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마태24:1-)
똑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 어떤 이는 이 사건의 좋은 점을 보고 어떤 이는 이 사건의 잘못된 점을 봅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의 드러난 면만을 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이면의 감추인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이지만 같은 느낌을 가지기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은근하게 비유로 말한다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이가 그 내면에 감추어진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장황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의 서로 다른 시각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달라도 그냥 다른게 아니라 철저하게 다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오히려 의아할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잡히시던 마지막 때의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주님은 몇일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달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이라고 부르는 그 마지막 때에 그러니까 화요일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나오시면서 되어진 일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오실 때에 제자들이 그 성전의 화려함에 대해서 주님에게 가리켜보입니다.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아마 “주님, 저 성전 건물이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기들의 말에 동조하시고 성전 건물에 감탄할 줄 알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가리키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제자들은 주님이 성전을 가리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충격을 받고서는 헤롯 성전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지적하면서 “주님 저 건물을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설마 저 아름다운 성전이 버린바 되고 황폐해 지겠습니까? 아직 완공도 안된 건물인데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이런 뜻으로 성전 건물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성전은 지금 한참 짓고 있는 중입니다. 이 성전은 주후19년에 짓기 시작해서 주후6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목하신 그때는 성전의 본당과 뜰이 완성되었고 외벽공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황폐하여 진다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 역시 ‘너희들이 이 건물을 보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자신도 그 건물을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성전이 지금 한참 공사 중이고 아름다고 장엄하며 화려한 것을 너희가 보느냐? 나도 보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성전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 자세히 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철저하게 파괴된다는 말입니다.
성전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나 다릅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하기 때문에 그 영화가 영원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반기를 든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의 기본적인 기능에 주목하셨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 지금 성전은 그 두가지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온갖 더러운 음모와 거짓된 권위가 판을 치고 있는 거짓과 배신의 장소인데도 사람들은 정작 그 장엄함과 화려함이 주는 외양에 정신이 팔려서 그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떠나신 성전이 더 이상 존재의의가 없는데도 제자들은 일반 백성들과 같이 여전히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폭탄 선언을 하신 겁니다.
이 말의 본뜻을 파악하기위해 제자들이 많이 머리를 굴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위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나아와 조용하게 묻습니다. 조용하게 묻는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포인트입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은 지금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 물어 봅니다. 그런데 왜 조용하게 몰래 와서 물어 볼까요? 남들이 들을 새라 조용하게 물어볼 것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요?
바로 여기에 주님과 제자들의 인식차이에 관한 굉장한 비밀이 있습니다. 무슨 비밀일까요?
참, 여기 앉으셨다는 것은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쉬려고 앉은게 아닙니다. 제자들은 조용히 주님께 말세의 징조와 그 시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생각하는 말세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말세하고는 내용이 너무 너무 다릅니다.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안드레와 요한이 조용히 나와서 묻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여기서 말하는 ‘이런 일’은 성전이 무너지는 일을 말합니다. 감람산위에 앉으면 바로 밑으로 성전이 잘 보입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성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 성전을 보면서 제자들은 이런 일이 언제 있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의 파괴뿐만 아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관해서도 묻습니다.
자, 잘 보세요. 본문의 ‘임하심’은 주의 재림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헬라에서 ‘임하심’이란 말은 황제나 왕이 어떤 지역을 방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황제의 방문은 대단한 영예로 생각되었고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기위해 기념주화도 만들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주의 임하심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게 아니라 주께서 왕위에 올라서 예루살렘성에 임하실 때가 그러니까 왕으로 예루살렘에 갈 때가 언제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때 성전을 파괴할 것으로 생각한 듯 보입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헤롯이 자기의 인기를 위해 지었으므로 파괴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주님이 헤롯과 로마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킬 때가, 거사를 일으킬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들을까봐 몰래 조용히 그 시기를 물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들으면 곤란합니다. 역적모의를 밀고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그 역적모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당연히 조용히 인적이 드문 산에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말하는 세상끝 이란 말은 주님이 왕이 되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끝이란 말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수님의 왕위 등극이란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말에서 말세, 세상 끝은 결코 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세상이 오는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주님이 새로운 왕국을 열고 왕위에 등극하는 시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말세의 징조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해서 예언합니다. 발밑에 펼쳐진 예루살렘과 성전을 바라보며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마지막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세의 징조를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첫 번째로는 ‘거짓 그리스도가 많아지므로 여기에 미혹되지 마라’고 경고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답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랍니다.
세 번째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두 번째의 난리와 난리 소문과 비슷하겠지만 세 번째에 민족이 민족을 대적한다는 말은 한나라안에 다민족들이 연합하여 살고 있다면 그 나라들이 민족별로 쪼개져서 서로 싸울것이란 말입니다.
예전부터 나라와나라사이의 전쟁은 항상 있어 왔지만 한 나라안에서 민족들이 나뉘는 것은 최근에 두드러집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고 유고슬라비아가 여섯갠가의 나라로 나뉘고 소련이 붕괴하고 각 민족별로 나라가 독립하고. 어때요? 나라와 나라뿐만 아니라 민족이 민족에 대적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영국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독립하겠다고 하고 스페인도 바스크족과 북부의 여러 지방들이 독립하려 하고 한쪽에서는 통합의 물결이 몰아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오히려 더 작은 나라와 민족으로 나뉩니다. 이디오피아에서 에리트리아가 독립하고 수단은 종교에 따라 남북수단으로 나뉘었고.......
예루살렘이 주후70년에 멸망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 전쟁, 셀루치아 전쟁, 얌니아 전쟁들이 일어나서 로마내에서 싸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실 주님은 막연한 일반론을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에 있을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겠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난이 오면 이제 새로운 나라가 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하는 나라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이런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는 새로운 나라가 서기 전에 제자들은 고난을 당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그때에 너희를 죽이고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답니다. 그리고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미워하겠답니다. 네로에서부터 시작해서 디오클레티안까지 250년간 엄청난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죽고 사로잡히고 채찍질 당하는 것입니다. 이게 말세에 일어날 징조라는 것입니다. 이런것 때문에 배교자가 속축해서 동료 성도들을 밀고하고 잡아서 넘겨준다는 겁니다. 박해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의 인성까지 파괴합니다.
여섯 번째는 거짓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많아진답니다. 그리고 이 거짓선지자들이 불법을 성하게 하여 사랑이 식어진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법이 없는 방종한 상태로 사람들을 몰아가서 사랑을 식어 지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견뎌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지막으로는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세상의 끝이 온답니다. ‘저는 못들어서 안믿었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다 전파되어야 비로소 세상의 끝이 온답니다.
자, 여러분. 이게 정말 말세의 징조라고 생각됩니까?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너무 애매모호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난리가 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그래서 기근과 지진이 생기고 사랑이 식고.........이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처처에 난리소식이 있고 기근과 지진이 있었으며 가짜 그리스도가 판을 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저에게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내가 어릴 적에는 안그랬는데!’ 세상이 흉포해지고 살벌해 지면 항상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걸 보면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가고 불법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 당연 한가 봅니다.
그리고 한가지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난 중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는 기독교의 말세지 세상에게는 말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야기만으로는 그 시기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끝이 되는 징조라고 하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모호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 주님은 곧장 새로운 징조, 더 구체적인 징조를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좀더 구체적입니다. 예루살렘에 특화된 징조입니다.
15절 처음부터 성경은 아주 심각하게 말세의 징조를 말합니다. 게다가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뭔가 상당히 신비하고 굉장한 내용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먼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정도면 제법 구체적입니까?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란 말은 우상이 성전에 세워진다면 이란 뜻입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러한 징조에 적합한 사건은 주후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성을 점령하고 로마황제의 깃발을 예루살렘에 꽂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성전에 꼽지 않았느냐하면 성전을 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스스로 살아있는 신이라고 주장했고 황제숭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이는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확실한 듯 보입니다. 더구나 병행기사인 누가복음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이란 말이 있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에 딱 적합한 것인 듯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전에도 한번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졌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말세의 징조, 즉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후에 곧바로 예수님이 왕위에 즉위해서 제2의 다윗왕국을 만들고 로마로 진군할 것으로 여겼기에 예수님은 그 뒤의 설명까지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재난 방지 대책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언이란 것은 피할 수 있는 방책을 설명해야 진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되어질 일에 대한 현상의 나열만으로 예언이 끝난다면 도데체 우리보고 뭘 어쩌란 말입니까?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성으로 들어가지 말고 성밖의 산으로 도망가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의 바로 옆에 있는 감람산으로 가란 말은 아닙니다. 참고로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겨우 1km떨어져 있고 일년내내 마른 하천인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올라가는데 예루살렘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그리고 올리브나무들이 서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게 있어서 숨기 좋은 곳도 아니고 지대가 험해서 올라가기 어려운 곳도 아닙니다. 게다가 난리를 피할 만큼의 바위나 동굴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는 것은 몰라도 환난을 피해서 감람산으로 들어가면 위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병행기사인 누가복음21장에는 재난대비요령이 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저도 이 글을 보고는 깜짝 놀랄만큼 정확합니다.
“(예루살렘)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고 들어가지 말지어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당시에는 아주 이상한 말로 여겨졌습니다. 군대가 성을 포위했는데 어떻게 성안으로 들아가겠습니까?
게다가 군대가 성을 포위하는데 어떻게 성을 나갈 수 있습니까? 주님의 예언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물론 군대가 성을 포위하면 당연히 성안에서 싸우던가아니면 성을 나가 멀리 도망가야 합니다. 그러나 포위된 성을 벗어날 기회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이해되지 않는 말씀은 정확하게 주후 7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주후 66년에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놀랍게도 로마의 유대와 시리아지방 총독군을 패배시키고 이스라엘 땅에서 몰아내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용기백배한 유대인들이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모여 기세를 올렸는데 로마에서는 정예군단을 베스파시안에게 주어서 반란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몇 년간은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위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포위가 풀리고 로마 군대는 철수를 해버렸습니다. 왜냐면 당시 로마황제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차기 황제경쟁에 뛰어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포위망이 풀린게 자기들 스스로 그리스도를 자칭한 자기들의 신통력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오히려 성문이 열리지 성밖에서 성내로 물밀 듯이 몰려 들어갔었습니다.
더구나 유월절 잔치까지 겸해서 예루살렘성은 거의 이백만에 달하는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었답니다. 기록은 그런데 이건 좀 과장이 아닐까요? 당시의 예루살렘성은 이백만을 수용할 수가 없었을 것 같은데...어쨋든 모든 사람들이 성으로 들어올 때 주님의 이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잽싸게 이틈을 이용해서 성을 빠져나와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의 펠라 라고 하는 곳으로 이주했답니다.
그리고 성내에 일단 들어간 가짜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성을 탈출하려고 하자 가짜 그리스도들은 스스로의 세력을 유지하기위해 성문을 닫아 버렸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그리고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였답니다. 그냥 내전을 벌인게 아닙니다. 이들은 상대방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수년을 먹을 식량창고를 불질렀고 여기에 반발해서 상대측에서는 우물에 독을 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내의 비정상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골목골목마다 시체가 산을 이루어서 걸어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고 배고픔에 지친 여자들은 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여자들이 그랬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잡아 먹자고 보챘겠지요. 협박도 하고. 19절에 있습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날마다 싸움으로 지새우는 가짜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나중에는 집집마다 쳐들어가서 음식을 찾고 나쁜일을 했다고 하니 목불인견입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는 동안 새로운 황제위에 대한 계승전쟁에서 승리한 베스파시안은 자기의 아들 디도를 장군으로 삼아 재차 예루살렘에 대한 원정을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을 포위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성내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로마군대가 진주하자 어서 빨리 와서 자기들을 괴롭히는 가짜 메시야들을 멸하라고 부탁하고 이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단 한 번도 예루살렘성이 멸망하면 내가 왕이 될 것이고 새로운 나라가 설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때 산으로 성 밖으로 피하라는 말씀만을 하셨을 따름입니다. 세상이 어려워지자 여기 저기서 가짜 그리스도와 가짜 선지자가 나와서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말세의 징조를 틈타서 백성들을 미혹하고 왕이 되려는 자와 그에게 붙어서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은 주님의 제자들말고도 여전히 많았던 듯 합니다.
유대인들이 너무 어리석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도는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지옥도였을 뿐입니다. 진정으로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욕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왜곡하고 없는 영능력이 마치 있는 것처럼 자기는 하나님과 통하는 것처럼 위장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진정한 메시야는 죽이고 가짜 메시야들을 따르다가 실컷 고난을 겪다가 함께 멸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과 주님의 말세는 다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어디에서도 자기가 왕이 되고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부활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사랑하시가 그들로 하여금 환난을 피할 방책을 주셨을 뿐입니다. 다만 이걸 비유로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오해했을 뿐입니다.
진짜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제자들의 행동요령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잡하시기 직전까지도 주님이 이땅에 세우실 새로운 나라의 고관이 되어서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출세할 생각만으로 진짜 말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확실히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물에 공기까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공기청정기, 정수기가 심지어 우리의 건강을 더 위협하는 실정입니다. 공무원들은 뇌물을 받고 나쁜 물건을 만드는 것을 묵인하고 장사꾼들은 좋지 못한 재료를 사용하여 유독한 물건을 만들어 냅니다. 한두푼 이익을 더 보기위해서.
인성파괴와 자연파괴에 경기불황과 미래에 대한 암울함까지 가까운 미래에 수천년을 이어온 나라의 소멸까지를 보고 있지만 그 어떤 지도자도 여기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되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좋은 대책이 되어서 나라의 소멸을 멈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폭주 기차입니다. 달리다 달리다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해서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당장의 쾌락과 목숨의 연명 때문에 아무도 이 기차를 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 나라의 소멸과 멸망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함께 멸망하면 불에 타서 사라질 그 알량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아예 나라가 없어지는 것도 모른체 합니다.
아마 먼 훗날 우리민족은 역사의 미스테리가 되거나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왜냐고요? 타국의 침략을 받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애를 안낳아서 소멸한 어리석은 민족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때는 우리 때문에 많은 민족들이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 그들은 왜 멸망했나?’ 이런 제목으로 떠들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러한 삶에서도 말세지말을 당한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자녀들이 살아나기를 원하셔서 방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있습니다. 미국에서살고 있는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를 미국으로 보내신 섭리가 있다. 내 생각에는 마치 요셉처럼 우리가 먼저 미국에서 터를 잡아서 고국이 위험할 때 탈출한 한국 사람들을 정착시킬 선발대로 부르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어때요 여러분,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은 없겠지요? 우리 나라가 어떤 경우에도 멸망하지 않을 것 같지요? 우리나라의 적정 인구가 남북한 합쳐서 한 삼천만? 지금 인구가 너무 많지요? 그래서 징글징글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힘빠진 우리들이 이 나라를 유지하는 것을 이웃들이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나라의 독립이 유지되도록 그냥 두고 보지는 않습니다. 자본가들은 다국적 기업을 만들어서 여기 아니면 외국으로 탈출해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라도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은 계속될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는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설치지만 그들의 행동은 전혀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모든 이야기는 자기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의 개발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사두개인같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사회의 기생충입니다.
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도 자기의 자녀도 군대에 가지 않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득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애국을 강조하는 이들, 안그래도 삶이 힘들어서 헉헉대는 사람들의 등에 타고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이들, 이런 이들은 나라야 망하던 말던 자기네 이속만을 챙기면서 살겁니다.
이민가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제가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요 노랗게 태어난 우리는 갈데가 별로 없습니다. 중국으로 가겠습니까? 일본으로 가겠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여기가 우리에게는 제일 좋은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이 나라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멸망의 채찍을 좀 늦게 휘두르시도록 바르게 기특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실은 사회지도층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지도층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심이 넓다고 해도 결코 남의 사정을 당사자만큼 절박하게 자세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내 사는 동안에야 설마 이나라가 망하겠나 생각하고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미래는 생각지도 않고 내욕심만 챙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반인륜적인 범죄가 심심찮게 지면에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인내가 곧 끝이 날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더 늘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이 나라의 요소 요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쩌면 벌써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운데 있는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솟아날 구멍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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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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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사랑이 식어진다 라는 말이 참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남과 여가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혐, 여혐이라면서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하면 깎아내리느라 바쁩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당연히 흠은 매우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흠집나 있는 것은 잘 안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실은 인생이 참 짧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래서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아깝고 귀중한 시간들인데... 에너지를 이상한데 쏟아붓는 사람들이 참 많아서 신기했네요
무슨 일만 생기면, ㅇㅇ탓, 누구누구 잘못, 좋은 일은 나부터 올라타려는 사람의 본능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성도답게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입니다. 성도 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타인에 대한 비방을 삼가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높여줄 때, 세상은 조금 더 숨쉴만 한 세계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을 잃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의로 좋은 사람들을 대할 수 있기를...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