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실수 (이사야39:1-)
히스기야는 남 유다의 왕으로 신앙이 투철하고 앗수르의 침입을 물리치며 유다를 부흥시킨 왕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라고 해서 일평생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으며 또한 실수로 인해 책망도 들었던 그런 평범한 인간 왕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히스기야가 병이 낫고 난 다음 바벨론 사신단을 만난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을 극진히 환대했고 그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큰 책망을 받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책망하라고 시키신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특별히 히스기야가 책망받을 일을 한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를 책망하셨을까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스기야는 유다의 후반기에 가장 신실하고 뛰어난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그 히스기야가 뚜렷한 이유 없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히스기야가 한 일이라고는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물창고와 무기고를 보여 준 것 정도입니다. 그게 그렇게나 엄중하고 무거운 형벌을 받을 죄일까를 생각하면 약간 이상하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1절에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금과 예물을 보낸지라”
이 일이 있기 전에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나음을 받았고 더불어 수명이 15년간 연장되는 특혜를 입었습니다. 굉장한 은총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히스기야의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벨론 왕이 금과 예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일국의 왕을 찾아오면서 축하금으로 예물과 금을 당연히 보낼 것입니다. 이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2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축하 사절 때문에 매우 기뻤답니다. 당연히 기쁠 겁니다. 남의 나라에서 자기의 병이 쾌차한 것을 축하하기위해 사절을 보내고 금과 예물까지 들려 보냈으니 당연히 기쁠 겁니다. 더구나 바벨론은 유다와 같이 앗수르의 속국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라자체가 매우 강하고 저력이 있는 나랍니다. 그러니 히스기야가 그렇게 좋아하는게 당연합니다. 좋은 일에 축하도 해주고 이런게 왜 문제가 있을까요?
실제로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이었고 그래서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 상태로 지금 엘람에 머물러 있습니다. 엘람도 큰 나라고 므로닥발라단이란 인물도 잘난 인물입니다. 이 왕이 생각할 때 앗수르의 침공을 격퇴한 히스기야가 병에서 쾌유했으니까 바벨론과 유다간에 군사동맹을 맺는다면 그래서 앗수르에 반대한다면 충분히 든든한 동맹이 될걸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병에서 쾌차했다는 축하 사절단이 아니라 군사동맹을 체결할 목적을 가진 사절단을 보낸 겁니다.
당시 유다도 비록 한번 앗수르의 침공을 격퇴하기는 했지만 앗수르의 강대한 세력에 맞설 동맹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바벨론의 사절을 매우 기뻐한 것입니다. 든든한 동맹이 생겼으니까 이제 더 이상 앗수르가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히스기야의 마음속에 교만과 허영이 틈탄 걸로 보입니다. 든든한 군사동맹 때문에 기쁘기도 했지만 더 기쁜건 그가 바벨론이란 나라에서 군사동맹을 체결하려고 할만큼 강자로 인정받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더구나 뜨는 해인 바벨론과 손을 잡고 앗수르를 대적하게 되면 더 이상 유다는 앗수르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바벨론은 바로 이웃나라가 아니라 멀리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별로 큰 위협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군사동맹에 아주 적절한 상대인 것입니다. 그 나라의 사신들이 동맹을 맺기위해 왔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인 잔머리가 사실은 하나님을 노엽게 한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하나님을 노엽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하나님 자신만을 의지하지 않고 신흥 세력인 바벨론을 의지하는 그 인간적인 마음이 섭섭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별걸 다 질투합니까? 군사 동맹이야 맺을 수도 있지 그런걸 가지고...
그런데요 당시에 동맹이란 건 단순한 군사적 동맹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바벨론이 유다보다는 강하니까 동맹을 맺게 되면 바벨론과 유다가 서로 교류를 하게 되고 이러한 교류는 대부분 바벨론의 우상을 받아 들이는 일로 발전합니다. 사실 미래를 보는 하나님과 당시만을 보는 인간과는 그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나중에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포로도 백성들이 끌려가고 왕궁과 성전의 보물들을 다 빼앗기고 왕은 두 눈이 뽑혀서 잡혀 갈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에게 간이라도 빼줄 듯이 설쳤으니 하나님이 가만 계시겠습니까?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갈대아가 바로 바벨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한 아브라함은 무엇 때문에 우르를 떠났습니까?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동맹을 맺게 되면 자연적으로 바벨론의 우상들이 다시 유다에 퍼지게 될 겁니다. 강대국이 강대국인 이유는 그들이 모시는 신이 강해서 그렇다는 인식이 팽배한 당시에 강대국의 신을 약소국의 백성들이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과의 동맹으로 하나님은 벨신이나 다른 우상들에게 밀릴겁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은 그렇게나 하나님을 섬기고 벨을 섬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건만 돌고 돌아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시 벨신에게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렀을 때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자기만을 의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하나님을 당연히 의지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침략을 물리친 것도 역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근방의 그 어떤 나라도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나라를 보존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인간이라면 그 은혜를 쉽게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히스기야가 정작 살만해지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약해지고 인간적인 머리를 굴려서 바벨론을 의지하려는 것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서 히스기야를 책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너무 다급하고 상황이 어려우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왜냐면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 좀 살만하고 인간적으로도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생각이 들면 그새 우리는 옛 습관이 나와서 인간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렇고 그렇게 되면 저렇게 되고 하면서 우리딴에는 가장 합리적이고 그럴듯한 계책을 꾸밉니다.
그러나 그런 계책들이 과연 제대로 맞아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계책은 인간이 세우지만 성사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병상에서 일어나고 바벨론의 사신이 온 이때 히스기야는 자기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서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겠지만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고 맙니다. 앗수르에 맞서서 공동으로 싸우고자 했던 소위 말하는 혈맹은 바벨론의 배신과 유다의 멸망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히스기야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히스기야의 사후 유다는 바벨론에 종속되고 영향을 받고 하다가 결국 속국이 되고 나중에는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바벨론에 잡혀 갔다가 석방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미래까지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지나간 과거를 통해서 교훈은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이방 강대국을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따랐고 결국 그것이 유다에게 올무가 된 것이고 결국 나라를 멸망케 만드는 시초를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불가능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직접 체험해 놓고도 그는 하나님을 덜 의지하고 인간을 더 의지하는 일을 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지금 히스기야의 이런 행위를 불신앙이라고 비난하고 비웃을 수 있지만 지금도 우리네 삶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일이 힘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대선후보들이 몰래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다닌 것은 주간지의 가장 뜨거운 소재입니다. 권사고 장로고 할 것없이 몰려 가서 점을 보고 장래를 알려고 하는 행태는 그를 그만큼 키워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조롱하는 행태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나중이 결코 좋을 수가 없습니다.
바벨론의 사신을 맞이한 히스기야는 인간적으로 매우 기뻤습니다. 멀리서 강대국의 사신이 와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를 그만큼 알아주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에게 보물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히스기야가 자기의 모든 소유와 무기고를 보여준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내가 이만큼 강성하므로 너희들과 동맹을 맺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목적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에서 히스기야는 실격한 겁니다.
죽을 자리에 누워있던 그래서 유다와의 동맹이 불확실하던 시기를 보내고 히스기야가 기적적으로 쾌유한 것은 바벨론으로서는 매우 큰 기쁜 일이고 약간은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신이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이들은 아마 히스기야가 정말로 병석에서 일어났는지 앞으로도 나라를 잘 이끌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는지 그리고 유다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고 온 겁니다. 그래서 동맹을 맺으면 자기네에게 도움이 되겠는지 알아 보려한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남의 나라에 자기네 나라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되는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옛날 나라의 사신은 보통은 간첩을 겸하는 것입니다. 합법적으로 상대국의 정보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그에 따라 자기네 나라의 정책결정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모든 왕은 적어도 국력의 삼할은 숨겨야 합니다. 뭔가 숨겨야 상대방이 배신했을 때 결정적인 한방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바벨론을 너무 믿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막 생긴 겁니다.
실제로 바벨론 사신이 히스기야의 병이 회복된 것이 궁금해서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간증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기적적으로 회복시키셨다 그리고 그가 앗수르의 침입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셨다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만이 참신이라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대신 자기의 강성함과 운좋음을 자랑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기회를 하나님의 능력을 간증하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강성함을 자랑하고 바벨론과 군사동맹을 맺는데 사용합니다. 결국 그는 바벨론과 바라던 군사동맹은 체결했지만 결국 그 바벨론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유다는 멸망합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맺은 그 동맹이 오히려 유다를 옮아매어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의 종이 되게 한 겁니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 단초를 제공했다는 걸로도 히스기야의 잘못은 능히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큰 겁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부유함과 강성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고 잘 섬기는 히스기야를 영화롭게 해 주신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잘 섬기므로 나는 너에게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줄 것이야’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그 부유함과 강성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교만에 허영에 빠져서 스스로를 높이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했고 결국 그는 올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란 말에는 원문상으로 ‘그 선지자’라고 ‘그’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 이사야가 유다에서 가장 권위있고 인정받는 선지자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사야는 유다에서 가장 권위있는 선지자임과 동시에 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왕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기독교계의 목사 몇 명이 대통령을 만나서 현사태에 대해서 그 책임을 지적한게 아니라 좋은 소리로 아부만 했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인의 기독교와 목사에 대한 인식만 나빠지게 만들었고 대통령으로 하여금 실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참 선지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은 세상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나타나기를 위해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적인 권세와 부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세상의 사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말이 세상을 울리는 종소리가 되려고 한다면 세상이 시비할 수 없는 깨끗하고 청빈한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오히려 세상이 그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조종하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합니다. 부와 권세 그리고 쾌락. 이런 것은 세상의 특기인데 이걸로 조종이 안되는 자를 세상은 능히 감당하지 못할자, 두려운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광고가 생각이 납니다. 세상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용기. 좋지요. 진리만을 따라가는 이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큰 선지자에게 큰 영광과 존경이 주어진다면 그 영광과 존경에는 무한한 책임과 바른 소리를 할 의무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른 소리를 하고 혹여 그것 때문에 권력자의 눈 밖에 나더라도 후퇴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나가도록 하는 댓가로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부여한 것이지 혼자서 대접받고 잘 먹고 잘살라고 그렇게 큰 영광을 준게 아닙니다. 오늘날의 목사들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저도 항상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사신단이 떠나고 왕궁에 들어가 히스기야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이사야가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닙니다. 좀 쉽게 말하면 왕의 실수를 책망하기 위해 입을 연겁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히스기야의 대답을 잘 보시면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바벨론에서 온 사람들을 말하면서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이 말투 속에 히스기야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들과 동맹을 체결하고 그들에게 나의 무기고와 부를 보여 준 것이 그렇게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겁니다. 아직 뭘 보여주었느냐는 질문이 나오기 전이지만 히스기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에서는 흔히 ‘원교근공’이라는 말이 정석처럼 내려옵니다. 멀리 있는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한다는 말이지요. 사실 가까이 있는 나라와 사이가 좋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바벨론이라는 아주 먼 지역에서 온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잘 대해주고 창고를 보여주고 교류를 맺으려고 한 거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원방, 먼 지방.
히스기야는 이어서 그들이 내 창고의 모든 것을 다 보고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글쎄 히스기야는 이 말을 하면서도 그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투가 점점 책망조를 띄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다 보여주었고 안 보여준게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그러면서도 그는 내 창고에 있는 보물은 다 보여주었다는 식으로 말을 돌립니다. 분명 무기고니 군사기밀 이니 를 다 보여주었지만 그건 대답에서 뺍니다. 자기가 말을 하면서 점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 챈 겁니다.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남의 나라 사신에게 무기고를 모두 보여준 건 좀 그랬나?’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무기고 얘기는 빠진 겁니다.
여기에 상관없이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사람 정말 안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평소에 히스기야의 극진한 대접과 존경을 받은 것을 전혀 무시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합니다. 사람의 낯을 전혀 세워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 이게 안됩니다. 저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의 낯도 봅니다. 그래서 큰 선지자가 안된 건지도 모릅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보통같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들이 마구 쏟아집니다. 히스기야의 면전에서 이사야는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말들을 쏟아 냅니다.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히스기야가 자랑하면서 보여준 모든 보물들이 다 바벨론의 소유가 되고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은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바벨론으로 옮기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랑하던 모든 것이 다 빼앗긴바가 된다는 말은 우리 인생의 의지할 바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잘 보여줍니다.
옛사람들은 보물이니 돈이니를 ‘신외지물’이라고 해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몸 자체였기에 학문을 닦고 힘을 기르고 하는 것을 으뜸으로 쳤지 보물이니 돈이니는 전혀 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돈이란 것이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게 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말기에도 시골장터에서 가장 널리 쓰인 것은 쌀과 베쪼가리입니다. 쌀과 포. 그래서 암행어사가 도성을 나갈 때 가지고 가는 것이 바로 유척, 놋쇠 자입니다. 이걸로 베와 쌀이 제대로 정직하게 유통되는지를 재어본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씨름대회에서 우승하면 돈을 주지 않고 소나 쌀을 주었지요. 왜 그랬겠습니까? 그게 많이 쓰였고 그게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려 합니다. 이게 얼마짜리다. 항상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신외지물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은 전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라고 하나님의 공의를 더 널리 펴고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하라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라고 주신거지 그것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나의 영광을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질을 싹 다 빼앗긴다는 저주 외에 이사야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끔찍한 저주의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이니까 그의 자손은 왕족이고 심지어 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남의 나라에 끌려가서 그 나라의 내시가 된답니다. 그것도 네가 지금 동맹을 맺으려고 너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공개한 그들 바벨론에. 지금 히스기야가 그렇게나 죽고 못 살 정도로 의지하는 나라가 바벨론인데 바로 그 나라에 끌려가서 환관이 된다고 하니 히스기야의 잘못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겠습니까?
솔직히 별로 잘못한 줄도 모르겠는데 하나님의 저주와 징벌은 너무 과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이 대답을 보면 히스기야가 너무 이기적인 듯이 보입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왕이야?’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나만 평안하면 되지 내 후손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 같지요?
그러나 이 말은 좀 떼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그 심판의 말씀에도 그 말씀을 기꺼이 수용했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무겁게 그리고 겸허히 받아 들이겠다는 겁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진 것에 대해서 충분히 자기의 잘못 때문이므로 그걸 수용하고 내가 하나님께 섭섭해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자기의 교만과 실책에 대해 회개를 시작합니다. 그 회개는 히스기야로 부터 온 예루살렘거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고 그 회개에 마음이 풀린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내린 심판을 당대에 내리는 것을 유예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징계의 심판은 무려 백년이나 지난 후에 이루어 집니다. 물론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 오는 일도 겪었기는 하지만 이것은 므낫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따르면 그는 나를 모든 불가능에서 건져 내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이루게 하신 일을 직접 경험했습니까? 나의 위기의 순간에 내가 가장 힘들고 절박한 순간에 그가 나를 들어 서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심을 내가 체험했나요?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특별한 은총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에게 특별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가 나를 특별히 사랑하심이 더하다면 내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렇게 특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강도에 미치지 못하는 믿음에 대해서는 섭섭해 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믿음을 보이기를 원하시고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심하게는 끝끝내 자신이 보고자 하는 믿음을 보지 못했을 경우에는 채찍을 드시고 내가 우리가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본문에서 히스기야의 죄목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배신하고 인간을 더 의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만입니다. 내가 이정도로 부자고 내가 이 정도로 강하다는 교만. 그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교만이 그의 눈을 가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기 보다는 자기의 낯을 세우기를 더 좋아했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보다는 인간적인 허영에 더 목맨 겁니다.
그리고 가장 큰 것,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일에 눈감은 겁니다.
예로부터 인간은 틈만 있으면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난국을 헤쳐 나갔음에도 하나님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쉽게 떠났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쾌락이나 욕망을 채워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죄성에 너무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살만해지면 딴 곳으로 눈을 돌립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만의 세력을 만든 네피림들과 바벨탑을 쌓아 스스로 신이 되려한 니므롯부터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지우신 멍에는 그렇게나 무겁고 그렇게나 괴롭지 않습니다. 가볍고 충분히 질 만한 겁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를 괴롭히려고 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이롭게 하기 위해 지게 하신 겁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사탄의 속삭임은 너무나 쉽게 받아 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지독스럽게도 배척하려는 것이 바로 죄성에 물든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히스기야도 피해가지 못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 봅시다.
뭐 그정도 가지고 그렇게나 가혹하게 벌을 내리냐?
그래요 바로 그게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지? 그래 그에게 반항하고 우리 힘을 합쳐서 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보자. 그가 지게 하신 멍에를 벗어 버리고 나에게로 와라 내가 너에게 쾌락과 부귀을 주리라는 말에 속으면 인생의 파멸이 쏜살같이 다가옵니다.
그래도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에 순종하고 그 스스로를 돌아보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늦추었습니다. 아마 그 후손들이 그런 벌을 받은 것은 히스기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범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실수를 바로 잡고 그가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게하려고 책망하신 겁니다.
인간은 가장 절망적일 때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고 여지가 보이면 하나님의 개입 없이 우리끼리 뭔가를 해보려고 모의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떠나서는 결코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강대한 세력을 의지하지 말고 금은보화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정신없이 이것도 보여주고 저것도 보여주면서 스스로 강한 체해도 결국 바벨론이볼 때 유다는 소국입니다. 그 유다가 앗수르의 침입을 격퇴하게 된 것은 그들이 스스로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하나님을 빼놓고 인간들끼리 자축한다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맙시다.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우선합시다. 내가 가진 보물들을 막 자랑하고 싶습니까? 내가 이룬 성취를 사람들 앞에 내어놓고 뻐기고 싶습니까? 그러한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 존엄을 위해서 영광을 돌린다면 내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의 앞에 꿇어 엎드리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 드리며 그의 명령을 따라 행하고 항상 그만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이 다함이 없게 될 것이며 세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성도를 건드리지 못하게 될 것이며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내가 평안하고 번영했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사십시다. 항상 내가 흔들려서 교만하려고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겸비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법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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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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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이 주신 것들. 우리가 가지게 된 소유들.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된 찬양이 떠오릅니다.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앞에 모두 드립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들을 주님이 보시기에 합하도록 사용할 때 아름다운 모습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자신의 삶에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결정을 올바르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 처럼, 우리는 얼마든지 교만의 덫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높이 들고, 내가 잘난 사람임을 자랑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자기PR의 시대에 자신을 낮추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제도, 인내도, 반드시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덕이 안 되는 말을 삼가고, 한 번 더 생각을 해보고 이야기 하는 배려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와 엘리야처럼 상대방의 중요한 의견에는 꼭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6. 1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