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꾼 비유 (마태복음 20:1-)
오늘 우리가 살펴볼 비유는 솔직히 말해서 매우 이상합니다. 왜 천국이 포도원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이지요? 천국은 포도원과 같다 이래야 하는데 포도원 주인과 같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유 속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을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요즘 이런 주인이 있다면 아마 갑질 주인으로 미디어에 오르내릴 겁니다.
그런데 그 주인을 우리가 욕하기도 곤란합니다. 그 주인은 사실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하신데에는 뭔가 깊은 뜻이 있을까요? 물론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며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깊은 뜻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찝찝한게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하고 겨우 한시간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하고 품삯을 같이 주면서 ‘내 돈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고 말한다면 이건 정말 갑질 중에 상 갑질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아주 진지하게 천국에 대한 비유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보면 결코 우리를 웃기려거나 아니면 분노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비유를 드신게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 비유가 천국에 관한 비유라고 하는데 과연 천국과 이 비유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1.천국은 포도원주인과 같다.
먼저 천국은 일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넓고 어디에 위치해 있고 하는 물리적인 천국에 대해서 말하는게 아니네요. 잘 보면 천국의 성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징?
천국이 집주인하고 같을 수는 없는데 집주인이 포도원에 일꾼을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고 합니다. 만일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천국은 하나님이 천국 일꾼을 직접 부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보통은 포도원 주인이 직접 일꾼을 선발하기 보다는 청지기가 하지 않겠습니까?
이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단지 품삯만을 지불할 뿐 품꾼들을 직접 선발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청지기도 아니고 전속 일꾼들이 일당제 일꾼들을 뽑아서 데리고 가지 않을까요? 보통의 경우에 주인은 일꾼들을 뽑으러 가지는 않고 일하러 온 일꾼들을 검사해서 추려내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나요? 아니면 청지기가 있으니까 그런일도 청지기에게 맡기고 자기는 그냥 포도주나 기울이면서 지내지 않나요?
그런데 여기서는 일꾼을 뽑기 위해 포도원 주인이 직접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사람이 전도를 하는 것 같아도 결국 우리 아버지께서 선택하시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옛 어른들이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채우신다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오늘 교회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은 겁니다.
2.부르심을 받은 시간은 다양하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부르심을 받는데 그 시간이 일률적으로 똑같지는 않습니다. 여기 보시면 이른 아침 즉 오전 6시부터 오전9시, 낮 12시, 오후 세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5시까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전6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섯 시간만 일합니다. 정말 소수의 사람들은 오직 한시간만 일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포도원에서 몇 시간을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포도원에서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품삯을 나누어 줄 때에 과연 그가 포도원 품꾼으로 남아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는 시간은 달라도 포도원에서 일을 마치고 나가는 시간은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품삯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품꾼들이 품삯을 받는 때는 실제로는 최후의 심판때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는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이 거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다가 일이 끝나는 오후 6시를 한시간 앞두고 그만두었다고 해서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주지는 않습니다. 거의 일평생 예수를 잘 믿다가 죽기 얼마 전에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누가 열심히 일하는지를 감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마감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바깥에서 여전히 포도원을 위하여 일꾼을 모아 포도원에 들여 보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마칠 때 청지기에게 정산해 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일을 하는 방식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교회에 들어가는 것으로 즉 입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믿는 시기는 각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3.품삯은 주인의 마음이다
이 비유에서는 품삯을 주는 방식이 일반 세상의 관례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일찍와서 열심히 일한 순서대로 품삯을 줍니다. 회사 같은 곳을 보아도 호봉제를 실시해서 일찍 회사에 들어온 이에게는 높은 호봉을 쳐줍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비교적 많은 급여를 지불합니다. 아무래도 일하는 시간이 더 많고 따라서 기여가 많고 따라서 공을 더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늦게 온 사람부터 품삯을 줍니다. 이건 정말 세상의 관례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겨우 한 시간 일한 품꾼에게 주인은 놀랍게도 은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주인은 지금 12시간을 일한 거나 한 시간을 일한 거나 똑 같이 일당으로 계산한 겁니다.
이걸 본 먼저 온 자들은 더 받을 줄로 생각했답니다. 어쩌면 이들은 포도원 주인이 사람이 좋아서 관대하다고 칭송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들에게도 은 한 데나리온만을 줍니다.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12시간 일한 자신들에게는 12데나리온이 와야 할 것 같은데 한 시간 일하나 열두 시간 일하나 똑 같습니다. 이거 어떻게 된겁니까?
게다가 포도원 주인은 원망하는 폼꾼에게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네가 나와 한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원래 너하고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을 했는데 그렇다면 계약대로 이행했는데 무슨 소리냐?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주인은 이어서 말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내것을 가지고 내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의 말은 맞습니다. 하루 일하고 일당 은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한게 맞습니다. 게다가 일꾼은 일당으로 정확하게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불평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이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자기 돈이지만, 아무리 자기가 고용주이지만 제 멋대로 하는 것을 이해할 품꾼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바로 이해가 됩니다. 뭣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절대 주권!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한다는 거지요. 절대 주권이라고 할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자세하게 비유로 설명을 듣게 되니까 뭔가 부당하고 하나님이 독재자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강제로 뭔가를 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가장 높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십니다. ‘내가 이정도로 당신에게 잘했으므로 당신도 나에게 신경을 써야 안됩니까?’ 같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과 우리는 계약을 맺은 사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명령을 따르면 그는 나를 자녀로 삼으시고 나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게 바로 계약입니다. 본문에도 나왔습니다. 은 한 데나리온에 계약했으므로 그 계약대로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요 계약대로 은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불평할 수 없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일한 품꾼에게 계약을 정확하게 지킨 것은 감사할 일이 아니라 불평할 거리입니다. 그런데 일하러 늦게 들어온 다른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은 감사할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을, 일찍부터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나중에 들어온 일꾼들이 우리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감사의 조건인 셈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라는 선민사상에 젖어서 실제 행실은 전혀 선민이 아님에도 선민으로서의 우월 의식에 젖어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기 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그들이 결코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또 하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일꾼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와서 제발 포도원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게 아닙니다. 일꾼들이 아니라 오히려 포도원 주인이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먼저 아무 일이 없어 놀 수 밖에 없는 폼꾼 대기조에게 가서 포도원에서 일을 하지 않겠느냐고 내가 섭섭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이기는 한데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주인은 아무데나 가서 품꾼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다가 만난 사람을 자기 포도밭에 일하러 가자고 막무가내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주인은 인력시장이 있고 인부들이 대기하고 있는 일할마음이 있어서 인력시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품꾼으로 뽑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강권하여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그 마음이 가난하여 마음이 허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은 느껴야 하나님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시간만 있으면 하루 일을 마칠 때에 조차도 하는 일이 없이 어쩔 수 없이 빈 손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노동자들에게 주인은 일자리와 상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상당하게 주리라’의 ‘상당한’ 이란 의로움, 정담함을 뜻합니다.
이른 아침에 부른 일꾼들에게 주인은 은 한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그렇게 계약을 맺은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터 일꾼들에게 주인은 품삯을 정하지 않고 다만 상당하게 주겠다고 말 말합니다. 이 상당이란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 말입니다. 의롭고 정당하게 대우하여 절대 손해가 나지 않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약간은 억지 스러울 수도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하루 12시간을 일한 사람과 겨우 한시간을 일한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은 정말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의로움과 정당함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은 이번 일에서는 정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바로 천국이며 하나님의 속성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세상의 법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경쟁을 시켜서 일등부터 꼴찌까지를 나누어서 차등을 둡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금 보신바와 같이 제일 약한 자를 기준으로 그 이상을 주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외면적으로 일찍 들어온 사람들이 일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시간을 남겨두고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면 어떨까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는 주인의 물음에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제가 파사데나에 있을 때 제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러 아침 일찍 길을 걷다 보면 멕시칸들이 잔뜩 모여서 누가 자기에게 일거리를 줄 사람을 기다립니다. 가끔가다 차가 와서 일꾼들을 데리고 갑니다. 그때면 서로 몰려가서 자기를 써달라고 어필합니다. 한명 정도 차에 태우고 차는 가버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다른 차를 기다립니다.
제가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그 길을 다시 지날 때 그 쪽을 보면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줄 때 서 있던 사람들이 결국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서 아무 곳에서나 앉아 있습니다. 그래도 일자리가 안 나오면 이들은 근처에 있는 빌라 파크(비야파케)에 가서 도박을 합니다. 여기서 한사람에게 돈을 몰아 주는 겁니다. 그래야 집에 가서 할 말이 있겠으니까.
지금 포도원에 한 시간을 남겨두고 들어가서 일을 한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은 은인입니다.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람이 없는 그런 은인입니다. 가장으로서 체면도 세워주고 하루 양식을 확보하게 해 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더구나 생각지도 않게 하루 종일 일한 일당을 쳐줍니다. 이 사람이 주인에게 얼마나 고마워 할지, 그리고 그 한시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인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다시금 그 상황을 합리화한다면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온 사람은 별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일자리를 확보했으므로 일자리를 준 주인에게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약간은 태만하게 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늦게 들어온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텃세도 부렸을 겁니다.
물론 성경본문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정의로운 주인이 다른 일꾼들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보아 먼저 온 일꾼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지 않나 추측할 뿐입니다.
주인은 원망하는 일찍 온 품꾼에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말합니다. 선하다는 말은 관대하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번역하면 ‘내가 관대하다고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렇게 되지요.
분명히 이건 맞는 말입니다만 왜 그 관대함이 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행해져야 합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우리 인간의 속에는 남을 해코질하려고 하고 비방하며 깎아 내리려고 하는 못된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질투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속성입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겠다고 하는 마음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포도원 일꾼이라고 하지 말고 교회 교인이라고, 하나님의 나라 성도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요 주인님 고맙습니다. 그 사람도 힘드니까 한 데나리온을 주신건 정말 잘하셨습니다. 아마 주인님에게 더 감사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동료들에게는 ‘자,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해서 한 데나리온을 벌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양식을 사서 집으로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되어야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원망이 아니라 주인의 관대함을 칭송하며 서로 기뻐함이 마땅합니다.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놀았는데도 똑같이 가지고 가는 것은 정말 마음에 안든다고 하는 생각은 옛날 공산주의자들이 가졌던 생각입니다.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체제의 맹점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야 당연하게 일당으로 또는 시급으로 돈을 칼같이 정확하게 계산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악하다고 보고 그런 악한 인간을 제어하기위해서는 체계와 법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이야기하면서 심하게는 ‘마음껏 일하고 필요한만큼 가져간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악하므로 당연히 남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게 일한 사람이 필요가 많다고 해서 많이 가져가는 것에 결코 관대하지 않습니다. ‘몸이 약해서 적게 일했으면 너희들이야 굶든지 말든지 양식도 적게 가져가야 맞지 않냐’ 라고 하는게 바로 인간의 악한 성질입니다. 질투. 이런게 바로 공산주의를 몰락시킨 원인입니다. 인간의 심성이 악하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지요. 우리는 체질적으로 남을 짓밟아야 되는 걸로 생각합니다. ‘더불어 함께’ 같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인이 쓴 돈을 봅시다. 그는 모든 품꾼들에게 은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은 한돈쯤 됩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랍니다. 그래서 주인은 정당한 계약을 한겁니다. 그러나 주인은 모든이에게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고 그래서 보통이면 쓰지 않아야 될 돈을 엄청나게 많이 썼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 보다 더 준 것이지요. 그런데 이른아침에 들어온 품꾼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는데 한 시간 일한 자를 우리와 같이 대우합니까’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세상의 방식대로 한다면 주인은 계약대로 일당을 은 한 데나리온으로 계산하고 그보다 적게 일한 사람은 한 데나리온에서 깎으면 됩니다. 반 데나리온 그리고 한 앗사리온 이런 씩으로 차감해서 준다면 주인에게는 훨씬 이득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충분히 관대했음에도, 자기에게 혹은 자기만 특별 대우를 하지 않았기에 주인이 원망을 받습니다. 주인은 돈을 많이 주고도 오히려 원망을 받습니다. 왜냐면 저 사람에게 준 것보다 나에게는 더 줄줄 알았다가 안주니까 실망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남은 모르겠고 나는 더 받아야 겠다는 마음이지요. 그리고 저 사람에게 왜 그렇게 잘해 주느냐는 마음입니다. 남의 행운이 배가 아파서입니다. 나의 행운이 아니기에 당연한 겁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이 세상과는 다르기를 원한 것입니다. ‘친구여’라고 주인이 일꾼을 부르지요? 이 친구라는 말은 ‘같은 목적을 가졌으며 운명을 같이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인은 원망하는 일꾼을 친구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인 다른 품꾼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것에 불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친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는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주께서 쓰신 호칭이 바로 ‘친구’입니다. 또한 예복을 입지 않고 임금의 잔치에 참여한 자에게 쓴 호칭입니다. 그 ‘친구’는 어두운 바깥으로 쫓겨 났답니다. 우리를 여기에 대입해 봅시다. 우리는 같은 성도를 형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 사이에 알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차라리 남이 잘됐으면 됐지 내 형제가 잘되는건 못보겠다는게 오늘 우리 성도들의 속마음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에 주께서 그를 보고 ‘친구여’라고 비꼬아서 부를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에서 노동시장에 쓰는 말이 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있습니다. 위치에 차이가 있습니다. 직장마다 직업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무노동 무임금이란 말에는 엄밀하게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준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뉴스를 인터넷 포탈로 접합니다. 그러니까 티비와 신문을 자세히 읽는 분들에 비해 뉴스를 많이 모릅니다. 그런데 무슨 기사가 있는고 하니 어떤 시멘트회사에서 비정규직의 밥값을 빼앗아 정규직의 체력단련비로 주었다는 겁니다. 아마 이 회사뿐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에게는 평등이란게 없습니다. 모든게 자기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지요. 그런데 이런 개인들의 이기심을 조정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정부가 해야 될 일입니다. 정부는 무릇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해서펴는 역할을 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의 이기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이 지금 원망을 듣는 것은 더 호구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 은 한데나리온을 주는 관대함을 보였다면 먼저 온 자기에게는 은 열데나리온은 아니 적어도 두 데나리온은 줘야 되는데 그걸 안줘서 화가 난 겁니다. 내가 한 데나리온밖에 못받는 다면 저 사람에게는 오히려 깎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평등하게 대우해서 오히려 화가 난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정의감으로 봐서는 그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가 맞다는 겁니다. 무한정으로 관대한 일이란 없습니다. 그걸 우리는 ‘호구’라고 하지요. 그런데 다른사람에겐 막 퍼주면 호구인데 나에게 퍼주면 그건 처음에는 ‘재수’였다가 두 번째로 되풀이 되면 ‘복’이 되고 계속해서 되풀이 되면 ‘권리’가 됩니다. 그러다가 익숙해 지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고 인간은 그렇습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바위에 새긴다고 인간은 항상 그렇습니다. 혹 가다가 이런 상궤에 어긋나는 사람이 나와서 은혜를 갚으면 미담이다 뭐다해서 책에도 신문에도 방송에도 나오는 겁니다. 왜냐면 그게 정말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방식으로 해 볼까요? 포도원 주인은 하루 일당을 한 데나리온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늦게 온 사람에게서 그 비율만큼 일당을 빼앗아서 먼저 온 사람에게 더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주인이 사용한 돈의 총량은 똑 같습니다.
그럴듯합니까? 그러나 잘 보면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손해를 본겁니다. 노동시간의 손해를 본겁니다. 주인은 계약한 것보다 더 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걸 욕심을 자제하라는 주님의 교훈으로 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잘 쓰는 말, 부자라고 해서 하루 다섯끼 먹는 것 아니다. 맞는 말이지요. 아무리 맛있는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결국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뷔페 식당이 영업을 하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날씬을 미덕을 삼는 사회에서 마음껏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솔직히 일정 이상의 재물은 그냥 쌓아 놓는 것이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통장에 숫자로 찍혀 있는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있다면 자기 만족감 정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쓸데가 없다면 그게 어디에 쓸모가 있습니까?
제가 본 가장 인상에 남는 영화장면이 있습니다. 미국의 마피아 두목 집에 돈이 너무 많이 쌓여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범죄로 돈을 버니까 은행에 예금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방 하나를 비워서 돈을 쌓아 두고 부하들이 총을 들고 문앞에서 그걸 지킵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쥐들이 돈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이게 너무 양이 많아서 해충을 퇴치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서 쥐들을 잡아 달라고 전화하는 장면. 이게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62명의 사람이 세상의 절반을 가지고 있답니다. 온 세상 부의 절반을 겨우 62명이 가지고 있다니 말이 됩니까? 지금 지구 인구가 한 74억 쯤 된답니다. 세상에 62명이 가진 돈이 37억의 사람들이 가진 돈과 같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품꾼들이 결코 손해를 보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라도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받지 못한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품꾼들은 더 많은 이익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세상의 규칙이 아니라 포도원의 규칙은 그렇습니다.
누구라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했고 모든 이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시간상으로 혜택을 본 사람은 있지만 손해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더 큰 이익을 주지 않았다고 나에게 왜 혜택을 더 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욕심, 나만 잘살면 된다는 욕심은 교회 안에서는 안 통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을 보고 ‘친구여’라고 불렀는데 오히려 품꾼들끼리는 친구가 아닌 모양입니다. 어떻게 남의 이익이 나의 불행이 될 수 있습니까? 그가 내걸 빼앗아서 남에게 준 것도 아닌데 왜 남의 행운에 내가 불행해 질 수 있지요?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회를 준다. 당시 유대사회에 일거리는 적고 일할 사람은 넘쳐 났습니다. 그러니까 오후 5시가 되어도 여전히 광장에서 인력시장에서 혹시나 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데 그 귀한 일자리를 구했으면 감사해야지 이건 그래도 여전히 불평입니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돈이 풀리면 경기도 살아나고 서로 이득입니다. 그런데도 더 많은이가 행복해 지면 그게 나의 기쁨을 줄이고 나를 분노하게 한다면 나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내 욕심이 문제인 겁니다.
평등한 결과에 불평하지 마라. 참 이런 말은 받아 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경쟁사회에 살다 보니까 모두가 잘된다는 것에는 그렇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누구와 비교를 하게되면 불평하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나대로 행복하고 너는 너대로 행복하면 되지 너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비교해서 누구의 행복이 더 귀하고 좋은가를 평가하기가 어려운데도 우리는 이걸 굳이 비교합니다.
왜 그런 평가가 됩니까? 다양한 평가 기준이 아니라 돈이라는 하나의 평가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겁니다. 물질주의가 그래서 골치 아픈겁니다.
가령 자녀가 상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 봅니다. 몇 명이 상을 받았니? 그래서 적게 받았으면 좋아하고 많이 받았으면 귀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적게 받으면 받을수록 그러다가 결국 내 자식만 받았다면 더 없이 행복해 합니다.
제가 요즘 물질주의에 어긋나는 일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뭐냐면 임금을 너무 많이 받는 근로자들의 임금을 깎아라. 그리고 사람을 그만큼 더 뽑아라. 그러니까 임금을 한 20%를 깎고 인원을 한 30%를 더 뽑아라. 노동자와 고용주가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경제적으로 사회에 활력이 돌게 하자. 노동시간을 줄여라 그래서 사람이 숨을 쉬게 하라.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월급을 받고 더 많이 소비하고 그렇게 서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 좀 추상적입니까? 일을 너무 열심히 시키지 말고 좀 적당하게 일하고 돈을 조금 깎아서 그 돈을 쓸 시간도 주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다니는 분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좀 내어놓고 그 만큼 사람을 더 뽑아서 실업난도 해결하고 소비자의 구매력도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면 좋겠다고 하는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 알바를 해도 최저임금을 만원은 주라. 그렇게 되면 알바를 해도 당장 끼니걱정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보장은 해 주고 더 욕심내는 것은 자제를 시키는. 사실 이건 개인에게만 맡겨놓기가 곤란한 일입니다. 사람의 욕망에 불을 질러서 사회의 발전을 꾀하자는게 자본주의니까 아무래도 여기서는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그걸 교회가 하는 거지요.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하는 것. 그걸 대학이 하는 거지요. 사람의 정신을 살찌우는 것을 학자와 작가와 사상가들이 하는 거지요. 조금 늦게 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겁니다.
사실 우리 헌법에는 개인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천부인권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는 제한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애꿎은 근로자의 임금만 깎느냐? 회사 주인들도 이익배당을 깎고 임원들의 급료도 줄여라. 고통을 분담하라. 회사의 사내 유보금이 1000조원이 넘고 역외로 불법유출시킨 돈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3위로 900조랍니다. 충분히 그 돈을 좋은데 활용할 수 있답니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아주 좋습니다. 당연히 그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요즘 뉴스에서 세계 상위1%의 재산이 나머지 99%의 재산보다 많아 진다고 합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어떻게 한명이 나머지 99명이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질 수 있지요? 이건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소리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선하고 관대하지만 결코 우리가 무분별하게 욕심을 부리는 것을 채워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포도원 주인이 제 멋대로라고 생각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스스로를 내가 선하다고 말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주인의 말이 맞습니다. 그래요, 주인이 아니라 우리가 물질을 바라보는 마음이 약간은 이기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 혼자만 잘먹고 잘살겠다고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주시옵소서로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주시옵소서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기도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주가 가르친 기도문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에는 겨우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한 마디 말밖에 없습니다. 교회들에 따라서는 내일의 일용할 양식이라고도 합니다만 어쨌든 일용할 양식입니다. 결코 앞으로를 위한 양식을 달라거나 부자가 되게 해 달라거나 부귀영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제대로 살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살 일입니다. 은 한 데나리온은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욕심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요, 교회는 그렇게 살 일입니다. 결코 세상의 경제 논리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래요, 성도는 그렇게 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정신없이 남을 이기고 경쟁하며 질투하며 그렇게 앙앙불락하며 살지 말고 더불어 함께 살 일입니다.
우리는 친구가 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이 좀 씁쓸합니다. ‘나는 뭐고?’ 이러면서 자학합니다.
우리는 친구가 안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유 정말 안됐구나!’라고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좀 놓이고 기분이 좋아 집니다. 친구와 비교해서 내가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결코 성도의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함께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함께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성도들 역시 자신의 아들딸이기 때문이지요.
이 지상을 지옥으로 그대로 두고 나만 죽어서 천당에 가겠다는 생각도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오늘 포도원 주인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관에 폭탄을 던지셨습니다. 우리의 관념을 산산이 부숴버리셨습니다.
우리를 한번 돌아 봅시다. 만일 우리가 포도원 주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잘하고 계신 겁니다. 계속 기쁨으로 확신을 가지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포도원 주인의 말과 다르게 가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돌이키시기를 원합니다. 주인과 정산할 때가 있습니다. 공과에 따라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세상과 다른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이 사회의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런 일을 위하여 힘쓰며 기도할 일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늦게 와도 괜찮아. 너도 이렇게 충분히 살아갈 수 있잖아." 어쩌면 한 폭의 기독교 동화 같은 이야기 입니다. 계산에 능한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저마다 해석해 보려고 해도, 괜히 마음만 복잡해 지는 것 같습니다. 오후 5시에 출근한 사람과,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받는 보수가 같다니요! 따지고보면, 하나님은 그토록 한 사람을 아끼시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입니다. "늦게 믿어도 괜찮아, 올바르게 믿고, 세계를 아름답게 바꿔나가자." 예수 믿는 이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힘이 있어! 라는 다정한 이야기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경험을 했다고 해서, 잘난 체를 한다거나,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거나, 새로온 자들을 얕잡아 보는 일을 제발 그만뒀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TV광고에도 나오는 유쾌한 비유를 들자면, "후배야, 협동 과제 레포트에 내 몫도 넣는거 알지?" 라고 폼잡고 갑질하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 선배님~ 대신에 선배님 이름도 뺄께요~"
조금 먼저 왔다는 것을 핑계로, 우리는 잦은 갑질을 합니다. 텃세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갑시다. 새로온 사람에게 좋은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음 세대를 아껴나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잘 믿게 힘써 격려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공의의 포도원 주인도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을까요. 너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곳이, 건강한 공동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