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갈렙의 승리 그러나(사사기1:1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29. 02:43

 

갈렙의 승리 그러나 (사사기1:17-)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세상만사가 다 ok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본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약간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을 살펴 보려 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는데 골짜기의 주민들이 철병거를 가졌기 때문에 이기지 못했다는 이상한 본문을 살펴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사사기 1:19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겨우 철병거보다 더 못하다는 말입니까? 오늘 설교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겁니다.

 

요즘 우리는 사사기를 새롭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중근동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의 하나인 ‘비옥한 초승달지대’라고 하는 가나안에서 원래부터 가나안에 살았던 가나안 7족속과 새롭게 가나안에 정주하려는 이스라엘간의 정복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한동안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사사들이 나중에 일어나지만 이들도 위기상황에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만을 다스렸지 이스라엘 전부에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옛날의 다스림이란게 겨우 전쟁의 지휘관과 평시에는 재판, 복잡한 행정절차와 조직을 가진 본격적인 다스림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스스로 자족해서 지파별로 그렇게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살려고 했습니다.

 

몸을 누일 한 평의 땅도 없을 때는 이들은 서로 합력하여 정복전쟁에 나섰지만 이제 조금씩 여유가 생기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선봉에 나서기를 꺼려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왔는데 더 많은 땅을 가지려다가 눈먼 화살에 맞아 죽게 되면, 칼에 상처를 입고 부상을 입는 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대신 누가 먼저 나가서 싸워주기를 바랐고 그가 싸우는 것을 보고 진퇴를 결정하려는 눈치만 발달합니다. 상대방이 강하면 ‘아이쿠야, 몸조심 해야 겠다!’ 상대방이 약하면 ‘우리도 공격해서 땅을 빼앗아야 겠다!’

 

물론 정복전쟁에서 유다가 제일 먼저 싸움에 나서기는 했지만 뒤이어 여러 지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에 나섭니다. 그래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또 포기도 하고 사정이 복잡해 집니다. 사사기 350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방민족들은 서로 혼거합니다. 여기는 이스라엘의 땅이고 저기는 가나안인들의 성읍이고...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고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했다고 합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유다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함께 행동하기로 했는데 왜냐면 유다와 시므온은 같은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지도에 보면 시므온의 땅은 유다속에 있습니다. 이제 그 동맹의 약속 때문에 둘은 함께 전쟁에 나섰는데 먼저 스밧을 쳐서 진멸했답니다.

‘스밧’이란 말의 뜻은 망대입니다. 그러니까 망대를 쳐서 진멸했다는 말이지요. 지명이 망대인 것을 보면 이곳은 요새입니다. 군사 요충지.

 

그런 군사 요충지를 유다와 시므온지파의 연합군이 점령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멸했다고 합니다. 진멸이란 말은 그 성에 사는 모든 사람과 가축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게 있습니다. 바로 ‘헤렘’입니다.

 

모든 것을 죽여서 하나님의 것으로 드린다고 하는 헤렘.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헤렘으로 드렸고 나중에 사울이 아모리 족속을 헤렘으로 드려야 했는데 드리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던 바로 그 헤렘.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스밧’의 모든 사람을 멸하고 그곳을 ‘호르마’라 했습니다. ‘호르마’는 봉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식으로 말하면 스밧을 멸하고 그 성을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스밧을 봉헌한 유다지파와 시므온지파의 연합군은 계속해서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점령합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매우 익숙하지요? 성경에 자주 나오는 블레셋인들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들뿐만 아니라 그 도시가 다스리는 주변 농촌지역까지 다 점령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도시들은 다시 블레셋인들에게 도로 빼앗깁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시대 후기에는 블레셋의 지배를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여하튼 350년 전에는 유다지파가 점령했습니다. 원래 블레셋은 다섯도시국가의 연합체였으므로 이때 무려 절반이상의 블레셋 영토를 빼앗았다는 말입니다.

 

자, 이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 내지 못하였으며”

여러분,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데 겨우 철병거 때문에 골짜기의 거민들을 쫓아 내지 못했다는게 무슨 말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철병거보다 못한 신이 되는 겁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버젓이 나와 있으므로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그런데 원문을 살펴보면 이 말들은 한문장이 아니라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셨다.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 내었다. 그러나 그는 골짜기의 거민들은 쫓아 내지 못하였다. 왜냐면 그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손쉬운 상대하고만 붙어서 이긴게 아니라 정말 힘든 상대하고 치열하게 싸웠고 그 싸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유다지파의 믿음으로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골짜기의 거민을 쫓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철병거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무서워했기 때문에 이들은 싸움에서 패한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영이시므로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영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길을 느끼고 그분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내 마음이 먹먹해져 오고 내 마음이 뜨거워서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고는 안되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나쁜일을 하면 찜찜한게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함을 느낍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가 나의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심을 믿습니다. 내가, 내 몸이, 내 영이 그분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제가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때는 대부분 그 전날 밤에 아버지의 보호와 인도를 간절히 간구하고 난 다음에 밤에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 않고 갑자기 우리의 뇌리에 하나님의 인도가 남겨진 것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기 전에 뭔가를 간절히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해결책을 간구하고 잠이 든다면 그날 밤에 우리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보여 주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 느부갓네살이 그랬습니다.

 

물론 이건 개인마다 다르고 정해진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경우에는 그렇더라는 거지요. 문제는 우리가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세상에 집중하거나 보이는 것에 미혹된다면, 탐욕에 넋이 빠진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유다지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철병거에 더 집중하고 무서워해서 믿음이 꺾여 버린 겁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런 신앙자세도 필요합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세상이 주는 거대한 물질과 문명의 화려함과 극대화된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선택하겠다는 자세는 여호수아를 여호수아로 만들었습니다. 갈렙을 갈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골짜기를 점령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짜기’는 평지를 말합니다. 여기는 평평하기 때문에 철병거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습니다. 골짜기는 주로 와디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말랐다가 우리가 되면 시내로 변하는 마른하천. 이 와디는 평소에 철병거가 다니는 잘 닦인 길이 되는 겁니다.

 

산지에서는 철병거가 제대로 운신하기 어렵습니다. 이 철병거를 보고 유다지파는 겁을 먹었고 결국 골짜기의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다와 시므온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철병거를 향해 돌진했더라면 이겼을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바락 장군이 이끄는 일만의 군대가 가나안의 시스라가 이끄는 철병거 구백승을 격파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병거를 격파하는 것이 결코 붕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때도 가나안의 전차는 골짜기, 와디를 통해서 다볼산으로 진군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유다지파는 먼저 철병거를 눈으로 보고 겁을 먹었고 하나님의 말씀, 저들을 내가 네 손에 붙이리라는 말씀을 의심했으며 끝내 철병거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골짜기로 진군하지 못하고 산지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철병거가 지나다니는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비옥한 들판에 자란 곡식을 바라보면서 옹색하게 산지에 만족하고 산 거지요. 눈에 보이는 철병거의 무시무시한 위용에 하나님이 하신 약속, 저들을 내가 네 손에 붙이리라는 말씀은 까맣게 잊어버린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이들은 이제 승리하면서 점점 더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자 처음의 자세를 버린겁니다. 당장 급한 불은 끄게 되지 마음이 여유를 찾고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니라 세상도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다가 화려하고 쾌락적으로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니면 무섭고 두려워서 자기의 모든 것을 좌우할만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런데 20절의 서술은 정말 오묘합니다. “무리가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이제 유다지파의 정복전쟁이 끝이 납니다. 그런데 유다지파의 자손들은 족장인 갈렙에게 헤브론을 주었답니다.

 

예전에 하나님은 갈렙이 밟는 땅을 그에게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원하는 곳을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마 그 약속을 지킨 것 같습니다. 왜냐면 갈렙이 헤브론을 원했기 때문이니까요.

 

우리가 단순히 본문만을 보면 이 본문이 얼마나 대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헤브론이 어떤 곳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헤브론에 대해서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지요? 그런데 뒷부분에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 내었고”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낸게 무슨 대단한 일인가요?

 

예, 맞습니다.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낸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면 아낙 자손은 거인족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울 때 그 싸움돋우는 자로 나온게 골리앗이쟎습니까? 아마 예전부터 블레셋의 일족에는 거인의 피가 흘렀던 것 같습니다. 아낙자손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헤브론을 차지했다는 것은 거인족들의 성읍을 빼앗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갈렙이 자기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유다지파의 족장으로 생존해 있는 최고 원로입니다. 그는 무려 모세시대의 이스라엘 열두 정탐꾼 가운데 일인이었고 여호수아의 정치적 동료였으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치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감을 불러 넣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특권을 내려놓고 가장 위험한 곳을 자기의 땅으로 달라고 요구하고 또 그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철병거만 무섭고 거인들은 무섭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철병거는 기계니까 높은 산지로는 오지 못하지만 거인들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총이 없던 시절에 인간의 힘과 힘이 격돌하던 시대의 거인은 얼마나 공포스런 존재입니까? 더구나 헤브론은 그렇게 비옥한 땅도 아니었습니다. 산지지요. 그리고 거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지파의 누구도 그 땅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렙이 그곳을 달라고 요구하고는 차지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어떻게 거인족들을 이겼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약속 “네 발로 밟은 곳은 너에게 주리라”는 그 약속을 믿고 눈에 보이는 거인들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밥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한 것입니다.

 

족장이면서 나라의 원로요 공신이라면 충분히 주어진 특권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유다지파에게 주어진 땅 중에서 가장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풍부한 물이 흐르는 강가에 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 땅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이후에 지도자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지파의 족장으로 만족하며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정복전쟁에 임했습니다.

 

오늘 이 땅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권력자와의 조그만 인연이라도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각종 특권을 요구하고 압력을 행사하고 이권을 쟁취하기 위해 난리를 칩니다.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려 하고 권리만을 요구합니다. 그게 당연한 모습인데 갈렙은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헤브론을 침공할 때 그의 나이도 이미 많아서 늙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위해 나간 것입니다.

 

그 갈렙이 이끄는 유다지파가 골짜기의 철병거를 가진 거주민들을 쫓아 내지 못한 것은 유다지파의 자손들이 그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입니다. 게다가 남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갈렙의 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힘을 내서 거인들과 싸워도 내 동족은 편하게 싸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흔히 공에 눈이 먼 지휘관들은 수만의 목숨보다 공적에 더 연연합니다.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만명의 피가 흘러야 한다는 말을 그는 부정했습니다.

 

철병거도 무적은 아닙니다. 병력차이가 얼마 안날 때야 공포스런 무기지만 수십배의 병력에 둘러싸이면 철병거도 무력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골짜기에서 철병거를 가진 적들을 공격하기위해 열배 스무배 병력들을 마구잡이로 파견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하면 되는데요.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 붙이면 희생이야 많이 나겠지만 골짜기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무리한 명령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동족들을 사지로 내몰고 혼자 영웅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솔선수범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가장 취하기가 어려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 곳을 먼저 나서서 공격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단 한 줄의 설명은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진 일인 것입니다.

 

그 대단한 갈렙이 믿음의 용사 갈렙이 이끄는 유다지파도 결국 골짜기의 철병거를 가진 거주민들을 쫓아 내지는 못하고 정복전쟁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끝을 맺는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왜 그는 골짜기의 사람들은 몰아 내지 못했지요?

 

아마 갈렙은 스스로는 믿음의 용사요 강직한 족장이었겠지만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어 넣어서 철병거를 상대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도자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이후에 이스라엘 전체 지도자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뒤에도 잘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는 말이 나오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곤경에 처하고 교착상태에 놓이고 결국은 실패하고 하는 일들이 본문에서 이어 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호와가 함께 하는 것은 그가 물리적인 힘을 보태거나 물질을 지원하거나 인력을 더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도움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그 자체로 성공에 이르는 첩경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의 말씀을 신뢰하고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회의하며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우리가 눈을 배제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나 기적이 드문 건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아이를 구하기위해 트럭을 번쩍 들어 올린 어머니를 아시지요? 그게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몸에 넣어둔 힘의 원천은 바로 믿음이라는 방아쇠로 깨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렇게나 크고 또 소중한 것이지만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별무 소용입니다.

 

제가 예전에 대학생 병영훈련을 전방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때. 그런데 사실 가는 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목이 부었습니다. 편도선염. 제가 옛날에 잘 걸렸던 병이지요. 여기에 걸리면 독한 항생제와 소염제를 먹고 한 이삼일은 기본으로 앓아야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편도선염이라서 고생좀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교관들이 공포분위기를 연출하고 선착순을 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한두번이 아니라 수십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환자를 조사하는데 놀랍게도 제 편도선염이 싹 나아버렸답니다.

 

병으로 훈련도 좀 열외하고 약도 타고 할려고 했는데 흔적도 없이 싹 나아버려서 제가 그때 정신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정신이 육체를 제어한 것처럼 영은 더 우리의 육체를 제어합니다.

우리의 곁에 계신 주님은 영이시므로 그가 우리의 영에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우리의 영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 그래서 우리가 육보다 영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을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내가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내가 잘되게 하시지 않고 내 안에 넣어주신, 내가 태어날 때 이미 나에게 주어진 능력의 씨앗을 발아하게 하셔서 일을 이루시기를 즐겨하십니다. ‘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나를 눈에 보이는 저것보다 더 신뢰하느냐?’ 입에다가 강제로 꼴을 넣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꼴이 풍부하게 펼쳐져 있는 들판으로 나를 인도하셔서 나로 하여금 내 입을 벌리고 꼴을 먹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복잡다단하고 피곤한 현대에서 삽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고 불확실한 미망 속에 잠겨 있는 삶입니다. 어디가 어딘지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냥 무턱대로 바로 앞만 바라보고 나가는 겁니다. 그 불확실의 시대에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아니 선민이 되기로 예정된 그 옛날부터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적으로 혼탁해져서 아버지의 영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거인들을 격파한 갈렙이었다면 아마 철병거도 격파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갈렙이 이끄는 유다지파가 골짜기의 거주민들을 내쫓지 못한 것은 갈렙이 다른 이들의 믿음까지는 강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요,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당나귀를 물가에 끌어다 놓을 수는 있지만 강제로 물을 마시게는 못한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지고 보면 믿음은 간단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믿음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쉬운 상대를 보고 믿음이 올라가고 어려운 상대를 보고 믿음이 떨어지고 그래서는 결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쉬운 것을 이루면 ‘이건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되었을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로 어려운 것에 도전해서 이기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대학 입시에서 1.02대 1에서 합격하는 것보다 102대 1에서 합격한게 더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고단하고 어려운 현실에 지레 겁먹고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나에게 승리를 주실 것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음을 믿고 눈에 보이는 불리한 현상과 압도적으로 나를 위압하는 현실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 전능의 주가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언제든 나를 도우실 준비를 갖춘 자세로 나의 곁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나아가 승리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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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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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현실에 만족해 버리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꿈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답을 구한다면, 주께서 응답하여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소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머니에게 전해들었던 실화인데, 제가 어렸을 때, 몸이 많이 좋지 않았는데, 그 때 이 병을 고쳐보기 위해서 기도원에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이었던 50만원을 헌금했었다고 합니다. 지금 가치로는 한 500만원쯤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 500만원은 헛되었냐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헤아려본 운만 해도 족히 500만원은 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행운아 스타일? 로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왔으니까요.

 

그래서 늘 생각합니다. 오, 주님,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우리가 더 당당히, 힘내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서라도 하나님을 믿기. 그리고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아보기. 그런 소박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