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편121: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17. 23:39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편121:1-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본시는 성전 순례시 15편 가운데서 두 번째 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년에 적어도 세 번은 성전을 순례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게 예루살렘사람들에게는 별로 문제가 안되지만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큰 일입니다. 더구나 평야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순례는 단순한 여정이 아니고 높은 산으로의 등산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지대에 위치합니다. 다윗성은 처음 산성이었습니다. 성전 역시 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산을 이스라엘사람들은 시온산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산은 시온산이 되는 셈입니다.

지금은 여름입니다. 엄청 덥습니다. 평지를 가만히 걸어가는 것만 해도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살인적인 더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더위도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양반입니다.

 

더구나 그 동네는 나무나 숲이 잘 없습니다. 당연히 물도 잘 없습니다. 비가 안오니까 샘도 없고 물웅덩이에 물을 저장하는데 두레박으로 물을 한번 먹으려면 아주 죽음입니다. 어떤곳의 물은 지하로 수백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황량한 들판에는 나무도 숲도 물도 없지만 맹수들과 도적들은 들끓습니다.

 

산에는 산적, 강과 바다에는 해적 그리고 육지에는 강도와 도적들이 설칩니다. 게다가 자그마한 마을들은 폐쇄적이고 이들은 틈만 보이면 바로 강도로 돌변합니다. 고대 중동의 유목민들은 순박해 보이지만 여차하면 떼강도로 돌변합니다. 유목이 주업인지 강도가 주업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특히 대상들이 먼 길을 여행할 때 돈을 내고 여기에 참여합니다. 일종의 보호세를 내는 겁니다.

 

게다가 도로가 정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뭘 타고 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는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짐승들에게도 여물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말이나 낙타를 타기보다는 걸어서 갑니다. 진짜로 지치고 힘이 듭니다.

 

그 순례길을 걷다가 멀리서 시온산이 보이면 순례자들은 자기를 이때까지 여기까지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마지막 남은 구간도 지키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루살렘성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돌아가는 여정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래가 바로 본 시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중에 때때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산을 향하여 눈을 들 때가 있습니다. 산위에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딛고 선 대지의 삶이 너무 치열하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저 산위에 우리 하나님의 신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시퍼런 푸르름 속 어딘가에 내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나무그늘 속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쉼과 안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저 산너머에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나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지의 길을 보고는 항상 가슴 설레어하며 때로는 신비한 상상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눈을 들어 산을 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저는 천성산으로 기도하러 자주 갑니다. 올여름에는 아니고 지난 여름에 천성산에 갔었는데 그 전 여름에도 갔었고 그 전해에도 갔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천성산에 갔을 때 멧돼지 일가족을 만났습니다. 식구수대로 밥먹으러 가는 길 같더라고요. 그래서 전 길가에서 조금 내려온 바위틈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문득 그 멧돼지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졌습니다.

 

그래서 일년후 두 번째로 천성산에 기도하러 갈 때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멧돼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보고 싶다”
천성산은 제일봉과 이봉이 있는데 일봉은 예전의 공군 미사일기지였고 이봉이 산의 정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이봉에서 자는데 그날따라 한밤중에 네사람인가 후래쉬 불빛을 비추면서 이봉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내려왔습니다.

 

한밤중에 산위에서 자는걸 보고 이런 저런 얘기를 걸어오면 또 세상사람들과 시답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서 그냥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급히 산봉우리를 내려오고 있었는데 한 오십여미터 정도를 내려왔는데 갑자기 멧돼지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꽥~~~’ 바로 제 앞에서 멧돼지가 제가 무심코 비춘 후래쉬 불빛을 보고 자기보다 더 큰 짐승의 눈동자인줄 알고는 도망을 가면서 낸 소리였습니다.
만일 멧돼지가 옆으로 도망가지 않고 놀라서 엉겁결에 앞으로 돌진했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깜짝 놀라서 저도 정신이 없었는데 급히 봉우리를 내려와서 가만 생각하니까 만일 그 사람들이 한밤중에 봉우리에 올라와서 제가 깨지 않았다면 멧돼지가 제가 자는 곳까지 와서 저를 내려다보며 꿀꿀 거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황당하겠지요? 제 배낭에 든 음식냄세를 맡고 왔다면?
눈을 떠보니 바로 눈앞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며 멧돼지가 꿀꿀거린다면 아마 아찔했을 것입니다. 그 봉우리는 사방이 겨우 한 두평정도로 삼면이 낭떠러지입니다. 도망갈 데도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봉우리에는 안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바로 여호와의 보호와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나의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 내가 무심코 중얼거린 음성을 들으시고 나의 말대로 이뤄주신 하나님, 그러나 멧돼지에게 해를 당치 않게 피할 길을 또한 주신 하나님!

 

그 봉우리에 오르기 전에 첫날밤에는 계곡의 바위에서 잠을 잤답니다. 멧돼지가 혹시라도 있을까 싶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지요. 아무래도 등 쪽이 약간 찝찝해서 자다가도 뒤로 돌아 보고, 그러다 보니 푹 잠을 자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살풋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불을 덮어 주시면서 ‘걱정하지 마라 뒤는 내가 지켜줄게’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었는데  그 다음날 멧돼지의 돌진으로부터 피하게 하신 하나님, 굉장하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성경말씀이외의 어떤 계시도 없다. 글쎄요, 전 그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직접 하나님의 말씀하신 역사를 너무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요.

 

순례의 길은 이와 같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더 집중하면 주께서도 우리를 더 집중해서 지키실 것이라고. 나의 옆에 계신 주님은 지금도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시고 미리 가셔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미지의 순례길을 행하는 여러분, 준비해야 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내가 제대로 걸어 갈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스펙이라고 말합니다. 입학을 위한, 함격을 위한, 취직을위한 스펙.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준비는 하나님과 동행할 준비입니다. 마음에 죄를 회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요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지요.
그가 나의 길을 여시고 어려움으로부터 나를 지키시며 보호하시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순적하고 안전한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순례길을 잘 걸어 왔습니다. 좋은 길로 왔건 아니면 무지막지한 길로 왔건 어쨌든 지금 우리는 여기까지 순례길을 잘 걸어왔고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습니다. 이제 저 멀리 시온산이 보입니다. 이 광야를 지나고 저 산을 올라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면 하나님은 ‘잘 왔다 얘야’ 하시면서 맞아 주실 것이고 나머지의 모든 길에 귀향길에 우리를 위해 복을 주실 것입니다.

 

본문의 시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시입니다.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시온의 언덕이 보이는 예루살렘 도성에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이 가지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유대광야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는 거지요. 예루살렘성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아득히 너머 산이 보이고 그 위에 예루살렘성이 보일 듯 말 듯 가까이 오게 되면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를 상상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요. 기도라고 해도 됩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자유를 얻어 귀향하는 포로들이 멀리 예루살렘이 있는 산을 보고 감격하여 불렀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느 설을 취하더라도 그 산을 보고 감격했던 당시의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인천공항에 내려서 한국말을 들으니까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더구나 경찰이나 공항직원들이 한국말로 물어보니까 살맛이 납디다. 순례자들 역시 그랬을 겁니다. 이제 저 들판만 지나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고 그러면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순례자가 1,2절을 독백 형식으로 불렀다면 3-8절을 제사장이 아론의 축복과 같은 형식으로 순례자들을 축복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꼭 제사장이 아니라도 다른 이들 또는 어른이 이 노래에 화답하면서 복을 비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례길에 힘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인들은 신이 산에 산다고 여겼고 그래서 산위에 산당을 짓기를 즐겨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불렀겠습니까? 여하튼 그 산위에 수많은 산당에 있는 많은 신들 중에서 어떤 신이 나를 도와줄 참신인가를 묻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온산, 멀리 보이는 산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의 도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를 기원하면서 부른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라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여기서 ‘도움’은 전쟁 중 어려움에 처한 아군에게 군사와 물자를 보내서 돕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을 하면서 군인들이 죽어가고 다치고 그래서 싸울 수 있는 군인의 수가 모자라고 각종 물자가 빨리 소모되어서 무기부터 식량,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모자랄 때 후속군대가 오면서 양식과 무기와 의약품을 가지고 온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도움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를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나그네 길은 아주 길기도 하고 때론 아주 짧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나그네 길은 다음 생을 위한 귀중한 기준이 됩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길을 얼마나 잘 걸었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영생이냐 영멸이냐가 결정되는 귀중한 장소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걸어가는 순례길을 제대로 잘 걷는 것이 무지 중요하지만 이 길을 제대로 걷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제가 좌광천 심십리길을 순례길로 삼아 걸었지만 이 길의 전 구간이 평탄하거나 아름다웠던 것은 아닙니다. 한여름에 정말 무덥고 중간쯤에는 공장으로부터 냄세가 나고 때로는 다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목이 마르고 그래서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우리가 순례길을 가다가 그늘에 앉아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면 새파란 풀들과 맑고 깨끗한 하늘이 아름다워 보이고 평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밝은 햇빛이 사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심하면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살인적인 더위를 가져오는 빛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선뜻 일어나서 햇빛 속으로 나가기가 두렵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성전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지금 상황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눈으로는 저 멀리 광야너머 까마득히 솟은 시온산과 그 산위의 성전이 보이는 듯 하지만 실제로 무더위를 무릅쓰고 그곳까지 가는 것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불타는 대지와 아득한 산봉우리는 긴 순례길에 지친 순례자들에게 마지막 투혼을 요구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시온산을 보지 못했던 이전보다는 힘이 나고 이제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사실에 흥분하지만 아직도 넘어야 될 난관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기분상 순례의 막바지에 다다른 듯 하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나머지 여정도 만만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순례자들은 저 산 어디에선가 나를 도우실 하나님의 도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에게 찬미를 올리는 것입니다. 지금 그가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찬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도 생각해 보면 이들의 기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외갓집에 갑니다. 읍내에서 내려서 다리를 건너서 신작로를 따라 끊임없어 보이는 길을 걷습니다. 도중에 길을 가는 이들을 보는건 어렵습니다. 그런데 얼마정도 가면 외할머니가 동구밖에 나와서 멀리서 나를 보고 달려오시며 잘왔다고 손을 흔드시는 모습. 이걸 보면 우리는 피곤한 중에서도 힘이 생기고 그래서 외할머니를 향해 마구 뛰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는 성도들의 생활에 대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의 인생길에 도움을 주시지만 그가 도움을 주시지 않은 듯이 보일 때에도 여전히 그가 도움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며 찬미하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그가 나의 인생 순례길에 함께 하시며 나의 우편그늘이 되신다고 생각하고 든든히 여기며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세밀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 이제부터 성전에 당도할 때까지 나의 앞길을 열어 주시고 지켜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시인이 본문에서 노래한 것처럼 내가 도움을 바라는 하나님은, 내가 도움을 기대하는 신은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 이 천지만물을 만드신 그리고 나와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 자신의 백성들을 날개 아래 품으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 기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든 이 신 저 신 하고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하나님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제 3절 부터는 순례자에게 제사장이 복을 비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복을 비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실족하다’는 말은 ‘넘어지다, 발을 잘못딛다, 비틀거리다, 흔들리다’ 란 말입니다.

 

시온산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가 평지가 아니라 산길에서 실족했다고 한다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산비탈에서 굴러서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오랜 여행으로 지친 순례자의 발길을 지키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이제부터는 마른 광야를 지나 험한 산길을 올라야 합니다. 자칫하면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스라엘의 산지는 나무가 없어서 굴러 떨어지기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에게 실족지 않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실족이란게 자칫 방심하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더구나 여행이 막바지에 다리에 힘이들어가지 않을 때는 더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내 하나님이 순례길에서 졸지 아니하시며 지켜 보시고 보호하신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로운 시대에 살면서 평탄한 길로 간다 하더라도 자칫 잘못하면 실족할 수 있습니다. 이 길이 험해서가 아니라 유혹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 디딜 수 있는 것입니다. 길이 아닌 곳, 진흙같은 곳을 디디면 우리는 유혹에 빠져서 영영 제대로 된 길로 돌아 올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으슥한 뒷골목 같은곳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길로 안가는데 중요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된다면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이때 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셔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평지를 가다가도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는데 험한 산길을 간다면 실족할 확률은 더 늘어납니다. 우리 아버지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요, 우리 아버지께서 졸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복을 비는 것입니다.

여러분, 3절에서도 ‘졸지 아니하신다’는 말이 있는데 4절에도 역시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자야 하나님을 말하는 거지만 왜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 하는 겁니까?

그건 당시 중동인들의 생각에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신은 평소에는 잠들어 있다가 신도들이 위기에 빠지게 되거나 필요할 때 제사를 통해서 신을 깨워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엘리야의 기사를 보면 갈멜 산상에서 바알의 추종자들을 보고 ‘바알이 잠을 자고 있는지 모르니까 깨워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방인들은 자기네의 신을 깨우기 위해서 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약과고 모압의 왕은 자기가 전쟁에 져서 사태가 위급해 지자 자기의 후계자 아들을 잡아 번제를 드리기까지 해서 자기의 신을 깨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이 잠을 자고 그래서 깨워야 된다는게 결코 빈말이 아니라 저들은 그렇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자기들을 지켜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래서 3절과 4절에 계속해서 줄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순례자의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는 선언은 얼마나 순례자를 안심시키는지!

 

실제로 여행은 이 세상 역사의 대부분동안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각종 여행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호텔에 비행기에 각종 음식점에 관광업이 발달했지만 옛날 여행은 종종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강도와 도둑의 위험, 독충과 맹수 그리고 정비되지 않은 길, 풍토병, 열악한 의료 환경, 각종 질병이라도 걸리면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아찔한 상황이 여행입니다.

 

각 마을들은 외지인에 대해서 매우 배타적이었고 치안이 확립되지 않아서 어떤 상해를 입을지 아니면 재산상의 손실을 겪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행하다가 잡혀서 노예로 전락하는 일도 매우 빈번합니다. 그래서 놀러가는 여행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같습니다. 옛날 왕들이 궁궐밖을 나오면 수천명의 신하들과 병사들을 대동하는 이유가 그만큼 바깥이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산을 넘을 때 산적 아니면 호랑이가 나오는 조선시대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금정산을 넘기 위해서 이쪽 마을의 주막, 지금의 미남로타리쪽에서 사람들이 오도록 기다렸다가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이면 한푼 두푼 걷어서 함께 가는 병사들에게 주고 그러면 병사들이 그들을 재너머까지 보호해서 데려다 주고 그곳에서 넘어 오려는 이에게 역시 돈을 받고 그들을 데려오곤 했답니다. 깊고 높은 산도 아닙니다.

 

지금 만덕 터널이 있는 위쪽으로 넘어 가려면 그랬답니다. 넘어가면 구포가 나오지요. 낙동강을 통하여 물산들이 몰려오는 장이 서는 곳입니다. 그래서 장사꾼들과 사람들이 많으니까 산적들이 그걸 털겠다고 나오고 그걸 막으려고 군사들이 보호하고 맨입으로 하지 않고 또 수고비를 갹출하고 그랬다는 거지요.

 

또 이런 이야기. 재너머 마을에 가서 잔치음식을 해주고 엄마가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나타나서 ‘떡 하나주면 안 잡아 먹지’ 하는 옛 동화를 우리는 너무 잘압니다. 우리나라처럼 사람이 많은 곳도 그런데 사람이 거의 없는 들판과 산악지대를 가는 순례객들에게 그 길이 얼마나 위험했겠습니까?

 

더구나 작렬하는 태양아래서 순례자는 목마르고 기진맥진해서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답니다. 단순히 그늘을 만들어 준다는 말이 아니라 휴식과 안식을 준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사실 나무가 거의 없는 유대광야에서 그늘이 생길 려고 하면 나무가 있어야 되고 광야에서 나무가, 그늘을 제공해 줄 큰 나무가 자라려면 그 나무의 생장에 필요한 물이 있어야 되고 사막가운데에 나무와 물이 있는 곳을 뭐라고 합니까?

 

그래요, 오아시스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나의 우편에서 나를 지키시며 내가 광야에서 쉴 수 있는, 새로운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막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오아시스의 존재 때문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웃기는 말이 나옵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해칠 수 있을까요? 여러 해석이 분분합니다. ‘낮의 해’를 일단 생각하면 타는듯한 태양빛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태양빛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면 한여름의 타는 듯한 더위를 가져오는 햇빛은 저주입니다. 살인적이지요.

 

요즘 보면 무더위로 죽은 사람 병에 걸려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무려 천명이 넘었답니다. 연일 폭염경보가 쏟아지는데 여기에 뭐라고 합니까?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낮에 야외활동을 삼가고 물을 잘 섭취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고 나옵니다. 바로 그거지요. 그래서 낮의 해로부터 지키신다는 겁니다.

 

또 밤의 달은 사막의 밤에 낮에 펄펄 끓던 더위가 가시고 반대로 이번에는 쌀쌀한 추위가 와서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겁니다. 아니면 낮의 해가 육체적인 위험을 말한다면 밤의 달은 정신적인 위험을 말하는다는 설이 있습니다. 밤의 달이 사람의 머리에 영향을 주어 뇌에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그런 미신이 있는데 그래서 육체적인 위험과 정신적인 위험으로부터 즉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고 또 우리의 영혼을 지키신답니다. 이렇게 본다면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해치 못하게 한다는 말과 똑 같은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에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경의 이 약속은 무어란 말입니까?

 

원래 본문의 ‘환난’은 그 의미가 ‘악’이나 ‘불행’이란 말로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그래서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 순례자들에게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야 될 것인데 우리도 잘 알다시피 인생의 고통이 우리 성도들만을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크고 작은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환란이 면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성도에게도 찾아오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길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이 오는 것이지 너무 그 고통이 극심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그런 것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훈련이 끝나면 우리가 더 성장하고 그래서 더 멋진 성도가 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환난을 하나님이 우리의 훈련을 위하여서 허용하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환난에서 피할 길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 7절에서는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지키는 것은 좋은데 영혼이 위험에 처한 적도 없는데 무슨 영혼을 지킵니까? 그냥 우리 몸이나 재산이나 지켜주지 쓸데없이 영혼을 지킨다는건 뭡니까?
솔직히 영혼을 상하게 할 위험성이 얼마나 있다고? 어차피 영혼은 내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성할 수도 있고 타락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형태나 몸을 가진게 아니므로 마음만 바로잡으면 바로 정상적으로 돌아오는데 굳이 그걸 지켜야 합니까?

 

그리고 영혼이야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므로 그 누가 상하게 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내 육체나 지켜주지, 내 목숨이나 지켜주지, 아니면 내 재산이나 내 처자나 지켜주지.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영이기도 하지만 또 ‘전인적인 삶’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다르게 번역하면 하나님이 너의 전 삶을 지키시리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8절에서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출입이란 말은 나가고 들어오고의 의미입니다. 나가고 들어오고. 아침에 집을 나가서 일을 하고 그리고 저녁에 들어올 때까지 내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특별히 여기서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 순례길을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주님 지금 우리가 업무차 출타할 터인데 모든 가고 오고 하는 발걸음을 지켜주세요”라고 하는 기도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특히 이 말은 당시의 여행객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졌는데 당시 지역신 개념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내가 어디에 있던지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지키고 보호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세상 천지만물을 주관하는 천지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전능의 아버지께서 나를 어디에서나 무엇을 하든지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변합니다. 조석변개에서 조조변으로 까지 마구 변합니다. 변덕이 죽끓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합니까? 지금부터 영원까지.

 

내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이 설교를 듣는 우리 성도들도 지금부터 영원까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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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졸지도 않고 지키신다는 말씀이 참 재밌었습니다. 이 당시 다른 신들과는 개념이 많이 달랐다는 것이네요. 유일신 신앙,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때로는 그래서 배타적이고, 때로는 그래서 욕먹기도 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을 지켜봐주고 지켜주신다는 것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동화 같은 책이 생각납니다. 한 소녀가, 들판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맹수가 앞에 나타났어요. 얼른 피해야 하는데도, 차분한 태도로 소녀는 기도를 마치고, 발걸음을 돌이켰는데, 운좋게도 맹수는 소녀를 해치지 않고, 다만 멀리서 지켜봤다는 이야기. 가끔 동물들의 세계는 알 수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면 기도에 대해서 만큼은 지키시는 하나님의 그 보호하심, 은혜 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인도하심을 믿고, 살아갈 때, 우리는 어쩌면 보다 더 용감할 수 있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두려운 마음 대신에, 무엇이든 해보겠다 라고 마음먹게 되는 이유가 되겠지요. 인도함에 따라 반응하고, 응답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다만 소망해 봅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