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 군대를 물리치다 (역대하32:1-) / 2019년 11월 3일 주일 낮 예배
히스기야가 비록 온 백성들과 더불어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고 큰 기쁨과 엄청난 복락을 누렸지만 언제까지나 마귀의 시험이 없이 행복과 기쁨만 있었던건 아닙니다. 이들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는데 바로 앗수르의 침입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와 같이 믿음이 없다가 한번 잘 믿어보려고 열심을 내면 번개처럼 사탄이 개입해서 시련을 주며 훼방을 놓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열심을 내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만큼 왕성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는 만큼 사탄의 세력이 줄어 들기 때문에 일이 더 늦기 전에 믿는자를 위협해서 넘어뜨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탄이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자의 눈앞에서 각종 무시무시한 일을 행함으로 그들의 간담을 녹게하고 스스로 좌절하여 항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고 과거로 되돌아가게 하고 좌절해서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별명이 훼방자입니다.
오랜 세월 하나님을 떠나 있던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자 사탄의 방해 공작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앗수르의 침략입니다. 앗수르에게 고개를 숙이면 그들은 하나님과 겸하여 앗수르의 신도 함께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자기의 자녀들이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며 다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녀들이 앗수르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에게 멸망했고 앗수르의 군대는 지금 한참 맹위를 떨치며 정복 전쟁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중근동의 패자인 앗수르의 패악을 꺾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앗수르 군대의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 그냥 한번 훅 불면 꺼질 것처럼 위태로운 약소국의 군대가 저들의 눈에 찰 리가 없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침입은 역대기보다는 열왕기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역대기를 보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자세한 기사는 아니지만 유다에 쳐들어온 앗수르 군대가 격퇴되었고 앗수르의 왕이 귀국해서 반란군에게 죽은 것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믿음의 용사가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열왕기에서 앗수르의 침입에 관해서 살펴 보았지만 이제는 역대기의 기록을 따라 다시 한번 앗수르의 침입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앗수르를 기적적으로 격퇴한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역대기의 기자는 열왕기의 기자와는 다른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따라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 1절은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와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은 원문으로는 ‘이 신실한 행위들’로 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을 청소하고 국토의 우상과 제단을 헐고 제사장과 레위인 제도를 다시 확립하고 십일조를 드려 그들을 정착시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하고 그 유월절을 위해 막대한 재물을 기부하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한 신실한 일들 후에 히스기야의 치세에 복락만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그런 신실한 일들 후에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만 믿으면 만사가 다 잘되고 평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하나님은 우리의 신심을 달아보시기 위해 뭔가 시험의 시련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는다는 말이 공허한 빈말인지 참인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까지 합격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본격적인 복이 내려오는데 도저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복을 부어 주십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하십니다.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지금 자기들의 신앙고백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처해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위기처럼 보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증명할 기회를 히스기야에게 부과하신 것입니다. 위기처럼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기회를 볼 것이요 만세반석의 터전을 닦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앗수르의 침입은 사실은 산헤립의 두 번째 침공입니다. 그는 이미 2년전에 유다에 쳐들어 왔다가 히스기야로부터 조공을 받고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조공품이 바로 금 삼십 달란트와 은 삼백 달란트입니다.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인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만 어마어마한 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돈을 구하기위해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의 창고를 탈탈 털었고 그래도 모자라서 성전에 입힌 금을 다 벗겨서 주었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히스기야지만 성전의 금보다 백성들의 목숨이 더 귀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으로 입히지 않아도 하나님은 정금보다 금강석보다 더 빛나는 우리의 믿음을 더 귀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준 돈을 가지고 앗수르는 군대를 더 보충해서 무기도 더 좋게 하고 군량도 더 충실하게 하고 2년 후에 유다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시편의 기사를 인용하면 아마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에게 약속한 친 앗수르정책을 변경한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친 앗수르 정책이란 것은 결국 앗수르의 우상들을 하나님과 겸하여 같이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유다 자손들이 앗수르의 우상들을 섬긴다고 해도 이를 금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모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히스기야가 그걸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는데 앗수르의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패역입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준 돈으로 더 강해진 군대가 이년 후에 다시 쳐들어 온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차 침입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전 699년경으로 봅니다. 1차 침입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돈을 주고 평화를 사려 했지만 이제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의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알레카 메’의 기도가 바로 이차 침입 때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 때문입니다...”로 시작되는 기도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시적인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지만 그건 절대로 항구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미봉책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그냥 잠시 덮어 두는 거지 해결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의뢰해야 합니다.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내어 놓고 그의 도와주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산헤립이 쳐들어 온 것으로만 되어 있지요? 보다 정확히는 산헤립2세를 말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절대로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 고대의 일이라서 도저히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걸 단지 신화나 전설로만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이솝우화처럼 교훈집으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3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합니다. 그런데 그 대책이 바로 예루살렘 성밖의 모든 물근원을 막는 겁니다. 저번에 예루살렘성의 고고학발굴팀이 히스기야가 바위를 뚫고 판 ‘수로와 샘’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걸 말하는가 봅니다.
본래 예루살렘은 고지대에 있고 그 지역에 비가 드물기 때문에 물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민을 위해서 샘과 수로를 만들었는데 기혼의 윗샘물이 앗수르 진영으로 흘러 가는 것을 막고 오히려 이것을 성안으로 끌어 들이도록 수로를 만든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은 매우 튼튼하고 높은 곳에 있으므로 물과 양식만 충분하다면 몇 년동안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군은 식량과 물을 제때 공급받기가 어려워서 결국 포위를 풀고 철수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바로 이런 것을 기대하고 수로의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 성내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고 망대를 높이 쌓고 외성을 쌓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준비하고 백성들을 징집하여 전쟁에 대한 준비를 갖추어 나갑니다. 비록 앗수르 군대가 무섭기는 하지만 히스기야는 더 이상 앗수르 왕에게 바칠 돈도 없고 저들의 우상에게 굴복하지도 않을 겁니다. 자기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그걸 믿어볼 셈입니다. 아마 이사야 선지자도 이런 히스기야를 격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때 앗수르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유다의 영토를 침탈하고 파괴하고 점령했습니다. 일차 침공때는 무려 46개의 성읍을 점령했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만 남아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연설을 참 많이 하는 왕입니다. 7절에 보면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는 앗수르의 군대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말은 신자라고 하면서 막상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은 뒷전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막 머리를 굴리면서 인간을 의지하려고 하지만 솔직히 그런건 다 헛겁니다. 위기의 순간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족은 능력이 모자라서 함께 고민하고 슬퍼해 줄 수는 있어도 그 위기를 이기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전능의 하나님께 간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불가능한 현실을 타파하고 구원을 얻으려면 자비와 전능의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밖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고 해서 두손놓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게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단 앗수르나 애굽의 왕에게 의지하는 것을 빼고 자기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수로를 끊어서 물을 성안으로 흐르게 하고 성벽을 새로 쌓고 외성도 쌓고 망루를 세우고 밀로를 만들고 장군들을 세워서 백성들을 이끌게 하고 그리고 이들을 불러서 위무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저들보다 더 큰 분임을 강조합니다.
일차 침략때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철저히 하나님께만 의존하면서도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은 열심히 합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방어태세를 갖춘다고 해서 앗수르 군대에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삼면이 절벽인 성안에서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공방을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은 좀 무책임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야에서 앗수르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을 가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마 마병을 키우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이를 금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기병이 없는 유다군이 기병과 전차를 가지고 있는 앗수르 군대와 벌판에서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성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수성을 하려는 겁니다.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최대한 견디도록 인간이 할 도리는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조금 더 견디는 정도?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깁니다. 그가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일을 하게 하셔서 우리의 준비가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의 일을 다하고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전능하심을 의뢰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천하를 발아래 정복한 앗수르에게 약소국 유다가 홀로 대항 한다는게 얼마나 같잖게 여겨질까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기위해 앗수르의 우상을 거부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앗수르의 보복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문제가 생긴게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한 이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의 편에서서 후퇴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벗겨낼 금도 없습니다. 창고는 텅텅 비었습니다. 설마 백성들의 것을 뺏들어서 앗수르왕에게 주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가만 있을까요? 원망하고 저주하겠지요?
돈을 가지고 적을 물리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니할말로 힘으로 뺏어버리면 되는데 뭣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힘으로 뺏게 되면 오히려 더 많이 가질 수 있는데요? 돈을 가지고 협상을 하려고 해도 싸우면 자기들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혹 질 수도 있다고 적어도 귀찮다고 생각할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 한심합니다.
지금 미국을 보세요. 이들은 국내에 생산공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무기만드는 공장은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최강의 군대가 있습니다. 이걸로 이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군대가 뒷받침되지 않은 달러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히스기야가 지킬 힘이 없는 보물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코 앗수르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일차 때와 같이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저들에 맞서기로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8절에 “저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그래요, 지상의 그 누가 있어 하나님의 능한 팔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히 우리 편인 하나님 때문에 감사합니다. 왜냐면 든든하니까요. 결코 패배할 수 없기 때문에요. 그러므로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그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사람은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전능의 하나님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든든합니다.
얼마후에 라기스에 도달한 산헤립이 사자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항복하도록 말을 전합니다. 앗수르의 침입을 예상하고 꾸준히 준비해 왔지만 막상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 강력한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그 전에 미리 항복하라고 사자를 보낸 겁니다.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깟 하나님을 안섬기면 안될까? 그 강력한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게 나에게 더 좋지 않을까? 어차피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굳이 우리가 히스기야와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죽어야 할까?
오만 생각이 다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예루살렘을 탈출해서 어디 인적이 없는 사막 깊숙한 곳으로 도망을 가야 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런데 사막에서 어떻게 먹고 살겠나요? 다른 곳으로 도망가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말이 서로 싸웁니다. 이럴까 저럴까? 나의 구원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당시의 백성노릇도 정말이지 힘들었을 법합니다. 허구헌날 전쟁이 터지고 전쟁이 터지면 모든 백성들이 징집되어서 죽을판 살판 싸워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요?
게다가 그 전쟁의 결실은 자기들에게 전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패했을 때 그 피해는 오로지 자기들의 몫입니다. 기가 찹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왕이나 귀족을 존경하고 따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처벌이 무서워서 말을 안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죽이고 싶을 겁니다.
평소에는 온갖 호의호식에 갑질에 위세는 다 떨고 막상 싸울 때는 뒤로 쏙 빠져서 간만 보다가 온갖 과실은 다 차지합니다. 게다가 져도 귀족들이나 왕들은 그래도 일정한 대접은 받습니다. 정말이지 기가 찹니다.
그런데 여기 보세요. 8절 끝에 “백성이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세상에 눈에 보이는 그 엄청난 위협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말을 믿고 안심했답니다. 이건 보통은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얼마나 당시 백성들에게 믿음직한 왕이었는지, 신뢰를 받고 있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요, 지도자와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면 대부분의 문제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지도자가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어간다면 효과는 더 대단할 것입니다. 그들의 지향점이 하나님이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게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 고매한 인품과 성실함 청렴함 충성스러움 지혜로움 그리고 인자함 같은 덕목들로 인해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직분자인데 바깥에서는 욕만 듣는 사람이라면 뭔가 잘못된 겁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썼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강약이 눈에 훤히 보임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이길 것이라고 하는 히스기야의 말이 얼마나 말이 안되게 보일까요?
그래도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성령의 감동하심입니다. 회중이 하나 되어 지도자를 따릅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당연히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전능하심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울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믿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안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믿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안심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상대방이 말할 때 그가 진심으로 믿고 말하는지 자기도 믿지 않지만 의례히 그렇게 말해야 하니까 말하는지 잘 압니다. 들려오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눈빛과 몸짓이 그가 제대로 믿는지 아닌지를 드러냅니다. 마찬가지로 믿지 않고 설교하는 목사의 설교가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한 말입니까?
라기스를 점령한 산헤립은 여기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사람을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하고 결국 항복하게 하려고 합니다. 라기스는 예루살렘 남서50km지점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러니 이를 듣는 백성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항복하지 않으면 쳐들어 옵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생매장됩니다. 성이 함락된다면. 정말이지 끔직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섭습니다. 어째야 합니까?
지금 여러 명의 앗수르인들이 항복을 권유하러 왔습니다. 우리가 그 중에서 잘 아는 사람이 랍사게입니다. 들어 보셨지요? 엄청나게 잔인한 사람입니다.
산헤립은 편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면 부정합니다. 이때까지 어떤 신도 앗수르의 손아귀에서 자기 민족을 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괜히 헛된 기대를 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겁니다. 이들은 지금 항복을 의도하기 보다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흔들려고 합니다.
사실상 예루살렘성은 지형적인 특징 때문에 한순간에 함락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겨우 한면만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자체가 해발 800고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 작정하고 싸운다면 적어도 몇 년은 치열하게 공방을 벌여야 합니다. 이때는 대부분 공격하는 쪽이 불리합니다. 군인들이 엄청나게 죽어 나갈겁니다.
이전에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점령할 때도 약4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을까요? 이제 예루살렘도 그렇게 된다면 또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겁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미리 이스라엘 사람들을 낙담시키려는 심리전을 펼치는 겁니다.
어떤 신도 앗수르의 신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헛된 기대를 하지 마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결코 우리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히스기야가 무슨 말로 너희를 안심시키려 해도 믿지 마라. 다 거짓말이다. 그런 식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앗수르의 대군이 쳐들어 와 있습니다. 이들 군대는 적어도 185,000명이상 이랍니다. 그냥 농사짓던 백성들을 갑자기 징집해서 데리고 온게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매년 정복 전쟁을 펼쳤기에 실전경험도 풍부하고 사기도 충천합니다.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항복을 권유하러 왔습니다. 말이 권유지 협박이요 공갈입니다. 백성들은 성안에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지금 유다 사람들은 히스기야와 군대를 믿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고 히스기야와 백성들의 사이를 불신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모든 의욕을 잃고 포기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요 이미 유대인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큰 복을 주신 것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들 사이에 일치와 평안을 주셨고 큰 기쁨을 주신 것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위험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헤립은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에 “예루살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 무엇을 의뢰하느냐” 의뢰한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말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의뢰를 하러 어디로 달려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이란 말은 인격체가 아니라 비인격체 즉 물건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산헤립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이 자기네의 우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말도 못하고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조각 덩어리,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직도 그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우리의 영성이 점점 약하여져서 하나님의 숨결을 제대로 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말은 너희를 꾀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여호와를 의지하면 결국 주리고 목말라서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국론을 분열시켜서 자중지란으로 손들고 나오도록 꾀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예루살렘주민들을 낙담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이처럼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미리 낙담하고 실망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에게 무릎꿇게 합니다. 그러나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를 공략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의자녀를 직접 손대지 못하기에 위협하고 협박하고 공포심을 갖게 해서 알아서 항복하게 하려는 얄팍한 수입니다.
그리고 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죽음 이런 것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육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고 직접적인 위협이 됩니다.
게다가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조치로 하나님을 분노케 해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벌을 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한 개혁을 빌미로 오히려 하나님의 노를 촉발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선동하고 있습니다. 정치꾼들이 주로 이런 선동을 잘하는데 이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산헤립도 역시 거짓으로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 산헤립은 “이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하여 버리고”라고 말함으로 마치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실을 왜곡합니다. 물론 히스기야는 산당을 폐하고 제단들을 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중심의 제사를 확립하려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뿐입니다. 게다가 이런 산당과 제단은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 외에 각종 우상을 섬기는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산헤립의 말은 절대로 진실이 아닙니다.
사실 산헤립의 말은 이렇습니다. 왜 꼭 정해진 장소에서 왜 꼭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 얼마든지 너희들 마음대로 편리한 장소에서 예배할 수 있지 않느냐?
예,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걸 우상숭배자인 산헤립이 비난한다는 것은 정말 웃겨도 보통 웃기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산헤립은 온갖 것을 가지고 왕과 백성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발악을 합니다.
정당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고 종교개혁을 완수한 히스기야의 행위는 역대기의 저자가 볼 때에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칭찬받을 행동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이를 왜곡해서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반대한 것처럼 비틀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설령 그가 진정한 신이라고 해도 히스기야를 도와줄 리가 없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이 산헤립이란 사람은 보면 정말이지 교활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는 것은 예루살렘을 함락하는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셈입니다. 그냥 밀어버리면 될터인데 그게 어려우니까 심리전을 꾀해서 성을 함락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사람들은 자기네 신이 약해서 상대방 나라에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 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기네가 그렇게 근동의 패자가 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너네 신이 아무리 힘을 낸다고 해도 결코 너희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히스기야가 백성들을 불러서 한 이야기를 들었나 봅니다. 그 하나님, 너희가 그렇게나 의지하고 믿는 여호와가 결코 너희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를들어 설명합니다. 이제까지 열방의 신들이 결코 그 나라를 구하지 못했지 않느냐? 그러니 당연히 이번에도 앗수르 군대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헤립이 모르는게 있습니다. 열방의 신이란게 결국은 무생명인 우상조각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앗수르의 침공에서 돕지 못했지만 하나님 여호와는 절대로 인간이 만든 조각 덩어리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유일한 신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온갖 것들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신은 오직 한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으로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다른 것은 신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행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14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 하나님’이란 말은 원문에서는 ‘너희의 신들’이란 뜻입니다. ‘엘로힘’은 ‘신들’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단수입니다. 하나님을 더 장엄하게 표현하는 장엄복수형식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인데 어마어마하게 장엄하고 능력이 많은 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엘로헤켐’이라고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상관없이 ‘여러 신들’을 말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왜곡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유다인들은 지금 여러 잡신들을 섬기는게 아닙니다. 유일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한분 만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산헤립은 지금 유대인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으로 단정 짓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 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협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도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그는 온 천지의 주재요 천하 만민을 만드신 분이시지만 그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그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고 또 우리가 그에게서 가장 사랑받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거짓선동에 속아 넘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가장 잘 아는데 누가 뭐라고 헛소리해도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 거짓 선동에 넘어가서 동요하고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를 아버지로 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강하고 신실한 분을 보호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미혹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헤립은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그 신하들 역시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그들은 단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낙망시켜서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바라서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을 비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을 비방한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를 비방한 지도자가 어떤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산헤립은 끝장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비방한 그 순간에 그의 운명은 이미 멸망으로 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는 이미 사형을 판결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편지로 비방하고 소리높여 비방합니다. 전략적 목표인 예루살렘 성의 항복을 위해서 비방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하나님을 비방할 때 이미 그들의 운명을 결정되어 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하고 같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답니다.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열렬히 기도했으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가 훼방한 편지와 말은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가 아무리 비방해도 하나님이 그의 비방에 두려워하거나 공포를 느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반응은 진노입니다.
한 천사를 보내어서 앗수르 군대를 쳤다고 합니다. 185000의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진멸되었습니다. 아마 앗수르 군대는 이보다는 많았던 듯합니다. 그러니까 왕은 살아서 철수를 했지요.
어떤 식의 재앙이 내렸는지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하룻밤 사이에 진멸시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죽음의 천사가 직접 쳐서 죽였다? 어떤 이들은 전염병으로 이들이 죽었다 같은 추측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사실은 앗수르 군대 185000이 죽었고 앗수르 군대가 본국으로 철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앗수르의 군대를 이겨낼 군대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근동의 패자였고 인근에 이들의 전진을 막을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 마저 이들의 속국이었습니다. 동족이었던 이스라엘도 망했고 이스라엘보다 더 큰 아람도 망했습니다. 국제무역으로 부를 독점했던 두로 오늘날의 레바논도 망했습니다. 그런데 약소국 유다가 이겨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다 놀라고 찬탄했습니다.
바벨론의 왕은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군사동맹을 추진하였습니다. 게다가 산헤립은 본국으로 철수해서 자기네 우상의 신전에서 제사하다가 자식들의 반란으로 칼에 찔려 죽습니다. 하나님을 겁도 없이 비방하고 깔보다가 자기의 목숨과 군대와 왕좌까지 잃었던 것입니다.
이일 후에 여러 사람들이 놀라서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제사한 것입니다. 그 어떤 우상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앗수르 군대를 패망시키고 그 왕을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장난으로도 하나님을 비방해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욕하고 까분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집안을 절딴 내려는 철부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또 히스기야에게도 각 나라의 사람들이 와서 보물을 드렸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천하만방에서 뛰어나게 하시고 영광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앗수르의 성장세가 꺾입니다. 그리고 얼마후에 앗수르는 바벨론의 말발굽에 짖밟히고 망합니다. 그들이 당장의 성세만을 믿고 하나님을 비방했기에 하나님은 앗수르를 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세상 나라들이 볼 때 우리가 얼마나 만만하겠나요? 어디에 붙었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작은 영토를 가지고 인구는 많아서 저 사람들이 저 작은 땅에서 어떻게 먹고 살까를 걱정해야 되는 나라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번영하고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자들 타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막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요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이들을 그냥 두시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심과 전지전능한 위대한 창조주이심을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저 강력한 앗수르 군대의 공격을 이겨낸 것은 굳건한 성벽도 아니고 마병의 강성함도 아니고 나라의 부유함도 아니었습니다. 재물도 다 떨어지고 땅은 거의 다 빼앗겨서 소출도 기대할 것이 없고 산 위에 고립된 성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면서 기도한 히스기야의 기도는 응답받았습니다. 천하 열국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시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자녀들이 자기의 품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즐겨 하시기에 그 누구도 평안을 위협하는 자를 그냥 두고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무어라 무어라 인간들의 혀에 오르내리는 값싼 분이 아닙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십니다.
영원히 그와 함께 하시는, 승리의 개가를 울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군대요 신실한 믿음의 용사가 되시기를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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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홍 목사님의 명설교 입니다. 앗수르가 물러나는 기적의 순간입니다.
총균쇠라는 책에 의하면 역사과학적 접근이 있다고 합니다. 정밀하게 왜 그런지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왜 앗수르는 그 당시 세계를 정복한 거대한 제국이었으나, 그 작은 유다 앞에서 몰살시키지 못하였고,
왜 오늘날 유대인은 살아남았으며, 또 유대인은 지혜로운 이가 많은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가 개입하시면, 살아남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 한국 기독교 리더들이 8월 18일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복종 대신, 자꾸 대들고 반역하는 하나님 최고라는 기독교는 눈에 가시입니다. 감히 일본 제국 천황 앞에?
우리 역사는 알고 있습니다. 그 3일을 앞두고, 8월 15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독립을 위해 노력했기에, 한국은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또한, 오히려 어리석은 일본 지도자의 오만함으로 인해서, 엄청난 일본인들이 절멸당하며 목숨을 잃었습니다.
목사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나라는 그가 어떤 강대국일지라도, 패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컨대 동전에 조차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새겨넣은 그 나라는 흥하게 됩니다.
올바른 기독교가 서 있는 나라는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그리고, 종교가 타락하고, 도덕성이 몰락한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정직 대신에 거짓이 넘쳐나고, 성실 대신에 한방이 퍼져가고, 사랑 대신에 오만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나라는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음을 배웁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하나님 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지켜주세요. 반드시 교회가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목사님들을 장로님들을 집사님들을 성도님들을 하나님의 선한 삶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세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게 아니라, 남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도록.
하나님 제발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 2019. 가을에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