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낫세에게 일어난 기적 (역대하33:1-)
오늘 우리는 역대기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역대기는 역사서로 이스라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아니 우리나라 왕들도 알기가 어려운데 남의 나라 그것도 아주 아득한 옛날의 왕까지 알아야 됩니까? 그래요, 충분히 반문할 수 있지만 이 므낫세라는 왕에게 일어난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과연 므낫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 났을까요?
먼저 므낫세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히스기야 왕의 아들로 그의 사후에 남쪽 유다의 왕위를 계승한 사람입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은 ‘잊어버림’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이 바로 므낫세지요. 모든 고통을 잊어버려라. 그냥 잊어버리는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 큰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이전의 고통을 잊어 버린다는 아주 은혜로운 이름입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고 이런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 당시 국제정세는 상당히 위태로워서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했고 남쪽 유다 홀로 남았는데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고 바벨론과 통교하며 나름대로 전성기를 자랑하던 때였으므로 그는 이 이름을 지어서 자기의 아들이 이전의 어려운 때를 잊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자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처음부터 약소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도 시달렸던 정말 별볼일 없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사단이 났을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때에 기적적으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고 유다는 다시 부흥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어렵고 힘든 고통은 잊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마냥 행복하게 살아라 이런뜻으로 지어준 것입니다.
1절에 므낫세가 왕위에 나아갈 때가 12세라고 하는데 이때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아직 살아 있을 때입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와 함께 약 10년을 왕위에 있었으므로 실제로 그가 단독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2세, 주전687년입니다.
그런데 그는 2절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이 사람은 여호와께서 보실 때에 악한 왕입니다. 게다가 이방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들어오기 전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던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했답니다.
이 말을 기록한 이유는 가나안땅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8:25에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땅 가나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증한 행위로 더러워지게 되면 가나안 원주민들이 쫓겨났던 것처럼 그 땅이 그들을 토해낼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바로 그 예언이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려고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방인들, 가나안 원주민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가나안에서 진멸되고 쫓겨났는데 이제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역시 가나안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이미 북쪽 이스라엘은 멸망해서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갔고 이제 남쪽 유다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열지파가 없어지고 겨우 두 지파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자, 므낫세가 저지른 악한 행위인 이방인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은 내용이 여기에 나옵니다.
첫 번째는 부친이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과 아세라와 일월성신을 숭배했답니다.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저는 바알과 아세라를 보면 항상 우리나라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산당은 우리의 서낭당이 생각납니다. 게다가 우리는 일월성신을 아주 오랫동안 섬겨 왔습니다. 너무 비슷해서 바알과 아세라 이러면 천하 대장군과 지하 여장군. 여기 보면 아세라 목상이라고 했지요? 원래 이스라엘도 이 두 우상의 조각을 나무 기둥에 새겨서 마을 입구에 세워 두었답니다.
사실 산당은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우기 전부터 가나안 원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것이었습니다.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용도로 바꾸었고 후에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위해 만들기도 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너무 멀리 있어서 가기가 어려우므로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까 이 산당의 제사에 이교의 제의 풍습이 들어가게 된 겁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율법에 규정한 엄격한 의식을 지키지 않고 자기들끼리 드리게 되니까 당연하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당을 없이하고 오직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리라고 말한 거지요.
그리고 산당은 원어적인 의미로는 ‘높은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높은 산위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우상에게 제사지내던 곳인데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도 본받아서 처음 여호와 제사를 여기서 드리다가 점점 이교의 풍속이 들어오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우상을 섬기는 곳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것인데 아들은 이제 그 산당을 다시 세웁니다.
우리나라 절에도 보면 절에 원래 있어서는 안되는 건물들이 보입니다. 산신각, 칠성각, 용왕각 같은 건물들이 그런 것입니다. 산신이니 일월성신이니 칠성이니 용왕이니 하는 것들은 원래 불교하고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금정산 고당봉에 고모당이라고 무당들이 굿하는 곳이 있는데 이게 원래는 범어사의 불제자였던 어떤 할머니가 세웠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자리 잡으면서 고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던 미신과 타협하고 그것들이 함께 들어간 겁니다. 산당제사도 이와 같이 혼합 종교적으로, 이교적으로 변해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교의 풍습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성전제사를 위해서 산당을 폐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므낫세가 어느 정도로 악한 왕이었느냐 하면 북쪽의 소문난 악당 아합왕과 같은 인물이랍니다. 열왕기하21:3에 ‘아합의 소위를 본받았기“에 그렇게 악하답니다. 산당을 다시 세웠고 바알의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답니다. 여기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는 것은 원어적으로는 ’하늘의 군대를 숭배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그 별들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듯이 하늘 군대가 엄청나게 많아서 군대와 같은 별들이 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 군대‘를 숭배한 것입니다. 아마 므낫세는 여호와 하나님이 앗수르의 대군을 쳐서 멸한 것에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고대 근동에는 이 별신을 섬기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강하고 많은 수의 별들이 운행하는 것에 따라 지상의 인간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은 별을 보고 점을 치고 길흉을 예견하며 연구하고 숭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 세사람이 왔다고 하는데 이들도 아마 이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들이었을 걸로 여겨집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충분히 악당이 될 수 있는데 이 므낫세는 더 악당이 되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어느 왕들도 하지 않은 황당하고 해괴하며 신성모독적인 일을 합니다.
두 번째로 므낫세가 저지른 일은 바로 성전에 우상을 위한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여호와의 전에 여호와를 섬기려고 단을 쌓은게 아닙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분향단은 이미 있습니다. 므낫세는 이방신들과 하늘의 별신을 섬기려고 단을 여러개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고 그의 공의를 대신 집행해야 될 왕이 하나님의 대의를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보이는 행동을 하니 이 사람의 결말은 안봐도 뻔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만든 성전에서 이방신들을 위한 제사가 드려진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악이 저질러지는 곳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거두실 것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내 이름을 사용할 자격이 없어, 나도 더 이상 너희의 제사를 받지 않을 거야’ 나중에 나중에 성전에서 이방의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은 말세의 징조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버젓이 그런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므낫세는 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 두 곳에 우상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자, 성전을 망친 므낫세는 더 황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세 번째로 므낫세가 저지른 악행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 아들들을 불가운데로 자나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기드론 골짜기의 일부를 말합니다. 당시 이곳은 시체와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고 성전제물들의 쓰레기들이 흘러 오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지옥의 모형으로 여길 정도였는데 바로 이곳에서 므낫세는 암몬의 신 몰렉에게 사람을 태워서 제사를 지내는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시는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여기 보면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라고 되어 있지요? 사람이 불가운데로 지나가면 타 죽습니다. 그래요, 바로 이들은 신에게 바칠 제물인 인간의 정결의식을 행한답시고 사람을 불에 태워서 정결케 한답니다. 인신공양을 드리는 암몬의 사당이 여기에 있었는데 므낫세는 어김없이 이러한 우상에게도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아마 므낫세는 자기의 아들들을 여기에서 불태워 제사를 지낸 모양입니다. 이 인간은 정말 제정신이 아닙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점쟁이를 찾아 가는 여집사님. 진짜 사람이 너무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 교회의 교우에게 소개받고 그 집엘 갔답니다. 아주 용하다는 소개를 받고 그 집에 갔는데 딸의 대학 입시 때문에 어느 대학에 가야될지를 물어본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이면서 점쟁이를 신임하고 찾아다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남자하고 결혼해야 겠느냐 를 물어 보는 것에서부터 각종 문제들을 막 물어 봅니다. 하나님은 그 점쟁이가 섬기는 보살이니 장군이니 선녀니 동자니 옥녀보다 귀신보다도 더 못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목사가 점쟁이보다 못합니까? 만일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거지요?
우리가 이 므낫세를 보면서 황당하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므낫세처럼 행동하는 교인들이 오늘날 이 땅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는 그 모든 악행으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켰답니다.
자, 이만하면 할 만큼 했을 텐데 므낫세의 악행은 끊임이 없습니다.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더라” 앞부분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은데 왜 본문에서 다시 반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같은 말의 반복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여기서는 말하는 ‘아로새긴 목상’은 아세라 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장인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 자기가, 므낫세가 직접 나무에다 새겼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아세라에 대한 열성이 대단합니다. 우리로 치면 불상을 임금이 직접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왕이 그렇게나 할 일이 없는 존재입니까?
그 결과로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에 빠져서 악을 행하게 되었답니다. 왕정시대에 왕이 시키면 백성들이야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아니면 죽을테니까. 그런데 그 악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한 이방민족보다 더 했답니다. 이제는 답이 없습니다. 자기만 죄를 짓는게 아니라 국민들을 죄를 짓게 만듭니다. 이 사람은 왕의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에서 돌이키고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의 말도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므낫세는 믿음의 군주인 히스기야의 아들이었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아합과 쌍벽을 이루는 악당이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습니다.
그랬더니 11절에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간지라“
자기 아버지에게 패퇴한 앗수르가 다시 쳐들어 와서 그를 잡아 갑니다. 아버지 히스기야 때에는 앗수르 군대가 몰살을 당하고 앗수르의 왕은 신하의 반역으로 죽고 한 그 영광스런 역사가 채 잊혀지기도 전에 그 아들은 지금 쇠사슬에 묶여서 바벨론으로 끌려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마음대로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 성경은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군대를 불러 들여서 므낫세를 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백성들을 죄짓게 만들었고 자기와 백성의 아들들을 불태워 죽였으므로 하나님은 므낫세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먼 곳으로 끌려가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가 갖은 악으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켰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산헤립을 죽게 만들었다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의 악행은 산헤립의 아들 에살합돈에게 전쟁에 져서 포로로 끌려가게 만듭니다. 역사 자료에 의하면 에살합돈이 앗수르의 건축사업을 위해 돈과 물자를 제공하도록 제후들에게 명했는데 그 22명의 신하 명단에 므낫세의 이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산헤립의 손자 앗슈르바니팔이 이집트를 원정할 때 그를 수행한 제후들의 명단에 므낫세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므낫세는 앗수르에 충성을 다했는데 어떻게 해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을까요? 여기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앗슈르보니팔 당시에 바벨론의 총독인 사마스 숨 우킨의 폭동이 있었는데 이때 므낫세가 유다의 독립을 추진했거나 폭동진압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서 포로로 끌려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보세요. 아버지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앗수르와 적대했지만 오히려 앗수르 군대가 패망했는데 그 아들은 인간적으로 앗수르에 충성을 다하고 별짓을 다했는데도 오히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는 쇠사슬로 결박하여 끌고 갔다고 하지만 원어로는 구리로 만든 착고를 두 발에 채워서 포로로 끌고 간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적국의 왕으로서의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므낫세를 끌고 간 곳이 앗수르가아니라 바벨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나중에 유다민족이 바벨론에 끌려 갈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악하게 행동한다면 내가 너희를 쳐서 포로가 되게 하리라’ 나중에 유다가 망하고 앗수르도 망하고 유대인들은 바벨론군대에 의해 바벨론으로 잡혀 갑니다. 어때요?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므낫세가 앗수르가 아니라 바베론에 포로로 잡혀 간 것에 대해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역사서를 참고한다면 아마 므낫세가 바벨론 총독인 사마스 숨 우킨의 반란에 가담했으므로 앗수르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그곳으로 모든 봉신들을 모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자, 그런데 므낫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정신을 차립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것과 똑 같이 므낫세 역시 환난을 당하자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그렇게 하나님에게 패악무도하게 행동하고 자기의 아들들 조차 불에 던져 넣은 악한이 구리 착고를 양발에 차고 유다에서 바벨론까지 끌려가면서 겨우 정신을 차린 겁니다.
본문에 ‘환난을 당하여’에서 ‘환난’이란 말은 원어적으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사방이 꽉 막힌 상태’를 나타냅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뭔가 힘들어도 탈출구가 있고 어느 정도 희망이 보이면 이상하게도 모두 내려놓는 것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냥 자기의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가면, 그에게 겸비하게 엎드려 ‘저를 구원해 주세요’ ‘저를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맛볼 수 있을 터인데도 이상하게도 인간들은 그게 안 됩니다. 그래서 아주 극한까지 내려가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그렇습니다.
겸비하다란 말은 원어적으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래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데 부끄러울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부담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릴 수 있습니다.
므낫세에게 일어난 기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다시 찾고 그 앞에서 겸비하여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고 다시 왕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한번 왕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자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왕이 된다는 건 기적입니다. 왜냐면 보통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것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후에 풀려날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너희의 죄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도 그곳에서 겸비하고 회개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에게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가 다시 왕좌에 앉고서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아마 하나님을 자기민족의 고유한 신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도 믿어보고 저 신에게 빌어도 보고 심지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까지 섬겨보고 아세라도 수입해서 만들기까지 하고 하나님보다 이방의 신들이 그에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여호와만이 참 신이고 나머지는 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다시 왕좌에 앉은 므낫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14절부터 그가 한 개혁조치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포로에서 돌아와서 제일 먼저 국방을 강화합니다. 성을 더 튼튼하게 더 높이 쌓고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사령관들을 배치하고 다시는 앗수르의 침입에 무능력하게 잡혀 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건 그가 회개한 거 하고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아 보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그가 회개한 표시입니다. 이전에 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폈습니다. 친 앗수르 정책이란 정치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우상들도 수입해서 그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고 자신도 섬기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반앗수르 정책을 편 것은 더 이상 앗수르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앗수르의 우상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자신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다의 주권을 견고히 하는 것은 유다의 하나님 여호와를 더 열심히 섬기겠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국방강화가 회개한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앗수르가 다시 쳐들어 오면 자기 아버지가 한 것처럼 앗수르하고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인 것이지요.
14절에 “오벨을 둘러 높이 쌓고”에서 ‘오벨’은 예루살렘 동남부에 있는 높은 구릉지역을 말합니다. 여기에 높은 성을 쌓아서 예루살렘을 더 쉽게 방어하려고 한 것입니다.
므낫세의 두 번째 개혁조치는 종교개혁입니다. 국방을 개혁한 므낫세는 이제 종교를 개혁하려 합니다. 정신적인 개혁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개혁은 좀 미온적입니다.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우상을 섬길 수 있는 불씨를 남겨 둔 미완의 개혁이 되었습니다. 그가 미완의 개혁을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다시 우상을 극렬하게 섬기다가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우상을 제하며...모든 단을 다 성밖에 던지고”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므낫세가 우상숭배에 대해 매우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하여’란 말은 ‘멀리 쫓아 버리거나 옆으로 치워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던지고’라는 말은 본래의 형체는 보존한 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 두거나 먼 곳에 던져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므낫세는 그 우상들을 부수거나 그 제단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는 말입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우상숭배가 극렬했는데 아버지 므낫세가 만든 우상을 다시 꺼집어 내어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양조차도 버려야지 우선 눈가림만 하고 확실하게 근절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생활도 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고 따르며 죄악을 싹조차 갈아 버리지 않으면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서 악의 씨앗들이 점점 발아하여 자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일이 지나 이것들이 커지면 다시 죄악을 저지르게 되고 다시 어려움에 빠지고 다시 눈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므낫세의 종교개혁으로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더니 백성들이 여호와께만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화목제는 하나님 이때까지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저와 함께 해 주세요.
감사제는 제가 다시 살아서 이 땅을 밟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가 산당을 남겨 두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전이 아니라 산당에서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산당제사가 없어진 때는 유다 말기의 요시야 때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에는 산당제사가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므낫세의 행한 일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것은 ‘호새의 사기’에 기록되었답니다. 어떤 성경번역본은 ‘호새’를 ‘선견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보아 ‘선견자의 사기’라고 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냥 호새를 사람 이름으로 보고 책을 지은 선견자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본문에 대한 해석이 끝이 났는데 우리는 므낫세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긴 것 말고는 왕으로서의 어떠한 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그에게 아합과 비견할 정도로 그렇게 악한 왕이라고 정죄했을까요?
실제로 병행기사인 열왕기하21장에 므낫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악한 행위가 일부 기록되어 있는데 16절에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우상숭배를 말합니다)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여기 ‘이 가에서 저 가까지’란 말은 ‘이 문에서 그 반대편 문까지’란 말입니다. 성문이 있는데 이 성문에서 반대편 성문까지 무죄한 자의 피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말은 온 성안이 무죄한 자의 피로 흠뻑 적셔져서 흘렀다는 말이고 이는 므낫세가 공포정치를 한 폭군이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므낫세가 말년에회개하기는 했지만 초기의 악행이 너무 심해서 그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하지 않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어서 그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학자들은 세가지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므낫세가 몰록에게 인신공양을 하는 것을 즐겨했기에 당시 유다에서 인신공양으로 희생된 어린아이들이 매우 많았다는 거지요. 두 번째는 가난하고 약한 민중들이 므낫세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억압받았다는 거지요.
므낫세 당시는 앗수르에게 바치는 조공품과 노동력 그리고 군사들로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우상 숭배를 거절한 경건한 자들과 이를 정죄하고 비판한 선지자들을 죽여서 그들의 피가 흘렀다는 거지요. 전승에 의하면 이때 이사야 선지자도 므낫세에 의해 톱질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이도 신빙성이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인 사람들의 피가 흘러 온 성에 가득 찰 정도였다면 이 사람은 북이스라엘의 폭군인 아합과 비견될 만한 악당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리 포로로 끌려갔더라도 어떤 계기로 회개하고 하나님품으로 돌아와서 개혁조치를 했는지는 지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걸어온 길이, 그리고 그의 기도로 다시금 왕이 된 것이, 그리고 본국에서 국방과 종교개혁을 실시한 것이 한편의 기적적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나중에 므낫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겨우 2년만에 신하의 반란으로 죽게 되고 그 손자 요시야가 왕이 되어서 미완의 개혁을 완성합니다.
우리가 오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이 그렇게나 극적으로 변할 수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변화에 주께서 그렇게 즉각적으로 그렇게 극적으로 화답하신 것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며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요구되어 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파도가 너무나 거칠고 무서워서 수시로 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서초동에 있을 때 참 좋은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돈도 많고 그런데 걱정이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들의 게임중독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 권사님이 참 많이 기도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어느날 이 권사님이 아들을 데리고 도봉산에 가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적을 보여 준다고, 믿음에 회의적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간 겁니다.
아들도 참 좋은 청년인데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지만 그땐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무언가 표징을 구했습니다. 그것만이라도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해 보겠는데 나는 아직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목회를 하다 보면 의외로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가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 할머니의 하나님은 되시지만 나의 하나님은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에겐 어떤 확신도 징표도 없어서 회의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냥 주일날 교회 가 주는 거지요. 그동안의 습관에 의해서 그냥 다녀 주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산에서 기도할 때 저도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들과 반대 방향의 봉우리로 가서 기도하고 시간이 되어서 같이 왔습니다. 두 봉우리 사이가 한 십분정도 떨어져있었고 길이 꾸불꾸불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서 건너편이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봉우리에서 내려오기 전에 잠깐 조는 사이에 그 쪽 바위에서 기도하는 광경을 꿈으로 보았습니다.
그 권사님과 아들이 내려 올려고 짐을 싸다가 그만 성경책을 바위 밑으로 떨어뜨린겁니다. 그런데 그 성경책이 딱 펴진 채로 바위틈새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더라고요. 그리고는 꿈을 깨고 중간에서 만나서 같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고 제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그 꿈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이 깜짝 놀라면서 안그래도 내려 올려고 짐을 싸다가 성경책을 떨어 뜨렸는데 바윗틈의 나무에 걸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바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내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표징인 것입니다. 다른 어떤 표적도 보지 못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성경책 꿈이 실제의 행동을 그대로 나타낸 것을 그 무엇보다 확실한 표징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보지도 못했는데 그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사인을 구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인은 매우 작은 것일 수도 있고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물이 갈라지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생활 속의 작은 것에도 하나님의 사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인을 알아차리려고 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은밀한 중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가끔가다가 그동안 늘상 보던 경치고 풍경이고 환경인데도 뭔가 새롭고 신비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게 있었구나!’하고 감탄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가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우리가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우리 몸속에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징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영교하고자 하는 영적인 바램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우는 일은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정욕과 분노를 버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혹해서 정신을 못차리는 것은 우리 하나님에게 속한 영적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영에 속한 사람이므로 육의 필요를 최소한으로 채우고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 세상의 흐름이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거대한 줄기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의 탁류에 휩싸이면 결국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서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탁류에 휩싸이지 않도록 한발짝 떨어져서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주의 성도라면 능히 그러해야 합니다.
물질에만 정신없이 혹해서 따라 다니다가 심신이 피곤하고 지쳐서 넋놓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더 귀하고 더 능력있는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 영적인 인간, 성도라도 결국 배고픈 육신을 위해 밥이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정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면 단순한 밥을 넘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한정이 없습니다. 예,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을 쫓는다고 해서 그걸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잡을 수도 있고 잡지 못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라면 그 모든 것들을 좇아 이전투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바라는 것들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내 정욕대로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내 정욕대로 구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아버지께서 허락 하실 것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돈에 눈이 있어서 잡으려고 따라가면 도망간다고 하는 말 들은 적이 계실 겁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를 더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살고 행동하면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채워 주십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금 최소한의 필요는 어느 정도 충족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배고프고 목마른 이유는 우리의 욕심이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물질은 마치 바닷물 같습니다. 마실수록 점점 더 목마르고 더 마셔야만 하는 바닷물. 웃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행복을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누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가 왜 아버지와 반대로 앗수르에 굴종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독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이방의 신보다 약하고 별 볼일 없는 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앗수르가 강한 것이 앗수르가 섬기는 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한 것이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좇았고 앗수르의 눈에 들려고 갖은 애를 쓴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 유대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반란군의 편에 선걸 보아도 그의 마음이 짐작됩니다.
므낫세는 무려 55년간을 나라의 왕 자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오고 우상을 극렬하게 섬기다가 국방개혁과 종교 개혁도 펼치고 정말 극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기에 그에 관한 기록은 겨우 20절입니다. 심지어 열왕기서에서는 그가 말년에 회개하고 국방개혁과 종교개혁을 펼친 사실도 기록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므낫세가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려 50년 이상을 왕자리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하나님은 그에 관한 많은 것들을 생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 기준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적인 부와 권세가 큰 가 아닌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았는가 아닌가로 판단하십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큰게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고 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크게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들이며, 육이 아니라 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도 하늘을 소망합니다. 므낫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무려 7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요. 므낫세는 60여년 전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기적이네 뭐네 말은 많지만 그가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적을 위해서 한 일은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만물의 주인이자 천지의 주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이 필요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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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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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유튜브에 가면 조회수 8천만이 넘는 I Surrender 라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완전히 항복한다는 의미겠지요. 그러고보면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고, 주님을 찾을 때, 주님께서는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 하시는 건지도 모릅니다. 다시 일어서라, 열심히 살아가라, 오늘을 감사히 보내라, 인생을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지요. 영어공부를 할 때 gift 같은 단어에 괜히 놀라기도 합니다. 천부적 재능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선물로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긴 목사님의 설교를 읽다보면, 사람마다 느낌이 오는 구간이 다르지 않을까 상상합니다. 그래서 미루지 않고, 제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야 하는데, 정작 저는 이번 주는 지쳐있다는 핑계로, 이런 저런 핑계로 업데이트를 미룬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데드 라인인 토요일쯤 와서야 이렇게 급히 허겁지겁 새벽에 설교를 올리고 있네요. 이번 주는 작은 일부터 성실하게, 그렇게 반성적인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나는 굉장한 사람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를, 이러한 교만함을 완전히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라서 부메랑처럼 뒤통수를 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밖에 안 되었잖아." 그래서 겸손한 기독교인이 실은 대단한 것입니다. "주님,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이제는 성실히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세요." 그 정직한 신앙고백이 계속 하루 하루를 쌓아갈 때, 우리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조금씩 닮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기엔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 2016.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