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전정개정판)
마태복음5:13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식상해버린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자, 한번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의 소금이었나요? 지금 우리가 과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나요?
우리 성도들 중에는 주님을 믿는 연수가 적은 분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예수 믿어온 연조가 십년이 넘아갑니다. 과연 그 긴 세월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단순히 세상적인 성공이나 성공을 위한 노력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소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소금입니까? 혹 소금은 소금인데 맛잃은 소금입니까?
아니, 소금이었던 적이 한순간이라도 있었습니까?
이건 너무 심한가요? 그래도 우리는 매 순간 소금이길 바랐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다고요? 그래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했던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아니라 교인으로 그쳤던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 우리를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가 아니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정의를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정의감에 의분을 느껴서 말로 뭔가 이룰 것처럼 떠든 적은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말을 넘어 행동으로 옮긴 경우는 몇 번이나 됩니까? 아니면 단 한번이라도 정의를 위해서 행동한 적이 있나요?
‘키보드 워리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엔 굉장히 유명한 말이었는데 아마 요즘도 잘쓰는 말일 겁니다. 말만 많고 전혀 실천하지 않는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키보드로 댓글은 잘 달아도 정작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말만 많고 요란하게 떠들지만 정작 정의를 실천하는데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척한다고 말합니다. 성도인 척, 정의의 화신인 척, 그리스도인인 척.
제가 교회를 가리켜 공동체라고 많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냥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사교의 장이 아닙니다. 말만 많고 척만 하는 클럽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의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며 영광을 돌리는 현실적인 공동체입니다.
언행일치의 장입니다. 그게 교회이고 성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좌절한 이를 위로하고 낙망한 이를 일으켜 세워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독려하는 공동체지 단순히 서로 인간적인 안부를 나누는 그저그런 사교 집단인 공동체는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그런 공동체에 사교의 장이 마련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회는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대의가 있는 곳이고 우리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깨어나는 곳이여 영적인 것을 공급하는 전진기지입니다.
교회는 한편으론 공동체이지만 다른 말로는 전진기지입니다. 전진기지에는 척하는 사람은 필요가 없습니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안뜰에서 괜히 요란하게 칼을 들고 소리만 지르는 이는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의 검을 들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성벽위에서 직접 싸우는 믿음의 용사가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경우를 본다면 모두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아닌 이들도 양심을 가진이가 많습니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영을 깊숙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양심이, 이걸 조금 더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넣어 주신 우리의 영이 안목의 정욕 때문에 육신의 게으름과 쾌락 때문에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영은 너무 오래 잠잠해 있다가 이제는 아예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이 만져 주시기 전에는 깨어날 생각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해서 얼핏 느끼기는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합니다. 혹 우리에게 불이익이 생길까 봐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소시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나 대의보다 먼저 나 자신과 내 가정을 생각하는 아니 해야 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소시민.
되돌아 보면 인류사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은 한 사람의 영웅의 선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과 그 사람의 욕망이 일치했기에 일어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뭐 역사의 물줄기니 대세니 시대의 추세니 하는 말은 후세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바를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는 미망 속을 헤매는 가여운 인생이지 뭔가 거창한 존재는 아닙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갖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지극히 짐승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짐승이니 인간이니 하는 말 속에 ‘본능’이란게 있습니다. 육체적 인간으로서 가지는 본능적인 움직임.
그래요, 인간은 본능을 넘어서 뭔가를 이루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본능은 본능이 추구하는 쾌락과 편안함을 포기하기를 싫어하고 미지의 세계에 발걸음을 들이기를 꺼려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제자된 우리에게 ‘너희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니?’ 라고 묻지도 않으시고 대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단정적으로 확정적으로 단언하셨습니다.
오늘 소금의 문제는 행동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단지 뭐가 정의라는 생각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느냐 아니냐 입니다. 앞으로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제가 이렇게 거창하게 말씀드리지만 우리 대다수는 세상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은 민초에 불과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시대를 이끄는 민중이 아닙니다. 지극히 가볍고
하잘 것없는 이익에도 기뻐하고
조그만 일에도 기분 상해하는
인간입니다.
그래요, 그게 성도라는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성도인 이유는 우리의 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남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값주고 사셨기에 우리는 그의 소유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의 것이므로 당연히 그의 것인 우리를 주가 지키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주인이 원하시는 바를 행해야할 의무를 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성도입니다. 성도는 불가능에 맞닥뜨리면 그 너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소금이 되게 하십니다.
1.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앉았다는 말은 그들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누가 올라옵니까? 제자들.
그렇다면 무리들은 올라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4:25에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에서 이 무리들은 기적을 보고 뭔가 볼거리를 따라 기적을 따라 이러저리 떠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도 아니고 제자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 따라는 다니지만 대의를 생각지도 않고 수틀리면 비난도 하고 반대도 하고 돌아설 그런 사람입니다. 뭐 따라다닌다고 해서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지요.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이들로 하여금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배움의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주님은 배움의 장소에 나타난 제자들을 붙잡고 천국 백성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참 고독한 분이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 오셨지만 그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으셨고 자기의 주인됨을 나타내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하고 싶었던 말씀을 역시나 제자들에게만 줄기차게 하시는 겁니다.
그 놀라운 가르침을 다른이들에게도 전파하시고 싶어셨을겁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이들은 제자들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독한 분입니다. 왜냐면 제자들마저도 그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너희’라고 하면 바로 그런 제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또 나옵니다. 11,12절에 보면 ‘너희’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를 인하여 욕을 듣고 핍박을 받고 거짓증거를 당한 사람 그러나 결국은 복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크답니다. 바로 그 ‘너희’가 여기 본문의 ‘너희’입니다.
굳이 욕을 듣고 핍박을 받고 거짓증거로 공격당해야 해? 그래요, 당연히 굳이 그렇게 되어야할 필요는 없는데 그만큼 성도에게는 세상의 핍박이 거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공격과 핍박보다는 뒷담화 따돌림 비난이 있습니다.
사실 소금은 짭니다. 적당량을 넣으면 맛이 좋아지지만 과하게 넣으면 너무 짜서 못먹습니다. 그런데 맛을 떠나서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금을 염증에다 발라버리면 엄청나게 따갑고 괴로워요. 대신에 치료를 촉진합니다.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부패를 멈춥니다. 대신에 아프고 힘듭니다.
소금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당장 아프니까 소금을 바르는 이에게 화도 내고 투정도 부리고 바르지 못하게 거짓말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 즉 세상의 소금인 성도는 썩어져 가는 세상으로부터 나쁜소리를 듣고 까칠한 대접을 받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결국 소금으로 인해 세상이,
썩어질 세상이
썩어가고 있는 세상이
훨씬 나아지고 부패가 멈추고 좋아지고 난 다음에야 소금이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를 몰라줄 수도 있습니다. 모두 자기의 공으로 돌리고 성도의 역할이 가져온 엄청난 이로운 효과를 모른척하고 그걸 무시할 수 있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성도를 칭찬하실겁니다. 왜냐면 그가 세상을 만드신 분이므로 그는 세상을 아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남의 것이므로 마구잡이로 사용하고 이용하고 버려도 되지만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고쳐서 사용하실 수 있다면 고쳐서 쓰고자 하십니다. 정 안되겠다 싶어야 심판을 가하시지 그렇기 전에는 사랑하셔서 고치고 바로잡으려 하십니다.
그래서 소금이 필요한 겁니다.
또 하나 하나님에게 세상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창조작품이기도 하지만 자녀들이 살아갈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천지 만물을 아끼십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물었습니다. 소금입니까? 만일 소금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주님의 제자는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기적을 보고 좋아서 쫓아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주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 교회의 교인은 모두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적으로 많은 이들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질적으로 순정 성도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신 말투를 잘 보세요.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모든 성도가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아니라면 성도가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믿음의 연조가 깊고 헌금을 많이 해도 중직을 오래 맡았다 해도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오지 않았다면 성도가 아니라는 거지요.
지금의 세상 교회에는 교인과 신자와 성도가 섞여 있지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충분히 그가 성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욕들은 적이 있나요? 성도입니다.
예수 때문에 핍박받은 적이 있나요? 그래요, 성도입니다.
예수 때문에 우리는 거스리는 모든 악한 말을 들었나요? 감사합니다. 성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그는 강하시고 그는 미쁘시므로 자기를 소망하는 자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소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이때까지 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하면 됩니다.
또한 ‘세상의 소금’이란 말에는 ‘이 땅의 소금’ 즉 ‘사람들 사이에서 소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굉장한 영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혼자만 세상 밖에서 거룩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영성 수련을 위해 일정한 시간동안 세상과 격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일생을 격리한다면 영성이 무슨 필요가 있나요? 영성도 동굴 속에서 혼자 닦아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기위해서 영성이 필요한 것이지 혼자서 사는데 영성이 어디에 쓰일까요?
온통 황금이 굴러 다니는 무인도에서 이 황금이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황금이 황금이 되려고 하면 인간세상에 그것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언의 능력이나 치유의 능력이나 위로와 안식의 능력은 사람이 있어야 쓸모가 있습니다. 예언을 들을 사람이 없고 치유가 필요한 자가 없고 위로받을 이가 없는데 무슨?
2.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당연히 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당연히 세상을 짜게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으로하던 뭐로 하던간에 무조건 세상의 부정과 부패를 막는 소금같은 역할을 해야 되는데 소금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그런 방법을 알지를 못한다는 말이지요?
참고로 여기서의 소금은 천일염이 아니라 암염 즉 돌소금입니다. 그래서 바닷가에서 만들지 않고 산에서 캐어냅니다. 그래서 맛을 잃으면 정말 돌멩이가 됩니다. 녹아 없어져 버리지 않습니다.
3.소금은 무슨 일을 하는가?
좋습니다. 그러면 소금은 무슨 일을 합니까? 썩어져 가는 세상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만 한단 말입니까?
당시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까요?
1)생명유지
우리가 잘 생각지 못한 사실인데 소금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옷과 양식처럼 가장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입니다.
군대에서 여름에 행군을 하게되면 군복에 땀이 젖어납니다. 그리고 이게 마르면 하얀 소금기가 옷에 올라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땀에 소금성분이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 몸에 소금기가 일정 이하로 내려가면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심장마비 확률이 무려 4배가 증가하고 수분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고, 우리 몸에 수분이 꼭 필요한데 이걸 잡아 주는 겁니다. 물이 부족하면 혈액순환의 장애가 생기고 당연히 만병이 증가하는 건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군을 할 때 소금을 먹습니다. 땀으로 배출되는 소금기를 보충하는 거지요. 그게 안되면 탈수증상이 오고 그러다가 큰 문제가 생길테니까.
이외에도 일일이 들기 어려울 정도로 소금의 중요도가 높습니다. 몸안에 소금이 부족하면 소화가 잘안되고 또 적혈구 수치가 떨어져서 빈혈이 생기고 탈수현상이 생기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는 성도가 빠지면 이 세상이 유지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각 요소에서 가장 필수적인 일을 하는 겁니다. 얼핏 보면 중요하거나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없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필수적인 생명 유지 물품인 겁니다.
성도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유지하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게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기 때문이지요.
그러지 않았다면 세상의 소금은 정말이지 죽으라는 소리하고 같습니다.
2)방부제
소금은 썩음을 방지하는 물건입니다. 우리가 소금하면 떠 올리는 가장 첫 번째 역할이 바로 이 기능이지요. 그런데 이건 첫 번째 기능에는 못미치는 두 번째 기능입니다.
생명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소금이 썩음도 방지하는 겁니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 조상들은 소금간을 해서 고기나 생선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이 썩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가 없다면 당연히 세상이 썩게되는 겁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이 세상의 부패에 성도의 책임이 어느정도는 있다는 겁니다. 성도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면 세상이 썩지 않았을텐데 성도가 존재하는데도 썩었다면 그건 성도의 책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영 부적합해지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그건 그 안에 있는 소수 성도의 잘못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세상의 부패에 대해서 별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썩어빠진 세상에 대해서 욕만 할 줄 알았지 썩음을 방지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게 바로 성도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성도가 없는 세상이나 성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세상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걸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인세의 지옥!
그래서 이 세상이 행복해 지려면
착한 사람들이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려면
성도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3)맛을 낸다
성도라고 해서 너무 거룩거룩하게만 세상을 살게 된다면 주위에 있는 이들이 숨막혀 죽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거룩함하고 인간미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요리에 소금을 치면 요리가 훨씬 맛있어 집니다. 단지 간을 맞게 한다기보다는 훨씬 더 풍부한 맛을 내게 만들어 줍니다.
마찬가지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성도는 세상을 보다 더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기사가 나오면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는 댓글이 달립니다. 택시에 두고 내린 전세금 몇천을 기사가 찾아 주었다는 이야기, 또는 치매가 걸려서 도심을 배회하는 할머니에게 집을 찾아 주었다는 이야기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아직도 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의인들이 많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런데 그런이들 모두가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 제가 조금 욕심을 낸다면 이런 미담의 주인공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예수쟁이는 달라” 이런 말을 듣고 싶습니다.
문득 길을 가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선행을 할 기회를 만난다면 일생에 한번이라고 생각하고 주가 주신 기회를 붙드시길 소망합니다.
이 땅의 천만 교인 중에 몇 명이 성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이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 감동과 울림으로 살만해 질까요?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풀 때 상대방이 생각한 것보다 넘치게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통하여 두고 두고 반추하면 기분 좋은 그런 일들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금된 성도의 할 일이 바로 이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거룩하게 살면서 때론 따스한 마음을 가진 그런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좌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산타가 되는 그런 이가 우리 성도 가운데 많기를 바랍니다.
맛을 내는 소금처럼 이 세상을 살맛 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담담히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런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고 그 상급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그걸 바라 보시는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실까요? 마음이 너무 너무 흐뭇해 져서 막 주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런 일이 바로 천국을 확장하는 일입니다. 무슨 목사니 선교사가 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4)치료를 한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의료체계가 형편없었던 바로 그 시절, 약도 없었던 그 시절에 소금은 가장 훌륭한 치료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물론 전문 약이 아니므로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만 아예 약처방을 할 수 없는 시절이라는걸 감안하면 치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과거 유대인의 기록에 보면 이빨이 아플 때 소금으로 치료를 했고 신생아의 몸에 염증이 생겨서 농이 생기면 아픈 부위를 소금으로 문질러 치료했습니다.
그럼 우리 성도의 삶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크게 양보해서 우리 성도는 아픈 환자를 심방하고 그를 위로하고 또한 그 병에 좋은 것도 좀 대접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좋은 지식도 알려 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더 크게는 치병을 위해서 기도하고 마음이 우울한 이를 위해서 친구가 되어주고 상담도 해주고 위로해 주는 그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같은 교인이라도 시간을 내어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 자랑만 하려고 하지 남의 고민을 들어 주는 일을 정말이지 안합니다. 차라리 이런 일은 미용실의 미용사들이 더 잘해왔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이와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치료제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단순히 치료제의 역할이 병, 영육간의 병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제도를 개선하고 관행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악습을 폐지하는데 앞장 서고 이 사회가, 병든 사회가 보다 건전하게 돌아가도록 활동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인간개인의 병도
이 사회의 병도
우리 문화와 제도 속에 드어있는 병도
고치는 치료제.
성도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5)순결한 희생을 상징한다
이건 약간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소금을 이런 용도로 사용한 다른 곳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그 제물에 소금을 쳤습니다. 썩지 말라는 의미와 순결한 희생을 상징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당시의 소금이 땅에서 캔 암염이란 것을 감안해도 제물에 뿌려진 소금은 제물을 불태울 때에 같이 타게 됩니다. 그래서 전혀 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희생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태워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4.다만 사람에게 밟힐 뿐
소금의 기능에는 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금 같은 역할을 감당할 성도로 사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같은 이기적인 세상에서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삶은 좀 시대착오적인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도 ‘주시옵소서’로 일관하는 우리가 굳이 남을 위해서 우리를 불태울 필요가 있을까요? ‘에이 예수는 믿어도 소금은 안할 거야’라고 결심했다 합시다.
그래서 ‘에이 하기 싫어’ 하게 되면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뭡니까? 길에 뿌려지는 겁니다.
‘아무 쓸데 없어’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다섯가지 기능중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런 소금을 내어 버리게 됩니다. 자리만 차지하게 되니까.
바윗덩이를 집안에 쌓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수석처럼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맛잃은 암염은 전혀 쌓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암염이란 것은 보면 생긴게 무슨 보석같습니다. 적어도 수정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혀를 대어 핧아 보면 짭니다. 그런데 여기서 짠기가 빠져버리면 정말이지 평범한 돌멩이가 되는 겁니다.
돌멩이라고 해서 길에 버리면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방해가 될 것 같지요? 그런데 이 암염이 그러니까 상업적 가치가 없어서 소금의 기능을 못하는 암염은 길에 뿌려놓으면 먼지를 잘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기능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소금이지만 유일하게 한가지 쓸모가 있는데 길에 뿌려서 먼지를 일어나지 않게 하는 쓸모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소금이 비록 맛을 잃어도 사회를 위해서 결국 한가지는 좋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 길에 뿌려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역할.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주님은 성도가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인지 아닌지 의심하는게 아니라 무조건 소금이랍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맛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장기간 보관하다보면 그런일이 많았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금이 자기 스스로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녹여 남을 유익되게하는 겁니다. 자기를 태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그도 안된다면 온몸으로 자기를 낮추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면서 먼지를 막아 줍니다. 그렇게나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으려고 뺀질거려도 결국은 한가지 좋은 일은 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금의 역할을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뭐냐면 자기를 드려서 사회를 유익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본 다섯가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면 소금은 점점 줄어지고 결국은 자기가 없어 집니다.
그런데 자기를 살리게 되면 길에 뿌려지게 되는 겁니다. 짠맛이 한 개도 없기에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길에 뿌려서 먼지를 방지하는 역할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밟힙니다.
그러니 밟히기 전에 더 좋은 용도로 쓰이면 좋지 않을까요?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를 위해서 끊임없이 달라고만 해야 할까요? 아니면 뭐라도 남을 위한 일은 한두가지는 해야 할까요? 나는 다 늙고 힘이 없고 돈도 없어서 남을 위한 큰 일은 못해. 그래요, 좋습니다. 다만 적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십시오. 그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적은 일이라도 진심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날같은 것도 들어서 사용하시는 구나! 너무 감사하다! 최선을 다해야지’ 이렇게 된다면 역시나 우리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게 된다면 그냥 모아서 쓰레기장에 버리는게 아니라 뭔가 한가지라도 쓸모가 있게 먼지 방지용으로 길에 뿌립니다.
제가 암염제품광고를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암염 중에서 식용,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전체의 1%밖에 안된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재산으로 1%가 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재주의 1%가 되려고 역시나 밤잠도 자지 않고 경쟁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소금의 기능을 제대로 감당하면 우리는 교인들 중에서도 1%안에 들게 됩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가운데 선택하신 자 중에서도 1%라면 너무 너무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순간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면 제자지 제자가 무슨 대수입니까? 당연하지요. 제자에게 주어지는 시험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몇배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혜택이 주어집니다.
제자가 되면 무슨 혜택이 있나요? 그 혜택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중 가장 큰 혜택은 바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생이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리뛰고 저리 뛰어도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통곡하고 애통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모든 일을 내 아버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혜택! 그래요, 세상 모두가 부러워해야 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혜택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어려움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절망시키거나 좌절시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아버지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다시금 소생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비의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안에서 위로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절망하지 말 일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로 나에게 미치는지 기대를 갖고 살펴볼 일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바라는 자마다 복을 받는다는 그 말씀대로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러므로 소금입니다. 소금이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소금이 되어야만 우리네 가슴 아픈 일상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여건이 되고 여유가 있고 힘과 시간이 넘쳐서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가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좋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너무 좋아서 아무런 조건없이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이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 정도로 단순하지 않지요? 당연한 일을 하고서도 뭔가 아버지의 사랑과 칭찬과 어루만짐 그리고 상급을 은근히 기대하고 그게 없으면 좀 섭섭하고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시고 소금이 되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 상급이 결단코 없지 않을 것입니다. 현실이 너무나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문득 거울 속에 늙고 초라하고 병든 내 모습이 보여서 서글픕니까? 전혀 전혀요. 전능하신 아버지를 모신 세상을 이긴 선지자의 모습이 그 속에 있습니다. 나를 만드신 그리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초라하고 비참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그분의 용사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는 한 나는 결코 패배할 수 없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그를 바라십시오. 결단코 결단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소금은 자기가 녹으므로 역할을 감당하고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이깁니다. 죽음으로 이기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8월 9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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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세상이 부패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에도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잘못된 일에도 침묵하고, 누군가가 잡혀가는데도 침묵한다면,
그 이웃을 외면한 대가로, 그 다음에 희생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셈이지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주일 예배도 못 드리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렇게 설교를 읽어볼 수는 있습니다.
마치, 옛날 바울 서신을 돌려서 읽어보던 교회 공동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이 너무 싫어! 이기적인 것 같아! 라는 댓글창의 폭탄 선언들에 상처받기도 합니다.
최근 읽은 신학서적에 따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는 아픈 사람들, 죄인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사람들 보다 윤리적으로 못난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기독교를 욕한다고 단언하기보다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었던, 즉... 맛 잃은 소금처럼 살았던
스스로의 모습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반성이 끝이 아니라, 그러면 조금이라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돌이킴, 그리고 행함이 뒷받침 되어야 진정성이 있을텐데...
마음에서 다만 갈등하게 됩니다. 그만큼 신앙이 옅었음을, 자기중심이 컸음을 발견하고는 최근 적잖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놓치 말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 2020. 08. 시북 (허지수)