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사무엘상3:5-)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여진 말씀을 듣는 곳인 교회가 반드시 절대 선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모두 다 선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있으되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까지 경쟁의 논리를 끌어 들이고 자본주의의 논리가 판을 치는 그런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꿩잡는게 매라고 사람만 많이 모으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눈에 바르게 가지 않아도 모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그 교회가 올바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는 교회라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교회의 단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그 목사의 나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다 사탄의 음해라고 치부되어 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이는 숫자나 건물의 크기만 생각하지 그 교회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인들에게 한 구좌에 400만원씩의 건축헌금을 강요하면서 그렇게 이루어진 헌금으로 크고 화려하게 치장된 예배당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 높아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한편 한국교회의 현실에 실망해서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소위 가나안 성도들이 백만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저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이런 가나안 교인들을 다시금 교회로 불러 올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명목과 실재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교회! 하나님의 눈에 흠잡을 것이 없는 교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려운 것은 압니다. 그래서 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고 껍데기만 남은 교회는 결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무리들이 성도의 이름을 달고 가증한 일을 행하는 곳에 결코 성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이름조차 거룩한 영이시니까 당연히 죄악된 곳에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아니한 곳에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일시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을 미혹할 수는 있어도 결코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고 또 일시적이라도 전부의 사람들을 미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미혹의 상태가 인생에 있어서는 오래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미혹의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청춘을 돌려다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외칩니다. 영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라.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네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묵상함으로 체크하라.
오늘 우리는 실제가 따르지 않는 형식만의 신앙이, 외형만 있고 내용은 없는 그런 신앙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가치한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을 살펴 볼 겁니다.
오늘 본문은 5절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때는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말기쯤 됩니다. 엘리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이고 아이 사무엘이 장막에서 자라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투의 결과 그만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아벡에서 무려 4000명의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패배하고 돌아온 군대를 맞이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패배의 처방으로 언약궤를 가져와서 그것을 앞세우고 전쟁을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장로들의 처방은 언뜻 보면 기차게 좋은 방책처럼 보입니다. 또 매우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가는 믿음의 전사처럼 보입니다. 무력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에 복을 더하시고 적군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을 한 2차 아벡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모든 이들의 예상처럼 승리는커녕 무려 삼만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3차 전쟁이 있지않고 이 전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쳐버렸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엘리제사장은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엘리의 두 아들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가계가 끊어진 겁니다.
여러분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이 언약궤가 만들어졌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민수기10:35에 보면 이 언약궤가 나가는 곳에 대적들을 흩어 달라고 기도했고 또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넜으며 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리고성을 돌아서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랬던 언약궤가 전쟁에 나왔는데 대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도데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5절에 보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올 때에는 이제 이겼다고, 이제 전쟁이 끝이 났다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쳐서 땅이 울렸고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알고 두려워했답니다.
처음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들어온 줄을 알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 그랬는데 막상 싸워보니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앞에서 대패를 하고 무려 3만의 전사자를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이 패배로 언약궤를 남겨두고는 각기 자기의 장막으로 도망갔답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 옛날 역사의 중심이었던 언약궤가 이번에는 왜 아무런 영험한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전쟁에 능한 신의 언약궤가 왜 아무런 능력도 보여 주지 못한 것일까요? 왜 왜 왜?
언약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이겼다고 승리의 함성을 목청껏 질렀고 블레셋인들은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했습니다. 왜냐면 언약궤를 설명하는 구절을 보세요.
4절에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그룹이란 천사를 말합니다. 언약궤의 겉에 그룹의 날개를 조각한 것을 보고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진짜 천사의 날개아래 언약궤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보십시다. 만군의 여호와.
‘만군’이라는 말은 ‘군대’ 또는 ‘천군’ 그리고 ‘군대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전능하심’이란 뜻도 됩니다. 즉 이들은 언약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겉에 새겨진 천사의 형상과 군대의 하나님이란 명치에 주목합니다. 그것이 마치 어떤 주술적인 힘을 가진 듯이 생각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을 기억하라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를 보면서도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놓고는 그 언약궤를 가지고 가기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무당의 그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언약궤를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이리저리 가지고 가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을 해치는 행동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언약이란 두 당사자가 이행해야 할 조건을 가지고 약속을 하는 겁니다. 정작 자기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요구할 조건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섬기고 나의 명한 계명을 지켜 행하면 내가 어디에서든지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리라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려놓고는 급하니까 언약궤를 이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 합니다.
정작 근본적인 문제인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신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외양을 이용하여 뭔가 주술적인 힘을 내도록 하겠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행동입니다. 그렇게 전쟁터로 가지고 온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버립니다.
언약궤가 실로의 성소를 떠나서 에벤에셀의 전쟁터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대패하여 도망했습니다. 참고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도움도 없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도움이 임한 곳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볼 때는 스스로 위대함을 증명하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블레셋 인들은 자기네 신이 하나님신보다 더 강하다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위하지도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전능의 하나님이 왜 그렇게 무능하게 블레셋의 손에서 자기네를 지키지 못했는지를 도저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 형식주의, 의식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사람들은 언약궤라는 외형은 가졌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신도가 가져야할 올바른 행실은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이 언약궤의 힘을 빌려 전쟁에 이길려고 하는 행동, 즉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행동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뜻을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나를 앞세우는 척하는 게 너무나 역겹구나!
그것은 나를 무시하는 신성모독의 행동이다!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는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는 상징물에 불과하지 언약궤 자체가 어떠한 능력을 가진게 아님도 알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웃긴게 여기 나옵니다. 9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으로 온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오히려 더 결사적으로 싸움에 임했습니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잘 보세요. 처음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쳤고 블레셋은 아벡에 진쳤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벡에 있는 블레셋의 진에 쳐들어 간 것입니다. 약한 쪽이 먼저 쳐들어 간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못합니다. 보통 약한 쪽은 수동적이고 강 한쪽이 공격적입니다. 상대의 견고한 진을 공격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섣불리 적에게 쳐들어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쳐들어 간 겁니다. 그래서 아벡 전투라고 합니다. 여기서 처음 이스라엘의 전사자는 4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앞세우고 싸운 두 번째 아벡 전투에서는 무려 삼만이나 죽고 패퇴해서 도망갔습니다.
언약궤가 오히려 블레셋으로 하여금 더 분발하게 만든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블레셋에 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며 종교적 혼합주의와 의식주의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한 제사를 멸시했던 엘리 가문을 벌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대적의 칼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자녀들을 벌하셨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빠진 언약궤는 한갓 우상에 불과한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 삼은 것에 집중하는 종교적 의식주의가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실제 생활은 이방인들과 같으면서 뭔가 특별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종교적 혼합주의가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가장 쉽게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매일 상기하면서도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은 정녕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덩치만 크면 무조건 용서받고 그 자체로 성령의 임재로 착각하는 종교인들의 생각이 과연 교회와 세상을 겸하는 섬기는 작태가 아니란 말입니까? 대마불사를 외치는 세상과 다른점이 무엇입니까?
“나는 절에도 가지 않고 점도 치지 않고 오늘의 운세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만을 의지하는데요?”
“그래요? 그럼 혹시 당신은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는 돈도 신입니다. 맘몬.
우리도 물론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돈은 하루 쓸 것만 있으면 족하답니다. 매일 매일을 그렇게 살라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나머지는 더하여 주신답니다.
그건 의식주는,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쓸 어느 정도의 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줄 테니까 너는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위해 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돈신을 섬기며 돈을 사랑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부유하게 살까를 생각하게 된다면 이건 교회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람은 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람의 삶을 편하게 하기위해 만들어진 돈이란 것 때문에 상처주고 상처입고 울고 웃는 다면 이건 정말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함은 하나님의 참으심을 넘어 서는 겁니다.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은 실제로 우리에게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다만 내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남의 생명이 아니라 내 생명만 그렇다는 겁니다.
다만 나의 사랑하는 이의 목숨은 귀합니다. 물론 천하보다는 조금 덜 귀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우리가 과연 종교적 혼합주의자가 아니라고요?
맘몬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라고요?
능률과 효율을 숭상하는 우리가 과연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한사람의 영혼을 위해 이천 마리의 돼지 떼를 죽음에 몰아 넣을 수 있는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현재 여기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떼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더 중하게 여겨서 여기 있는 양을 다른 목자에게 맡기고 잃어버린 양한마리를 찾기 위해 돌아 가시는 주님의 제자가 맞기는 한겁니까?
그래놓고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천만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옛날 언약궤만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승리한다는 종교적 의식주의 종교적 형식주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웃을 수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때 그들의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이나 비슷합니다.
예배당이 거룩합니까? 예배가 거룩합니까?
강대상이 거룩합니까? 그 위에서 퍼져 나가는 말씀이 거룩합니까?
너희 몸이 성전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도대체 왜 그렇게 자주 잊어 먹는 겁니까?
스스로는 몸을 막 굴리면서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자기가 거룩해 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엄위함과 공의는 애써 외면하고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만 줄창 입에 달고 있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고 벌이 변하여 상이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되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도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약간 특이한 클럽의 회원일 뿐입니다.
오히려 아무런 능력도 거룩한 모양도 없는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게 만든 우리는 신성모독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미 거룩한 모양은 가졌으므로 그 모양안에 거룩의 모양을 따르려는 마음을 더하면 됩니다. 그래서 거룩의 외양에 거룩의 내용을 채워넣게 되면 되는 겁니다.
거룩하게 살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뭐 막살거나 한건 아니지만 목사가 되면 세상의 낙과 작별해야 된다고 해서 목사는 결코 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 좀 살아 보니까 목사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재미 때문에 목사를 하는건 아니겠지만 꼭 불법에 퇴폐적으로 놀아야만 재미를 느낄 수 있는게 아닙니다. 잔잔한 가운데서 주는 재미와 보람도 무시못하는 겁니다.
한 사람이 불리한 여건을 딛고 일어서서 우뚝 서는 것을 보는 보람
병든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더 열심히 나오는 것을 보는 재미
사랑하는 사람들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햇살아래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록들을 보는 재미도 결코 못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웃으며 아무 걱정없이 친구와 장난치는 것에 마음 따뜻해 지는 소소한 재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 여기는 상황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우리는 너무 막 살 땐 느끼지 못했던 작은 것들 속에 있는 재미와 감동과 뿌듯함에 놀라게 될 겁니다.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앞길에 걸리적거리는 모든걸 짓밟고 파괴하고 가야만하는 그런 고독하고 정신없는 게다가 비정하기까지한 질주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가는 삶, 조금 늦어도 주위를 둘러보고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은 피하거나 뛰어넘고 몸도 힘들지 않고 주변경치도 즐기면서 충분히 즐겁고 아름답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삶도 훨씬 더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나혼자만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이 많은 이들이 함께 즐겁고 기뻐한다면 내마음이 단순한 즐거움에서 따뜻함까지 느끼게 될 겁니다.
해보세요. 너무 빨리 빨리만 찾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한발 느리게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함께 가는 삶에는 여유와 인간다움과 재미와 보람까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느낀건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예수를 극성스럽게 믿지는 않는데 예수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일반 세상 사람들하고 생각하는 게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교류하면 ‘아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바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명목상 주일신자에 불과하다고 씩 웃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성도구나하고 느껴집니다. 그리고는 슬퍼집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을까?’하는 자괴감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합니다. 그 옛날 아무것도 이웃을 위해서 해 줄게 없었던 유대인들은 자기 집 앞에 큰 항아리를 놓고 물을 가득 채워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릇을 두었답니다. 길가는 나그네가, 목마른 나그네가 물 한잔을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추수 때에 다 베지말고 조금은 남겨두어 가난한 이들이 베어 먹을 수 있게 한 그들의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지요. 곡식단을 묶을 때에 조금은 땅바닥에 빼어서 흩어두어 아이들이 주워 가도록 했다지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선단체는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교회고 교회는 자선을 주로 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전진기지인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삶속에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겠다고 생각되도록 그렇게 살아 볼 일입니다.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감사를 알고 실천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알고 그것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데 왜 이웃에게 그것을 실천합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내 아버지의 형상이 내 이웃에게 그대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사람들 가운데 악마의 형상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이마에 악마의인을 치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 혼자만 잘살자고 남을 짓밟는 이들이 그런 이들 입니다.
빼앗긴 언약궤는 알아서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 옵니다.
그리고 빼앗긴 언약궤 때문에 기존의 대제사장인 엘리와 그의 후계자들이 다 죽어 버립니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무엘이 사사와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블레셋에게 패했지만 사무엘시대에 미스바에서 블레셋을 대파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합니다. 그 전에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게 됩니다. 철저한 종교개혁,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열정의 회복과 자체 내의 정화.
우리 스스로 한국 교회를 정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대신 그것을 하실 것입니다. 다른 누구의 손을 통해서.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불신세력 누구의 손을 통해서 교회개혁이 강제로 이뤄진다면 이 땅의 교회가 겪을 고난과 핍박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교회에 속한 세속화와 종교혼합주의를 타파하는 것이지만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자체적인 정화를 하지 못한다면 아니 안한다면 다른 민족이 강제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당할 고난을 어찌 말로다 표현하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 교회도, 우리 나라도 먼저 자체적으로 개혁하고 정화해야 합니다. 자정능력을 상실했을 때에 우리 하나님은 결코 방관하지 않으시고 강제적으로 외부의 손을 동원하여 개혁하시고 정화하실 것입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그가 만드신 세상이고 그는 이세상의 영원한 주재자요 조화옹이시며 자신이 만든 이 세상이 인간들의 손에 더러워져서 자기의 자녀들인 의인들의 눈물의 호소를 외면치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이 강제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을 통하여 개혁하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빼앗겼지만 강제로 이스라엘은 개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자정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 우리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 개혁의 현장에 우리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너무 거창해서 엄두가 안납니까?
그래요, 제가 큰걸 주문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 교회 권사님 중에 한 분은 올 한해 교통법규를 잘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분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자그마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권사님은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를 생활화하기를 다짐한 분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도는 십일조의 삼분의 일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누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람이 말하는 성물이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우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택함받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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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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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감동적인 설교를 업데이트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매번 일하고 나서 올리게 되는 늦은 밤, 거의 새벽시간이지만, 혼자 고독하게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좋습니다. 저는 제일 먼저 "기다림"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랐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할 수 있어를 외치며 달려들어가는 것에 매우 익숙해 졌습니다. 혹시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언약궤도 있고, 하나님도 그럭저럭 섬기는데 모든 게 다 OK! 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최근, 이번 주 역시도 (어머님이 아픈 관계로 주로) CBS 방송을 보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손 약속을 믿지 않고,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출생시키자, 그 전능자 하나님이 10여년 넘게 침묵을 했다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제일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만 봐도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분의 섭리로 침묵하시자 이스라엘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언약궤도 효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기다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고, 하나님께 물어보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예배를 소중히 하고, 이웃을 소중히 여기며, 돈 대신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참된 크리스챤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순례의 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찬송가도 있잖아요.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순례는 국어사전에 의하면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순례하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우리가 삶의 하루 하루를 순례의 길처럼 산다는 것은, 매일을 아름답게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매일 중에는 힘겨운 날이 있음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기도하고, 감사하며, 행복해 하는 그 그림이 참 아름답지 않을까요. 우리가 나만 생각하지 말고, 주변을 생각도 해보고, 인생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게 즐거운 일들도 멋지게 상상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는 것. 기다림의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응원합니다. / 2016.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