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토기장이 비유(개정판,로마서9:19-3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14. 04:26

 

토기장이 비유(개정판,로마서9:19-33)

 

오늘 우리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부터 결코 승복할 수 없는 한가지 비유를 배웁니다. 토기장이 비유!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히 쓸 그릇이 되었다고 해도 시비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좋습니다. 토기장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모든 그릇이 다 귀한 그릇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토기장이는 이와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귀한 도자기와 천한 옹기는 흙자체가 벌써 다르지만 아마 로마는 도자기 공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냥 그릇을 만드는 흙덩이는 같고 즉 재료는 같고 다만 좀 정교하고 신경을 써서 섬세하게 만들거나 막 만들거나의 차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진흙으로 만드는 토기는 어떤 것은 도자기가 되어서 고려청자니 이조백자니 하게 되고 어떤 그릇은 옹기니 해서 장을 담거나 쌀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물론 백색토니 갈색토니해서 색깔이 다르지만 뭐 크게보면 흙이고 범위를 좁혀도 점토고 더 좁혀도 고령토고 결국은 흙덩이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구리가 아니라 흙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다만 모양이 섬세하고 겉에 유약을 바르고 심하면 흙으로 만든 토기표면을 조각칼로 파서 다른 흙을 집어넣고 원료에 소뼈를 집어 넣고 더 심하게는 금을 입히고 해서 고급그릇이 됩니다.

 

어떤 그릇은 그냥 진흙으로 물레에 올려서 그릇의 형태로 만들고는 표면에 어떤 유약도 바르지 않고 그냥 구워버립니다. 우리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토기들이 다 이렇게 만들어 진 겁니다. 유약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흙의 특징상 표면이 거칠고 물도 새고 해서 물을 오래 보관하기가 어려워서 그걸 막으려고 유약을 발랐고 그건 물이나 간장같은 것을 넣어서 보관했답니다. 그런데 그 유약이 산화납인데 인체에 유해하다는게 밝혀져서 요즘은 다른 걸로 대체되었지요.

 

자,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토기장이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토기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누구는 귀하게 쓰임 받고 누구는 천하게 쓰임 받는다면 천하게 쓰임을 받게 만들어진 토기는 기분이 어떨까요?

 

물론 토기야 무생물이니까 당연히 생각이 없겠지만 토기를 우리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전혀 상황이 달라집니다. 더구나 내가 천하게 쓸 그릇으로 태어났다면 더 비참해 집니다. 왜 나는 이렇게 지음을 받았나요?

토기장이에게 충분히 항의할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지만, 머리로는 납득하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불공평한게 없습니다.

 

똑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부귀를 누리고 누구는 빈천에 처하고 이거 잘못된 겁니다. 진짜로 잘못된 겁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부하고 덜 부할 수는 있어도 부하고 가난하고 귀하고 천하고로 나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부하고 귀한 입장에서야 당연히 기득권을 유지하고 현상을 굳히려고 하겠지만 가난하고 천한 입장에서는 기득권을 빼앗아서 같이 누리려고 할 것이고, 또 그 현상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러다가 그것이 불가능해 지고 가난하고 천한 쪽이 수가 많아지면 판자체를 뒤엎으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이건 당연한겁니다.

 

나는 항상 배부르고 나아가 맛있는 것을 먹고 있을 때 너는 굶던지 아니면 맛없는 것으로 배를 채우던지 알아서 해라고 한다면 그 사람들이 가만있을까요?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 안 넘는 사람이 없다고 같이 먹자고 아니면 너 죽고 나살자고 덤빌 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미리 나누고 도와줘야 합니다. 또 국가는 제도적으로 그런 조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파국을 막을 수 있습니다.

 

윤회를 믿는 인도의 어떤 종교에서는 네가 지금 가난하게 살고 고통받는 이유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이니 네가 지금 현실에서 착하게 살면 너도 다음생에는 부자로 귀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실제로는 기득권의 권리를 보장하는 체제순응적인 숙명론적 포기론자를 만들 뿐입니다.

 

현실이 불만족스러워도 데모도 하지 말고 불평도 하지 말고 착하게 살면 너도 다음생에는 부자로 살 수 있고 높은 신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참아라. 말도 안되는 궤변입니다. 우리나라의 초기에 불교가 왕실과 귀족에게 먼저 수용된 이유가 바로 이런 논리 때문입니다. 힌두교는 이런 면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인도가 그 불행한 체제 속에서도 나라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나 성도 여러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이 말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구원에 대한 얘기지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논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얘기하는 것이지 신분의 귀천이나 빈부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안에서 한형제요 자매인데 형제와 자매사이에 무슨 귀천이 차이가 난단 말입니까? 형제와 자매사이에 부와 빈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고 재물을 흩어서 형제를 구제하라고 하는 말씀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런걸 없게 하려고.

 

19절에 보시면 “혹 네가 내게 대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말은 죄를 저지르는 것도 결국 하나님이 죄를 짓도록 만드셨기에 짓는 것인데 하나님이 너 왜 죄를 지었느냐고 묻는다면 이건 부당하다고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말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고 나는 그걸 거역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서 그의 조종대로 행한 것뿐인데 하나님이 죄를 짓게 해놓고 왜 죄를 지었느냐고 책망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도 하나님이 예수를 팔게 했으므로 죄가 없고 가인도 하나님이 아벨을 죽이게 했으므로 죄가 없고 고라도 아간도 죄가 없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시는게 정말 잘못되었는데 그들은 왜 벌을 받았지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죄를 받아서 죽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죽게 되었지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말을 너무 강조하다보니까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아, 교리는 너무 어렵고 누가 정했는지 참 말이 안되네. 모순투성이다! 그래요, 조금 더 살펴보십시다.
이래서 나온 교리가 ‘유기’입니다. 버려둔다는 말이지요. 선택과 유기에서 누구는 선택해서 구원하고 누구는 버려둬서 유기되어서 지옥으로 가고. 이게 바울의 논리입니다. 그럼 아까와 같은 논리의 연속일 따름입니다. 누구는 대우받고 누구는 버리고. 부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원래는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두 죄 때문에 멸망 받고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죄인의 운명이라는 점입니다.
원래는 다 착해서 그대로 두면 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그중에서 몇몇을 골라서 죄성을 집어 넣어서 죄를 짓게하고 그걸 빌미로 영벌에 처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본다면 하나님이 선의로 은혜를 베푸셨는데 왜 다 은혜를 받게 모두에게 베풀지 않았느냐고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지옥에 갈 사람들 중에서 몇몇이라도 구원해서 천국에 가게 하는 일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구원받지 못하고 다같이 죽을텐데 몇 명만 살려주어서 그게 화가 납니까? 극도의 이기주의입니다. 내가 저 사람이 구원받는 때문에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게 아닙니다. 저 사람이 구원받는 것하고 내가 지옥가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불평은 다같이 죽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다 많은 이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그가 많은 이에게,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이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고 선의를 베풀지 마라고 항의하거나 나는 왜 그의 선의를 받지 못했는지 불평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이 차이가 성악설과 성선설을 나눕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악설을 지지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죄성이 들어와서 악하게 태어났고 그대로 두면 멸망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데 그걸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띵에 보내셔서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게 우리의 기본 입장입니다.

 

예수의 보혈공로가 우리 모두에게 미치지는 않지요?  그럼 누구에게 미칩니까?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는 이들에게만 미치는 겁니다. 그가 나를 위해서 무죄한 피를 흘리셔서 그 피로 내 죄가 사해졌다고 믿는 이들에게만 그 보혈의 효력이 미치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구원의 조건은 참 간단합니다. 그러나 실천은 정말 어렵습니다. 신념체계가 바뀌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념이 바뀌면 삶이 바뀝니다. 그래서 결국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믿고 안 믿고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만세전에 생명책에 이름이 녹명된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믿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믿을거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절대로 변개치 아니하시는 분이시니까 한번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면 그걸로 끝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든 바뀌는 법이 없다?

자, 그런데 우리가 성경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혹시 본 기억이 나십니까?

 

시편69:28절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
요한계시록3: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
성도가 기도할 때 생명책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하나님이 결코 생명책에서 의인들의 이름을 지우지 않으리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르게보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운다는 표현이 있는 겁니다. 이 두 구절은 서로 묻고 답하고의 구절이 아닙니다. 한 개는 시편이고 한 개는 요한계시록이므로 둘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22절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의 뜻을 잘 살펴보면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이기는 하지만 오래 참는다는 말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용한다는 말입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이라면 오래 참는거는 그렇지만 관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멸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이라도 오래참고 관용한다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주고 그가 회개하면 용서해서 멸망의 그릇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생명책에 이름을 새로 써넣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7절에 바로의 예가 나왔는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받고 결국 버림받은 그에게 하나님은 즉시 단번에 채찍을 휘둘러서 죽이거나 멸하지 않고 열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건 그가 열 번의 회개의 기회를 받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만일 그가 그 재앙을 보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겸비하게 무릎꿇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면 그의 운명도 바뀌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럼 결코 변개치 않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서 변하고 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런데 여러분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이걸 우리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알기 쉽게 말하다보니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겁니다. 번역상의 의역같은 거지요.

 

자, 이걸 어떻게 잘 표현할까를 고민한 사람이 미국에 또 있었습니다. 영화 콘트롤러라고 있습니다. 그 영화에 예정론에 대한 것들이 단편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렇습니다. 배우가 나오는데 멧 데이먼입니다. 이 사람이 상원의원인데 몇일 몇시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결심을 하게 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고 저떻게 되었다가 결국은 미국 대통령이되는 걸로 정해집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사람이 시간을 앞당겨서 무슨 일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는 천사로 나오는데 뒤틀린 일들을 원래의 계획대로 바로 잡는 일을 합니다.

 

가령 이런겁니다. 어떤 총각이 길을 가다가 흘린 수건을 주워주고 그 수건의 임자와 결혼하는 운명이 있는데 그 총각이 수건을 주워서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하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수건을 집어서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되고 그래서 이 총각하고 수건주인하고 만나지 못해서 결혼을 못하게 된다면 천사들이 그걸 바로 잡는 겁니다.

 

그래서 영화제목이 조절자이지요. 영화에서는 몇 번이고 멧 데이먼이 운명에 맞서서 결국은 조절을 못하게 되고 결국 대통령이 안되는 그런걸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대통령이 안될려고 하지요. 시나리오는 여러면에서 허술하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지만 상당히 독특한 사고방식이라서 제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론은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사소한 것까지 모두 정해져있다면 그건 인간이아니라 로봇입니다. 정해진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그래서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찬양하고 경배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위해 만들었다고 했는데 원래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로봇들이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그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한심해서 하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의미가 있고 기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예정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이렇다고 봅니다. 가령 인생의 처음과 시작사이에 중요한 몇 개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때 선택을 이렇게 하면 이렇게 가고 그곳에서 저런 선택을 하면 이런 결말이 나고. 그런 식으로 경우의 수가 있다는 거고 고비고비마다 우리가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선택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신다는 겁니다. 다만 그 선택의 책임에 있어서 정해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제가 교리를 설명하려고 한번 제 생각을 정리해본거고 실제는 어떻게 되는지 아직 제가 잘 모릅니다. 이 교리를 처음 만든 칼빈도 성경의 여러 구절을 보고 만들었지만 이 구절을 보면 그의 말이 맞는데 저 구절에서 그의 논리가 부정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인간의 생각 중에서 그의 논리가 제일 그럴듯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칼빈주의입니다. 당연히 칼빈은 인간이므로 그도 틀릴 수 있습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박세당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공자의 도리를 연구하는 유학자인데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모두 믿는 주자의 해석법과 다른 해석을 취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주자도 역시 나와같은 사람인데 어찌 그 사람의 말만 맞고 내 말은 모두 틀렸겠는가하고 주장해서 주자의 논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선비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 합니다.

 

제가 뭐 박세당처럼 칼빈만 잘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건 아니고 우리에게 성경을 제외한 절대권위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는 거지요. 성경이 아닌 인간의 해석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논리는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듯할 뿐이지.

 

우리나라에 요즘 때아닌 수저론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금수저니 은수저니 흙수저니 하면서 나는 왜 금수저가 아니고 흙수저인가 하며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흜수저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같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평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기위해 가족도 만드셨고 사회도 만드셨고 교회도 만드셨고 나라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까지 얼마든지 우리가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노아의 방주 문이 일단 한번 닫히면 물이 빠질 때까지 결코 다시 열리지 않았지만 그 전까지 무려 120년 동안 누구나 방주를 짓는데 동참할 수 있었고 누구나 방주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사람이 녹명되었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원 토기장이의 비유는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이사야29:16절에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지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 말은 로마서의 비유와는 약간 다릅니다. 그래서 뜻도 다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게는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미천한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존귀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으신 것에 각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 토기장이 비유가 서로 달라 보이는 이유는 바울은 이 비유를 가지고 선택과 유기를 설명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려다보니까 초점이 달라진 듯이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와 같이 합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라. 그것이 바로 너희가 선택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어떻습니까? 좀 그럴듯합니까? 영원히 멸망받기로 정해진 바로에게도 하나님은 열 번이나 참으시고 관용을 베푸셨는데 가룟 유다도 회개하고 살아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면 그 끝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베드로의 부인과 저주도 같이 기록해 둔 것입니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오십보를 도망을 갔는데 자기의 앞에는 백보정도 도망간 병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겁쟁이라고 매국노라고 비웃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보를 도망간 병사가 하는 말이 “백보나 오십보나 뭐가 다르냐?” 그래서 ‘오십보 백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베드로의 죄나 유다의 죄나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인간의 몫이며 그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 선택과 유기를 설명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록 멸망받을 자로 예정되었다하더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 그릇으로 태어나고 저 그릇으로 만들어졌기에 결코 그릇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신분론이나 운명론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25절에 바울은 호세아서를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내가 내 백성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속된말로 나는 쪼대로 산다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서 입을 열어 간구하세요.

 

그러려면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가 나를 지으신 자임을 고백하고 그 앞에 겸바히게 엎드려 그가 명령하신 삶을 사세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여서 보내 주신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은혜받은 성도로서의 신실한 삶을 사세요. 그러면 얼마든지 우리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녹명될 수 있다는 말을 지금 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고 선민이라, 택한자라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선민이 아니라 선택된 자라는 선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직히 많이 악합니다. 지독히도 말 안듣는 노새같습니다.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 같지요. 그래서 더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야 했지요. 말을 안들을 때 때린다고 역사, 회개하면 독립시켜준다고 역사, 히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일하심. 여하튼 참 많은 역사가 필요한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그건 우리도 같습니다. 참 많이 악한 민족이고 고집도 센 민족이므로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한 민족입니다. 복음은 돌고 돌아 이스라엘과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이곳 까지, 저들의 눈에는 극동까지 온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복음은 지구를 돌아 중극을 지나 인도로 중앙아시아로 아랍권으로 서진하는 거지요. 그래서 호세아서의 말처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어리고 젊고 늙은 청춘여러분, 절대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비관하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삼아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기쁨이라 즐거움이라 영광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나는 생명책에 녹명된 하나님의 택한 자라고 믿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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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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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쁘게 살아가는 그릇. 이 짧은 단어가 주는 특별한 어감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릇하면 저는 항상 대기만성 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합니다. 원래의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인데, 이 역시 다르게 해석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대기만성, 큰 그릇은 이루어지는 법이 없이, 계속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이루어졌다 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완결의 의미라면, 만성이 가지고 있는 것은 늦은 때에라도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지속 가능성이 담겨 있다는 주장이에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우리가 기쁘게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간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발전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훨씬 편안하고 간단하겠지요. 가끔 진실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EBS에서 매우 늦은 밤 영화 괴물을 해주었는데, 함께 한 상에서 밥 먹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실로 소박한 행복의 출발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밥 한 끼 식사에도 크게 한 입 떠먹으며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 옛날 선조들처럼, 밥에 소박한 반찬으로도 감사할 줄 알기를!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