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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2 (디도서1:7-9)

 

지난주는5절과 6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7절부터 9절까지를 살펴봅니다. 우리가 편의상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지만 내용상 두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번주도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땅에 남겨두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은 목사의 조건에 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성도에게 하신 요구조건이며 또 다른말로는 우리가 행해야할 일 ,즉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될 수도 있는 조건들입니다. 왜냐면 이 조건을 실천하다보면 어느듯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장로나 감독이나 같은 말입니다. 하나는 유대 배경 하나는 헬라 배경인 것만 다르지 똑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감독이 일반 목사보다 상위개념인 것은 현대에 와서이지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감독과 비견되는 말이 주교입니다. 감리교에서 아직 감독이란 말을 사용하고 이건 주교하고 비슷합니다.

 

천주교의 주교는 그 도시나 교구 교회의 감독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감독은 내용상 앞의 장로하고 똑같은 개념입니다. 왜냐면 장로와 감독으로 같은 직위를 약간 다른 말로 바꾸어서 언급하는게 바울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1.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오늘 본문을 보면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장로 부분과 감독 부분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헬라 원문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본문은 “왜냐하면~ 때문이다” 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감독은 ~하는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장로의 조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바뀌면 우리는 장로나 감독이나 같은 직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바울은 같은 대상을 두가지 단어로 바꾸어서 기술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이분의 글쓰기 습관같은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장로나 감독이나 같은 말이라는 겁니다.

 

먼저 장로, 감독의 조건을 들기 전에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는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감독이란 말에는 목사가 해야 할 사역의 원칙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감독이란 말은 ‘하나님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기의 백성들을 돌본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 즉 목사는 성도들을 돌보고 어려움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상 지도자처럼 군림하고 대접받고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진리 이외의 측면에서 자기 교회 교인들과 싸우는 감독이라면 정말이지 황당한 일입니다. 그런 분들은 미안하지만 목사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한때 서울의 모 대형교회 목사가 4억짜리 외제차를 교회 지상 주차장에 대놨다가 뉴스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지상 주차장에는 그 차만 주차가 되어 있고 나머지 차는 모두 지하에 있어서 더 문제가 되었습니다.

 

목사는 외제차를 타면 안 되냐고 묻는다면 안 되는건 아닌데 자제해야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4억이나 가는 스포츠카를 연로하신 목사님이 탄다는게 좀. 세상의 감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감독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잘 보살펴야 하는 자리이며 다른 한편으론 섬기는 자라야 합니다.

 

선거에서 정치꾼들이 말하는 나라의 공복, 즉 나라의 공동 노예라는 말하고는 전혀 다른 순수한 의미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음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님’은 아닙니다. 물론 좋은 의미로 하신 말씀이란건 알지만 듣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성전노예사역자는 아닙니다.

 

4억짜리 스포츠카를 살 돈이 있다면 마땅히 삼천만원 이하의 차로 바꾸고 남는 돈으로 어려움에 처한 교우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목사의 할 일입니다. 그건 당신이 차를 안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다른 이들은 차를 좋아 한다구요. 좋습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너무 과합니다. 적절하지 않습니다.

 

자 본문은 이어집니다. 감독은 청지기인데 그냥 청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청지기가 재물을 관리하고 나누고 집행하지만 자기 것이 아닙니다. 청지기는 그 집의 재산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자인데 하나님의 집은 교회고 교회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떡을 다루는 이가 손에 떡고물이 묻는게 당연합니다. 추수할 때 연자 맷돌을 돌리는 소에게 마개를 씌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맷돌을 돌리면서 가끔씩 추수곡식을 먹습니다. 그래요, 그것까지 못하게 막는다면 너무 심하지요? 그러나 적정 한도라는게 있습니다. 목사 본연의 자세를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이해해도 하나님은 이해하시지 않습니다. 그 모든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적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치하지 않고 검소한 가운데서 자기가 맡은 사명을 충심으로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남의 돈을 가지고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문제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만일 목사가 호화로운 삶을 산다면 남의 돈을 가지고 착복한 자와 같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습니다.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자세로 임해도 하나님은 결코 자기의 자녀를 굶기시거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배를 곯고 자녀들 공부를 못 시키고 살 집이 없고 탈 차가 없고 그 정도는 아닙니다. 비록 여력이 있어도 분수에 지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돈이 좋으면 목사 하지 마라’는 말이 거의 관용어처럼 입에 붙었었는데 이것도 세월에 따라 변하는 모양입니다. 자중해야 합니다. 걱정되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가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겁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말이 좋아 청지기지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는 종. 항상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서 재물이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되고 그 가정을 잘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아니라 원 소유주인 주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님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자녀들 특히 아픈 손가락들을 잘 보살피는 것입니다. 건강한 손가락도 역시 살펴야 하지만 아픈 손가락에 더 관심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래서 앞으로 나올 조건은 모두 하나님의 집 청지기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2.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책망할 것이 없고는 어디서 많이 본 조건이지요? 그래요. 6절에도 나왔습니다.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고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붙여서 읽는다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다음에 나오는 조건들 역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를 붙여서 해석한다면 더 뜻이 명확해 집니다.

 

다음으로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원뜻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란 뜻입니다. 제멋대로 독단적으로 하는 겁니다. 결국은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내 뜻대로 운영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하고싶은대로 내가 기뻐하는 대로.

우리 성도는, 목사는 누구를 기쁘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시고 잘했다 칭찬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흐뭇해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래 잘했다. 수고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안식과 상급을 줄게 더 열심히 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나면 특별한 상급이나 유익이 없음에도 마음이 뿌듯하고 기쁘지 않습니까?

 

청지기는 주인과 잘 통해야 합니다. 주인의 의중을 잘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내 마음이 기쁩니다. 그건 바로 우리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항상 영교하므로 하나님이 느끼시는 마음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목사는, 감독은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행동해야 하고 성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에게 더 집중해야 합니다. 세미한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 목사는 급히 분 내어서는 안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도 뭐라고 병명이 있지요? 장애. 예, 이건 병입니다. 갑자기 버럭하는 사람은 단순히 성질이 더러운게 아니라 병입니다. 아마 간이나 비위나 뭔가가 좋지 않거나...

 

그래서 그런 사람은 목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세처럼 그 유함이 다른 모든 이보다 승하다는 평가까지는 안되더라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모임이나 인간관계나 중요한 일을 망치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에 잠기면 자연적으로 유해집니다. 세속의 혈기를 죽이지 않으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들 가운데 말을 막하는 분이 있습니다. 다혈질이지만 뒤끝은 없다고 하는 분들이있는데 그것도 삼가야 합니다. 절제를 배워야 합니다. 말이란게 한번 뱉어버리면 주워 담기가 어렵습니다. 사과를 해도 그가 그런 소리를 한건 절대로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조심해야 합니다. 목사나 성도는 유의해야 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는데 이것만큼 치명적인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성질대로 안된다고 해서 분노를 폭발시켜서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되는 듯이 보여도 결국은 반발과 반란을 초래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온유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야 합니다.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원문으로 보면 여기서의 술은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직역하면 ‘포도주의 곁에 오래 앉아있지 않는’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술취한’이란 뜻이 됩니다. 조금 더 이 상태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고 몸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옆사람과 시비가 붙거나 욕하며 횡설수설하는 상태가 바로 이 상태입니다.

 

혹 그럼 맥주나 소주는 언급이 없으니까 괜찮나요? 이렇게 생각하실까봐 말씀드리지만 고대에 술 만드는 재주가 없어서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포도주를 대표적으로 든 것일 뿐 모든 종류의 술은 다 포함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대신에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4.구타하지 아니하며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매우 이상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감독의 조건으로는 너무 이상하다! 왜냐면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그렇지 감독까지 되어서 남을 때리는 이가 잘 있을까? 그걸 또 맞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사실은 당시의 감독은 성도들을 때리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황당하지요? 사도경전이란 책에 보면 ‘과실을 범한 성도를 구타하는 감독은 파면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에 성도를 구타하는 감독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본문의 ‘구타하지’ 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때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난폭한 자’라는 말이고 또 ‘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도 됩니다.

 

그런데 누구를 때릴까요? 아무나 막 때리면 상대방이 참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 시비가 붙고 그러면 쌍방폭행이지요. 옛날에는 주먹시비가 칼부림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때리냐면 보복의 위협이 없는 자를 때리는 겁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은 노예입니다. 당시에 로마인들은 노예를 잘 때렸고 채찍질하거나 심하면 죽이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뭐 노예를 소유했다면 당연히 때려선 안된다는 말이지만 당시 초대교회에는 교인들 중에 노예가 많았습니다.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평등을 강조하는 기독교에 귀의하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잘 돌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교인 이전에 노예니까 그래서 그런 노예가 잘못을 하면 감독이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는 거지요. 교인이지만 노예니까 혹 인간 자체를 무시하고 천대하는 경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재산과 학벌 그리고 지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그런 뜻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구타만 나왔지만 이 구타라는 결과물은 교인들보다 자기를 우위에 두는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식의 사고를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각종 범죄들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강단 위에서는 하나님의 대언자로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자기 말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단 아래에서는 겸손하게 교인들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간혹 교회 안에서 성직을 가지고 높고 낮음을 따져서 서로 시비하고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그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망치려는 시도이며 마귀의 이중첩자인 것입니다.

 

특히 요 근래에 이런 기사가 두건 정도 났습니다. 신도에게 가혹한 훈련을 가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교집단과 혐오적인 훈련으로 심신에 위해를 가해서 문제가 된 광신집단. 바로 이런 심리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깟 리더가 뭐라고 리더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훈련이라니.... 그런 리더도 문제지만 그걸 또 따라하는 신도들도 문제입니다. 제발 분별을 하기를 바랍니다.

 

5.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란 말은 본래의 ‘더러운’이란 말 외에도 ‘부끄러운’ ‘천박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러운 이득은 곧 부끄러운 이득이고 도덕적으로 천박한 이득이란 말입니다. 가령 성관련업소, 술장사, 인터넷 도박, 사채업 같은 일을 하면 부자가 되기 쉽습니다. 무슨 보이스 피싱같은 것도 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단계가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상대로 다단게 영업을 하는 것도 안됩니다.

 

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이런 이득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부당하게 이득을 보면 그걸로 좋을 것 같지만 누군가는 그 이득 때문에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게 뭡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걸 생각한다면 더러운 이득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직원들의 급료를 주지 않고 몇 달씩 밀려놨다가 한달씩 주는거, 정해진 급료보다 덜 주고 나머지를 착복해서 호화 생활을 즐기는 것, 심지어 그런 돈으로 소득이라고 십일조를 내거나 교회당의 건축헌금을 낸다면? 뭐 그런 일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아이고 그래 돈에 무슨 좋은 돈 나쁜 돈이 있냐? 많이만 내라. 내가 기쁘게 받고 얼마든지 복을 주마” 이러시겠나요?

 

우리가 축복을 하지만 그 축복이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가 그 돈을 받고는 하나님 복을 주시옵소서! 그게 먹히겠나요?

 

하나님은 자기보다 높은 분이 없으므로 축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복을 달라고 빌지 못하고 직접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불쌍하고 어려운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피와 눈물로 점철된 돈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이루시겠나요? 그런 돈을 받은 자녀들이 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축원한다고 해서 들어주시겠나요?

 

이건 더러운 이득입니다. 목사도 당연히 해서는 안 되지만 성도는 이런 업에 종사해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에 다단계 전도법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서울쪽에 금은동철석목인가로 계급을 나누고 어쩐다 하는, 교회라고 하는 사기업체가 있었는데 목사가 수십억의 이득을 챙기고 도주했다는 그런 기사도 나왔지요.

 

더러운 이득에 대해서 경고하는 본문은 그만큼 돈에 대한 유혹이 크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자본주의,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돈의 위력이 너무 큽니다. 물물교환이 대세요 거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고대에도 이런 경고가 나왔는데 지금은 돈의 위력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그래도 더러운 이득은 안됩니다. 그걸 탐해서 안됩니다.

 

마약을 팔아서 남의 가정을 망치고 그 돈으로 부자로 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복을 주시는지...”이게 말이 안되는 것처럼 모든 산업을 엄밀히 따져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셨을 때 부끄럽지 않은 물질이 충만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6.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이제부터 성경은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라 무엇무엇을 하라는 적극적인 그리고 능동적인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이거 안하는 목사가 아니라 이거 이거 안하는 성도가 아니라 이거이거 하는 목사 이거이거 하는 성도를 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자가 목사의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앞에 금지명령을 잘켰다면 이제 목사와 성도는 나그네 대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보일 때입니다.

 

‘오직’이란 말은 강조의 의미라고 생각하십시오.

“앞에 거는 하지마라”

“그러면 뭘 할 수 있나요?”

“나그네 대접하고 뭐 이런 거는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좋습니다.

 

여기서 ‘나그네를 대접하며’ 라는 뜻은 당시에 순회 전도자를 잘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순회 전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이란게 없습니다. 당시의 여관은 보통은 창녀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가 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들을 대접하는 이가 없다면 이들은 노숙을 해야 하는데 당시의 치안상황에서 보면 노숙은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니 나그네를 대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아서 책망받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아마 순회전도자를 먹이고 재우고 하는 일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귀찮고 힘들고 또 재물이 필요한 일이라서 이를 행하지 않는 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감독의 조건 중에 감독이 적극적으로 해야 될 일의 첫 번째가 바로 나그네 대접입니다. 또 당시에는 신앙의 핍박을 피해서 도망치는 성도들이 많았답니다. 그러니 이들을 대접하고 위로하고 돌보는 일도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망 노예가 있습니다. 누굽니까? 오네시모, 빌레몬의 종인 오네시모 이야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바울은 나그네 대접을 조건으로 목사와 성도들에게 요구했을뿐만 아니라 스스로 이를 실천했습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 저희 어머니께서 산에 홀로 사는 바위 밑에 진흙과 돌로 방을 만들고 살았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그 은퇴 여전도사님을 모시고 와서 같이 잠을 자고 또 떠날 때는 제가 산에까지 쌀을 들고 가서 드린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귀찮았지만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전도사님은 얼마나 위로를 얻었을까요?

 

7.선행을 좋아하며

‘선행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선행을 잘 행하기 때문에 선행과 매우 가깝게 있습니다. 항상 선행을 하기위해 적극적으로 살피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목사와 성도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돈 되는 일은 못하게 하고 돈 안되고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듯이 보이는 일만 하라고 하는 것 같지요? 그러나 우리가 모르고 한 선행도 우리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다 기록되고 저장되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상급 점수에 계산이 된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한 이 땅에서의 선행이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항상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명문으로 ‘~하면 복받는다’는 것 세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효도와 십일조와 이웃에 대한 구제.

 

선행을 할 기회가 오면 기뻐하세요. 왜냐면 하나님의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영적인 감응에 따라 우리의 심령이 따뜻해지고 흐뭇해 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가 우리를 흐뭇하게 보신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8.신중하며

옛날 성경은 이것을 ‘근신하며’ 라고 번역했는데 이번의 번역에서는 ‘신중하며’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원뜻은 정신이 바르고. 그러니까 앞에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에서 술이 취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데 바로 그것의 반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린’이란 뜻도 되고 ‘정신이 건전한’ 이란 뜻도 됩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치유 받고 정신이 온전해졌다고 할 때와 같은 말입니다. 아마 그래서 ‘신중하다’고 번역한 모양입니다.

 

조금 더 말하면 사람이 너무 싱겁거나 쓸데없이 공상을 즐기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피해망상에 젖어 있지 않고 항상 올바른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너무 과격하거나 광신적이거나 독단적이거나도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9.의로우며 거룩하며

이 두가지 조건은 같은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으로 본다면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먼저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의 법에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룩하다’ 라는 말은 약간은 다른 뜻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란 뜻입니다. 뭐 하나님의 법에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만 결국 앞의 ‘의롭다’는 말이 수동적이며 소극적이라면 ‘거룩하다’는 말은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개념입니다.

 

목사의 조건,성도의 조건에 의로우며 거룩하며 가 들어간 이유는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선행을 좋아하며, 선행의 친구가 있었쟎아요? 여기서는 법을 지키며 살아서 죄를 짖지 않는 상태로는 부족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찾아서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참 어렵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법을 제대로 지켜서 죄를 짓지 않는 것만해도 참 굉장한 일이라고 칭찬하는데 우리 성도들은 여기서 나아가 더 적극적으로 선을 찾아서 행해야 하니 정말이지 성도가 쉬운게 아닙니다.

 

10.절제하며

이 말은 ‘자제력이 있는’ 이란 뜻입니다. 사실 세상에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갖고 싶은것도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각종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로 가득하고 우리 인간은 온갖 것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득을 탐하는 마음은 당연하게 절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겁니다. 보통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로운 삶이 안됩니다. 뭔가 불법적인 것이 들어가지 않으면 욕망을 충족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죄성에 푹 젖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런 욕망에 저항하고 자제력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의 보호와 인도 아래에 있어야 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절제하며 라는 조건을 충족하려면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도가 반드시 가져야 되는 조건인 셈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과 함께했을 때 나오는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목사와 성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조건이 필요할까요?

 

11.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제 9절에서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라고 합니다. ‘미쁜’이란 말은 믿음의, 믿을만한 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라는 겁니다. 왜냐면 그래야 우리 목사와 성도가 세상을 향하여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믿음을 지키지 않고 바른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 세상에게 아무리 바르게 살라고 가르친다고 한들 그 누가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 조건들은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당연하게 성도로서 목사로서 지켜야 할 바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둠의 영역, 온갖 욕망과 쾌락이 숨쉬는 음지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를 막기 위해 뭐라도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발악을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목사나 성도에게 뭐하나 트집을 잡으면 이를 거슬러 말하고자 합니다.

 

거슬러는 거꾸로 올라간다는 말이아니라 기분을 거슬러, 기분나쁘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하고 선한 일을 힘써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교회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바른삶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당시는 고대사회라서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고 의롭게 살기가 쉽지만 지금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목사들이야 세상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니까 그렇지만 성도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도저히 혼자 거룩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려고 힘쓰는 자에게 하나님이 외면하시겠나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없겠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도 우리 하나님은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자녀로 산다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이 모르는 거대하고 큰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힘을 소유했다고 하는 겁니다. 세상이 불가능 하다고 하는 병도 기도로 나을 수 있습니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에서도 하나님은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런 조건을 모든이에게 다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조건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요구되어지는 사람은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목사, 세상의 지도자 성도.

 

그래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미혹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인도하라고 이 땅에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말씀을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만 하면 구원얻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은 목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들입니다. 감독에게 요구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성도에게 지도자에게 요구되어 지는 것을 지키는 자는 지도자인 겁니다.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별거 없습니다. 여기 나와있는 조건을 힘써 지킨다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번에 온천교회에서 코로나 완치자 20명의 혈장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반응도 무척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같습니다. 지켜보는 제가 다 흐뭇하니까 아마 아버지께서도 굉장히 흡족하셨을 겁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이게 생각이 났는데 월요일날 혈장제공 기사를 보고 정말 기뻤답니다. 제 설교를 듣고 그분들이 기증한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겁니다. 아, 하나님의 생각도 그와 같았구나!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마음은 그와 같구나!

 

그래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저는 저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동시에 온천교회 성도들에게도 역사하시고 감동하셔서 저들로 하여금 혈장을 기부하게 하신 걸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주에 걸쳐서 장로와 감독의 조건, 성도의 조건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래요, 이 땅에 우리를 남겨두신 이유가 그 조건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행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튼튼히 하는데 이바지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명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날 점점 세상은 교회 속으로 들어옵니다. 세속화의 물결이 너무나 거세므로 도저히 우리만으로는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만이 우리가 그런 물결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속화의 물결을 막음에서 끝나지 않고 도리어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적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거요 그냥 주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결코 흔들리지 말라고 주시는 겁니다.

 

그냥 주시는게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혹의 세상에서,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잡고 나아가라고 주시는 겁니다.

 

세상 욕망을 이겨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주시는 겁니다. 너무 기특해서 주시는 겁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믿음만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 누가 뭐래도 하나님과 함께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노고에 충분히 상 주실것입니다. 믿습니다. 우리의 헌신이 하늘아버지의 보좌를 흔들게 될 것을 믿습니다. 가납될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6월 14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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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번 주에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시편 19편을 보라는 이야기인데, 평소 성경책을 즐겨보는 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망하기도 했고.... 왜 또 하필 19편인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윗의 시였고, 마지막 구절을 써보면 이렇습니다.

 

나의 반석이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는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주가 보시기에도 기뻐할 만한 것이 되게 하소서. (시편 19편 14절 - 현대인의 성경 번역) 아, 개역 개정도 같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개역개정)

 

다윗이 하나님에 대하여, 반석이며 구원자로 묘사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의 소원이 참 뜻밖입니다. CCM 노래 제목으로 쓴다면,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입니다. 그 중에서도 말을 예쁘게 할 것, 마음을 단정히 할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이 귀중한 소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백하면, 바로 어제 일을 하다가 시비를 거는 손님과 대판 싸웠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습니다. 좀처럼 좋아지지 않아서, 후유증은 오늘까지도 이어집니다. 처세를 잘 하시는 주변 분들의 권고는 그만 잊고, 털어버려라 였습니다. 확실히 우울을 곱씹으며 반추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정도로 지지 않는다 라는 강인함을 달라고 기도하고 나니 조금은 나아집니다. 기독교인의 비밀은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기 덮쳐오는 큰 파도가 보이면, 무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파도를 없애달라고 기도할 순 없습니다. 상처받지 않는 인생을 달라고 기도할 순 없습니다. 다만... 어려움 앞에서도 주님,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세요. 다시 세상에 나가서 다시금 밝게 노력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마음가짐부터 형편 없는 나쁜 놈들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관점을 완전히 돌려서, 마음이 통하는 좋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쁜 놈들만 있다면 그런 세계는 지옥과 마찬가지라서 살아갈 희망이 없을테지요.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날들을 맞아도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좋은 사람 (어쩌면 한 두 명일지라도) 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멋진, 감사 제목이 될까요. 나아가 성도가 먼저 이웃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준다면, 두말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꿈이자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임을 알아서, 여전히 기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장문의 개인적 덧붙임 마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절벽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너도 따라서 뛰어내릴래?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다고 해서 그 일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란다. (사소한 것들 책에서 발췌)" - 2020. 06. 시북 (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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