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조건 (사도행전9:32-43)
오늘은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린 기사를 중심으로 기적의 조건에 대해서 알아 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전에 이 본문을 가지고 한번 설교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을 조명해 보기를 원합니다. 솔직히 이전 설교를 조금도 참고하지 않고 새로 작성했습니다.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같은 본문에서 나올 수 있는 방향은 비슷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기적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말 그대로 초자연적인 현상이고 초자연이란 말은 자연법칙을 뛰어넘었다는 말입니다. 자연법칙을 만드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법칙을 하나님 스스로 뛰어넘기 위해서는 뭔가 나름 합당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렇게나 쉽게 깨지는 법칙이라면 그건 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나 쉽게 법칙이 무시된다면 당연히 이 세상에 무질서와 혼돈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주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법칙을 존중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연하게도 저역시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기적은 바로 그 예외에 해당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기적의 조건들을 살필 수 있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적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저도 아니고 기도받는 이도 아닙니다. 기적의 주체,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본문에 이런 법칙이 있다고 해도 다른 곳이나 다른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본문을 살펴서 기적의 법칙을 세워둔다면 적어도 참고는 되리라고 봅니다.
1.마침 가까이에 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녀가 병들어 죽었을 때 베드로가 바로 인근의 룻다라고 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38절에 보면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있음을 듣고 두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룻다와 욥바는 약 17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먼 거리는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의 관념으로는 충분히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침 룻다라고 하는 가까운 곳에 베드로가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해서 베드로가 룻다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기도해서 중풍에 걸린 애니아를 고쳤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이 퍼져서 룻다뿐만 아니라 사론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욥바에 있는 다비다의 동료들도 베드로의 소재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론은 룻다와 욥바를 포함하는 평야지대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룻다나 욥바가 고을의 이름이라면 사론은 지역명입니다. 당연히 욥바에 거주하는 이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 베드로를 청할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했거나 교통이 편리한 시절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가 매우 어렵고 또 안다고 해도 지역간 이동하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옆 동네라면 이야기가 달라 집니다. 마침 베드로 선생님이 옆동네로 오셨다는데 그를 부르자.
만일 누군가가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국내에 있지 않고 미국에 있었다면 청하기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비다가 살아날 수 있는 기적의 첫 번째 조건이 뭡니까?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 그래요,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가까이 살아야 시체가 썩기 전에 가서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베드로가 직접 다비다를 만날 수 있는 그러니까 베드로가 다비다에게 살아나라고 기도할 수 있으려면 만나야 할 것 아닙니까? 물론 멀리서라도 기도로 서로 영교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기적은 일어나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확률이 높을 것임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잘 아는 말 중에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자를 보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간절함을 더하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서로 영으로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성령의 기운이 더 강하게 미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 저는 옛날부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에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그래도 대면하여 직접적으로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멀리서 기도로 영교하는 것보다 확실히 치유의 효과를 더하게 합니다. 열두해를 혈우병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을 만졌을 때 주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내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감을 느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성령은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역사에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뭉쳐 있을 때 두 세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더 강하게 역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면 기도할 때 서로 대면하여 손을 얹어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았고 전화통에 대고 기도해도 역사하시는 것을 제가 목도하거나 경험했고 물론 그렇지 않아도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제가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면하여 안수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일대일의 상황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도 좋고 서로 합심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도 좋고 뭐 간절하고 진실된 기도는 특히나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큰 법입니다.
성경에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치료하신 것은 우리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네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으로 봅니다. 하하, 당연히도 저는 그런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2.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자, 그런데 기적의 또 다른 조건이 여기에 나옵니다. 뭡니까? 다비다와 같이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비다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사람을 보내어 청했다는 겁니다. 자기 동네도 아니고 옆동네까지 가서 베드로에게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즉시 와 달라고 간청한 거지요.
이미 다비다는 죽었고 여기 보니 다비다에게 가족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가족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비다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이대로 다비다를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해서 베드로를 빨리 와 주도록 간청했다는 겁니다. 아니 다비다는 이미 죽었는데 장례식을 위해서 베드로를 청했다면 급히 와달라고 간청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겁니다.
장례식을 집전하는데 굳이 베드로를 불러서 할 것 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당일 매장하는 습관이 있답니다. 아마 너무 더운 지역이라서 시체가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그런 풍습이 생겼지 싶습니다. 물론 이들에게서도 삼일만에 영혼이 떠나간다는 풍습은 있었지만 이들의 장례는 우리처럼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바위굴에 넣고 돌을 굴려 입구를 막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하고는 좀 다릅니다.
틀림없이 욥바에도 믿는 형제들이 많았을 것이고 이 중에서 욥바 공동체를 지도하는 이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까지 필요한 일이었을까 싶습니다.
그럼 왜 그들이 베드로를 지체없이 와 달라고 간청했을 까요? 그건 다비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면 다비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급하게 서둔 겁니다.
만일 주위 사람들이 이미 다비다는 죽었으니 정말 슬프기는 하지만 이제 모든게 끝이 났다고 여기고 장례식을 정성스럽게 치르려 했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적은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지만 믿음이 가장 강력한 동인이 되는 법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설정한 기적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정도까지만 해도 좋겠다. 이거는 되고 저건 어렵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 성령 하나님에게 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소원을 넘어서 우리의 간구를 넘어서 역사하십니다. 원래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품성을 가지지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꿈을 꾸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본 성질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다비다의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인 욥바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자기네가 믿는 주님처럼 다비다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까요?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처럼 그의 제자인 베드로도 다비다를 살릴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까요?
물론 본인은 이미 죽어서 믿음을 보일 수 없지만 주변인들의 간절함과 믿음으로 다비다는 살아납니다.
3.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시체를 씻는 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장례를 위한 절차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누여놓았다고 하는 것은 뭔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다락은 성도들에게 있어 부활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집회 장소이고 교회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비다의 시체를 묻지 않고 씻어서 다락에 누여놨답니다. 다락에 죽은 이를 누여놓은 것을 우리가 아주 친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 때와 엘리사 때 모두 죽은 아이들을 다락에다 누여놓았습니다. 예로부터 다락은 그 집에서 가장 넓고 좋은 장소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며 집회의 장으로 사용되었고 생명부활의 신비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다비다 역시 바로 이 다락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4.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이 과부들이 왜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었습니까? 다비다에게서 받은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그가 진정으로 자기들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낸 것이 감사해서 운겁니다.
다비다는 아람식 이름 즉 유대 이름이고 도르가는 헬라식,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이 당시에는 두가지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바울도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시몬 이렇게.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욥바에서 다비다는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걸로 추정합니다.
기적은 열심히 울기만 하면 일어납니까? 많은 사람이 눈물로 호소하기만 하면 일어납니까? 그렇지는 않고 기적은 누릴 수 있는 이가 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적도 일어날 만 해야 일어납니다.
다비다는 ‘영양’이란 뜻입니다. 잘뛰고 날씬한 짐승있쟎아요. 그래서 다비다란 이름에는 은혜로움이나 아름다움이란 뜻이 있답니다.
만일 베드로가 기도했지만 다비다가 기적에 합한 자가 아니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아마 죽은 다비다는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속옷과 겉옷을 내어보인 과부들이 다비다의 죽음이 슬퍼서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울었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베드로를 급히 오도록 간청하고 뭔가 기적을 바라기는 했지만 과부들은 유대의 관습대로 다비다의 시체 옆에서 장례의 풍습대로 애곡하고 있는 중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고 다비다의 선행을 간증하기위해 자기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였다는 겁니다. 이 광경을 보고 베드로의 마음이 연민과 기이한 열정으로 뒤덮였을 것입니다.
이렇게나 사람들이 그가 다시 살기를 원하는 구나! 지금 죽어서는 안되고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여인이구나! 그는 정말 그리스도의 참 제자구나!
그러니까 기도에 최선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그저 그런 사람, 죽던지 말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베드로도 의례적으로 기도하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급하게 달려온 것은 교역자의 의무라고 하더라도 다락방에서 본 과부들의 증언과 눈물짓는 그 광경은 베드로의 마음을 뜨겁게 했을 것입니다. 그가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온 맘을 다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열정적인 기도를 한 것이지요.
이처럼 기적은 기적에 합한 삶을 산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물론 전혀 기적에 합하지 않고 산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그를 거꾸러뜨려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서 자기의 사역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이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기적을 입어서 다시 살 확률이 높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삶에서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인 사람이거나 이러면 ‘너는 충분히 고생했으니 여기 와서 영광에 참예해라’ 이렇게 하고 데려 가실 수 있고 아니면 ‘너는 거기에 있어봐야 하는 일도 없으니까 어서 와라’ 이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이 판단하시겠지만 다비다의 동료들은 다비다와 함께한 과부들은 다비다가 아직 자기들 곁에 머물러야 된다고 생각하고 눈물 흘린 것입니다.
5.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당시 유대인들은 무릎 꿇고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주께서 무릎 꿇고 기도한 적이 있고 엘리야도 그렇게 한 적이 있지요? 그건 아주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간절함이 사무침을 표시한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입니다. 이게 제가 무릎을 너무 꿇어서 오른쪽 발이 약간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말은 간절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려 줄려면 살려 주고 아니면 말고’ 이렇게 생각하거나 ‘에이, 그게 설마 되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한다면 절대로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한 후에 베드로는 다비다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선포합니다. 확신에 찬 믿음의 선포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여 믿음을 가지고 선포한 것입니다.
생각나십니까?
그 옛날 주님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탈리다 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헬라어로 적혀 있지만 베드로가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으므로 그가 선포한 말은 ‘타비다 쿰’입니다. 이 말을 할 때 베드로는 예전 스승의 그 선포를 기억한 것입니다. 주님의 그 선포가 오늘 베드로에 의해서 재현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제 이천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믿음에 기초하여 확신에 찬 선포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믿으십시오. 꿈은 이루어집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그는 다시 사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그가 승천하는 것을 보았고 그가 생전에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제자인 그 역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건 결코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뇌가 상해서 눈이 안보이고 몸을 못 움직이고 말을 못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목숨에 관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뇌부분도 역시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에서 보듯이 산 사람도 죽고 다비다의 예에서 보듯이 죽은 자도 살아나고 하나님의 역사, 보다 정확히는 성령의 역사에 제한은 없습니다. 문제는 의심많은 우리 인간들이 이 유한한 뇌를 가지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거지요.
베드로는 그가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죽은 이가 얼마던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믿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주께서 보신 겁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죽은지 얼마 안되는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릴 때와 똑같이 방안에 있는 사람을 다 내보내고 혼자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에도 훤화하며 애곡하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지요.
다비다가 살아나는 것은 베드로에게 유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요 다비다에게 유익이요 다비다의 은혜를 입은 이들에게 유익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베드로에게는 명예가 하나 더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면 베드로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최정점에 위치해 있고 수많은 이적을 행한 자라는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베드로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놀라운 기적의 시험대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모든 이를 다 내보내고 무릎 꿇고 기도했는데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베드로에게 이 무슨 챙피겠습니까?
주님의 수제자로 이미 그 신통력이 천하를 떨어 울리는 사람에게 있어 이는 체면의 심각한 손상이요 교회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지는 일이요 한참 뻗어가는 복음 사역에 큰 실패로 기록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위한 기도를 시작한 것은 그가 그만큼 다비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주위 사람들 특히 과부들의 애통함에 마음이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이란 말이 생각나시나요? 감동은 기적의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마음이 열리고 감동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의 심정에 동화되고 저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고 마음이 열렸을 때 성령께서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감동케 하십니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6.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다비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을 온 욥바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분명히 영광을 돌린 쾌거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 같아도 그 놀라운 주님을 믿고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사실 옛날 욥바니 룻다니 하는 곳은 요즘으로 치면 일개 동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서초동, 목동, 부곡동 이런 곳의 인구는 지금 성경에 나온 욥바의 몇배나 많은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고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온 지역이 떠들썩 하게 되어서 모를 수가 없게 됩니다.
기적이란 것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불쌍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적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일이 일어날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기적을 일으켜서 개인이 치부하고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누구 개인의 이익으로 끝난다면 기적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기적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니 오늘날 사실 더 소원합니다. 병원과 의술이 발전한 오늘, 인간 이성이 극도로 발달하고 이 지상에 신비의 영역이 점점 줄어드는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더 곤고하고 그래서 더 하나님의 신비를 갈구합니다.
우리는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오히려 엘리야와 엘리사같은 선지자를 꿈꿉니다. 인간 이성이 판치는 오늘. 고급 교회, 점잖은 교회를 추구하는 오늘 베드로와 바울을 꿈꿉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결혼하고 세상 속에서 사는 생활인에 불과합니다. 바라는 것은 많고 의욕은 앞서지만 온전히 우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결점 투성이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절대로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내 중심을 보시고 어쩔 수 없는 여건을 이해하시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오늘도 역사하시며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험난하지는 않았지만 다이나믹했습니다. 그 모든 고비 고비마다 인간의 엉터리 지식이, 이기적인 욕망이, 근거없는 자신감이 선택을 망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까지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그 옛날 베드로의 시대에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은 지금도, 오늘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그의 놀라운 역사를 믿습니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믿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모두 다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면 그것이 비록 어설퍼 보인다 해도 내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합니다.
기도합시다.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우리 주님이 이미 이루신 기적을 따라가면 됩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하늘보좌에 상달될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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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만약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본다면 어떻게 들릴까요? 뭐야, 예수님도 아니고, 또 그의 수제자 베드로가 다비다 라는 사람을 살려냈다고? 자꾸 황당한 이야기만 수록되어 있네. 라고 성경책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어요.
이상한 일. 신비한 일. 하지만 저는 그런 일들을 가끔씩 경험합니다. 처음 뵙는 분이 이 곳 블로그까지 찾아와 댓글을 남기고, 응원과 격려를 해줍니다. 그런 날이면 큰 감동을 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마음은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데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면, 열심히 기도하면, 분명히 좋은 일은 찾아온다는 것이 성경책의 가르침이라면, 오늘의 시간을 좀 더 값지게 보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삶이 아무 의미 없이 보이는 날들을 겪을 지라도, 나의 지나친 욕심 보다는,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른 결정을 해가면서 살아간다면, 후회 없이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조금 더 열심히, 조금 더 힘내어 살아봅시다. / 2017.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