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신과 의사 스튜어트 브라운 박사님의 책을 읽고 있다. 놀이 예찬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러한 구절이 있다. "일이나 여러 가지 책임은 놀이 같은 건 집어치우라고 요구할 때가 많다. 그러나 놀이가 장기적으로 결핍되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낙관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쾌감이나 지속적인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어머님의 (폐쇄병동을 포함한) 중증 바이폴라 정신장애 간병은 내게 매우 힘든 과제였고, 즐거움이 없는 긴 생활이 강요되었다. 인간에게 낙관성과 기쁨이 사라지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과연 있을까? 나는 견디고, 또 견디다가, 한계치를 넘는 고통과, 결코 나아지지 않는 절망 앞에서, 종합병원 옥상까지 천천히 발걸음을 향했다. 우연히 내 모습이 병원 직원에게 발견되었고, 그 옥상에서 나는 경찰 분들에게 긴급 구조되었다. 간병을 하다가 보호자인 내가 쓰러져 버렸고, 삶의 희망을 되찾기까지 제법 입원 생활을 경험했다. 어쨌든 살아남았다.
나는 병상에서 건강을 힘겹게 회복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온라인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우)"를 플레이 하였다. 재밌었다. 며칠인가 무척 열심히 놀았는데, 안전지역을 벗어나 중립지역에 들어갔다가, 적군에게 갑자기 얻어맞고 캐릭터가 누워버렸다.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그랬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우리 삶에 불행한 일이 쳐들어 올 수 있었다. (와우게임은 거기서 하차했다.)
그 후, 종종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의 여러 책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아무리 바빠도 간단한 리듬 게임은 여전히 즐기고 있다. 다시 스튜어트 브라운 의학박사님은 말한다. "인간은 계속 놀이를 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다." 이를 작가 스티븐 킹 식으로 쓴다면 이렇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게는 뇌를 먹는 좀비가 된다." 멍게의 사례처럼, 탐험할 욕구가 없는 생명체는 자기 뇌의 신경절을 먹어치운다는 것. 놀라운 통찰력이 담겨 있는 대목이다.
10대 때부터, 나는 병약했고, 그 덕분에 강제 게이머였다. 걸을 수 없는 지독한 생활이 길었기에, 학업도 중단되었고, 그 소년 시절을 슈퍼로봇대전, 파이어엠블렘, 파이널판타지, 드래곤퀘스트 같은 다양한 롤플레잉 게임들을 하면서 보냈다. 90년대 명작 고전게임들은 어린 나에게 충분히 어려웠고, 그것이 커다란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다. 아픈 아이를 불쌍히 여기어, 랑그릿사, 샤이닝포스 같은 게임을 직접 사다주시던 다정하던 어머니께서, 지금은 정신장애에 치매까지 오시다니... 비정한 현실은 가슴이 미어져 오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이 상황에 이제 적응해 나가야 한다. 그래. 또 다시 종합병원 옥상에 함부로 올라가서야 되겠는가.
윤홍균 의사 선생님 식으로 쓴다면, 환경이 좋지 않을 때는 건강한 마음으로 무장한 자신이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치매가 낫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지난 주 뉴스에서는, 간병하다가 숨진 아들 옆에서 치매 노모가 (우리 아들 살아있다며)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나의 어려운 환경은 새해가 밝았다고 해서, 좀처럼 좋아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여전히 무겁게 매일 마주해야 할 터.
그러므로, 나는 절망이라는 적군에게 선전포고를 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해야하는 일을 다한 후에는, 재밌게 놀 것이다. 밥벌이를 하고, 간병을 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모험을 떠날 것이다. 어제 라디오 사연처럼, 근사한 이집트 여행 같은 것이 아닐지라도,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소환해서, 나를 건강한 마음으로 힘차게 무장시킬 것이다. 용맹한 용자가 되어서, 이번에야 말로, 현실의 무게에 쓰러지지 않는, 두 번째 주어진 인생을 감사와 기쁨으로 물들이며 하루하루 살테다. / 2020년 1월. 새해 첫 글.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