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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누가복음2:21-35)

 

오늘은 성탄 주일입니다. 성탄절을 정확하게 삼일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약간 시간이 다르기는 하지만 시므온의 기도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는것도 뜻깊은 성탄절을 보내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정확히 주께서 탄생하시고 사십일이 지난날입니다. 할례는 생후 8일째에 하지만 산모의 정결례를 하기위해서는 출산후 40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마리아의 정결례를 할 때가 되어서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시므온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유대의 율법상 40일후에 하게 되어 있는 정결례도 그냥 집에서 대강하고 말지 굳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그 멀고 높은 산꼭대기 도시 예루살렘까지 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들도 매우 신앙이 돈독했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동학대고 인권이고 어쩌고 하면서 펄쩍 뛸 일이기는 합니다. 산모를 제대로 산후조리도 하지 않고 멀리까지 가게 하다니!

 

그런데 할례라는 것은 그가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완성하러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데 이제 그 첫 번째 단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처음 피흘림이라고도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합니다. 그는 이제 태어난지 8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죽으시기 위한 첫 번째 단계를 밟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우리 주님의 생애 33년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한가지 목표를 달성하기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기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가장 큰 부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아이의 태어남을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큰 부자라도 남의 아이가 태어난게 나에겐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이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내가 그 아이의 태어남을 축하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지요. 그러나 그가 만일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라서 자기 아이의 탄생 때문에 기뻐서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내가 충분히 그 아이의 탄생을 기뻐할 이유가 됩니다. 사장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나에게 보너스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왕이 아이를 낳아서 내가 기쁜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태어남으로 왕이 나라에 대사면령을 내려서 죄수를 석방하고 전과 기록을 말소하고 자격정지를 취소해서 복권을 시키고 그런 일을 한다면 그 혜택을 본 죄인들과 가족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요, 뭔가 그 아이의 탄생으로 사람에게 유익이 있어야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할 당위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나심을 우리가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이유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셨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의 성탄은 나에게 새로운 영생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이 아니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피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기 때문에 내가 그의 나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값없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금화를 낼 필요도 없고, 천개의 공덕탑을 세울 필요도 없고, 만명으로부터 사인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십자가 피가 나를 위한 것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내 죄로 인하여 그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 정도면 거저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은 쉽습니다. 죄짓지 않는다 인생이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정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하하, 이 세상에 죄없는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오심을 우리가 그렇게나 열광적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그의 나심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면서 우리 주님의 이름이 예수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른다면 하나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들릴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사실은 아이의 부모가 지은 것이 아니라 천사의 계시로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천사의 계시라고 해도 그 말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더 나아 보이는 이름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 온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냥 생명이 주어졌기에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이루고자 하시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요? 이번 성탄절에는 그것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자, 그런데 23절을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습니다. 뭐냐면 바로 이겁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음, 전혀 의미심장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그냥 당연한 구절입니다. 의례적으로 들어간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걸 원문으로 보면 약간 다릅니다. 뭐냐면 이렇습니다. “이 성경구절은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권위는 아직도 우리를 구속하므로 그 율법에 따라”이게 바로 원문 그대로의 해석입니다.

 

제가 이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요, 성경구절은 비록 아주 오래전에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구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경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아니 행동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뜻을 우리가 새겨야 합니다.

 

주님의 나심과 순종과 죽으심과 부활을 기록한 성경은 오늘 성탄을 맞이한 우리에게 구속력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경을 따릅니다. 주님이 말씀을 그대로 따르며 그의 모든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장자를 거룩하게 구별하는 규례는 출애굽시에 장자를 쳐서 죽일때에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사자가 넘어간 처음 유월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규정은 유효한데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의 숫자는 22270명이었답니다. 그런데 이 장자들을 대속하기위해 레위인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봉사하게 하였는데 대속할 수 없는 270명이 남습니다.그래서 이 사람들은 대속의 제물로 각 사람당 5세겔씩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었고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장자들이 5세겔을 드리도록 되었답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에 관한 규례는 매우 소중하고 오래된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 규례대로 성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산모의 정결례도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산비둘기 한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걸 보면서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을 준수하는 신앙인이기는 했지만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에서 비둘기를 드리는 이들은 가장 가난한 이들입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 중에서 비둘기니까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래요, 우리 주님은 구유에 누우셨고 이스라엘에서 매우 가난한 자의 아들이었고 스스로도 집하나 없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가난한 자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친구를 맺고 있나요?

 

그런데 이때 제사하러 올라간 이때 갑자기 시므온이란 사람을 만나게됩니다. 성경본문은 갑자기 장면을 변화하여 시므온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25절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사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주어가 되어서 나옵니다. 나사렛 사람이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원래부터 예루살렘에 살았던 시므온을 만난 겁니다.

 

시므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제 드디어 아기 예수와 시므온이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만난 모양입니다. 성경은 시므온에 대해서 의롭고 경건하다고 합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의 법을 준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생활은 형편없는데 하나님만 잘 믿는다고(?)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게 아닙니다. 생활은 온통 죄악투성이인데 헌금 잘하고 예배에 안 빠지고 교회의 직분을 맡아서 봉사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의롭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의로우려면 사람의 법도 잘 지켜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경건한’ 이란 말은 ‘종교적 의무에 투철한’ 또는 ‘헌신한’ 이란 뜻입니다. 성경이 시므온을 의롭고 경건하다고 표현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앞에 전혀 어떤 흠도 없었다는건 아닙니다. 다만 그는 정직하게 신앙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했다는 뜻입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려고 노력한 그에게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말은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표현입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그에게 성령이 그 위에 계시답니다.

 

성령이 한두번만 그에게 계신게 아니라 시므온의 위에 계속해서 계신다는 말인데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지시를 받은 그가 막상 그리스도를 보고 난 다음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저같으면 ‘아! 이제 나도 죽을 때가 되었구나!’

 

말로는 이럴 것 같습니다. “아, 지겹다. 빨리 그리스도를 보고 죽어야지” 이러겠지만 속으론 ‘이 따뜻한 햇빛과 소고기의 육즙 그리고 과일의 풍미를 맛보고 있는데 이걸 두고 죽으려니 너무 아쉬워’ 이러지 않을까요?

 

우리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말로는 어서 속히 주님의 재림이 오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 날이 되면 좀 슬플 것 같지 않습니까? ‘아직 이 세상에서 해보지 못한게 얼마나 많은데!’ 그렇지 않다고요? 주님을 만날 기쁨에 그런것들은 다 묻혀 버린다고요? 글쎄요, 좋습니다.

 

성경은 시므온이 예수를 만난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나 일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고대해온 시므온에게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정결례를 드리런 온 아기 예수를 만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의로,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만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불가능합니다.

 

예배당이라는 공간에 앉아 있다고 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열리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여기 나와서 진실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나심을 축하할 수 있는것도 바로 주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년도에 우리와 함께 하게된 **형제가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성탄절을 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의 성령이 인도하셔서 갑자기 퇴원할 수 있게 되어서 우리와 함께 성탄을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믿을 수 없을만큼 기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있는 우리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여기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궁벽한 골짜기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건 보통의 이끄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여기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나심을 축하하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시므온의 머리위에 성령이 머무셨다는 것은 그가 계속해서 일생을 성령과 동행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성령과 함께라면 이 세상이 얼마나 우습게 여겨질까요? 이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것들도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동행하고 계시는 성령께 간구하기만 하면 그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자신만만입니다.

 

막상 성전에 가서도 예수를 단번에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즘도 큰 교회에서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나와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 나갔는지 모르고 서로 만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쉽상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시므온의 만남은 성령의 이끄심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만남도 마찬자기로 성령이 이끄셔서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어쩌면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한페이지를 장식할 큰 사건, 기념비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이기 때문에 우리의 발걸음이 이 세상에 빛과 복음을 가져오는 믿음의 발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믿음의 성도들이 함께 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 적은 모임이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모임이 될 것을 제가 믿습니다.

 

우리가 걷는 곳은 어디나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서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어둠의 세력이 침노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는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나라 전진기지입니다. 일상에 지치고 힘든 신자들의 휴식처이지 우리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우리 주의 성령이 우리 위에 항상 거하십니다.

 

27절의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에는 약간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말속에 있는 뜻을 참조하여 새롭게 풀이한다면 ‘그의 위에 항상 머물러 계신 그 성령의 인도로’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으려고 한다면 성령님과 친해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가 막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성령님과 소원하다가 무슨 일만 생기면 엎어져서 눈물 흘린다고 하면 얼마나 웃으시겠나요? 뭐 그는 그래도 자비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는 하겠지만 정말 낯부끄럽지 않을까요? 참고로 성령과 함께 한다는 것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며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항상 하나님과 영교함을 말합니다. 영교는 기도로 하는 거지요.

 

음, 시므온의 기도 첫마디가 심상치 않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 사람 은근히 죽음에 신경쓰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나 안 죽을려고 한게 아니라 죽음에 개의치않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어진 말이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재라는 말은 주인, 소유주라는 말인데 우리가 보통 주라고 부르는 퀴리오스보다 훨씬 더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걸 떠나서 나는 주인의 소유물이라고 하는 인식이 바탕이 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자유민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며 종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십니까?

말씀으로 계시로 인도하시지요. 성령 하나님이 우리위에 머물러 계실 때 우리가 그 성령의 인도를 받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평생의 소원을 이루고 여한이 없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일평생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성령이 지시하신 일을 이루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겁니다. 우리가 종종 노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한다면 내가 소원이 없다” 또는 “이제 더는 여한이 없다”하는 말을 듣습니다. 스므온은 일평생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메시야를 고대한 것입니다. 그런그의 어투는 이제 그가 일생을 기다린 소원을 이루었으므로 여한이 없이 하나님앞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의 심정이 엿보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합니다. 자기의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유대의 구원이라는 숙원을 본 것입니다. 물론 그는 아직 어린 아기 예수를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아기를 본 순간 그는 이 아이로 말미암아 주의 구원이 임할 것을 확신하고 찬양한 것입니다.

 

시므온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 인류를 대속할 구원 사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수 자체를 구원으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구원그 자체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곧 그를 소유하는 것이고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오심을 온 맘을 다해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성경본문을 다시 자세히보면 25절에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두손에 안고 기도하기를 “이는 만민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영광이 되지만 그 구원의 빛은 분명히 만민과 이방 앞에 미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되는 사람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유대인만을 구원하시고 유대인의 나라를 세워서 로마를 물리치는 그런 국수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므온 역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의 입에서 나온 기도소리는 분명히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기들이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며 그리스도의 나심이 이스라엘에 영광이 된다는 말은 들어 있어도 그리스도를 ‘유대인만의’ 구원으로 상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천하 만민을 위하여 천하 온 족속을 구원하시기위해 빛으로 오신 분이기에 우리가 오늘 여기에 모여 아기 예수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33절에 이 말은 그 부모가 놀랍게 여기더라고 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기이히 여겼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원어적으로 분석하면 기이히 여긴 사람은 부모중에서 아버지 요셉입니다.

 

사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의심을 가지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시므온이 또 아기 예수를 안고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오심과 우리를 위한 십자가 대속의 피흘림에 대해서 이제껏 정말 많이 들어 왔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런 말을 들은게 일이십번이 아니라 수백번도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면 놀랍게 여깁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해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육체를 가진 흙덩이가 아니라 영이시며 무한하고 전능한 존재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탄생에 대해서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이 모두에게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믿어진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마음이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을 성탄주일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축하나는 주일이지요. 그래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한 말은 생략합시다. 성탄절은 그냥 마냥 기쁘기만 하고 싶습니다. 인생사에 온갖 슬프고 어렵고 더러운 일들이 많지만 오늘 성탄주일만은 그런것들은 다 내비두고 오직 좋은 것 기쁜것만 생각합시다.

 

시므온의 말처럼 이제 우리 앞에 천하 만민을 위한 구원의 빛이 비추이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생각하는건데 성탄절이 연말이 되어가지고 뭔가 묘한 아쉬움과 설레임 그리고 희망을 더 주는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일년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성탄의 기쁨을 더 많이 누리시기를 바라고 아직 마음에 미흡한게 있다면 새해가 오기전에 다 풀고 새해에는 정말이지 희망찬 새출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민앞에 빛이 비춰지지요? 새해의빛이 찬란하게 빛이 남과 동시에 우리네 신앙도 우리네 희망도 더 밝고 뜨겁게 빛나고 불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과 우리의 앞날에 우리교회이 앞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밝은 빛이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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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참 신기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월요일이나 꼬박꼬박 올리면 블로그도 더 글이 잘 써지고...

이번처럼 사정이 생겨서 설교를 토요일 오후 맨 마지막 시간에 올리게 된 경우, 글이 잘 써지지 않습니다...

다르게 써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나머지 일들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다는 게 그리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해 나갈 때,

우리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구체적으로 다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삶을 향한 치열한 열정이 살아숨쉬기를 소망합니다.

- 2019년을 마무리 하며 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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