쳐들어와서 성읍을 불태우고 포로를 잡아 갔는데 그들을 모두 도로 찾을 수 있다는게 쉽사리 믿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장담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본문을 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갔다’는 것을 알지만 본문 속의 다윗과 그 일행도 그 사실을 확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남으니까 당연히 그게 없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들을 끌고 가다가 어디 다른 곳에서 죽일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잡아 가려다가 나중에는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또 시글락이 불타고 있는 잿더미 속에 시체 한 두구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기도하고 그 뜻을 구했다지만 잡혀간 이들과 빼앗긴 재물을 도로 찾는다는게 과연 가능할지는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그 군대는 아기스의 진에서 시글락으로 삼일간을 행군해 왔습니다. 그런데 시글락이 노략당한 것을 보고 쉬지 못하고 즉시로 아말렉을 뒤쫓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군이 너무 강행군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브솔 시내에서 600명의 군대 가운데 200명이 ‘피곤하여 브솔시내를 건너지 못했다’고 합니다.
브솔시내는 ‘차가운, 추운’ 시내란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이 시내가 있는 곳은 험준한 산악지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동일대에서 산악지역이 아니고는 차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브솔 시내는 시글락에서 약24km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험준한 산악지역을 무리하게 행군한 결과 200명은 낙오합니다.
물론 이들이 단순히 피곤해서 낙오했는지 아니면 다윗의 추격에 기대를 하지 않아서 낙오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400명의 군대가 남겨진 200명을 공동체에서 축출하려고 한 것을 보면 이들이 단순히 피곤해서 낙오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은 다윗에 대한 실망과 불만을 함께추격하지 않고 남는 것으로 표출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9절에 보면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한 육백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 상으로는 ‘바로 그 사람 다윗과 또 그와 함께한 육백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본문은 그 추격전을 주도한 것이 바로 다윗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로 누군가를 강조할 때 성경이 잘 쓰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그들의 대장이라서 의례적으로 다윗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사람들을 재촉해서 추격전을 주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추격전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피곤하여 낙오한 사람도 군대의 1/3이나 됩니다. 점점 다윗은 초조해지고 초라해집니다.
아마 브솔 시내까지는 한 개의 길이었지만 이 시내를 건너고는 여러 갈래로 길이 나뉠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와서도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어렵다. 그러니까 ‘산악지역의 외길을 벗어나서 들판으로 나가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리해진 여건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가면 모두 다 찾아서 돌아오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믿은 것입니다.
‘에잇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 왜 나보고 난리냐, 나도 피해자다. 이젠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절규하며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망명이고 혁명이고 왕이고 다 필요없다. 이미 글렀다.’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면 사람들은 저절로 힘이 빠지고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에 의심이 생기고 포기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게 지도자가 가진 덕목입니다. 믿음 또는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 그래요, 세상을 거스리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나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지도자가 혼자서 결단하고 밀고 나가야 할때도 있습니다. 물론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중의를 묻고 그들과 함께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나혼자서라도 따르겠다는 고집도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중요해도 하나님의 명령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3.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만나고
갑자기 성경에는 11절에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어떻습니까? 요즘처럼 도로가 정해진 시절도 아닌데 마치 약속한 것처럼 들에서 애굽사람을 만납니다. 산악지대를 벗어나서 아말렉을 추격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과 가축들의 발자국, 그리고 지나간 흔적은 삼일만에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아말렉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부족이나 대상의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혹시라도 아니라면 어쩌지요?
그래요, 그런데 절묘하게도 이들은 들에서 애굽사람 하나를 만납니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본문은 ‘우연히’ 만났다고 되어 있지만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무리들은 애굽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그를 다윗에게 데리고 가서 떡과 물과 음식을 줍니다. 본문의 내용상 이 무리들은 본대를 위해서 미리 정찰을 하고 있는 정찰병일것입니다. 아마 가능한 추격로가 여러개다 보니까 이리 저리 몇 개의 정찰조를 보내었을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들판에서 발견된 이 애굽 사람은 무려 사흘간을 굶었습니다. 게다가 병이 들어 아말렉 사람들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사흘 전에 병이 들어 버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들판에 누워 사흘밤낮을 굶고 있다가 다윗군대의 구조로 목숨을 구함 받은 겁니다. 다윗의 무리로부터 구함받은 애굽사람은 생명의 은인을 위해 그들을 정확하게 아말렉 사람들이 노략질 잔치를 하고 있는 곳으로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란 구절로 보아 그는 아마 다윗 군대에 발견될 당시에 굶주림과 병 때문에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 보시면 떡에 물에 무화과 뭉치와 포도 송이까지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그를 살리기위해 다윗 일행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지금 애굽 소년 하나의 목숨보다 추격이 더 급하겠지만 애굽 소년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다윗 일행은 그 소년으로 인해 더 큰 보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나에게 이득이 될 사람이면 그 앞에서 호의를 베풀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봐가면서 호의를 베풀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지으신 내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때문에 호의를 베풀어야만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대로 실천하면 그뿐입니다. 위기에 빠진 이웃을 선대하면 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은 그렇게 했습니다.
구하고 보니 그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의 노략질하고 관련이 있는 ‘관계자’입니다. 게다가 그는 아말렉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므로 아말렉에 대한 원한이 클 것입니다. 두말하지 않고 목숨의 은인을 위해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가 종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종은 특유의 복장이 있습니다. 다윗은 구원받은 그 사람을 보고 바로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라고 묻지 않습니까?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자비를 베푼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을 믿고 아말렉을 추격한 다윗을 위해 길잡이를 남겨주셨고 그를 통하여 그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애굽 소년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에게 길잡이를 부탁하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자들의 몫입니다. 바쁘지만, 내가 지금 정신도 경황도 없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사람에게 베풀다 보면 우리는 뜻하지 않게 나를 위한 길잡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만나면 그가 당장 나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 듯이 보여도 사막에 버려진 사람을 구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그가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래서 나의 형제이기 때문에 선대한다면
그 일로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도 바빠 죽겠는데, 내 코가 석잔데 뭐 쓸데없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라고 ...........’이런 식은 하나님의 군대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나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그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가 나를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건져 올리셔서 품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4. 차별하기 보다 포용하라
다윗의 군대가 아말렉을 찾아 가보니 그들은 지금 승전 기념회를 열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도둑질을 잘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블레셋과 유다의 여러 지역을 공략하고 엄청난 사람과 재물을 끌고 왔습니다. 이게 당하는 사람입장에서는 천인공노할 짓이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한 방식입니다. 중동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전리품을 빼앗아서 먹고 사는게 일종의 자랑이요 그네들의 풍속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은 대취해서 정신이 없는 그들을 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래서 아말렉 사람들을 이기고 보니 전리품이 굉장합니다. 시글락에서 빼앗아 간 것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온 블레셋과 유다를 돌면서 노략질을 했는데 엄청난 재물과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은 자기들이 빼앗긴 사람과 재물뿐만 아니라 아말렉족이 다른 곳에서 빼앗은 것들도 모두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족이 일대를 쳐서 노략질한 그 모든게 다 다윗일행의 차지가 된 겁니다.
사람은 한 사람도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19절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라고 한 대목이 보이시지요? 하나님은 잠깐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결국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전화 위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몇배 몇십배의 이득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물론 고생은 했습니다. 가슴도 철렁 내려앉을 공포도 맛보았고 대성통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놀랍고 기쁜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일행들, 다윗의 무리들은 아말렉에게서 빼앗은 가축들을 몰고 가면서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했답니다. 다윗을 돌로 치려하던 그들이 이제는 다윗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더 큰 위기가 닥쳐옵니다. 바로 공동체의 와해. 22절에 보면 다윗의 일행 중에서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낙오병들을 무리 중에서 내쫓으려 합니다.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천신만고 끝에 아말렉을 쳐서 자기들의 친인들을 도로 찾았습니다. 빼앗긴 재물도 도로 찾았습니다. 게다가 다른데서 노략질한 물건들 원래부터 아말렉의 물건들과 가축들도 몽땅 다 차지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칭송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집니다. 자기를 끝까지 따랐던 400명중에서 악한자와 불량배들이 낙오한 사람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실망한 그들이 공동체에서 스스로 나갈 수 밖에 없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낙오한 자들의 숫자가 무려 200명 , 1/3이나 됩니다. 지도자는 공동체의 대원을 한사람이라도 더 늘리려고 하는데 정작 대원들은 자기 고집만 부립니다. 사실 공동체에는이런사람 저런 사람이 있습니다. 선하고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악하고 쓸모없는 자들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한 공동체에 속해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공동체는 생각지도 않고 눈앞의 재물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마 어마어마한 재물을 보고는 이걸 나누기가 싫었던가 봅니다. 그정도면 충분히 풍족함에도 더 풍족해지려는 욕심이 생긴 겁니다.
공동체안의 다툼은 항상 욕심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욕심 욕심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걸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방치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공동체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심하면 와해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아마 이때 악한 이들과 불량배들의 말대로 했다면 다윗은 재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사태를 잘 수습하지 못했더라면 다윗의 입지는 없어 졌을지도 모릅니다. 지도자는 한쪽을 버리고 다른 한쪽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줄어 듭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공동체가 와해 됩니다. 선택의 순간은 자주 오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신앙공동체에서 제일 중요한 명분은 ‘하나님이 하셨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서 하나님을 판 게 아닙니다. 자기의 악행을, 어리석은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판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듣기에도 명분이 서는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내세웁니다.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우리들이 흔히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봐라, 네가 잘했는지 내가 잘했는지. 누가 옳다고 하는지” 다윗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누가 봐도 옳다할 만큼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31:27에 보면 싸움에 나간이나 그렇지 못한 이나 모두가 전리품을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 율법조항이 있는데 지금 악한이들 불량배들이 그걸 어기자고 하는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욕심만을 충족시키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이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질앞에 명분을 버리는 행동은 장기적으로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장기적으로 사람의 평판을 떨어 뜨리고 공동체를 안으로부터 와해시키는 일입니다.
다윗은 술수를 부리고 말장난을 하고 위력으로 내분을 수습한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그리고 정직함으로 욕심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함으로 공동체가 와해될 위기를 수습한 겁니다. 다윗을 따르는 군대가 400명이라는 것 보다 600명이라는게 더 좋지 않습니까?
‘400명으로도 아말렉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굳이 저런 약골들을 끌어 안아야 되냐?’
‘어려울 때 합심해서 나를 따르지 않고 분열한 저것들을 내가 끌어 안아야 될까?’
‘나도 돈쓸데가 많은데 저것들과 나누지 않으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어쩌면 낙오자들은 단순히 피로하고 체력이 약해서라기 보다는 다윗에 대한 불신,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 때문에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낙오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쫓아가봐야 안된다는 생각으로 지레 포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말렉의 강성한 세력을 겨우 600명으로 쳐들어 가서 과연 우리가 이기겠냐? 그런 싸움을 하다가 내가 죽으면 뭐하냐 이런 생각으로 낙오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다윗이라고 이런 사람들이 좋았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악당들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수고는 우리가 다 하고 너희는 수고한 것도 없는데 처자라도 무사히 돌려 받았으니 감사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들과 동등하게 전리품을 나누는 규칙을 세우고 이 일을 통하여 공동체를 더 공공하게 만듭니다. 약한 자에게도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몫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원래 율법에 있는 그대로 했을 뿐인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은 이전에는 율법의 조항에도 불구하고 동일 분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일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공동체를 위한 좋은 선례가 되었습니다. 공동체가 더 단단해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이기심과 인간 이성에 근거해서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행해왔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뻔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인간 생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가 단체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생각대로 변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신성모독적인 일이 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공동체는 그런 것입니다. 내가 쓸모가 있어서 대우받고 내가 별 볼일 없어서 홀대받는 일이 생기면 그건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일반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경쟁과 효율을 제일로 치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경쟁을 조장하는게 뭐 나쁩니까? 효율을 따지는게 그렇게 나쁜 일입니까?
그래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유례없이 각박하고 치열한 나라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다’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고 서로 유기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도우며 함께 나아간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조금 덜 효율적이면 어떻습니까? 조금 덜 누리면 어떻습니까? 꼭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이 알아줘야 됩니까? 내 마음이 편하고 내가 먹을 일용할 양식이 있고 몸건강히 있기만 하면 그게 행복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가 진정으로 행복한 공동체가 아닐까요?
5.곤궁할 때도 나누라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을 우리는 잘 압니다. 뭐가 있어야 나눠 먹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곳간이 가득 찼다고 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또 아닙니다. 없으면 없어서 나누지 못하고 있으면 주기 싫어서 나누지 않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정말입니까? 글쎄요, 욕심 많은 인간이 과연 그럴지는 두고 봐야 압니다.
다윗은 대원들에게 분배하고 남은 전리품을 친구 유다 장로들과 평소에 왕래가 있었던 족속들에게 보냈답니다.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이렇게 선사했기 때문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된 겁니다. 이제까지 다윗은 항상 꾸러 다녔습니다. 나발에게서 양식을 얻으려고 하다가 충돌이 일어난 일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은 꾸는 자가 아니라 남에게 나누는 자가 된 겁니다.
유다지파는 사울이 죽고 난 후에 누구보다 먼저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여 본격적인 다윗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환점이 바로 아말렉을 쳐서 얻은 전리품을 유다의 장로들에게 선물한 때부터입니다.
다윗이 유다지파라서 사울의 핍박을 받고 나라에서 홀대를 받고 손해만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우리의 형제라서 내가 이런 선물도 받고 ...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겁니다.
‘내가 이것을 왜 사람들과 나눠, 내가 이것을 혼자 다 차지해도 모자란다’
아니면 ‘저것들이 내가 아말렉을 치는데 무슨 힘을 보탰다고 내가 왜 주냐’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자 비로소 다윗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명을 보면 유다지파외에 다른 족속도 있고 다른 지파도 있지만 다윗은 평소에 은혜를 입었던 곳에 아마 빠짐없이 선물을 보내서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한듯합니다.
다윗에게 이번 사건은 일생일대의 대위기였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재물도 근거지도 없어진 게다가 자기와 함께 망명생활을 하는 동지들조차 돌을 들어 자기를 치려 하는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힘들 때일수록 선을 베풀고 약자를 보호하며 이웃에게 나누었기에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유다의 왕이 될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어려움이 있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그의 자비와 사랑을 믿으세요. 그가 처음 나에게 찾아 오셨던 그때를 기억하고 그를 여전히 붙드세요. 하나님은 결코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기도하고 그의 지혜를 구하고 마음의 여유와 대의명분을 버리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이미 우리 문 앞에 당도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도움의 손길이 저 문 앞에 이미 와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말고
그와 함께 천국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끝까지 참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상급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주시는 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계기로 찾아 옵니다. 기도하고 그를 믿으며 그와 함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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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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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다윗의 활약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위기 앞에서도 용기있게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글쎄요. 위기 앞에서 현실적 판단을 함으로서 좌절하는 사람이 있을테지요. 또 그와는 반대로 위기 앞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더 간절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도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망스러울 때, 다시 힘을 내서 기도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좌절스러울 때, 다시 힘을 내는게 좋겠습니다.
더 멀리 걸어가봤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속상한 일 앞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